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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척비린(蕩滌鄙吝)
마음속에서 비루하고 인색함을 말끔히 씻어낸다는 뜻으로, 도량이 좁고 인색하고 비루한 마음을 씻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蕩 : 쓸어버릴 탕(艹/12)
滌 : 씻을 척(氵/10)
鄙 : 다라울 비(阝/11)
吝 : 아낄 린(口/4)
출전 :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발(跋)
이 성어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발(跋)에 나오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跋(발)은 책의 뒤끝에 쓰는 글로 후기(後記)를 말한다.
右陶山十二曲者, 陶山老人之所作也.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은 도산 노인이 지은 것이다.
老人之作此, 何爲也哉.
노인이 이 곡을 지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吾東方歌曲, 大抵多淫哇不足言.
우리 동방의 노래는 대부분 음란하여 족히 말할 것이 없다.
如翰林別曲之類, 出於文人之口, 而矜豪放蕩, 兼以褻慢戲狎, 尤非君子所宜尙.
한림별곡(翰林別曲)과 같은 유는 글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으나, 교만하고 방탕하며 겸하여 점잖지 못하고 장난기가 있어, 더욱 군자가 숭상해야 할 바가 아니다.
惟近世有李鼈六歌者, 世所盛傳, 猶爲彼善於此, 亦惜乎其有玩世不恭之意, 而少溫柔敦厚之實也.
오직 근세에 이별(李鼈)의 6가(歌)가 세상에 성대하게 전하니 오히려 그것이 이보다 좋다고는 하나, 그래도 세상을 희롱하고 불공(不恭)한 뜻만 있고, 온유돈후(溫柔敦厚;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돈독하고 두터운 것이 시의 가르침)한 내용이 적은 것을 애석하게 여긴다.
老人素不解音律, 而猶知厭聞世俗之樂.
노인은 평소 음률을 알지는 못하나 그래도 세속의 음악은 듣기를 싫어하였다.
閒居養疾之餘, 凡有感於情性者, 每發於詩.
한가히 살면서 병을 돌보는 여가에 무릇 정성(情性)에 감동이 있는 것을 매양 시로 나타내었다.
然今之詩異於古之詩, 可詠而不可歌也.
그러나 지금의 시는 옛날의 시와는 달라서 읊을 수는 있어도 노래하지는 못한다.
如欲歌之, 必綴以俚俗之語, 蓋國俗音節, 所不得不然也.
만약 노래하려면 반드시 시속말로 엮어야 되니, 대개 나라 풍속의 음절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故嘗略倣李歌, 而作爲陶山六曲者二焉, 其一言志, 其二言學.
그래서 내가 일찍이 이씨의 노래를 모방하여, 도산 6곡이란 것을 지은 것이 둘이니, 그 하나는 뜻을 말함이요, 그 하나는 학문을 말한 것이다.
欲使兒輩朝夕習而歌之, 憑几而聽之, 亦令兒輩自歌而自舞蹈之, 庶幾可以蕩滌鄙吝, 感發融通, 而歌者與聽者, 不能無交有益焉, 顧自以蹤跡頗乖.
이 노래를 아이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익혀서 노래하게 하여 안석에 기대어 듣기도 하고, 또한 아이들이 스스로 노래하고 춤추고 뛰기도 하게 한다면 거의 비루한 마음을 씻어 버리고, 감화되어 분발하고 마음이 화락해져서 노래하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 유익함이 있을 것이라 본다.
若此等閒事, 或因以惹起鬧端, 未可知也, 又未信其可以入腔調諧音節與未也, 姑寫一件, 藏之篋笥, 時取玩以自省, 又以待他日覽者之去取云爾.
그러나 나의 처신이 자못 세상과 맞지 않으니, 이 같은 한가한 일이 혹시나 말썽을 일으키는 단서가 될는지 알 수 없고, 또 이 곡조가 노래 곡조(腔調)에 들어가며, 음절에 화합할지 그렇지 않을지를 스스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당분간 한 부를 써서 상자에 넣어 놓고, 때때로 내어 스스로 반성해 보고 또 훗날에 열람해 보는 자의 취사선택을 기다릴 뿐이다.
嘉靖四十四年歲乙丑暮春旣望, 山老, 書.
가정년 을축 늦봄 16일(旣望)에 도산 노인(山老)이 쓴다.
🔘 도산십이곡 1
이런달 엇더하며 뎌런달 엇더하료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러타 엇더하료
하믈며 천석고황(泉石膏肓)을 곳텨 무슴 하료.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겠는가?
시골에만 묻혀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이 이렇게 산다고 해서 어떠하리오.
하물며 자연을 끔찍히도 사랑하는 이 병을 고쳐서 무엇하겠는가?
🔘 도산십이곡 11
청산(靑山)은 엇뎨하야 만고(萬古)애 프르르며,
유수(流水)난 엇뎨하야 주야(晝夜)에 긋디 아니난고.
우리도 그치디 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호리라.
청산은 어찌하여 항상 푸르며,
흐르는 물은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칠 줄을 모르는가
우리도 그치지 말아서 오래도록 높고 푸르게 살아가리라.
⏹ 다음은 정민 교수의 世說新語 탕척비린(蕩滌鄙吝)의 글이다.
나가노 호잔(豊山長野)의 송음쾌담(松陰快談)에 검소함(儉)과 인색함(吝)의 구별을 묻는 객의 질문이 나온다. 그는 두 구절을 인용해 그 차이를 설명했다.
먼저 명나라 진록(陳錄)의 '선유문(善誘文)'의 구절이다. “검소함으로 자신을 지키는 것을 덕이라 하고, 검소함으로 남을 대접하는 것은 비(鄙)라고 한다(處己以儉謂之德, 待人以儉謂之鄙).”
검소함이 자신에게 적용되면 덕이 되지만, 남을 향하면 비루하게 된다는 말이다. 자신에게는 마땅히 엄정하고 검소해야 하나, 남에게 베풀 때 그렇게 하면 인색한 짠돌이가 된다는 말이다.
