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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역사 속 '인어이야기' ]
[해동역사(海東繹史)]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를 서술한 한국의 역사서. 신활자본. 85권 6책.
조선 정조․순조 때의 사학자(史學者) 한치윤(韓致奫)이 편술한 본편 70권과 그의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보충한 속편 15권 6책으로 되어 있다.
중국사서 523종, 일본사서 22종, 한국의 기본서 등 550여 종의 인용서적을 참고로 하였다.
본편 70권의 권 1~16은 세기(世紀)로 단군 이후 고려까지의 역대 왕조를 편년체(編年體)로 서술하였다.
권 17은 성력지(星曆志),
권 18~21은예지(禮志),
권 22는 악지(樂志),
권 23은 병지(兵志),
권 26~27은 물산지(物産志),
권 28은 풍속지(風俗志),
권 29는 궁궐지(宮闕志),
권 30~31은 관씨지(官氏志),
권 32는 석지(釋志),
권 33~41은 교빙지(交聘志),
권 42~59는 예문지(藝文志),
권 60은 숙신씨고(肅愼氏考),
권 61~66은 비어고(備禦考),
권 67~70은 인물고(人物考)이다.
속편 15권은 모두 지리고(地理考)이다.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양장(洋裝) 4책으로 간행하였고, 또 1913년 광문회(光文會)에서 한장(漢裝) 6책으로 간행하였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40권 - 교빙지(交聘志)8, 해도(海道)편]
- 견이기(甄異記) -
○ 대제(待制) 사도(査道)가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
날이 저물어 어느 산에 정박하여 머물다가 모래밭을 바라다 보니, 붉은 치마를 입고 양쪽 어깨를 드러낸 채 머리는 산발을 한 어떤 여인이 있었는데, 팔꿈치 뒤에는 희미하게 붉은 지느러미가 나 있었다.
이에 사도가 뱃사람에게 명하여 상앗대로 물속으로 밀어 넣어 부인의 몸이 손상되지 않게 하였다.
부인이 물을 만나 이리저리 자유롭게 움직여 보다가 몸을 돌려 사도를 바라보고 손을 들어 절하면서 감사해하고 그리워하는 듯한 모습을 하다가 물속으로 들어갔다.
뱃사람이 말하기를, “제가 바닷가에 살지만 이런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사도가 말하기를, “이것은 인어(人魚)이다. 능히 사람과 더불어 간통하는데, 물고기이면서 사람의 성질을 가진 것이다.” 하였다.
《견이기(甄異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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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담 문학의 효시, 유몽인 저술의 '어우야담 (於于野談)']
유몽인 (柳夢寅 1559~1623)
조선조 중기의 문장가. 자는 응문(應文)이고 호는 어우(於于), 간암(艮庵), 묵호자(默好子)이다.
1589년(선조 22)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인조반정 때 역적으로 몰려 1623년에 아들과 함께 처형당했으며, 1794년(정조 18년) 신원되었다.
시호는 의정(義貞)이다. 그의 문장은 제재와 구상이 독창적이고, 의경이 참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우야담(於于野談)
이 책을 편찬한 의도는 연산군 이래 야기된 정치적 혼란과 임진왜란 이후의 사회적 난맥으로 인하여 형성된 풍부한 야담을 팔도어사 등을 역임하면서 많이 채집 할 수 있었고,
전란의 참혹함을 겪으면서 사회적 모순에 눈뜬 민중들과 접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야담으로 기술하려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또 어려운 정치적 상황으로 은둔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처한 이러한 여건으로 인하여 어우야담을 저술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유몽인은 논평을 통해서도 편찬 의도가 드러나는데, 문학적인 흥미를 지니면서도, 역사 기술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는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기술하고자 했고,
독자들에게 흥미 있는 이야기거리를 제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들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도록 하려는 교훈적 의도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어우야담(於于野譚)에 나오는 인어(人魚) 이야기]
김담령(金聃齡)이 흡곡현(강원도 통천군의 옛이름)의 현령이 되어 일찍이 해변에 있는 어부의 집에서 묵은 적이 있었다.
어부에게 무슨 고기를 잡았느냐고 물으니 대답하였다.
