성 임군집(치백) 요셉(1804〜1846)
o 1804년 서울 한강변에서 출생. 이후 마포에서 거주
o 1846년 비신자로 체포된 뒤, 옥중에서 김대건 신부에게 영세 좌 포도청 에서 교수형으로 순교
임군집 요셉은『우포도청등록』의 기록에 “이름은 ‘군집’(君執), 나이는 43세(음력)이고, 마포에 살며, 또 다른 이름은 ‘치백’(致伯)”이라고 나온다.112》그리고 교회측 기록에는 그 이름이 ‘군집’(Koun tsip)으로 나온다 ^ 따라서 교우들 사이에서는 ‘군집’ 으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한강변의 부요한 가정에서 태어난 임군집은 성품이 온유하고 솔직하며 올곧았다. 어렸을 때 모친을 여의고 홀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그는 효심이 깊은 데다가 어른들의 말씀에 잘 순종하였다. 철이 들면서 10여 년 동안 서당에 글을 배웠고,활쏘기와 음악도 익혔다. 그러나 결코 향락에 빠지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나 상냥하여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830년 무렵 그는 아내와 새어머니로부터 천주 교리에 대해 듣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으나, 그때까지 교류하던 친구와 여러 가지 체면을 이유로 수계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교우들을 전적으로 신뢰 하였고,의지할 데 없는 이들 4〜5명을 집으로 불러들여 부양하기까지 하였다.
1835년에는 임군집이 살던 마을에서 박해가 일어나 여러 명의 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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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우포도청등록』, 1846년 5월 25일. 반면에『일성록』(헌종 12년 8월 1일) 에는한자 이름이 致百 으로나온다.
113)『순교자 약전』,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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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체포되었다. 그러자 그는 교우들을 보호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포교가 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포로 이주한 뒤에는 교우들이 자기 집에 드나드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 고,이로 인해 이웃들로부터 의심을 받고 험담도 들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임군집에게는 임성룡(林成龍)이란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임성룡은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1845년에 김대건(안드레아) 부제를 따라 중국 상하이에 갔다가 돌아왔으며, 이후로도 줄곧 김대건 신부를 도와 활동하였다. 또 김 신부가 해로 탐색차 황해도로 가게 되었을 때 선주 가 되어 함께 배를 타고 갔으며, 6월 5일 순위도(巡威島) 등산진(登山 鐵)에서 김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해주감영으로 압송되었다가 서울 포도 청으로 이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114>
임군집은 아들 임성룡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해주감영으로 달려가 아들의 석방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황해감사의 명으로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김대건 신부와 함께 서울 좌포도청115>으로 압송되어야만 하였다. 포도청으로 압송되는 여러 날 동안 임군집은 군사들의 방
해로 인해 끝내 아들 임성룡을 만날 수 없었다. 한편 서울 포도청에서는 포교들로 하여금 임군집의 집을 습격하여 그의 가족을 체포하고, 가산을 몰수하도록 하였다.116》
6월 21일(음력 5월 28일) 서울 좌포도청에 도착한 임군집은 그곳에 서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크게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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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임성룡은 포도청에서 교우들을 밀고했으며, 석방된 후에는 ‘베드로’ 란 세
례명으로 영세하였고, 1880년에 사망하였다(『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72, 김 요아킴의 증언 : 회차 95, 서 야고보의 증언 : 회차 67, 임 안나의 증언).
115)『일성록』(1846년 8월 1일)에는 임치백(군집)의 처형 사실을 좌포도청에 서 보고한 것으로 나온다.
116)『기해 • 병오 재판록』,임 안나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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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는 신부에게 “오늘부터 천주교를 믿겠습니다.”라고 말하였고,신 부는 그를 위로하며 "모든 곳이 천주의 크나큰 은혜이니 정성껏 그 은혜 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나와 함께 순교자가 되 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임군집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용감하게 약속한 뒤,그날부터 기도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옥 안에서 기도를 바치기 시작 하였다. 그런 다음 ‘요셉’ 이란 세례명으로 신부에게 영세하였으며, 옥에 갇힌 교우들을 권면하고 순교 원의를 드러내면서 모범을 보여 모든 이들 을 감동시 켰다.117>
그 동안 요셉과 친분이 있던 포교들이 그에게 와서 배교하기를 거듭 권하였다. 포교들은 요셉의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와서 그를 유혹하도 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요셉은 포교들에게 “나는 아버지이신 천 주를 위해 죽기를 결심했습니다. 그러니 나는 죽은 사람입니다. 어찌 죽 은 사람에게 그렇게 유혹하는 것이오. 더 이상 배교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시오.” 라고 말하면서 물러가라고 하였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난 어느 날,요셉은 사형선고가 있으리라는 소문을 듣고는 얼굴에 즐거운 빛을 보이면서 옥중의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오늘 나에게 사형을 내릴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아무런 공적도 없으나, 천주의 은혜로 내가 먼저 죽어 천국에 가게 되면, 내가 와서 당신들의 손을 잡고 우리 아버지의 천상 왕국으로 여러분을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용기를 내어 천주를 위해 순교를 받아들 이고, 내 뒤를 따라오시오.