다시 조씨객어(晁氏客語)를 인용했다. “한위공(韓魏公)은 집안의 재물 쓰기를 나라 물건 쓰듯 해서 인색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증노공(曾魯公)은 관가의 물건 아끼기를 자기 물건처럼 했으니 진실로 검소하다고 말한다(韓魏公用家資如國用, 謂不吝也. 曾魯公惜官物如己物, 謂誠儉也).”
한위공은 자기 물건을 나라 물건 쓰듯 공변되게 베풀어서 인색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증노공은 나라 물건을 자기 물건처럼 아껴 써서 검소하다는 말을 들었다.
안 아낄 데 아끼고, 아낄 것을 안 아끼면 인색한 사람이 되고, 아낄 데 아끼면서 안 아낄 데 베풀 줄 알면 검소한 사람이라 한다. 제 물건에 발발 떨면 인색하단 소릴 듣지만, 나라 물건이나 회삿돈을 제 것인 양 쓰면 비루하고 몹쓸 인간이 된다.
퇴계는 도산십이곡발(陶山十二曲跋)에서 우리나라 가곡의 흐름을 짚었다.
한림별곡(翰林別曲) 같은 작품은 긍호방탕(矜豪放蕩) 즉 마구 뽐내고 방탕한 데다, 설만희압(褻慢戲狎) 곧 제멋대로 장난치고 함부로 굴어서, 군자가 숭상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이별(李鼈)의 육가(六歌)는 세상을 우습게 보는 완세불공(玩世不恭)의 뜻이 있어 온유돈후(溫柔敦厚)의 실지가 부족하다.
그래서 자신이 ‘도산십이곡’을 지었는데 노래하고 춤추는 사이에 탕척비린(蕩滌鄙吝)의 마음이 생겨나서 감발융통(感發融通), 즉 느낌이 일어나 답답하던 것이 두루 통하게 되기를 희망했다.
답답한 세상이다. 탕척비린! 마음속에서 비루하고 인색함을 말끔히 세척해내자.
⏹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이황의 연시조(連時調)이다. 퇴계는 스스로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이별육가(李鼈六歌)를 모방해서 지었다고 밝히고, 아울러 전육곡(前六曲) 후육곡(後六曲)으로 나눈 후 전자를 언지(言志), 후자를 언학(言學)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도산십이곡의 주제가 지(志)와 학(學)임을 작가 자신이 천명한 것이지, 독자의 입장에서는 달리 파악할 여지도 있다.
언지(言志)의 지(志)는 성정의 올바름(性情之正)으로서 정감이 아닌 이성(理性)을 의미하고, 언학(言學)의 학(學)은 주자학의 심오한 이치이거나 혹은 배움의 자세와 태도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도산십이곡은 현대의 서정시와 동렬에 놓거나, 아니면 그같은 시각으로 접근하면 작품의 본질을 훼손시키기 십상이다.
퇴계는 도산십이곡발(陶山十二曲跋)을 지어 독자에게 그 시세계를 밝혔다. 그는 시를 창작한 것이 아니다. 가곡(歌曲)의 노랫말을 지었다.
동방가곡(東方歌曲)의 주제가 대체로 음란하고 건전하지 못한 점을 안타깝게 여겨서, 백성들이 남녀노소가 함께 불러도 좋을 건전가요를 보급시키고자 하는 의욕을 가졌다.
당시 가곡의 음란성은 물론이고 그 못지 않게 당대 현실을 지나치게 폄하하고 비판하는 주제의식에 대해서도 불만스러워 했다. 따라서 퇴계는 당시의 대중가요인 세속의 음악을 듣는 것을 꺼렸다.
도산십이곡을 완성한 후 아이들에게 익히게 하여 조석(朝夕)으로 노래부르게 했고,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울러 춤까지 추게 했다.
도산십이곡은 이를 노래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 모두가 정서가 순화되고 원만한 심성을 작게 하는 가곡이며, 마음속에 쌓인 찌꺼기를 씻어내어 온유돈후(溫柔敦厚)의 경지로 이끄는 힘이 있다고 퇴계는 생각했다.
도산십이곡에 대한 작자의 대단한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그는 동방가곡의 음란성과 한림별곡(翰林別曲) 류의 교만방자함과 이별육가의 세상을 비아냥거리는 따위의 성격을 지닌 당시 속악(俗樂)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우리의 가곡을 속악으로 인식한 것은 아악(雅樂)을 염두에 든 시각이다.
도산십이곡은 동양의 예악사상(禮樂思想)과 연결된 단가(短歌)의 가사(歌詞)이다. 퇴계는 조정(朝廷)의 아악이 아인 향당(鄕黨)의 가곡으로 도산십이곡이 자리 매김하기를 기대했고, 또 그 기대가 십분 충족되었을 뿐 아니라 시대가 진행됨에 따라 영남(嶺南)의 가곡으로 되었으며, 아울러 남인계(南人系) 사인(士人)들의 대표적 가곡으로 발돋움했다.
도산십이곡은 명종(明宗) 20년(1565) 퇴계의 나이 65세에 완성된 만년의 작품이다. 원숙의 경지에 이른 대석학의 심오한 학문과 고매한 인격이 고도의 미적 구도 속에 용해되어 있다.
퇴계는 전육곡(前六曲) 언지(言志) 기사(其四)에 “유란(幽蘭)이 재곡(在谷)하니 자연(自然)이 듣디됴해, 백운(白雲)이 재산(在山)하니 자연이 보디됴해, 이듕에 피미일인(彼美一人)을 더욱 닛디 못하애”라고 노래했다.
퇴계의 은거지(隱居地) 도산은 은둔지(隱遁地)가 아니다. 임금님(彼美一人)을 그리워하는 인간의 연장 선상이다. 깊은 산 속 숲 속의 난초는 자기를 보는 사람이 있던 없든 간에 그윽한 향기를 발한다. 남들이 주변에서 자신을 보아쥐지 않는다고 해서 향기를 발하지 않은 법은 없다.
산마루를 넘나드는 흰 구름 역시 그렇게 있는 것이다. 심림(深林)의 난초와 산정(山頂)의 구름처럼 의연한 자세를 지닐 것을 당부하고 있다.