"어떤 백성이 낚시를 하다 인어 6 마리를 잡았는데, 그 중 둘은 창에 찔려 죽었고, 나머지 넷은 살아 있습니다
나가보니 모두 네살 난 아이 같았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고왔으며, 콧마루가 우뚝 솟아 있었고, 귓바퀴가 뚜렸했으며, 수염은 누렇고, 검은 머리털은 이마까지 덮었으며, 흑백의 눈은 빛났으며, 눈동자는 노랬다.
몸은 옅은 적색이었으며, 혹은 온통 백색이기도 하였다.
등 위에 옅은 흑색의 문양이 있었으며, 사람과 같이 남녀의 생식기가 달렸고, 손바닥과 발바닥의 한가운데 주름살 무늬가 있는 것, 무릅을 껴안고 앉는 것까지 모두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사람과 대하여 있어도 별 다름이 없었는데 흰 눈물을 비처럼 흘렸다.
김담령이 가련하게 여겨 어부에게 놓아주자고 청하니 어부가 아까워하며 말했다.
"인어에게서 기름을 취하면 무척 품질이 좋아 오래되어도 상하지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부패하여 냄새를 풍기는 고래 기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지요"
김담령은 인어를 빼앗아 바다로 돌려보내니, 마치 거북이가 유영하는 것처럼 헤엄쳐갔다.
김담령이 이를 무척 기이하게 여기니, 어부가 말했다.
"큰 인어는 사람크기만 한데, 이들은 작은 새끼일 뿐이지요"
일찍이 들으니 간성(강원도 고성)에 사는 어부가 인어 한 마리를 잡았는데
피부가 눈처럼 희고 여자같은지라 장난을 치니까, 인어는 마치 견권(缱绻)한 정이라도 있는 것처럼 즐겁게 웃었고, 마침내 바다에 놓아주니 갔다 돌아오기를 세차례 반복하더니 갔다고 한다.
내가 일찍이 고서를 보니 '인어 남녀는 모습이 마치 사람과 같아, 바닷가 사람들이 그 암컷을 잡으면 못에 기르며 더불어 교접하는데 마치 사람 같다'하여 남몰래 웃었는데, 동해에서 그것을 다시 보게 되었네.
이 밖에도 한국의 남해안 일대에는 인어를 보았거나, 인어와 인간 남자가 혼인했다는 전설과 민담이 많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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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 낭간 설화]
옛날 평양 남문 밖에 이진수라는 가난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대동강에서 낚시를 하며 아내와 어린 딸 낭간과 함께 입에 풀칠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날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에서 배를 띄우고 낚시를 하고 있는데, 바다가 갈라지며 웬 미인이 나와 그를 데리고 바닷속 용궁으로 들어간다.
용궁에서 온간 산해진미와 보물, 아름다운 여인들에 둘러싸여 며칠동안 사치스러운 대접을 받고, 그를 데려온 여인은 먹으면 불로장생하는 인어고기 를 주고 육지로 보내준다.
집에 돌아온 이진수는 인어고기를 감춰둔 뒤, 아내와 딸에게 용궁에서 보고 듣고 먹은 것들에 대해 들려준다.
이후 평소와 같이 어부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진수의 딸인 낭간이 우연히 숨겨놓은 인어고기를 발견하고 전부 다 먹어치웠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진수 부부는 점차 늙어갔지만, 낭간은 점점 아름다움을 더해가며 이윽고 평양 제일가는 미인으로 자라났다.
낭간의 미모는 널리 알려져 뭇 사내들의 흠모를 받았으나, 낭간의 혼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할 때 쯤 '낭간이 인어고기를 먹은 요부이며, 그녀와 함께 살면 제 명을 못 채우고 죽을 것이다.'라는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해, 아무도 청혼하려는 이가 없었다.
그 뒤 부부가 노환으로 세상을 뜬 다음 낭간은 지아비를 평생 구하지 못하느니 뭇 남자들을 상대하겠다
결심하고 평양에서 수많은 남자들을 만나기 시작하나 그녀와 만난 남성들은 허약해지면서 희생당한 수가 삼천에 이르렀다.
120살이 되던 해에 낭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죄를 사하고자 불교에 귀의하면서 비구니가 되어 모란대 앞에 작은 암자를 세우고 30년동안 기도를 드린 뒤, 자신 때문에 죽은 남자들을 성불시키기 위해 전국 방방곳곳의 영지와 영산을 참배하며 방랑했다.
