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연대기와 시와 달맞이 꽃
윤형돈
경기도 여주 출생. 2002년 「전국교원문학」 당선. 시집 「땅끝편지」, 「슬픈 연」, 「꽃 사과나무 아래서」. 영역시집 「응시」, 「비너스의 태몽」, 「흑자갈의 노래」.
어느덧 교직 인생 36년이 유수와 같이 흘러갔다. 내게 있어 36년은 어찌 보면 영어(囹圄)의 몸과 같은 영어(英語)의 학교였다. 무심한 세월의 슬하에 감회 어린 기억의 흔적들이 애린의 시처럼 구속함의 노래 부르며 지나온 길을 더듬어 보게 한다.
나는 지금부터 까마득한 1978년 3월에 가평군 하면 현리에 있는 조종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로 있다가 그 이듬해 정식 발령을 받았다. 그러니까 교사로서 첫발을 그 곳에서 시작한 것이다.
시외버스를 타고 청평에서도 한참을 굽이돌아 들어가니 ‘조종‘이란 촌스런 이름의 시골 학교가 나왔다. 그때 나는 ’조종‘이란 아침 마루에 앉아 밭에 씨앗을 뿌리는 심정으로 내 운명의 수레가 나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 궁금해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리방(줄판)에 철필로 시험지를 긁어 등사하며 열정을 쏟았던 곳이요, 단체 기합이랍시고 순진무구한 애들의 손바닥을 두들겨 패도 탈이 없던 원시시대. 제자들에게 자전거 타기를 배우고 그 체험 수기로 인해 배우자를 만난 인연의 동네였으며. 방과 후 천렵을 하며 형제처럼 돈독했던 선생님들과의 숱한 일화가 전설처럼 남아있는, 그래서 떠날 때 눈물 흘린 내 마음의 풍금 같은 첫 학교였다.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어느새 첫정을 맺은 학교와 작별을 고해야 했다. 방동사니 들풀처럼 자유롭다가 운동장도 채 고르지 않은 신설학교에서 평지 작업으로 땀 흘리니 모두가 고원의 개척자였다. 규격화된 도시생활 적응이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앳된 중학교 1학년 소녀들과 ‘아이 엠 어 보이’ 목청을 돋우며 단어 왕 선발대회를 일삼던 곳. 당시 사회 분위기상 학생부에서 자기비판 식의 ‘정화 계‘ 업무를 맡아 동료들의 눈총을 받던 시절, 일급 정교사 자격 연수까지 연기해 가며 대학원을 다니던 학구열이 왕성하던 계절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주거지에서 멀어진 시흥군 소래중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떠날 때 허전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그 지역의 마을 이름을 토대로 <소래의 찬가> 라는 시를 만들어 나름대로 교육의 지표로 삼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열정이 움터 났는지 모를 일이다. 맥주를 박스째로 갖다 놓고 오징어 다리 씹으며 죄 많은 중년을 마무리하던 곳, 하긴 그로 인해 지금은 치열 배합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어쨌든 황량한 벌판에 낭만이 서린 학교로 남아 있다. 그러다 소위 전통 있는 수원여고로 가게 되었다. 바로 인근 수원북중에서 순위고사에 합격하여 기뻐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 데 말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여고생들과 교감하면서 시적인 감흥을 최대한 끌어올려 문학수업의 기초를 닦은 것도 그 시절이었으니,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동료 교사들을 위한 결혼 축시와 어느 입시 철 교정에서 ‘수능 출정 시’를 낭송하는 데 하늘에서 응답의 눈송이가 흩날리던 날의 감동이 가장 진한 기억으로 남는다. 도서관 신축 개관식 때는 <학문의 원시림을 꿈꾸며>란 자작 시가 도서관 입구에 걸려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였다. 당시 승진에 눈을 뜬 교사들은 전부 섬으로 가는 게 대세였는데, 나는 아랑곳없이 그냥 산본 도시 학교로 내신을 내는 바람에 그 길과는 아예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구러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 했던 동료들은 하나 둘 승진을 이유로 내 곁을 떠났다. 나는 고심 끝에 진격을 위한 섬 행차를 포기하고 수리산 자락에 위치한 산본 고교로 내려왔다. 섭섭한 마음을 달래며 떠나기 전에 이미 <나 지금 산본으로 간다>라는 시를 작성해 놓은 상태여서 마음은 편했다. 교단 문학을 통해 정식 등단하여 본격적인 작품 활동과 첫 시집 <땅 끝 편지>를 상재하는 기쁨을 가졌다. 나름 성대한 출판 기념회를 가졌고 동료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집 뒤편이 바로 야산인지라 잦은 산행을 통해 자연을 닮은 시심을 맘껏 일깨웠다.