후육곡 기육(其六)의 “춘풍(春風)에 화만산(花滿山)하고 추야(秋夜)에 월만대(月滿臺)라, 사시가흥(四時佳興)이 사롬과 한가지라, 하말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야 어느그지 이슬고”에서 봄날 산을 뒤덮은 흐드러진 꽃들과 정대(亭臺)에 교교하게 비치는 달빛을 묘사하면서 물아일체(物我一體)를 구가했다.
사계절의 가흥이 사람과 같다라고 노래한 구절은 정호(程顥)의 시 추일(秋日)의 “사계절의 흥취가 사람과 같다(四時佳興與人同)”와 거의 흡사하다.
물아일체(物我一體)는 흔히 서정자아가 강호(江湖)의 미경(美景)에 몰입하는 경지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강호에 존재하는 갖가지의 자연물 하나하나는 모두가 그들 나름의 흥(興)이 있다는 인식은 고대의 만물유령(萬物有靈)의 사유(思惟)와 관계가 았다.
그러나 중세에 들어와서 모든 자연물에 있다고 여겼던 ‘영혼’을 배제하고, 그 자리에다 성리학적 ‘이(理)와 ’흥취‘를 넣었다.
위에 인용한 단가에 등장하는 꽃과 고기 등의 자연물도 작품 속에 나오는 사람과 함께 대등하게 이(理)를 가졌거나 또는 흥취를 공유하는 경지가 바로 물아일체이다.
연못에 뛰노는 고기와 하늘을 나는 솔개 등은 사람의 종속물이 아니고 대등한 독립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같은 외물인식(外物認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은 서양의 서정시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의 단가문학(時調)을 서양의 서정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학(言學)의 후육곡(後六曲) 기육(其六) “우부(愚夫)도 알며하니 긔아니 쉬운가, 성인(聖人)도 몯다하시니 긔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낫듕에 늙난주를 몰래라”에서 퇴계는 학문의 특성을 극명하게 밝혔다. “쉽고도 어려운 것이 학문이다”라는 속설(俗說)을 시로 형상하여, 스스로 어리석고 재주가 없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도 학문에 뜻을 두게 했다.
그러나 범부(凡夫)가 물색 없이 학문을 쉽게 생각하고 함부로 나대는 것을 막기 위해 성인(聖人)도 다하지 못할 만큼 광대무변함을 깨우치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마도 ‘학문’을 제재로 하여 쓴 시가작품 중에서 동서고금을 통틀어 도산십이곡을 따라잡을 작품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근래에 분방한 감성을 노래한 작품들을 무리하게 추켜세우고, 단아(端雅)한 이성(理性)을 형상한 시가들을 지나치게 폄하한 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온유돈후(溫柔敦厚)한 품격(品格)으로 창작된 도산십이곡은 현대에서도 재평가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도산십이곡은 한국의 시조, 즉 단가문학사(短歌文學史)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은 작품이다. 단가를 여흥(餘興)차원에서 격상시켜 정서 순화는 물론이고 진일보하여 교화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율곡(栗谷)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예(禮)와 악(樂)으로 백성(百姓)을 교화하고 이끌어 간다는 중세의 예악사상이 깔려 있다. 퇴계는 백성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건강한 민족가곡(民族歌曲)을 만들어야겠다는 사명감을 지녔다.
도산십이곡은 이같은 퇴계의 악무인식(樂舞認識)을 바탕으로하여 창출되었다. 퇴계는 도산십이곡 발문에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하고 춤추게했다(自歌而自舞)’라고 밝혔다.
도산십이곡을 노래할 때 추었던 춤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세속에 유행하는 춤과는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도산십이곡의 주제는 지(志)와 학문이다. 신바람 나는 정감도 아니고 이른바 남녀상열(男女相說)의 애정도 아니다. 이같이 딱딱한 주제를 형상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읽히고 있을 뿐 아니라 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퇴계가 창작했기 때문만은 아니고 작품으로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퇴계는 탁월한 미의식(美意識)을지녔다. 당시 범동양권의 주된 주제의식(主題意識)은 문이재도(文以載道)였다. 문학은 성리학적 도(道)를 형상해야 한다는 풍조는 조선조 사단(詞壇)의 주류였다. 이는 자칫 시가를 사변적인 도학의 도구로 전락시킬 위험이 뒤따른다.
퇴계는 이 같은 유가적 문예의식의 약점을 강호(江湖)의 미경(美景)을 매체로 활용하여 생경(生硬)에 흐를 소지를 제거했다. 성리학의 경우 퇴계는 주리론자(主理論者)이다.
그러므로 도산십이곡 역시 주리적 성정(性情)을 강호를 매개로 하여 형상한 단가로 규정할 수 있으며 조선조 시조문학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 요점 정리
* 작자 : 이황
* 연대 : 명종20년
* 종류 : 연시조
* 성격 : 교훈적, 관조적, 회고적, 예찬적
* 표현 : 반복법, 설의법, 대구법, 연쇄법
* 명칭 : 도산십이곡
* 구성 : 총12수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눔.
전반부는 언지(言志)로 자신이 세운 도산 서원 주변의 경관에서 일어나는 감흥을 읊었다.
1연 : 아름다운 자연에 순응하면서 순리대로 살아가려는 마음을 노래.
2연 : 아름다운 자연을 벗하여 살며 태평성대 속에 병으로 늙어 가는 작자의 모습을 노래.
3연 : 순자의 성악설을 반대하고 맹자의 성선설을 지지. 세상의 많은 영재들에게 순박하고 후덕한 풍습을 강조.
4연 : 벼슬자리를 떠나 자연을 벗하며 살아 도 임금을 그리워하는 정을 노래.
5연 : 자연을 멀리하는 현실 개탄.
6연 : 대자연의 웅대함에 완전히 도취된 작자의 모습을 노래.
후반부는 언학(言學)으로 학문 수양에 임하는 심경을 노래했다.
7연 : 독서 면학(勉學)의 즐거움과 그 여가에 산책하는 여유 있는 생활을 노래.
8연 : 인간으로서 진리 터득의 중요성을 노래.
9연 : 옛 성현들의 인륜지도(人倫之道)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니, 우리도 그 길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노래.