그녀가 200살이 되던 해 모란대 암자에 돌아왔으나, 젊고 아름다운 비구니가 암자에 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모든 남자들이 그녀를 보러 애를 쓰자 낭간은 더이상 세상 남자들을 괴롭히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300살 후에 다시 산에 들어갔으며, 그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한국의 인어 전승이 대체로 어부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 바다를 지키는 수호신이나 인어공주 등, 풍요롭고 낭만적인 모습으로 묘사되는 데에 반해, 인어고기에 대한 묘사와 인어로 인해 남성들이 불행해진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의 인어전설과 유사한 점이 여러모로 많은 설화...
묘하게도 이 설화의 실존인물로 추정되는 사람이 한명 있다. 생몰연대 불명인 18세기 평양의 기생이자 화가인 죽향인데, 이 여인은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많은 명사와 교류했고, 묵죽을 잘 그렸으며, 원추리나 개양귀비, 금낭화 소재는 조선 초부터 유행하던 그림들을 답습한 자취가 있다.
또 어여쁘고 젊은 모습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이 기생의 호가 바로 낭간이며, 다른 별호가 용호어부(蓉湖漁夫), 즉 연꽃호수의 어부라는 뜻이다.
자신이 인어공주임을 이렇게 표현해 놓은 것일까...설화의 내용을 생각하면 상당히 묘하다.
어쩌면 지금도 산천 한켠에서 그 자태를 숨기도 있을지도...
그녀가 지은 시 한수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병에서 다시 일어나 봄 이미 저문 걸 몰랐는데
작은 창 앞에 복사꽃도 다 떨어졌네...'
[죽향의 그림 - 백양노인법, 화접도] - 국립중앙박물관 -
국립중앙박물관에 그녀의『화훼초충첩』13폭이 소장되어 있고,
그녀의 시 한 수가 『풍요속선』에 전하고 있다.
실버들 천만 가지 문 앞에 휘늘어지고 (千絲萬縷柳垂門)
구름인 듯 인가는 보이지 않는데 (綠暗如雲不見村)
문득 목동이 피리 불며 지나가네 (忽有牧童吹笛過)
강 위에 물안개 노을에서 피어오르누나 (一江烟雨自黃昏)
이 시가 추사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추사의 시와 연결시켜 읽어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시상이 보통을 넘는다.
죽향은 대동강변 조금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온통 실버들이 강마을을 가렸다.
휘들어진 초록 주렴 새로 죽향이 밖을 내다보고 있다.
문득 피리를 부는 한 사나이가 지나가고 있었다.
노을 속에서 뽀얀 물안개가 강 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 속의 남자는 추사라도 좋고, 어느 누구라도 좋다.
높이 솟은 정정한 저 대나무 일념향이라 (日竹亭亭一念香)
노랫소리가 녹심에서 길게도 뽑혀 나네 (歌聲抽出錄心長)
장보는 벌들이 꽃 훔칠 기약 찾고자 하나 (衙蜂欲覓偸花約)
높은 절개라 한들 어찌 엉큼한 마음 품을 수 있을까. (高節那能有別腸)
죽향은 조선에서 알려진 여성화가로는 신사임당에 이어 '넘버 투'쯤 되는 대단한 여인이다.
특히 19세기 전반까지 활약했던 예술가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 추사 김정희와 살짝 염문을 뿌렸고, 추사의 제자이자,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자하 신위도 그녀의 묵죽첩에 제시(題詩)를 써줄 정도로 잘 나가는 여류였다.
그녀가 남긴 그림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화조화훼초충첩을 비롯해 몇 개의 소품류가 보인다.
붓놀림이 섬세하고 색깔 사용이 화사하여 여성적인 센스가 돋보이기는 하나, 그녀의 작품들을 걸작으로 꼽는 이는 별로 없는 편이다.
장미와 모란, 연꽃을 그린 것들은 화본(花本)을 충실히 옮긴 것들이고 원추리나 개양귀비, 금낭화 소재는 조선 초부터 유행하던 그림들을 답습한 자취가 있다.
19세기 명사들을 매료시켰던 것이, 빼어난 인물이나 시적 재능 만이 아니라, 회화 솜씨도 포함된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놀랍고 개성적인 작품이 유실되었거나 숨어있을 것이라고 본다.
