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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 남경!' 은 영화를 접하기전의 저의 예상과는 달리 '이러한 끔찍한 역사가 있었다' 라는 정보전달이 주가 되는 다큐영화라기보다는 한 일본군 장교를 중심인물로 내세우고, 한 개인이 전쟁이란 참화속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현실을 목격하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내적갈등의 과정과 비극적인 결말을 이야기하는 영화이지, 다큐멘터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또 이 영화는 비록 전체적인 영화전개의 중심적인 축이 되는 인물은 한 일본군의 장교이긴 하지만, 다각적으로 다양한 인물(정복자와 피정복자의 상반된 입장에 처한 여러인물) 의 이야기를 하고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당시 남경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현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동시에
전쟁안에서의 인간성에 대한 탐구의 결과물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내용을 말씀드리면 스포일러가 되겠고...
덧붙이고 싶은 내용은 바로 이 영화에 대한 일본의 정부의 태도지요.
일본에서는 '남경! 남경!'의 상영을 금지시켰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아이들과 국민들에게 가르쳐온 역사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지요. 단적인 예로 그들은 남경에서 3천여명을 군인을 죽였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현실은 군인뿐만아니라 난민과 어린이 여성을 포함한 30만명에게 학살,강간,약탈이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실과는 10000%의 차이가 나지요.
자신들이 주장하고 가르치는 역사와 이 영화의 내용이 충돌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 영화를 상영할수 없는겁니다.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자유주의 국가임에도 말이죠.
단순히 일본의 반성의 부재와 현실왜곡이라는 측면을 떠나서, 이것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우리는 물론 전세계가 생각하는 그런 민주적이고 자유적인 국가가 아니라는겁니다. 그냥 덩치큰 경제공룡일따름이죠.
이 영화의 일본내 상영금지 판정이 옛날 어떤 하나의 사건과 오버랩이 됩니다.
혹시 아이리스 장을 아시는지요?
아이리스 장과 그의 역사적인 저서 남경대학살에 대한 잘 설명된 글이 있길래 퍼옵니다. 제가 설명하는것보단 낫겠지요
남경 대학살과 일본의 은폐
몇 해 전부터, 해마다 아이리스 꽃이 필 즈음에 내 메일 박스를 찾아오는 또 하나의 아이리스가 있다. 아이리스 장(Iris Chang, 張純如). 그녀를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20세기 초 일본은 아시아 일대에서 연속적인 침략 전쟁을 일으켜 이 지역을 피빛으로 물들였다. 전쟁이 거듭될수록 일본의 잔인함은 도를 더했으며, 인간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온갖 만행이 일본 정부와 군 당국에 의해 저질러졌다. 전대미문의 수많은 잔악한 만행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건이 남경 대학살이다.
1937년, 중국 내륙으로 밀고 올라온 일본은 12월13일 마침내 당시 중국의 수도 남경(Nanjing, 당시는 Nanking)을 점령했다. 남경에 이르기 전부터 일본군이 지나는 자리는 핏빛으로 얼룩졌다. 전쟁에서 죽고 죽이는 것은 불행하지만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일본군이 남경으로 향하며 보인 모습은 전쟁에 흔히 따르게 마련인 폭력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잔인함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잔인함의 광기가 일본군은 물론 일본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일왕은 전쟁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하도록 규정한 국제 조약을 걷어내 버렸으며, 일선에서는 포로는 무조건 사살하도록 명령이 떨어졌다. 일본군은 포로 뿐 아니라 진군 중에 잡힌 시민과 부녀자, 아이들까지 도륙했다.
일본군 소위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츠요시는 누가 먼저 100명의 목을 베는가 경쟁을 벌였다. 이들의 '점수'는 마치 운동 경기의 그것과 꼭같은 형태로 본국의 신문에 보도되었다. 특파원이 쓴 신문 기사의 제목은 "백 사람 목베기 경쟁, 신기록 수립" "106 대 105, 연장전 돌입" 등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전쟁을 빙자한 학살이었으며, 나라 전체가 피 냄새에 미쳐 있는 형국이었다.