이국에서 묻어온 여름 잔해가 / 가셔지기도 전에 / 설익은 배낭지고 / 꾸역꾸역 / 땅끝 마을 내려갔습니다. / 한 시대와 버성겨 살아온 / 어느 시인의 바다가 / 유형지의 아침을 깨워 / 꺼이꺼이 / 피울음을 놓고 있더군요. / 도중에 가슴이 헐린 사람들은 / 더 이상 새 집을 짓지 않습니다. / 잃어버린 영혼의 지도를 찾아 / 또 다른 에움길로 갔으니까요- <땅 끝 편지>
이어서 나는 안양 부안 중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어느덧 중년인지라 업무 부담이 가중되는 와중에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애당초 학생부장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직책이었고 오히려 아이들을 너무 혹독하게 다룬다며 의식 있는 어느 여교사는, <선생님, 회초리는 이제 그만 거두세요.> 란 책을 보내기도 했다. 반성하라고. 그즈음의 경험을 토대로 교단문학 현상 공모에서 <꽃 사과나무 아래서>가 당선되어 당당히 시인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문단활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초록 먼지 날리는 운동장에서 / 길길이 뛰는 아이들의 시선이 / 한 곳으로 고정되어 있다 악동들이 땀 흘리며 정직하게 / 붙좇는 것은 가죽 공뿐이다 / 풀 더미를 차던 유년의 기억은 돼지 오줌통만큼이나 먼데 / 고울 문을 벗어난 공들이 / 쥐똥나무 울타리에서 우연히 / 꽃 사과와 만나고 있다 / 이루지 못한 꿈의 알갱이들이 / 지친 호흡으로 매달려 있을 무렵…- <꽃 사과나무 아래서>
그도 잠시, 승진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다 도시 속의 시골인 언덕바지 신안 중 골짜기로 자리를 옮긴 것은 커다란 위안이었다. 골치 아픈 공문 대신 드넓은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맘껏 공을 차며 중년의 오후를 바보처럼 뛰노는 날이 많았다. 제 3시집을 펴내는 날은 유난히 천둥 번개가 심했다. 그곳에서 지금까지 수시로 만나 울분을 노래로 달래고 마음을 나누는 친구인 ‘노래하는 작은 새‘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전근 가는 그에게 <아름다운 동행>이란 송별시를 지어준 기억이 새롭다.
빛 좋은 대부도의 포도 알이 / 순수한 눈망울로 박혀 /종종걸음 웃으며 다가오는 작은 새 /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 우주의 발등상을 분주히 오가기 위해 / 신은 그에게만 아톰처럼 / 단단한 목질의 부름켜를 허락하시어 / 부지런한 지구를 왕래하게 했다는 걸/ 건조한 사람에겐 희나리의 젖은 장작이 필요할 지도 몰라, / 어쩌다 쉼을 얻는 저녁 / 어스름 뿜어 나오는 가난한 사랑 노래/ 고단한 삶의 하숙생일 것이니 / 가만히 읊조리는 낮은 음 자리까지 / 저 기다림의 영원을 속삭이게 하라
- <노래하는 작은 새>
언제까지나 낭만과 즐거움을 노래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 학교로 옮기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수준별 수업, 교원평가, 학생인권조례. 왕따, 혁신과제 같은 빠른 조류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한 나는 공중 부양되어 저절로 조직에서 벗어나 “사회적 빈둥거림” 현상을 겪게 되었다. 학교에서 가까운 야생화 자연학습장을 산책하는 게 유일한 낙이 되어버렸다. 독짓는 늙은이처럼 많은 오해와 편견에 시달릴수록 초연한 황소걸음으로 산기슭을 걸으며 느림의 미학을 익혀 시상의 원천으로 삼았다.
분리수거의 고수를 만나 산적한 생의 과제들을 정리하는 법을 배웠고, 생일이 같은 옆자리 동료는 왜 그리도 슬픈 애상조만을 노래하는지. 마침내 달려갈 길 다 가고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정년은 있을지 몰라도 자기 삶의 작가는 영원한 현역이란 것. 먼 데서 오는 어린 양을 위해 이제 그만 묵은 의자에서 내려와야 한다. <하직>이란 시를 지으며 말년의 어지러운 심사를 달랬다. 이제부터 배움은 생활 교실에서 제 3의 사람들과 영위해야 하는 것이다.