백양노인의 법식(法式)으로 그렸다는 화접도(花蝶圖)는 하늘거리는 꽃의 동세(動勢)와 거꾸로 날개를 돋운 나비의 비상이 생생하면서도 독창적인 느낌이 있다. 꽃 아래 자잘한 민들레류가 더불어 피어나 있는 것도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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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봉도 인어전설]
경기도 옹진군 북도면 장봉출장소에 배가닿으면 처음 눈에 띄는 인어상이 있다.
영종도 인천 국제공항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 장봉도에 만들어져 있는 인어상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최씨성을 갖인 어부는 이곳 장봉도에서 고기를 잡아서 생활을 하는 어부였는데, 어느때부터인지는 몰라도 흉어가 계속되고 매일같이 그물을 올려보지만, 잡히는 고기는 한마리도 없어서 살아가기가 매우 어려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때나 마찬가지로 그물을 끌어올리던 최씨어부는 그물이 올려지는 촉감이 뭔가 큰고기가 잡힌듯 하였다.
무엇인가 큰고기가 잡힌듯 묵직하고도 꽉찬느낌의 그물을 끌어올린 어부는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다.
그것은 그물안에 걸려 있는것이 윗쪽 상반신은 사람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름다운 여인으로 비록 말은 없었지만 살려달라는 애원하듯 바라보는 그 사람고기가 무척 불쌍하게보여 조심스럽게 바다로 되돌려주게 되었다.
그리고 이튿날도 여늬때와 마찬가지로 그물을 올린 어부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도 잡히지 않던 고기가 그물가득히 들어있는 것이었다.
헌데 이상한 것은 그날 하루뿐만 아니고, 이튿날도 또 그 이튿날도 계속해서 그물 가득하게 고기가 잡히는 것이 아닌가?
어부는 필시 놓아준 사람고기가 살려준데 대한 고마움을 고기를 많이 잡히도록 표시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웃어부들에게 이 이야기를 알리게되어 옹진군에서 인어상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인어이야기는 서양에서 흔히 전하지만 보았다는 전설이었지 직접 잡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장봉도 인어는 사람이 직접 잡았다는 이야기로 서양의 인어이야기보다 한발더 앞서나간 전설이라 할 수 있다.
[장봉도 인어공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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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께 전설]
(께는 순 우리말로 해변이라는 뜻)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의 거문도 사람들은 매일 새벽 1시에서 3시경 사이에 주로 신지께여 부근으로 삼치 미기리(줄 낚시)를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흐린 날은 틀림없이 조금 먼 곳에서 보면 물개 같은 형상이고, 가까운 곳에서 볼 때는 분명히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팔과 가슴이 여실한 여인이 나타났다고 한다.
하체는 물고기 모양이었지만 상체는 사람 모양을 한 하얀 인어가 분명했다고 한다.
특히, 달빛 아래서의 모습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고 한다. 섬사람들은 그 인어를 신지께, 신지끼 혹은 흔지끼라고 불렀다.
신지께는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의 거문도, 동도, 서도 세 섬으로 둘러싸인 내해에서는 나타난 적이 없고, 녹사이 같은 섬 밖에서만 출현했다고 한다.
때로는 거문도 죽촌마을 넙데이 해안의 절벽 위에도 나타났다고 하며, 백도 해변에도 자주 출현했다고 한다.
해상에 나타난 신지께는 반드시 배를 쫓아오고, 절벽 위에서는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돌멩이를 던져 훼방을 놓았다고 한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바다에 나갔다가는 반드시 큰바람을 만나거나 해를 입었다고 한다.
신지께가 나타난 이후에는 틀림없이 풍랑이 일거나 폭풍우가 몰아쳤던 것이다.
[거문도 신지께, 인어공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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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섬 인어공주]
해운대 동백섬에 있는 인어공주 동상.
동백섬에는 먼 나라에서 시집온 인어공주에 대한 지역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녀는 용궁인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나란다국'의 '황옥공주'로서,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열리고, 땅이 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득한 옛날. 동백섬에는 무궁나라가 있었다.
원래 이 나라에는 다스릴 임금이 없었지만 하늘에서 특별히 보내준 금상자 속에 황금알을 깨고 나온 어린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가 10여 일 만에 성인으로 자라 왕위에 올라 국명을 '무궁'이라 지었다.