10연 : 젊을 때 학문에 뜻을 두었다가 수양의 정도(正道)를 버리고 벼슬을 지낸 자신을 후회하면서, 이제 깨달음을 가졌으니 늦지 않게 학문 수양에 힘쓰리라는 다짐에 노래.
11연 : 청산과 유수라는 자연의 영원 불변성을 소재로 하여, 그러한 자연을 닮아 변치 않는 지조 인품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과 아울러 교훈적인 의미를 노래.
12연 : 영원한 학문 수양의 길을 강조.
* 주제 : 자연 속에 묻혀 살고 싶은 소망과 학문의 길에 대한 변함 없는 의지
* 의의 : 한자어가 많아 생경한 감을 주지만, 강호가도의 대표적인 작품이고, 성리학의 대가가 시조를 즐겨 지었다는 것은 시조의 출발과 발전이 유가에 의해 이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동기 : 작자는 창작 동기가 '우리 나라의 시가는 음란하여 말할 것이 못된다. 문인들이 즐겨 부르는 '한림별곡' 역시 방탕하고 상스럽다. 근래에는 이별의 '육가'가 돌아다니나 좋지 못하여 안타깝다. 나는 음률을 잘 모르나 여가가 있으면 시를 짓는데 백성들이 부르게 하기 위하여 도산곡을 만든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자의 '무이점사'를 본떠 지었다고도 한다.
* 특징 : 학문에 대한 의지와 생경한 한자어가 많이 들어감
* 기타 : 아류작으로 광해군 때 장경세의 '강호연군가' 12수가 있다.
🔘 내용 연구
(제1곡) 자연에 살고 싶은 마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랴?
시골에 묻혀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이렇게 산다고 해서 어떠하랴?
작자가 자신을 시골에 묻혀 사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낮춰 나타내면서 그런 처지의 자신이 이렇게 산들 어떻겠느냐고 묻은 이 설의적 표현은, 안분지족의 자세를 나타낸 것이다.
더구나 자연을 버리고는 살수 없는 마음(자연 속에 묻혀 살겠다고 말하는 이 부분은, 표면적으로는 체념적인 자세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은연중에 자랑하고 있는 표현이다.
천석고황은, 연하고질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자연을 깊이 사랑하여 그 속에 살고자 하는 깊은 소망을 고질병에 비유하여 나타낸 것이다.)을 고쳐 무엇하랴?
(제2곡) 허물없는 삶의 추구
안개와 놀을 집으로 삼고 풍월을 친구로 삼아, 태평성대에 병으로 늙어가지만
이 중에 바라는 일은 사람의 허물이나 없었으면.
(제3곡) 순박하고 후덕한 풍습
예로부터 내려오는 순수한 풍습이 줄어 없어지고 사람의 성품이 악하다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거짓이다. 인간의 성품은 본디부터 어질다고[성선설] 하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므로 착한 성품으로 순수한 풍습을 이룰 수 있는 것을 그렇지 않다고 많은 슬기로운 사람(영재)을 속여서 말할 수 있을까?
(제4곡) 연군
그윽한 난초가 골짜기에 피어 있으니 듣기 좋아(후각을 청각으로 전이시킨 공감각적 표현이다. 후각의 청각화로 난초의 향기를 듣기 좋다고 표현)
흰눈이 산에 가득하니 자연이 보기 좋아
이 중에 저 아름다운 미인 한 사람(임금)을 더욱 잊지 못하네.
(제5곡) 자연을 등지고 있는 현실 개탄
산 앞에 높은 대가 있고, 대 아래에 물이 흐르는구나.(대구 표현)
떼를 지어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거든(갈매기는 평화로운 자연을 상징)
어찌하여 (현인이나 성자가 타는 )희고 깨끗한 말[망아지 駒 / 갈매기 鷗가 아님 ]은[어진 사람] 나로부터 멀리에 마음을 두는고.
(제6곡) 영원한 아름다운 자연
봄바람이 부니 산에 꽃이 만발하고 가을 밤에는 달빛이 누대에 가득하다.
사계절의 아름다운 흥취가 사람과 마찬가지로다.
하물며 물고기가 뛰고 솔개가 날며[시경 대아 '한록편'에서 따온 말로 고기와 하늘을 나는 솔개처럼 뛰어난 인재들이 가득하다는 뜻이다] 구름이 그늘을 짓고 태양이 빛나는[만물이 천성을 얻어 조화를 이룬 상태] 이러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제7곡) 학문하는 즐거움
천운대를 돌아 들어간 곳에 있는 완락재는 기운이 맑고 깨끗한 곳이니,
거기에서 많은 책에 묻혀 사는 즐거움일이 무궁하구나.[학문의 즐거움]
이런 가운데 오고가는 풍류[이따금 바깥을 거니는 재미]를 말해 무엇하겠는가?
(제8곡) 독서의 즐거움
우레 소리가 산을 깨뜨릴 듯이 심하게 울어도 귀머거리[진리를 터득하지 못하고 인간의 도리를 망각한 어리석은 이들]는 못 듣네.
밝은 해가 하늘 높이 올라도 눈 먼 사람은 보지 못하네.
우리는 귀와 눈이 밝은 남자[진리를 터득한 사람]가 되어야 하리.
(제9곡) 옛 어른의 행적을 따름 : 학문 수양에의 다짐
옛 어른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도 그 분들을 보지 못하네.[대구법]
하지만 그 분들이 행하던 길[학문 수양의 길]은 지금도 가르침으로 남아 있네.
이렇듯 올바른 길[책을 통해 성현의 가르침을 본받을 수 있음]이 우리 앞에 있는데 따르지 않고 어쩌겠는가?(옛성현들이 가던 길, 즉 자기 수양과 학문 도야의 길이 앞에 있으니 그 길을 열심히 따라가겠다는 표현이다. 이는 퇴계 자신의 다짐인 동시에 그보다 더 후학들에 대한 충고와 훈계의 말이라 할 수 있겠다.)