일본군의 만행은 남경을 점령하면서 그 잔인함이 극에 달했다.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잡힌 중국군 포로는 물론, 무고한 시민까지 칼로 목이 베이고 검도 연습 제물이 되었다. 산 채로 매장되거나, 구덩이에 던져진 뒤 디젤유를 뒤집어쓰고 집단으로 불타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일본군은 탄환을 아끼기 위해 서너 명을 겹쳐 놓고 총을 쏘아 사살했으며, 그보다는 칼을 썼다. 수많은 시신이 양자강에 던져졌다.
열 살도 안된 소녀에서부터 할머니까지 백주 대낮에 집단 강간을 당했으며, 이윽고 목이 잘리거나 팔이 잘리거나 다리가 잘린 채 길가에 내팽개쳐졌다. 일본군에 의해 강간 당한 중국 여성은 8만 명에 이르렀다. 총으로 아비를 위협해 딸을 범하게 하고 그 옆에 둘러서서 팔짱 끼고 이를 구경했다. 일본군은 재물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약탈하였고, 나머지는 불에 태웠다. 인터넷을 조금만 찾아보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사진들이 쏟아져 나온다. 사진 속에서 일본군은 중국인을 칼로 베고 찌르고 쑤시고 파묻고 불태우며 즐거워한다.
학살은 이듬해 2월 초까지 6주 동안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일본군이 도륙한 남경 사람은 3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1947년,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이 사건에 대해 벌어진 전범 재판에서는 19만 명이 집단 학살되었고 개별적으로 살해된 사람도 15만에 달한다고 평가했다. 731부대, 종군위안부, 관동대지진 사건과 더불어 20세기 초 일본이 주변국에 대해 벌인 만행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일본의 생각은 다르다. 희생자 수 집계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어떤 범죄자든 죄를 숨기고 과거를 지워버리고 싶어하게 마련이므로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유태인 학살이 조작된 것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자도 있고, 한 국가 사회가 주체가 되어 학살을 저지르고도 시간이 가면서 은밀히 묻혀 가는 일도 벌어지는 마당이다. 그래도 수십 만을 처참하게 죽여놓고 나서 희생자가 수백 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뻔뻔하지 않은가.
위키에 따르면 일본 학자조차 대체로 10만에서 20만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수백 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진실을 호도하는 세력도 여전히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자기가 저지른 다른 만행과 마찬가지로, 남경 대학살을 후세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일본의 교과서는 이 학살에 대해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기껏해야 "이 사건의 실태에 대해서는 자료상의 의문점이 있는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 지금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라고 써서, 사실이 아닌 양 물타기를 한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는 남경 대학살이 엄청나게 과장되었거나 사실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일본인의 억지를 반영하고 있다. 일본 지도층 일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남경 대학살을 공공연히 부정한다. 일본 역사를 검토한다는 명목으로 결성된 한 우익 단체는 남경 대학살과 종군위안부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같은 '진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국민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기도 한다. 교과서에 입김을 끼치는 것은 이들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다.
나치의 만행을 부정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처벌하는 독일과는 달리, 일본 정부는 이러한 강변과 억지를 용인하고 있다. 더 나아가,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진실로 반성하기보다는 이같은 억지를 뒷심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불행했던 시기에 벌어졌던 있어서는 안될 유감스러운 일. 만행의 주체는 쏙 빠지고, 자신이 저지른 참상의 실태도 게눈 감추듯 싹 감춘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는 주변 나라로 하여금 과거의 잘못을 정말 반성하고 있는지 의심케 한다. 몇 해 전 중국땅을 뒤흔든 반일 시위에는 남경 대학살에 대한 조직적 부정과 이러한 주장을 용인하는 일본 정부에 대한 반감이 큰 영향을 미쳤다.