퇴임 후 얼마 뒤 마지막 재직 학교에 들렀다 / 감회의 계단을 오르는 데 / 한 젊은 교사가 눈물 가득/ 챙겨놓은 물건 가지고 나오며 / 이걸 가지고 가라고 건넨다. / 헌 옷 상자엔 첫 발령 때부터 지금까지 / 어머니의 간절한 / 염원 같은 내복이 들어있다. / 알 수 없는 설움에 북받쳐 / 깨어난 새벽 세시의 꿈! / 아직 하직 인사도 못 드렸는데, / 당신은 벌써 무언가를 감지하고 / 운명처럼 이제 그만 / 교직의 짐을 내려놓으라고 하시는구나! / 어머니, 그동안 참 고생 많으셨어요!
- <하직>
“경기도 교육청 교원 정책과 아무개입니다. 제자 박수인 분이 윤형돈 선생님을 찾고 계십니다.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얼마 전 난데없이 이런 문자를 받고 일순간 멍해진 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그 제자를 만난 지가 족히 이십여 년 이상이 넘었으니 어쩌면 기억의 파지곡선에서 소멸되어야 마땅할 일이 현실로 대두된 것이다. 당연한 것은 이제 엄연히 어엿한 생활인 대열에 합류하여 나를 만날 하등의 이유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거니 예전 목소리 그대로였고 그 애도 나를 금세 알아차린 듯 반겼다. 무슨 천재지변이 아니고서야 갑자기 이음줄이 닿을 리가 만무한 데 이유는 분명했다. 교편을 잡은 지가 벌써 23년째인 데, 남편은 갑상선 재수술을 받고 힘든 와중에 아들 하나는 꼭 교사를 시켜야겠다는 일념으로 입시 뒷바라지에 진력하느라 병이 났다는 거였다. 그래서 곰곰 생각한 끝에 장장 6개월 휴직 겸 체력 보강 기회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막상 휴직을 해보니 그동안 본의 아니게 소원(疎遠)시 했던 사람들이 생각나더라는 것이다. 나도 예외 없이 그 대열에 끼긴 했지만. 그 애는 아주 오래 전, 남한산성 밑에 위치한 성남 상원여중에서 3년을 같이했던 너무나 뚜렷한 학생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자기 삶에 감사할 줄 안다고 한다. 앞만 보고 달리는 자에겐 멈추면 보이는 것들의 여유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선생님은 내가 예쁘게 커준 것 고마워하셔야 해요.” 약속 장소에서 무심코 던진 제자의 말을 뒤로 나는 간밤에 써 놓은 ‘달맞이 꽃‘이란 시 한편을 내밀었다.
그 해 여름 / 낮은 논두렁의 흐느낌 / 달빛 그렁한 어께너머 / 샛노란 현기증의 단발머리/ 풀 섶 이슬에 /방울 종을 달고 피어나다 / 누군가 영어(囹圄)의 몸일 때 / 수인(囚人)의 계절은 가장 빛난다. / 아주 오래된 마음의 풍금소리.
- <달맞이꽃>
당시 그 애가 진로 문제로 많이 힘들어 할 때였다. 때마침 눈에 들어온 달맞이꽃, 노란 방향을 토해냈던 그 날의 감흥을 더듬은 것이었다. 도도할 만큼 감정을 숨기고 차가운 이성으로 몰입을 잘하던 달 바라기. 나는 그 제자와의 우연한 재회로 잠시 지나온 삶을 반추하고, 회오의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학창시절의 회상이 또 다른 감회의 연대기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낮에는 수줍은 듯 꽃잎을 오므리고 있다가 이른 저녁이 되면 샛노란 향기로 활짝 피어 달님을 맞이한다는 월견초(月見草)'는 밤이 깊을수록 꽃잎에 이슬이 맺혀 밤을 밝힌다는 달맞이꽃의 다른 이름이다. 전설에 의하면, 태양보다 달을 더 좋아하던 아가씨가 님을 그리다 죽어서 피어난 순애보의 꽃이며 희미한 달빛 아래 빛나는 한 송이 노란, 눈 먼 사랑의 꽃이었다.
나는 어려서 맹인 가수 이용복의 ‘달맞이꽃’을 자주 불렀다.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변되는 청년문화가 사회적인 현상으로 대두되던 시절이었다.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으로 검은 안경을 쓰고 부르는 허스키한 목소리가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으로 다가오는 예감의 꿈도 꾸었다.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되었나 / 달 밝은 밤이 오면 홀로 피어
쓸쓸히 쓸쓸히 미소를 띠는 / 그 이름 달맞이꽃 아~아~아
간혹 통속적인 노래가 육신이 되어 삶의 언저리에 스미는 걸 느낀다. 달밤에서야 향기를 토하는 달맞이 꽃 월하향(月下香)의 뿌리도 곤고한 삶에 지친 내면의 울적함을 달래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신비한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