(제10곡)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 정진함
그 당시 학문 수양에 힘쓰던 길을 몇 해씩이나 버려 두고(지난 날에 가던 길을 몇 해 동안이나 버려두었는가 하는 이 탄식 어린 표현은, 오랜 벼슬길을 물러나면서 느끼는 작가의 감회를 나타낸 것이다. 즉, '당시'라는 것은 벼슬길에 오르기 전, 자기 수양과 학문 도야에 힘쓰던 시절을 의미하며, 그 길을 버려 둔 '몃 하'나 되는 지 모를 긴 시간은 벼슬길에서 바쁘게 살아온 시절을 의미한다)
벼슬길을 헤매다가 이제야 돌아왔는가?(도연명의 귀거래사의 한 부분이 연상되며, 나중의 후학 정약용의 한시 타맥행이 생각나는 구절이다.)
이제 돌아왔으니 다시는 딴 마음을 먹지 않으리(이황은 23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대제학까지 지낸 후 69세에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했고, 그 긴 시간을 벼슬 자리로 보내고 이제야 돌아왔으니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제 벼슬길이든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수양과 학문 도야, 후학 양성에만 힘쓰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제11곡) 학문 수양의 의지
푸른 산은 어찌하여 영원히 푸르며
흐르는 물은 또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가?[초장과 중장은 대구]
우리도 저 물같이 그치는 일 없이 저 산같이 언제나 푸르게 살리라.(초장에서는 영원히 푸르름을 간직하는 청산을 예찬했고, 중장에서는 이와 대구를 이루어 밤낮 쉴 새 없이 흐르는 유수의 영원성을 예찬했다. 그리고 청산과 같이 변함없이 유수와 같이 그침없이 학문 수양에 힘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제12곡) 영원한 학문 수행의 길
어리석은 자도 알아서 행하니 학문의 길이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성인도 다하지 못하는 법이니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초장과 중장은 학문 완성의 어려움을 말함]
쉽든 어렵든 간에 학문을 닦는 생활 속에 늙는 줄을 모르겠다.
🔘 이해와 감상
제1곡은 서곡(序曲)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세상의 명리(名利)를 떠나 자연에 묻혀 한가로이 사는 생활을 그린 것이다. 이미 세속사(名利)를 떠나 자연에 묻혔으니, 아무렇게나 산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草野愚生(초야우생)'은 자연에 묻혀 사는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이고 '泉石膏황(천석 고황)'은 자연을 사랑하는 자신의 병은 이미 고칠 수 없음을 강조하여 지극한 자연애(自然愛)의 사상을 나타내었다.
제2곡에서는 자연 속에 묻혀 늙어가는 도학자의 자세를 그리고 있고,
제3곡에서는 미풍 양속이 사라졌다고 탄식하거나,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순박한 풍습이 아직 남아 있다면서 성선설의 입장을 주장한다.
제4곡에서는 자연에 몰입해 있으면서도 완전히 자연에 귀의하지 못하고, 나라에 대한 걱정과 임금님을 생각하는 연군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벼슬을 떠나 자연 속에 묻혀 지내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늘 연군(戀君)의 정이 떠나지 않음을 노래한 것이다. 여기에서 자연에 몰입하면서도 완전한 자연 귀의(自然歸意)를 이루지 못하는 유학자적인 충의 사상(忠義思想)을 엿볼 수 있다. 초장의 '듯디 죠희'는 한시(漢詩)의 표현법을 빌어 온 것으로 우리 시의 기법(技法)으로 본다면 '후각'을 '청각'으로 전이(轉移)시킨 일종의 공감각적(共感覺的) 표현이라 할 만하다. 한시에서는 '향기를 맡는다'를 흔히 '聞香(문향)'이라고 표현한다. 蘭生空谷 其香遠聞(난생공곡 기향원문; 난초가 빈골에 자라니, 멀리서도 그 향기를 맡는다.)
제5곡에서는 자연에 귀의하지 못하고 달아날 생각만 하는 자신을 안타까워한다.
제6곡에서는 사계절의 변화를 사람에 견주어서, 계절의 순환도 마치 사람의 흥취와 같기 때문에 아름다운 자연 현상도 끝이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제7곡에서는 자연을 산책하며 느끼는 흥겨움과 학문 수양의 즐거움을 밝힌다.
제8곡에서는 미세한 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변화하는 자연 현상에 눈을 떠서, 일취 월장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제9곡에서는 예 성현과의 교감을 오직 서적 탐독을 통해서만이 가능하고, 그 길은 학문에의 정진으로 찾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제10곡에서는 젊었을 때 뜻을 세우고 힘쓰던 학문과 수양의 길을 저버리고 벼슬길에 올랐던 자신을 탓하면 이제라도 학문 수양에 전념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내용이다. 퇴계(退溪)는 23세에 태학(太學)에 들어가 진사로 출발하여 대제학(大提學)까지 지내고, 귀향(歸鄕)한 것은 69세 때였다. 젊었을 때 품었던 학문에 대한 뜻을 소홀히 하고 벼슬길에 올랐다가 이제서야 돌아오게 됨을 안타까워하면서 스스로 학문에 전념할 것을 다짐한다.
제11곡에서는 변함없는 의지와 학문 수행으로 덕을 닦으려는 결의가 나타나 있다.'萬古常靑'하겠다는 의지와 결의를 보인 내용으로, 청산(靑山)은 만고(萬古)에 푸르러 영원하며, 유수(流水)도 주야로 그치지 않아 영원한데, 우리 인간은 왜 순간자(瞬間者)에 지나지 않은가? 우리도 저 청산같이 저 유수같이 언제나 푸르러 그치지 않겠다고 노래했고, 만고상청(萬古常淸)이란 끊임없는 학문 수양으로 영원한 진리의 세계에 사는 것이요, 옛 성현과 같이 후세에 이름을 영원히 남기는 것이다.
