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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6. 묵상글 (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 교환의 신비에 초대 받는 우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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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교환의 신비에 초대 받는 우리
“첫 순교자인 복된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에 거행하는 신비를 저희가 삶으로
드러내게 하시고 숨을 거두면서도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성 스테파노를 본받아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소서.”
성탄절에 그리고 그것도 주님 성탄 바로 다음 날에
성탄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순교자 축일을 지내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 축일을 지내는지 그 의미가 오늘 본 기도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세상에 태어나시고 스테파노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지요.
주님이 세상에 태어나심으로 스테파노를 포함해
우리 인간이 천상에 태어나게 됨을 뜻하는 겁니다.
주님의 모든 신비는 교환의 신비이고 성사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는
주님의 죽음으로 우리 인간이 부활하게 되고,
주님의 성탄과 육화의 신비는
주님의 땅으로 내려오심으로 우리 인간이 하늘로 오르게 되고,
주님의 성탄으로 우리 인간이 천상에 태어나게 되는 신비지요.
문제는 있습니다.
교환이 이루어지려면 그 교환에 동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늘과 땅을 교환하자고 하시며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면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오르겠다고 동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주님께서 땅으로 내려오셨어도
우리가 하늘로 오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주님의 성탄은 우리 구원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아무리 구원 열차에 오르라고 초대해도
우리가 그 열차를 타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오늘 축일로 지내는 스테파노는 이 교환의 제의에
처음으로 응답하여 처음으로 천상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 스테파노에 대해 사도행전은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라고도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였다.”라고도 하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스테파노는 적대자들을 이렇게 초대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늘을 보지 못하고,
그 초대에 응답도 하지 않지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분노로 가득 찼기에
하늘 대신 스테파노에게 증오의 눈길을 보냅니다.
스테파노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초대를 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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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어제는 하느님의 지상탄생일이었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 천상탄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지상탄생과 스테파노의 천상탄생, 이 두 탄생 이야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탄생이 ‘자기 비움’이라는 일종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요, 그것이 ‘타인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구세주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셨으며, 스테파노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신 분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있는 하느님의 지상탄생 없이는 뒤에 있는 천상탄생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오심으로 얻어진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았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한 사랑의 순교로 죽으셨듯이, 스테파노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순교로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사도 6,59)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26)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이처럼,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을 위해서도 불타는 사랑으로 기도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서서 기도했지만, 원수들을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사도 7,60), 자기를 죽이려는 이들을 위해 죽음으로써, 그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랑에 “하늘이 열리고”(사도 7,56), 하늘은 그를 받아들여 사랑의 순교자로 삼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는 비록 목숨 바쳐 순교할 기회는 없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생각과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 바로 ‘순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교’는 믿고 있는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분을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짜증내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오히려 자신 안에 품은 하느님의 사랑을 퍼 올리면, 우리 안에서 ‘열리는 하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시고.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미움 받고 거부당할 때에도, 박해 받고 배신당할 때에도
당신과 함께 받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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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을 지키는 일
죽음에 직면하면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어디가 조금 아파도 걱정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두려움은 온전한 믿음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자를 꾸중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8,26).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죽음을 앞두고도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7,55). 하며 주님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사도7,59-60). 하고 외쳤습니다. 참믿음을 지닌 사람만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증거할 수 있고 자신을 처벌하는 자에게 용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가 걸었던 이 길은 바로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이요,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느냐?”(성 에드몬드).
용서한다는 것이 말 같이 쉽지 않지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실수와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함을 지닌 이상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고 그때 비로소 타인을 넉넉히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주님이 걸으신 길을 걸음으로써 믿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제자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이 고난을 겪으셨으니, 제자가 또한 그 고난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언제나 진리의 길을 갈 것이고 그를 시기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의 미움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증거는 박해를 불러온다고 해도 그 박해의 순간이 참된 신앙의 탄생이고 예수님의 탄생 자체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하느님 측면에서 보면 이미 인간을 위한 희생이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우리에게 박해와 고난의 여정이 계속된다면 예수님의 탄생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희망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삶이 끝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그 삶은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마태10,16)합니다. 결무른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처지가 되던지 믿음 안에서 부드러움으로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신앙은 내 신념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각을 내 삶으로 옮기는 삶입니다.”