하늘의 은혜로 왕이 되었다 하여 '은혜왕'이라 불리면서 이 나라는 날로 번창해 나갔다.
그러나 임금에겐 마땅히 왕비가 없었다. 신하들은 결혼할 것을 원했으나 은혜왕은 이를 사양하고 하늘이 보내줄 왕비만을 기다렸다.
당시 바다 건너에는 나란다국이 있었다. 이 나라는 바닷속에 있었던 수정나라[9]의 후손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곳 사람들의 몸 끝에는 고기 지느러미가 옷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나란다의 임금과 왕비 사이에 첫 딸이 태어나자 선례에 따라 공주의 이름은 부모의 나라인 수정나라에 가서 지어 와야 했다. 공주를 모시는 특사는 거북이가 맡았다.
그 거북이는 옛날 용왕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토끼를 잡아갔다가 놓쳐버린 바로 그 거북이로, 이후 수정나라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수정나라의 대왕대비는 나란다의 공주 이름을 '황옥(黃玉)'이라 지었다. 황옥공주는 선녀처럼 아름답게 자랐으며, 나란다 임금과 왕비는 시집 보낼 신랑감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란다국 임금과 왕비의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 바다 건너 무궁나라의 은혜왕에게 시집을 보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무궁나라의 은혜왕과 나란다의 황옥공주가 결혼해 부부가 되었으니, 황옥왕비가 머문 곳의 궁궐이 바로 동백꽃이 활짝 피는 동백섬이었다.
황옥왕비는 무궁나라 동백섬에 와서 수정나라 대왕대비인 할머니가 일러준 대로 겹겹이 겹쳐 입은 옷 중 제일 깊은 속치마를 벗어 산신령께 바치니, 저녁 노을빛에 반짝이는 속치마는 바람에 나부끼며 하늘 멀리 날아가고 갑자기 발이 갖추어진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황옥왕비는 수정나라를 매우 그리워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옆에서 황옥을 모시고 있던 거북이는 황옥의 할머니가 선물한 황옥구슬을 황옥왕비에게 드리며, 매 달 보름달이 뜨면 이 구슬을 꺼내 달을 비춰보라고 일러주었다.
황옥왕비는 거북이 시킨 대로 황옥구슬로 달을 비춰보니 일순간 눈앞에는 꿈속에서도 잊지 못하던 수정나라와 나란다국의 아름다운 달밤이 나타났다.
그날 밤 황옥왕비는 고국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바로 그때 황옥왕비에게 큰 변화가 나타났다. 황옥왕비가 갑자기 시집 오기 전 인어공주의 모습으로 변해 바닷속을 마음대로 헤엄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가끔 목격한 사람들 사이에서 동백섬 앞바다에는 인어가 있다는 풍문이 퍼져 오늘날까지도 전해져오고 있다.
여기서 황옥공주의 고향인 나란다는 고대 인도의 불교 대학인 날란다(Nālandā)에서 따온 것으로 보여, 설화의 내용이 가야와 인도의 교류와 불교 전파를 뜻한다는 해석이 있다.
그리고 이 전설은 고대 건국신화의 일부로서, 여기의 무궁나라는 가야, 은혜왕은 김수로왕으로, 황옥공주는 그의 부인인 인도 아유타국의 허황옥 공주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는 게 향토사학자들의 견해다.
해운대 동백섬에 있는 인어상이라는 지리적 이점과 특유의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몽환적인 스토리 덕분에 한국의 인어 설화 중 가장 메이저한 축에 든다.
[김수로왕과 허황옥공주]
[수로왕릉 정문(納陵)에 새겨진 신어상(神魚像).
가락국 시절의 국장(國章)이다]
[해운대 동백섬 황옥공주상]
강이나 호수 또는 바다의 동물 중에 모습이 사람과 비슷하거나 내는 소리가 아이 우는 소리와 같다고 하여 인어라고 불린 것들도 있었다.
중국의 이시진(李時珍)은 ≪본초강목≫에서 제어(魚)를 인어· 해아어(孩兒魚)라고도 하고, 예어(鯢魚)를 인어·납어(魶魚)·탑어(鰨魚)라고도 한다고 해설한 다음 기미(氣味)와 주치(主治)도 적었다.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 玆山魚譜≫]
정약전(丁若銓)은 ≪자산어보 玆山魚譜≫에서 인어 항목을 두어 “인어는 속명이 옥붕어(玉朋魚)이고 모양이 사람을 닮았다.”라고 한 다음, 살피건대 인어의 설에는 대체로 다섯 갈래가 있다고 하고, 여러 가지 문헌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해설하였다.