제12곡에서는 도산십이곡의 결사(結詞)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끝없는 학문의 길만이 자신이 걸어야 할 길임을 알고, 학자다운 태도로 연구 활동에 깊게 몰입하는 자세를 보여 준다. 즉, 지은이의 학문에 대한 자세를 보인 내용이다. '愚夫도 알며 하거니 긔 아니 쉬운가?'는 학문은 뜻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고자 하는 것이요,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 동시에 '聖人도 못다 하시니 긔 아니 어려온가?'는 그러나, 그 세계는 아직 아무도 다하지 못한 무한히 심오한 것임을 말하고, 쉽거나 어렵거나 간에 학문을 닦는 이 길만이 우리가 가야할 영원한 길임을 암시하고 있다. 학문은 결코 다른 것 즉 명리(名利)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학문 그 자체에 대한 자세를 밝힌 글이다.
⚪ 이해와 감상 (1)
작자가 향리(鄕里) 안동(安東)에 물러가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며 자신의 심경을 읊은 12수의 연시조. 전 6곡은 '언지(言志)' 후 6곡은 '언학(言學)'으로 되어 있다.
더욱이 이 작품은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와 짝을 이루는데, 이이(李珥) 역시 뛰어난 성리학자였음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노래는 지은이가 명종 20년에 도산서원에서 후진을 가르치던 때에, 지은이의 뜻을 말한 언지(言志-때를 만나고 사물에 접하여 일어나는 심정과 감흥을 읊음) 전 6곡과, 학문과 수련의 실제를 시화(詩化)한 언학(言學) 후 6곡 등 12수로 된 연시조이다.
인간 속세를 떠나 자연에 흠뻑 취해 사는 자연 귀의 생활과 후진 양성을 위한 강학(講學)과 사색에 침잠(沈潛)하는 학문 생활을 솔직 담백하게 표현해 놓았다.
이 작품의 끝에 붙인 발문(跋文)에 지은이 자신이 이 노래를 짓게 된 연유와 우리 나라 가요를 평하는 말 가운데, 그의 문학관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 가곡이 무릇 음란한 노래가 많아서 이야기할 만한 것이 못 되며 이별(李鼈)이 '육가(六歌)'를 본떠 이 노래를 짓는다고 밝히고 있고, 또한 이를 아이들로 하여금 익혀 부르게 하여 나쁜 마음을 씻어 버리고 서로 마음이 통하게 하고자 한다는, 퇴계의 문학관을 밝히고 있다.
도산육곡(陶山六曲), 도산전후육곡(陶山前後六曲)이라고도 부른다.
⚪ 이해와 감상 (2)
이 작품은 조선 명종(明宗) 때 이황(李滉)이 지은 연시조(連時調)로서, 작자가 만년에 안동(安東)에 도산 서원을 세우고 학문에 열중하면서 사물을 대할 때 일어나는 감흥과 수양의 경지를 읊은 것이다.
모두 12곡으로 이루어졌으며, 작자 자신이 전6곡(前六曲)을 언지(言志), 후6곡(後六曲)을 언학(言學)이라 하였다.
전6곡은 자연에 동화된 생활을 하면서 사물에 접하는 감흥을 노래한 것이고, 후6곡은 학문 수양에 임하는 심경을 노래한 것이다.
중국 문학을 차용한 것이 많고, 생경한 한자어가 너무 많이 사용되어 문학적으로 볼 때에는 높이 평가할 수 없으나, 인간 속세를 떠나 자연에 흠뻑 취해 사는 자연 귀의(歸依) 생활과 후진 양성을 위한 강학(講學)과 사색에 침잠(沈潛)하는 학문 생활을 솔직 담백하게 표현해 놓은 점이 훌륭하다.
이 작품의 끝에 붙인 발문(跋文)에 작자 자신이 이 노래를 짓게 된 연유와 우리나라 가요를 평한 말 가운데, 그의 문학관이 잘 나타나 있다.
성리학의 대가의 작품이라는 데서 시조의 출발이 유가(儒家)의 손에 있었고 그 성장 발전 역시 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작품이다.
🔘 도산십이곡(陶山十理曲)에 대한 작가 자신의 평(評)
지금의 시가 옛적의 시와는 달라서 음영하기에는 좋아도 놀로 부르기에 적합하지 못하여, 이를 노래로 부르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우리말로써 지어야 되니, 이는 아무래도 이 나라 백성들이 부를 음절이므로 그렇지 않을 수 없는 바다.
그러므로 일찍이 대충 이가(李歌, 이별육가(李鼈六歌)를 본으로 삼고 도산육곡을 만든 것이 둘이니 그 첫째는 언지(言志)이요, 그 둘째는 언학(言學)이다.
이것을 아이들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익혀 부르게 하며 의자에 기대어 듣고자 하여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하며 이에 맞추어 춤추게 하려 함이다.
🔘 도산십이곡 발(陶山十二曲跋)
이 '도산십이곡'은 도산 노인(陶山老人)이 지은 것이다. 노인이 이 시조를 지은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 동방의 가곡은 대체로 음와하여 족히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저 '한림별곡' 과 같은 류는 문인의 구기(口氣)에서 나왔지만 긍호(矜豪)와 방탕에다 설만(褻慢)과 희압(戱狎)을 겸하여 더욱이 군자로서 숭상할 바 못 되고, 다만 근세에 이별(李鼈)이 지은 '육가(六歌)'란 것이 있어서 세상에 많이들 전한다.
오히려 저것[육가]이 이것[한림별곡]보다 나을 듯하나, 역시 그 중에는 완세 불공(玩世不恭)의 뜻이 있고 온유 돈후(溫柔敦厚)의 실(實)이 적은 것이 애석한 일이다.
노인이 본디 음률을 잘 모르기는 하나, 오히려 세속적인 음악을 듣기에는 싫어하였으므로, 한가한 곳에서 병을 수양하는 나머지에 무릇 느낀 바 있으면 문득 시로써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시는 옛날의 시와는 달라서 읊을 수 있겠으나, 노래하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이제 만일에 노래를 부른다면 반드시 이속(俚俗)의 말로써 지어야 할 것이니, 이는 대체로 우리 국속(國俗)의 음절이 그렇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일찍이 이별의 노래를 대략 모방하여 '도산 육곡'을 지은 것이 둘이니, 기 일(其一)에는 '지(志)'를 말하였고, 기 이(其二)에는 '학(學)'을 말하였다.