성탄축일에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충만히 받으시길 빕니다. 성탄은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신 사랑입니다. 우리도 나를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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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 교회에는 없는데 미국 교회에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종신부제’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부제는 사제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 1년 정도 있다가 사제 서품을 받습니다. 부제의 직무는 말씀을 선포하는 강론, 혼배성사 집전, 세례 집전, 봉성체가 있습니다. 저는 부제 때, 주로 말씀을 선포하는 강론을 하였습니다. 미국 교회에서 종신부제는 5년간 신학 교육을 받은 후에 부제품을 받습니다. 종신부제들은 사제가 파견되지 못한 지역에서 다양한 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종신부제는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수 있으며, 세례성사도 줄 수 있습니다. 혼인예식도 거행할 수 있고, 장례 절차의 여러 예식을 주도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와 관련해서 축복예식도 할 수 있으며, 봉성체와 성체 강복 등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가 미국 교회에 적응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현지 교구와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부제는 본당에서 훌륭한 보좌역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언젠가 종신부제 제도를 받아들일 때가 오리라 생각합니다.
교회사에서 빛나는 부제들은, 오늘 축일을 지내는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가 있고,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했던 라우렌시오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제의 역할이 축소되었던 중세시기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도 부제였습니다. 제가 있는 부르클린 한인성당에도 지난 5월에 종신부제가 탄생했습니다. 어려서 미국으로 이민 온 형제님입니다. 형제님은 주일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온화한 성품과 성실함으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부제품을 받은 후에 매 주일 영어미사에 강론을 하고 있고, 한국어 미사에는 한 달에 한번 강론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미사에 강론은 한국어와 영어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는 청년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본당 주일학교 복사들과 함께 신학교를 방문하였습니다. 학생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 17일에는 교우들을 위해서 ‘대림특강’도 해 주었습니다. 기혼인 종신부제가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서는 배우자인 아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제품을 받기 전에 배우자와 함께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부제의 역할이 무엇인지 배우자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의 축일을 지내면서 고인이 되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을 생각합니다. 저는 김수환 추기경님과 아름다운 기억이 있습니다. 1999년 저는 적성 본당의 주임신부로 있었습니다. 저는 추기경님께 대림특강을 해 주실 수 있는지 편지를 보내드렸고, 추기경님께서는 대림특강은 물론 미사까지 해 주시겠다고 답장을 주셨습니다. 무척이나 바쁘신 추기경님께서 기꺼이 시간을 내 주신 것은 적성 성당이 당시 서울대교구에서 가장 작은 성당이었기 때문입니다. 강의와 미사를 함께 해 주셨고, 교우들이 정성껏 준비한 저녁까지 맛있게 드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따뜻한 사랑을 듬뿍 주시고 가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생각하셨고, 그분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해마다 성탄절에는 가난한 분들이 많이 사시는 달동네에 가셔서 성탄절 미사를 봉헌하기도 하셨습니다. 권력의 힘에 밀려서 성당을 찾아오시는 분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힘들고 어려운 시대에 사람들에게 희망을 이야기 하셨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께서 남겨 주신 ‘우산’이라는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삶이란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 죽음이란 우산을 더 이상 펼치지 않는 일이다./ 성공이란 우산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요/ 행복이란 우산을 많이 빌려주는 일이고/ 불행이란 아무도 우산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다./ 사랑이란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하나의 우산을 둘이 함께 쓰는 것이요/ 이별이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빠져나와 각자의 우산을 펼치는 일이다./ 연인(戀人)이란 비 오는 날 우산 속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부부란 비 오는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갈 줄 알면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비요/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우산이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우산이 되어 줄 때/ 한 사람은 또 한 사람의 마른 가슴에 단비가 된다.” 오늘 하루 희망의 우산, 나눔의 우산, 위로의 우산, 친절의 우산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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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스테파노 축일입니다. 스테파노는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성탄 축제의 시작이 순교자를 기리는 날이라는 점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주님의 탄생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죽음보다 더 값진 것임을 드러내 보이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순교 성지에 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수많은 순례자를 만납니다.