① 제어:강이나 호수에 살며 모양과 색이 모두 점외(鮎鮠:메기를 말함)와 같고, 그 볼(아가미 뚜껑을 말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아이 우는 소리와 같기 때문에 인어라고 한다.
② 예어:메기를 닮았고 네발이 있으며 앞은 원숭이를 닮았고, 뒤는 개를 닮았으며 소리가 어린아이 우는 소리와 같고, 큰 놈은 몸길이가 8, 9자가 된다.
산골 물에서 살며 모양이나 소리가 모두 제어와 같지만 이와는 달리 나무 위로 올라갈 수 있다.
③ 역어(○):모양이 메기와 같고 네 발이 있으며 꼬리가 길고, 소리는 어린아이를 닮았으며 대나무에 잘 오른다.
또한 역어는 곧 바닷속의 인어로서 귀·입·코·손·손톱·머리를 모두 가지고 있으며, 살갗이 희기는 구슬과 같고, 비늘이 없고, 가는 털이 있다.
오색의 머리털이 말꼬리와 같고 길이가 5·6자가 되며, 몸의 길이도 5·6자가 된다. 바다 가까이 사는 사람이 잡아서 못에서 길렀더니, 암수가 교합하는 것이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④ 교인(鮫人):물 속에 있으며 물고기와 같고, 베틀로 베를 짜는 일을 버리지 않으며, 눈이 있어 잘 우는데 울면 눈물이 곧 구슬이 된다.
⑤ 부인인어(婦人人魚)사중옥(謝仲玉)은 부인이 물 속에 드나드는 것을 보았는데, 허리 이하는 모두 물고기였으니, 곧 인어였다고 한다.
또 사도(査道)가 고려에 사자로 갔을 때 바닷속에서 한 부인을 보았는데, 붉은 치마를 입고 양어깨를 내놓고 쪽진 머리카락은 엉클어져 있었고, 볼 뒤에는 붉은 갈기가 약간 있었다.
명하여 물 속으로 돌려보내 살려주자 손을 들어 절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물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 두 부인설(婦人說)은 앞에서 말한 제어, 예어, 역어, 교인과는 다른 것이다.
또한, 정약전은 “지금 서남해에 두 종류의 인어가 있는데 , 그 하나는 상광어(尙光魚)이며, 모양이 사람을 닮아 두 개의 젖을 가진다. 본초(本草)에서 말하는 해돈어(海豚魚)이다.
다른 하나는 옥붕어이며, 길이가 8자나 되며, 몸은 보통 사람과 같고, 머리는 어린아이와 같으며,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치렁치렁하게 아래로 드리워졌고, 하체는 암수의 구별이 있어 사람의 남녀와 서로 매우 닮았다.
뱃사람들은 이것을 몹시 꺼려 혹시 어망에 들어오면 불길하다 하여 버린다. 이것은 틀림없이 사도가 본 것과 같은 종류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상광어는 돌고래류가 틀림없지만 옥붕어는 물범인 듯하나 확실하지 않다. 이 두 가지는 포유류인데 옛사람들은 어류로 오인하였다.
우리 나라 해역에는 없지만, 바다 소목의 포유동물인 듀공(dugong:홍해·인도양·서태평양 해안에서 삶)이나 바다소[海牛:서대서양에 분포]가 있는 지방에서는 이것들을 보고 인어라 하였을 것이다.
참고문헌
『본초강목(本草綱目)』
『자산어보(玆山魚譜)』
『동물분류학』(김헌수·이창언·노분조, 집현사, 1981)
['산해경'에 나오는 저인(氐人)이라고 표현된 남자 인어]
[황해도 안악군 대추리, 고구려 안악1호분 벽화의 염유어 (사람의 악몽을 퇴치한다고 함)]
[홍산문명 흑피옥의 물고기여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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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나라 전래 전설속에는 인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고 또 각 지방에도 인어상이 많이 있음을 압니다.
옛 역사에도 인용되는것을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