아이들로 하여금 조석(朝夕)으로 이를 연습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고는 궤( )를 비겨 듣기도 하려니와,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를 부르는 한편 스스로 무도(舞蹈)를 한다면 거의 비린(鄙吝)을 씻고 감발(感發)하고 융통(融通)할 바 있어서, 가자(歌者)와 청자(聽者)가 서로 자익(資益)이 없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컨대, 나의 종적이 약간 이 세속과 맞지 않는 점이 있으므로 만일 이러한 한사(閑事)로 인하여 요단(鬧端)을 일으킬는지도 알 수 없거니와, 또 이것이 능히 강조(腔調)와 음절에 알맞을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일 건(一件)을 써서 서협 속에 간직하였다가, 때때로 내어 완상(琓賞)하여 스스로 반성하고, 또 다른 날 이를 읽는 자의 거취(去取)의 여하(如何)를 기다리기로 한다.
가정(嘉靖) 44년(1565) 을축년 3월 16일 도산 노인은 쓴다.
시가문학에서는 자연을 예찬하고 자연에 귀의하여 생활하는 것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사대부들이 창작하였다.
이러한 특징적인 현상을 조윤제(趙潤濟)는 강호가도로 규정하면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삶의 방식에서 그 형성 원인을 찾았다.
사화와 당쟁의 와중에서 벼슬길로 나서 자칫 거기에 휩쓸려 일신과 가문을 위기로 몰고 가기보다는 고향의 자연에 귀의하여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는 것이 보다 안전한 삶의 방식이었다.
이들에게는 사유지가 이미 확보되어 있었고, 향리에서도 토지나 명망을 기초로 한 독점적 지위가 가능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연을 예찬하는 강호가도의 구현은 도학을 기반으로 한 그들의 문학관 ·세계관과도 합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영남출신의 문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현보(李賢輔)를 꼽을 수 있다. 이현보는 영남사림으로서는 비교적 일찍 환로에 나서서 경상감사, 형조참판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줄곧 자연으로 귀의할 것을 꿈꾸다가 마침내 귀향하여 그 기쁨을 '농암가(聾巖歌)'와 같은 시조로 노래하였다.
그 후 이황(李滉)이 여러 편의 시조를 통하여 이현보가 표명한 자연에의 귀의를 이어갔고, 나아가 도학적인 이념과 교화 의도까지 노래에 포함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권호문(權好文)을 비롯한 퇴계 문하의 제자들에게 이어져 영남가단을 형성하였다.
그뿐 아니라 나이가 들어 벼슬을 사직한 치사한객(致仕閑客)이 그 유유자적한 심정을 자연에 담아 노래한 작품들도 강호가도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가 대표적인데, 이 작품은 강호자연마저도 군주의 통치가 행해지는 공간으로 규정함으로써 세계와의 단절이 아닌 화합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현보의 '농암가'와는 차이가 있다.
▶️ 蕩(방탕할 탕)은 형성문자로 荡(탕)은 간자(簡字), 偒(탕)은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湯(탕)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蕩(탕)은 ①방탕하다 ②방종하다 ③흔들다 ④움직이다 ⑤방자하다 ⑥광대하다, 넓고 크다 ⑦헌걸차다(매우 풍채가 좋고 의기가 당당한 듯하다) ⑧용서하다 ⑨씻다, 씻어내다 ⑩허물어뜨리다, 찌르다 ⑪호리다, 유혹하다 ⑫흘리다 ⑬흐르게 하다 ⑭큰 대나무 ⑮늪(땅바닥이 우묵하게 뭉떵 빠지고 늘 물이 괴어 있는 곳)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방탕할 질(佚)이다. 용례로는 세금이나 요금이나 진 빚을 온통 삭쳐 줌을 탕감(蕩減), 재물 따위를 죄다 써서 없애 버리는 것을 탕진(蕩盡), 재물을 남김 없이 다 써 버림을 탕갈(蕩竭), 방탕한 사람을 탕객(蕩客), 온통 죄다 없어짐을 탕결(蕩缺), 남김 없이 죄다 멸함을 탕멸(蕩滅), 온통 죄다 잔폐함을 탕잔(蕩殘), 빚을 죄다 삭쳐 줌을 탕채(蕩債), 키질을 하듯이 마구 들까붊을 탕파(蕩簸), 방탕한 여자를 탕부(蕩婦), 방탕한 사내를 탕자(蕩子), 방탕한 마음을 탕심(蕩心), 헛된 모양을 탕연(蕩然), 난을 평정함을 탕정(蕩定), 방탕한 마음을 탕정(蕩情), 크고 넓은 뜻이나 방탕한 마음을 탕지(蕩志), 죄다 망하여 뿔뿔이 흩어져 없어짐을 탕산(蕩産), 행동이 음란하고 방탕함을 음탕(淫蕩), 휩쓸어 모조리 없애 버림을 소탕(掃蕩), 주색잡기에 빠져서 행실이 좋지 못한 것을 방탕(放蕩), 아주 넓어서 끝이 없음을 호탕(浩蕩), 마음이 편하고 제멋대로 함을 염탕(恬蕩), 집안의 재산을 다 없애 버리는 것을 분탕(焚蕩), 더러운 것이나 부정적인 것을 말끔히 없앰을 척탕(滌蕩), 높고 넓음을 외탕(巍蕩), 광망하고 방탕함을 광탕(狂蕩), 죄수를 너그럽게 처결하여 죄다 놓아 줌을 소탕(疏蕩), 더러운 것을 씻어 내기 위하여 물을 부어서 세차게 흔듦을 충탕(衝蕩), 음탕하게 놂을 유탕(遊蕩), 집안의 재산을 모두 써서 없애 버림을 일컫는 말을 탕진가산(蕩盡家産), 흔들려 움직이는 모양이나 정처 없이 헤매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탕탕유유(蕩蕩悠悠), 싸움이나 논쟁 따위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탕탕평평(蕩蕩平平), 방탕함으로써 예의 범절을 무시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광탕지인(狂蕩之人), 술과 여자에 빠져 일은 하지 아니하고 불량한 짓만 함을 이르는 말을 방탕무뢰(放蕩無賴), 봄바람이 온화하게 분다는 뜻으로 인품이나 성격이 온화하고 여유가 있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춘풍태탕(春風駘蕩) 등에 쓰인다.
