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입만 해도 1980년대에 급격히 대두된 민중문학론 계열의 이론적 뒷받침과 소인창작열(素人創作熱)에 힘입어 노동문학이 하나의 뚜렷한 흐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방현석, 정화진, 안재성, 김한수 등이 ‘노동소설가’로 불리며 문단의 한 좌석을 차지하는 형국이었다.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박노해와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의 의장이었던 김정환이 이 시대에 활발한 활동을 벌인 사람이었다.
특히 방현석의 『내일은 여는 집』(1991), 김한수의 『봄비 내리는 날』(1992) 등의 창작집은 수록된 작품에 나타난 인물의 전형성이나 상황 묘사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으로 기억되었다.
이 무렵은 1980년대 급진운동의 맥락에서 ‘사회주의노동자동맹’(약칭 사노맹, 기관지로 『노동해방문학』발간), ‘노동계급’ 그룹 등 전위운동을 표방한 투쟁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시기였으나, 1990년의 동구권 몰락을 계기로 급진적인 운동은 곧 실효성이 회의시되는 상황에 빠져들었다.<.p>
노동소설을 비롯한 급진적인 문학 흐름이 급속히 퇴조함과 동시에 나타난 소설현상이 곧 후일담 문학이다. 김영현의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1990), 송기원의 「아름다운 얼굴」(1993), 공지영의 『고등어』(1993), 『인간에 대한 예의』(1994), 김소진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1993), 주인석의 『검은 상처의 블루스』(1995) 등이 시에서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 등과 함께 후일담 소설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후일담 소설은 문자 그대로 보면 무슨 일이 있은 이후의 소설이란 뜻으로, 좁혀 말하면 좌익 급진주의 운동에 몸담았던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운동 이후의 이야기, 또는 운동이 끝난 시점에서 그것의 의미를 반추하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말한다. 1990년대 전반기에 그와 같은 유형의 소설작품이 널리 발표되었다.
386 세대 작가 및 여성 작가군의 출현과 성장
속칭 386세대라 함은 1990년대에 30대에 접어들었으면서 80년대에 대학생활을 했고 1960년대에 출생한 일군의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1970년대의 유신 독재체제 아래서 성장기를 보냈으나 1980년대의 급진적인 민주화 운동의 세례를 받았고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방향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세대다.
강의자가 이번에 출판한 문학산문집 『명주』의 1부를 이루는 내용은 이른바 386세대의 삶과 의식구조를 드러내려 한 의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참조할 만하다. 그들은 농촌적 기억을 갖고 성장하여 도시화에 노출되었고 청년기에 접어들어서는 체제 문제와 씨름한 사람들이었다. 외면과 내면의 분리, 분열 속에서 정치적 삶을 살면서 실존적인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고민이 1990년대에 접어들어 문학으로 표출됨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대목이 이른바 1963년생 작가들이다.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공지영, 공선옥, 김소진, 김인숙, 신경숙, 심상대, 장정일, 주인석, 전경린, 차현숙, 함정임 등을 그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작가로 꼽을 수 있다. 이들 세대 가운데서는 아직도 새로운 작가가 출현중이므로 그들 전체의 그림을 그리는 일은 아직도 시기상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앞에서 열거한 작가들 가운데 상당수가 여성작가라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980년대에 여성작가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데 비해 1990년대의 여성작가군의 증강은 괄목상대한 점이 있다. 한국근대문학사에서 여성작가가 다수 출현했던 것은 1930년대였고 1950년대에 다시 한 번 그러한 때가 있었으므로 1990년대의 여성작가군의 출현은 이른바 ‘제3의 물결’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정치 일원론적 관심의 시대였던 1980년대에 비해 1990년대는 관심의 영역과 접점이 다양화된 것, 남성 중심적인 제도와 관습, 사고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의 시각이 대두된 것 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1990년대 한국소설의 흐름 (2)
포스트모더니즘의 외관을 가진 국수주의 문학의 출현
이인화, 김탁환 등이 주도하고 장정일, 이문열 등이 활발하게 참여한 문학잡지 『상상』이 창간된 것은 대략 1993년경이다. 이들 작가들의 공통점은 대구?경북 출신 작가들이라는 점과 국수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나게 내세웠다는 점일 것이다.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1992)로 표절 논란을 겪으며 등단한 이인화는 『영원한 제국』(1993), 『인간의 길』(1998) 등을 발표하면서 유신체제를 정조의 개혁에 비유하고 박정희의 삶을 초인에의 길로 묘사하는 등 파시즘을 정당화하는 문학 논리를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비평으로 등단한 김탁환은 곧 소설로 전향, 다시 역사소설로 나아가 이순신, 허균, 임경업, 황진이 등을 주인공으로 삼은 장편소설에 주력하고 있다.
