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강성남
할머니, 들어가 계세요
오냐, 그때까지 썩지 않고 있으마.
썩지 않을 만큼의 추위가 방치된 노인
온도조절 장치가 소용없다
집을 비울 때마다 번번이 플러그를 뽑으신다
전화 받지 않는 아들에게 재다이얼을 누른다
속을 잘 닫지 않아 눈물이 샌다
텔레비젼 켜놓고 주무시는 냉장고
들판 건너온 바람이 너른집을 웅웅 돌린다
코드 빼면 죽어요, 할머니
도청에서 나온 복지사가 락스로 속을 닦는다
저물녘이면 문밖으로 귀 기울이는 냉장고
손자들이, 명절 때 모셔간 노인을 다시 보관한다
한번 닫아놓고 몇 달 동안 열어보지 않는다
온도를 낮춰도 얼지 않는 마음 하나
바깥은 눈이 쌓여도 가슴엔 히터가 돈다
달빛이 드나들며
썩었나, 썩지 않았나 확인한다
당신과 듣는 와인춤/ 강성남
오른손 검지는 가장 깊은 음역의 시다
그가 그녀 '파' 건반을 지그시 누른다
잠들었던 바다가 천천히 눈을 뜬다
바닷속엔 그가 연주하다 만 그녀 음색들이 산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물의 건반들이 하나씩 일어선다
한 옥타브 두 옥타브 왼손과 오른손이 교차한다
그가 그녀 내면 깊숙이 숨을 불어넣는다
잃어버린 말들이 발꿈치를 들고 스텝을 밟는다
무수한 밀어들이 숨어 있던 기억들을 조율한다
심해에 잠들었던 물고기들이 군무를 춘다
갇혔던 말들이 파! 숨비소리를 내며 물 밖으로 솟구친다
내 손엔 수만 개의 금맥이 산다
우리는 서로의 손끝에서 우주를 왕래한다
ㅡ시집 [당신과 듣는 와인춤] 북인. 202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