또 하나의 아이리스 꽃
일본의 은폐 덕분인지, 남경 대학살은 아시아 몇몇 나라에서만 기억하고 분노하는 문제로 머물러 있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관련한 수많은 조직, 단체, 기록, 자료, 기금, 기념관, 증언자, 후원자들을 갖고 있는 서구 사회에서도, 비극적 양상이 비슷한 남경 대학살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남경 대학살을 들어본 사람을 찾기조차 쉽지 않았다. 적어도 아이리스 장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이리스 장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장은 명민하고 촉망 받는 젊은 저널리스트였다. 그의 부모는 중국 본토에서 태어난 대만 사람들로, 미국으로 유학 왔다가 학자가 된 뒤 미국에 눌러 살게 된 이민자들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중국인의 피를 그대로 받은 이민 2세인 아이리스 장이 중국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의 조부모 자신이 남경 대학살의 지옥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람들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피의 조국이 한때 외세에 의해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참상에 빠졌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그가 받았을 충격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그를 분노에 떨게 만든 것은 이러한 사실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도 않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아이리스 장은 1968년 3월, 프린스턴 대학이 있는 뉴저지 프린스턴에서 태어났다. 부모를 따라 일리노이 대학이 있는 어바나 샴페인으로 이사 온 그는 이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대학 때 대학 신문을 비롯한 대학 저널리즘에 참여하면서 그는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대학 신문의 동료이자 편집자였던 한 친구는 장의 기사가 언제나 완벽해서 손을 댈 일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이 정도로 그쳤다면 동료로부터 시기를 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 언제나 남보다 한 발 앞서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 남들이 원하는 자리를 바로 그 앞에서 따내고 남을 물먹이는 사람.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이 받는 상처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 아이리스 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것은 장의 노력과 재능 때문이었지만, 같은 길을 가려고 하는 동료들에게는 반가운 일이 될 수 없었다.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하는 자리는 언제나 장이 차지했다. 동료들은 그를 부러워하고 심지어 미워했다.
장은 <뉴욕 타임즈>에 기사를 기고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AP와 <시카고 트리뷴>에서 일했다. 저널리스트로서 화려한 출발이었지만, 장은 곧 지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를 만난 한 대학 동료는, 장에게서 대학 때의 기관차 같은 열정 대신 피폐하고 지친 모습을 발견했다고 회고한다. 장은 전도 유망한 길을 접고 좀더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삶을 모색했다. 그는 스스로 기획한 주제에 대해 취재하고 이를 책으로 엮어 내면서 자유 기고를 하는 작가로 변신했다.
그의 첫 번째 작품은 미국에서 활동하다 중국으로 넘어간 중국 미사일의 아버지 첸수에쉔(錢學森)을 다룬 <누에의 비단실> (Thread of the Silkworm)로, 1995년에 출간됐다. 그러나 장이 작가로서, 그리고 역사가로서 미국 사회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97년에 두 번째 책 <남경의 강간: 2차 대전의 잊혀진 대학살> (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을 펴내면서부터였다. 중국을 몇 차례 방문하며 관련자들의 증언을 철저히 취재하고 방대한 자료를 모아 집필한 이 책은 남경 대학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던 미국 사회를 충격으로 뒤흔들었다. 남경 대학살 60주년을 맞는 해에 출간된 이 책은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10주 동안이나 머물렀다.
남경 대학살의 마지막 희생자
이 책의 성공에 힘입어, 채 서른이 되지 않은 아이리스 장은 일약 유명 작가로 등극했다. 당시 영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은 그를 백악관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를 기쁘게 한 것은 사람들이 비로소 이 감추어진 비극에 대해 알게 되고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남경의 강간>은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장의 책은 음지에 묻혀 있던 이 사건을 전면으로 끌어 냈으며, 미국인은 장의 책을 통해,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더불어 근세사에서 인간이 벌인 가장 잔혹한 학살이면서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던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됐다. 남경 대학살 사건은 흔히 영어로 'the Rape of Nanking'으로 표현되는데, 이 말이 널리 퍼진 것은 아이리스 장의 책 덕분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1
장은 다만 조용히 책을 쓰고 뒤로 물러나 앉아 있지 않았다. 그는 남경 대학살에 대해 일본이 사과하고 제대로 보상할 것을 촉구하는 운동을 조직했으며, 기회가 있는 대로 대중 매체에 나가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책과 강연, 대중 활동을 통해 남경 대학살의 진실을 미국 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는 장이 일본의 눈엣가시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본은 밖으로는 장의 주장이 불명확한 자료에 근거한 과장이라고 주장하고 안으로는 장을 마녀 같은 존재로 취급했다. 일부 세력은 장을 해꼬지하겠다는 협박을 거리낌없이 내놓았다. 일본의 한 만화는 아이리스 장이 조작된 사진과 자료를 활용해 미국인을 선동하고 있다고 묘사했다(아래 그림). 불행하게도 일본의 주장은 힘을 얻지 못했다. 아이리스 장의 책에 실린 남경 참상의 사진 대부분은 언론 매체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일본 병사들 자신이 찍은 것도 있었다.