이문열은 1990년대에 들어서 파시즘 및 국수주의 문학 이념을 공공연하게 표방하고 있는 중견작가다. 『아우와의 만남』(1995)에서 『선택』(1997)을 지나 『아가』(2000)에 이어지는 흐름은 공공연한 경향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직접적인 정치성을 보여준다.
장정일은 이러한 일련의 경향과는 거리를 두어온 작가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문학적으로 가장 근사(近似)하게 보여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이 눈뜰 때』,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2),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1994), 『내게 거짓말을 해봐』(1996), 『보트 하우스』(1999) 등은 포스트모던적 현실감각을 문학으로 번역한 작품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지금 연재하고 있는 『삼국지』는 이인화의 『서유기』 연재와 함께 이문열의 『삼국지』 다시 쓰기를 연상시킨다. 독서계 전반의 고전열을 토대로 다시 쓰기나 베껴 쓰기를 체질화, 방법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통한다.
『문학동네』의 창간을 계기로 전면화된 ‘문학주의’ 현상
『문학동네』가 창간된 것은 1994년이다. 편집위원 면면은 황종연, 류보선, 서영채, 이문재, 남진우 등이다. 문학동네가 표방한 이념은 따로 분명한 것이 없지만 이들 편집위원 면면의 성향이 전력에 비춰볼 때 현저히 달랐던 것, 이후 문학동네가 ‘젊은 작가 특집’이라는 공분모로 젊은 작가층을 두루 잡지에 이끌어들인 것, 신경숙, 은희경, 김영하 등 상수화한 작가를 확보한 것, 문학동네 출판사가 좌우 관계없이 책을 출판하는 가운데서도 ‘현실’에 대해 ‘문학’을, 내용에 대해 기법을 중시하는 출판 성향을 보이는 것, 문학의 죽음 등의 수사학을 중심으로 비평 특집을 다룬 점 등에서 잡지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 잡지는 창간 초기부터 신문사 기자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잡지와 출판사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형성하는 등 1990년대에 들어와 급격한 변화를 보여준 문학 생산-유통-소비 메카니즘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창작과비평』, 『문학과 사회』, 『실천문학』과 함께 문학 잡지 지형의 일각을 형성했다. 현재 문학 이념적 측면에서 의미 있는 문학잡지는 『창작과비평』, 『실천문학』, 『문학동네』 정도다. 『문학과 사회』는 이 잡지를 내는 출판사인 문학과지성사가 여전히 문단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데 반해 잡지로서는 그에 해당하는 내용을 전혀 갖추지 못하면서 쇠락해 가고 있다.
생명과 인생의 의미를 환기시킨 소설들
공선옥, 공지영, 김소진, 최인석, 한창훈 등과 전성태 등 세대가 처지는 작가를 아울러 설명할 수 있는 용어가 있다면 그것은 ‘인생파’ 정도일 것이다.
공선옥의 문학적 활동은 『피어라 수선화』(1994), 『내 생의 알리바이』(1998), 『멋진 한세상』(2002) 등으로 이어지는 공선옥의 단편 세계는 1990년대 여성소설의 흐름 가운데서도 특별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그녀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본원적인 생명력을 형상화하는 이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는 공지영의 단편소설의 세계 역시 주목해 볼 만하다. 『인간에 대한 예의』(1994)에서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1999)로 이어지는 작품세계는 세평과는 달리 그녀가 단순한 통속작가가 아님을 보여준다. 후일담 소설이 진화해 가는 한 모습을 그녀의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요절한 김소진의 작품세계 역시 이 점에서는 빼놓을 수 없다. 단편집『열린 사회와 그 적들』(1993), 연작소설집『장석조네 사람들』(1995), 유작집이 된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1997) 등은 그의 성장환경을 반영하면서 민중들의 삶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있는 의미 있는 작품들이다.
지금의 한국문단에서 최인석만큼 이채로운 작가도 없다. 그는 『내 영혼의 우물』(1995), 『혼돈을 향하여 한 걸음』(1997) 등에 실린 중단편소설은 알레고리 기법으로 씌어진 현실비판의 함의를 띠고 있다.
한창훈과 전성태는 1980년대의 민중문학 가운데 농촌소설을 지양한 새로운 형태의 소설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한창훈의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1996), 『섬』(2003) 및 전성태의 『매향』(1999)는 바다와 농촌에 깃들인 사람들의 삶을 웅숭깊게 담아내고 있는 작품집이다.
<바. 한국어 소설의 외연적 확장 현상>, <사. 중견 및 원로 작가의 원숙한 작품 세계>, <아. 미지의 가능성으로서의 신진 세대 작가>, <자. 탈장르 내지 신종 장르 소설의 출현 가능성과 의미> 등의 항목에 대해서는 시간관계상 3주차 강의록에서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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