교우분들은 이곳에 방문하셔서 기도하시고 자신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저는 그러한 분들을 돕는 역할을 이곳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순교 성지입니다. 순교 성지라는 말은 이곳에서 순교로서 피를 흘리신 분들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순교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신앙 때문에, 믿음 때문에 자기 생명을 내어놓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사실 특별한 은총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순교자는 그 은총에 힘입어 순교의 월계관을 쓰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순교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다. 순교를 선택하고 싶어도 우리에게는 더 이상 그런 기회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시대가 순교자들의 시대보다 더 편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는 우리에게 다른 방식의 순교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늘, 항상, 순간순간마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늘 선한 것을 선택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순교는 이런 순교입니다. 그리고 이런 순교 또한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혹은 늘 우리를 하느님의 반대편으로 우리를 끌고 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시대의 순교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늘 하느님을, 선한 것을 선택하는 순교 말입니다.
오글거린다.
‘오글거린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간지러운 분위기나, 쑥스러운 상황에서 우리는
‘오글거린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오글거린다’라는
찌개가 끓는 모습이나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많이 있을 때도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김치찌개가 오글거리며 끓는다.
사람들이 오글오글 모여있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도 ‘오글오글’
사랑과 배려가 우리 안에서 ‘오글오글’
그렇게 우리 서로 ‘오글오글’
오글오글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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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신부로부터 성체 분배 때문에 항의를 들었다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성체 분배를 제대로 못 한다는 항의가 아니라, 신부가 한 곳에서만 성체 분배한다는 항의였습니다. 그렇게 한 군데에서만 성체 분배를 하면, 다른 곳에 앉아 있는 신자들은 한 번도 신부님께 성체를 받지 못하지 않느냐는 항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매번 자리를 바꿔서 성체 분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신부가 지난번에 했던 곳에서 또 성체 분배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쪽에 앉은 사람만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하더군요.
별의별 항의가 다 있다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항의를 하지 않는 저희 본당 신자들에게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사실 이런 항의를 들어도 저는 옮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고정된 자리에서 성체 분배를 해야 아직 세례받지 않은 사람, 첫영성체를 하지 않은 어린이들이 안수받으러 오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자리를 계속 바꾼다면 이들의 혼란이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항의하는 요즘 세대를 종종 봅니다. 자신의 불편보다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면 어떨까요? 또 무엇보다 사랑이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마음을 담아보면 어떨까요?
얼마 전에 병자성사 갔다가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확장 주차’ 자리를 보았습니다. 요즘 큰 차량이 많기에 배려 차원에서 넓은 주차선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아주 작은 경차가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경차 주차선이 따로 있었고, 텅 비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자기 불편을 따지기보다 함께 사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 나라가 바로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을 맞이한 오늘, 제1독서는 용기 있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스테파노를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민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들 역시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테파노의 지혜로운 언변이 그들을 물리쳤고, 이 점이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투석형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과연 스테파노의 죽음을 원하셨을까요? 단순히 자기 마음에 들지 않고, 그래서 화가 난다는 이유로 자기들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인정하실까요?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도 이런 마음을 간직할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복음에서도 전해주듯, 우리에게 일러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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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랑은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이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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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
-영적승리의 순교영성-
어제 주님 성탄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천상탄일 축일입니다. 주님을 위한 순교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암시하는 성 스테파노를 비롯한 순교성인들의 천상탄일입니다.
또 오늘은 순교적 사랑과 헌신으로 수도생활에 정진중인 우리 요셉 수도원의 김기룡 스테파노 부원장 수사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77세 노령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의 사랑과 신뢰, 존경을 한몸에 받으며 부원장직과 더불어 주방장, 채소밭 책임을 다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인 스테파노 수사입니다.