과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옥리들이 그를 불러내 포도대장 앞으로 끌고 갔고,포도대장은 가장 먼저 이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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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이하의 내용들은『순교자 약전』, 168〜 172쪽을 근거로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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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데 사실이냐?”
“예 , 감옥에 들어온 이후로 기도문을 배우고, 또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십계명이라는 것이 있다는데, 그것을 외워 보아라.”
“저는 아직 십계명을 완전히 외우지 못했습니다.”
“아니 십계명조차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겠느냐?”
"아니,모든 것을 잘 알지 못하는 어린이는 효심조차 가질 수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무식한 어린이도 자녀의 도리를 잘 알아 부 모에 대한 효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도 비록 교리에 무식하기는 하지 만 천주께서 제 아버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118>
그러자 포도대장은 배교를 종용하였고,"배교한다는 말을 하기 어렵다 면 여기서 나가겠다고만 해라. 그러면 아들과 함께 석방해 주겠다.”고 유 혹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이를 거부하고 “저는 신부님과 함께 죽기로 맹 세한 몸입니다.”라고 소리쳤다. 포도대장이 다시 “아니 그 신부는 조정 에서 벼슬을 주어 살게 할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면 너 혼자서 죽으려느 냐?” 하고 반문하자, 그는 “저는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고, 이를 굳게 믿고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 니다.”
이처럼 조리 있게 대답하는 요셉에게 화가 난 포도대장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에게 형벌을 가하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자 형리들은 막대기 로 허벅지살을 찔러 피가 나게 했으며, 세 차례에 걸쳐 주뢰형도 가하였 다. 포도대장이 “만일 네가 작은 신음소리라도 낸다면, 배교한 것으로 간 주하겠다.”고 소리치자,요셉은 굳게 입을 다둘고 주뢰형을 끝까지 받아 내 실신한 사람처 럼 보였다고 한다.
옥으로 돌아오자마자 요셉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면서 "내 가 고문을 받았나?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겠는데.”라고 말하고는 평온하 게 누웠다. 잠시 후 남경문 베드로가 온 몸에 상처를 입고 옥으로 들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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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페레올 주교 보고서〉. 9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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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요셉은 얼른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돌봐주고 위로의 말을 건네기까지 하였다.
9월 16일, 김대건 신부가 형장으로 압송된다는 소식을 들은 임군집 요셉은 남경문 베드로와 함께 "저희도 신부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고 하면서 따라가려고 하였다. 이에 신부는 그들에게 강복하면서 “먼저 가서 여러분을 기다릴 것이오. 차례가 되면 내 뒤를 따라 오시오.”라고 말 하였다.
이후로도 요셉은 거듭 형벌을 받았지만, 그의 순교 용덕은 한결같았 다. 결국 화가 치민 포도대장은 옥리들로 하여금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하 라.”고 명하였고, 이 매질은 정오에서 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저녁이 되자 그는 소리를 높여 "저의 주님 ! 제 몸과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 다.”라고 외쳤다. 그런 다음 옥으로 옮겨져 그날 밤에 교살되었으니, 그 때가 1846년 9월 20일(음력 8월 1일)로,당시 그의 나이 43세였다.119>
다음날 요셉의 아들들이 감옥으로 찾아와 몹시 슬퍼하자, 옥리와 다른 죄수들이 전하기를 “어젯밤에 당신네 아버지가 죽은 후 기이하고 밝은 빛이 옥 안을 가득 비추더니 아버지의 시신을 감싸 안는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 할 필요가 없소.” 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옥 리들은 그 시신을 거두어 10리가량 떨어진 산에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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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일성록』헌종 12년 8월 1일 ;『순교자 약전』, 171〜172쪽 :『우포도청 등록』, 병오 5월 25일. 반면에 요셉이 7월 마지막 날’ (음력 7월 28일, 양력 9월 19일)에 순교했다는 기록도 있고(『순교자 약전』, 19 • 1기쪽), 그의 나이가 55세였다는 기록도 있다(〈페레올 주교 보고서〉, 923쪽).
120)『순교자 약전』,172쪽. 요셉의 아들과 박 바오로 등이 요셉의 시신을 둔 지미(현 용산구 서빙고동)에 장사지냈다고 한 증언도 있다(『기해 • 병오 재판록』, 임 안나의 증언 : 회차 72, 김성서 요아킴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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