일본의 태도야 이미 충분히 예견했던 일이었다. 장은 당차게 싸워 나갔다. 장에 대한 지지는 곳곳에서 나왔다. 책을 통해 남경 대학살의 진실을 알게 된 미국인들은 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비슷한 학살의 비극을 겪은 나이 많은 유태인들은 장을 자신들의 딸처럼 대접했다.
역사가가 역사를 오로지 차분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볼 수 있다면 바람직하겠지만, E. H. 카가 말하듯 완벽히 객관적인 역사가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젊고 열정에 찬 아이리스 장은 더욱 그러했을지 모른다. 더구나 그는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 진실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그를 추동한 주요한 동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이리스 장의 의지는 굳었으나, 열정으로 타오르던 그의 감수성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남경 대학살의 희생자 자신들보다 더 분노하고 더 고통 받았다. 참상의 도가니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이 과거를 증언하며 울 때 장도 함께 울었으며, 그들이 울음을 그쳤을 때도 장은 여전히 울었다. 7년 동안 거의 매일, 목이 잘리고 배가 갈려 창자가 튀어나오고 불타고 강간당한 뒤 도륙된 시체 사진과 씨름하며 수십만 원혼과 대화해야 했던 장은 극심한 신경 쇠약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 스스로 선택한 소명은 그를 더욱 몰아붙였다. 장은 일본의 만행을 취재하기 위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사는 희생자들을 찾아갔으며, 그들로부터 포로에 대한 생체 실험, 종군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벌어진 집단 강간 같은 끔찍한 사건을 끊임없이 들어야 했다. 증언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수십 년 동안 뼈 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해 주었으며,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숙소로 돌아온 장은 그 뒤 몇 시간을 혼자 울었다. 희생자들의 고통과 슬픔을 몇 배로 확장해 공명하던 그는 정신적으로 급격히 약해졌다. 잠을 자지 못했고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다.
필리핀 전선에서 일본군에게 포로가 된 뒤, 동료를 생매장하지 않으면 스스로 생매장 당하는 상황에 처했던 미군 포로들을 인터뷰하러 켄터키에 간 장은 결국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의 정신 건강 상황은 이미 매우 나빠져 있었다. 그의 남편은 그를 걱정하면서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장이 다루어 온 개개인의 비극은 너무나 참혹하고 기막힌 것이라서, 그것을 끊임없이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쳐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연들이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의 집으로 돌아온 장은 친구들에게 하나하나 전화를 했다. 듣는 사람은 몰랐지만, 이것은 그의 작별 인사였다. 2004년 11월9일, 그는 캘리포니아의 한 국도변 차 안에서 자기 머리에 총을 쏜 상태로 발견되었다.
짧은 생애, 긴 그림자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만의 것이다. 역사의 교훈은 과거를 기억하고 이로부터 배우는 사람에게만 가치 있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남경 대학살은 일본과 중국 모두에 의해 적당히 은폐되어 왔다. 가해자인 일본이야 당연히 숨기고 싶어했겠지만, 중국 역시 외침(外侵)에 수도가 유린된 이 전례 없이 수치스러운 사건을 되새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장의 책 한 권으로 달라졌다. 장의 책이 나온 뒤, 중국 곳곳에 일본의 만행을 기억하는 기념관과 박물관이 설립되었으며, 중국의 반일 감정은 크게 높아졌다. 장의 책은 세상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세상을 뒤흔든 거대한 에너지는 오로지 장의 내부에서 나왔으며, 그는 스스로를 불태워 이 에너지를 만들었다. 장은 남경 대학살의 마지막 희생자나 다름없었다
첫댓글 이와 같은 주제로 투닥거리다가 막바지에 하는 말들이 '그 시대에 그럴수도 있지'라는 말이 꼭나오더라구요 ㄱ-.
그냥 과거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사과하는게 얼마나 힘든지...
좋은 글이네요. 퍼갑니다.
이번 일본의 중의원 선거 결과랑 태도가 어찌 바뀔런지..
신문보니까 민주당도 그냥 자민당보다 "약간 덜 극우"라네요
엎어치나 메치나 우리나 일본이나 ㅋㅋ
역사로부터 뭔가 배울 생각은 안하는군요. 역사가 진실로 있을때 교훈이 되는거지 거짓이 되면 선동이자 자위가 되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