새삼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샘솟는 희망의 원천은 살아 계신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오늘 축일의 새벽 성무일도 1.초대송 후렴도, 2.찬미가도, 3.즈카르야 후렴도 아름다웠습니다.
1.“탄생하신 그리스도께서 오늘 복되신 스테파노를 월계관으로 꾸미셨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
2.“순교자 스테파노 기쁜축일을, 모두다 정성다해 경축하세나
주님을 위한투쟁 목숨을바쳐, 최초로 승리빨마 얻어냈도다”
3.“첫 순교자인 스테파노에게 천국문이 열리고, 그는 승리의 월계관을 받았도다.”
내용 모두가 순교 영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합니다. 순교영성은 우리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영성이요 1-2세기는 순교영성의 세기라 할만큼 무수한 순교자들을 배출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순교를 열망했고 자발적 거룩한 사랑의 순교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라 말합니다.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살아서도 순교입니다. 제 주변에는 자발적 사랑으로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말그대로 살아 있는 순교자들입니다. 연옥같은 환경중에도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우리가 경축하는 순교축일은 비단 기념, 기억할뿐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에서 순교적 삶을 살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분발하게 합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인류사는 전쟁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는 야만의 전쟁입니다. 문명의 야만시대의 역설을 보여주는 전쟁이요, 인간 무지의 적나라한 표현이 전쟁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삶은 영적전쟁이라 일컫곤 합니다. 영적전쟁에 영적전사, 영적승리란 주제는 제 초창기 수도사제 시절부터 강론에 참 많이 인용됐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바로 순교자들의 후예이자 순교영성을 살아가는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인 우리 믿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 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영적전쟁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인 것입니다. 그러니 결코 영적 전의戰意를, 영적 투지鬪志를 잃지 않고 하루하루 분투奮鬪의 노력을 다해 영적훈련에 전념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영적전의를 새로이 하는, 제가 참 좋아하는 자작 애송시, “담쟁이”를 나누고 싶습니다. 25년전 쓴 시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여 자주 인용되는 시입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들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定住의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루
하늘 향해 타오를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이렇듯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가 되어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초록빛 열정으로, 초록빛 영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순교영성의 사람들이요 순교성인들의 후예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신자들에게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참으로 고맙고 자랑스런 순교영성의 유전자 DNA입니다.
이런 순교자의, 순교영성의 모범이 바로 오늘 경축하는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입니다. 순교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은총, 성령의 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어려운 상황중에도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때 아버지의 영이, 성령이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스테파노의 적대자들은 은총과 능력이,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를 당해낼 수 없었다 전합니다. 참으로 순교영성의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자 동시에 인내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지극한 인내로 참아견디는 이에게 영적승리의 구원이 주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역경중에도 진인사대천명, 노력을 다하며 인내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바로 순교영성이요 이에 성령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형제들의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성규72,5)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사랑의 성령, 사랑의 전사, 사랑의 순교자”로서의 진면목이 성 스테파노의 임종어를 통해서도 환히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짐으로 순교의 죽음을 맞이할 때 그의 임종어는 그대로 사랑의 주님을 닮았고 한없는 감동을 줍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주님의 섭리는 참 오묘합니다. 순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 된다 합니다. 주님은 바로 순교자 스테파노에 이어 사울을 예비하십니다. 적대자들이 돌을 던질 때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 발 앞에 두었고 사울은 시종일관 스테파노 순교장면을 체험합니다. 장차의 사도 바오로, 사울은 내심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며 결국은 회심에 이르게 하는 동인動因이 되었음을 봅니다. 스테파노는 순교의 죽음을 끝난 듯 하지만 사울은, 사도 바오로가 되어 그 뒤를 이음으로 하느님의 일은 계속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 순교적 삶에 충실함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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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령을 따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배척과 억압이
삶의 길일 때
한결같이
고루 보듬으시는
성령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거짓과 침묵이
삶의 길일 때
한결같이
진실을 외치시는
성령의 목소리를
나의 목소리로
불의와 변절이
삶의 길일 때
한결같이
곧게 나아가시는
성령의 발걸음을
나의 발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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