▶️ 滌(씻을 척, 물 이름 조)은 형성문자로 涤(척, 조)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條(조)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滌(척, 조)은 ①씻다 ②닦다 ③청소하다 ④짐승을 기르는 우리 그리고 ⓐ물의 이름(조)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씻을 식(拭), 씻을 세(洗), 빨래할 한(澣), 씻을 탁(濯)이다. 용례로는 씻어 버림을 척거(滌去), 몸을 시원하게 함을 척서(滌暑), 씻어 없앰을 척제(滌除), 말끔히 없앰을 척탕(滌蕩), 허물을 깨끗이 씻어 버림을 척건(滌愆), 생각을 깨끗하게 함을 척려(滌慮), 흉터를 씻어 준다는 뜻으로 남의 허물을 덮어 줌을 이르는 말을 척반(滌瘢), 씻어서 깨끗하게 함을 척정(滌淨), 깨끗이 씻음을 세척(洗滌), 때 묻은 옷을 빪을 한척(澣滌), 깨끗이 씻어냄을 쇄척(刷滌),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깨끗이 씻음을 참척(懺滌), 죽을 죄인의 목슴을 살려 주고 죄를 깨끗이 없애 줌을 활척(活滌), 죄나 허물을 깨끗이 씻어 줌을 소척(疏滌), 품고 있는 생각을 속시원하게 모두 털어놓고 말해 버림을 설척(雪滌), 제거하여 깨끗하게 함을 소척(掃滌), 더러운 것을 없애고 정하게 함을 탕척(蕩滌) 등에 쓰인다.
▶️ 鄙(더러울 비/마을 비)는 형성문자로 啚(비)는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우부방(阝=邑; 마을)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啚(비)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鄙(비)는 ①더럽다 ②천(賤)하다, 비루(鄙陋)하다(행동이나 성질이 너절하고 더럽다) ③속되다 ④부끄러워하다, 천하게 여기다 ⑤촌스럽다 ⑥깔보다, 앝보다 ⑦질박(質樸)하다(꾸민 데가 없이 수수하다), 꾸밈이 없다 ⑧고집(固執)이 세다, 고루(固陋)하다 ⑨인색(吝嗇)하다 ⑩(도량이)좁다 ⑪(문벌이)낮다 ⑫마을 ⑬두메(도회에서 멀리 떨어져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변두리나 깊은 곳) ⑭변방(邊方: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 지역), 변경(邊境) ⑮성 밖, 교외(郊外) ⑯행정(行政) 구역(區域)의 이름 ⑰천(賤)한 이 ⑱저, 자신(自身)의 겸사(謙辭) ⑲짐승이 내닫는 모양,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더러울 오(汚), 더러울 누(陋), 더러울 예(穢), 더러울 설(褻)이다. 용례로는 자기 의견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비견(鄙見), 자기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비회(鄙懷), 자기의 편지를 낮추어 이르는 말을 비서(鄙書), 자기 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비사(鄙舍), 자기의 소원을 겸손하여 이르는 말을 비원(鄙願), 문화적인 수준이 낮고 메떨어진 시골 구석을 비야(鄙野), 행동이나 성질이 더럽고 추저분함을 비루(鄙陋), 천박하고 상스러움을 비천(鄙淺), 몹시 다랍게 인색함을 비린(鄙吝), 더럽고 보잘 것 없음을 비설(鄙褻), 하는 짓이 더럽고 자질구레함을 비쇄(鄙瑣), 마음씨가 더럽고 못된 사내를 비부(鄙夫), 눈에 확 띄지 않는 비근하고 자차분한 일을 비사(鄙事), 점잖치 못하고 상스럽게 하는 말을 비사(鄙詞), 품위가 매우 낮은 시속말을 비언(鄙諺), 성질이 비루하고 편벽됨을 비벽(鄙僻), 성질이나 행동이 추저분하고 막됨을 비패(鄙悖), 천함이나 촌스러움을 누비(陋鄙), 거칠고 더럽고 낮음을 추비(麤鄙), 더럽게 여기어 침을 뱉음을 타비(唾鄙), 고상하지 못하고 더러움을 근비(近鄙), 욕심이 많고 야비함을 탐비(貪鄙), 서울과 시골을 도비(都鄙), 변방의 작은 나라를 편비(偏鄙), 중앙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시골을 변비(邊鄙), 남에게 자기 딸을 이르는 말을 식비(息鄙), 낮고 속된 일에 재능이 많음을 이르는 말을 다능비사(多能鄙事), 마음속에서 비루하고 인색함을 말끔히 씻어낸다는 뜻으로, 도량이 좁고 인색하고 비루한 마음을 씻어낼 수 있다는 말을 탕척비린(蕩滌鄙吝) 등에 쓰인다.
▶️ 吝(아낄 린/인)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입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文(문, 린)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吝(린/인)은 ①아끼다 ②인색(吝嗇)하다 ③소중(所重)히 여기다 ④주저(躊躇)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체면을 돌아보지 않고 재물을 지나치게 아낌을 인색(吝嗇), 몹시 재물을 아낌을 인석(吝惜), 더러운 마음씨 인색한 마음을 자린(玼吝), 욕심에 얽매어 인색함을 계린(繫吝), 자신의 물건을 버리거나 남을 주기가 아까워 주지 못함을 견린(牽吝), 남의 뜻을 거스르고 고분고분 좇지 아니함을 불린(拂吝), 몹시 안달하여 하는 짓이 다라움을 간린(慳吝), 너무 검소하고 물건을 아낌을 검린(儉吝), 탐욕스럽고 인색함을 탐린(貪吝), 몹시 다랍게 인색함을 비린(鄙吝), 인색한 마음을 이르는 말을 인색지심(吝嗇之心), 허물을 고침에 인색하지 않는다는 말을 개과불린(改過不吝), 아주 다라울 정도로 인색하고 비정한 사람을 꼬집어 이르는 말을 자린고비(玼吝考妣) 등에 쓰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