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82
8월14일[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19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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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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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_qghPE9g1yo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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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위대하고 숭고한 사랑의 순교자>
교회 역사상 수많은 성인성녀들 가운데 참으로 특별한 성인이 한 분 계십니다. ‘성모님의 종’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1894~1941)이십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헌신했던 사목터는 큰 본당이나 학교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양들은 고관대작이나 부자들이 아니라 지하 감방 속에서 신음하던 동료 수감자들이었습니다.
그는 폴란드 출신의 콘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수도자인 동시에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회 창립자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주님의 권고에 따라 한 동료 수감자를 대신해서 죽음의 지하 아사 감방으로 내려간 사랑의 순교자였습니다.
한때 저는 그런 생각도 조금 들었습니다. ‘참 안타깝고 아까운 죽음이다. 그렇게 훌륭한 수도자이자 탁월한 대 영성가였던 콜베 신부님께서 단 한 명의 동료 수감자를 위해 돌아가시다니! 이왕이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순교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혹시라도 죽음의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으셨다면 나중에 더 큰 일을 하실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 내 지척에서 울부짖는 동료들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인권이며 신앙이 철저히 유린당하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도 한 인간이 얼마나 위대하고 숭고한 존재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죽음의 계곡 안에도, 지옥의 구렁텅이 속에도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심을 생생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콜베 신부님의 일대기를 읽고 묵상하면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의 순교는 1941년 8월 14일 단 한 번에, 혹은 순식간에 또는 엉겁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제로서, 성모님의 종으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매일 순교를 준비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감동적인 죽음은 그가 매일 매일 살아온 삶의 결론이었습니다.
그가 순교하신 후 한참 뒤에 그의 어머니께서 동료 수도자들에게 전해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소년 콜베 앞에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는데, 그분의 손에는 두 개의 관이 들려있었습니다. 하나는 희고 하나는 붉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다정한 음성으로 그에게 어느 것을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소년은 즉시 둘 다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성모님께서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며 사라지셨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흰색의 관은 순결을 의미하고 붉은색 관은 순교를 뜻합니다. 결국 그는 평생토록 한 송이 백합처럼 순결한 수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 아사 감방에서 그토록 원하던 순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콜베 신부님과 함께 죽음의 수용소 생활을 견뎌낸 생존자들의 증언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는 폐결핵으로 인해 가장 병약한 수감자 중의 한 사람이었음에도 늘 동료들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했답니다.
자신에게 배당된 말라비틀어진 작은 빵 한 조각도 허기로 고생하는 젊은 동료들에게 양보해주었습니다. 매일 배당되는 강제노역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을 먼저 선택했답니다. 간수들의 번득이는 경계의 눈초리를 피해가며 동료 수감자들에게 사목자로서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의 영적지도와 고해성사를 통해 지옥의 도가니 속에서도 깊은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었으며 또한 자살 충동을 극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인간이 만든 가장 불행한 장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사랑과 기적의 장소로 변화시켜나갔습니다. 폭력과 증오심을 기도와 사랑으로 이겨냈습니다.
지하 아사 감방으로 내려간 후에도 그의 영웅적 덕행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부들부들 떠는 동료들 한 명 한 명에게 종부성사를 베풀었습니다. 동료들은 그의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 평온한 얼굴로 하느님 나라로 건너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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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KtM2mpakK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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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세를 대신 내주는 물고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할 것이지만,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은 몹시 슬퍼하면서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자녀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다음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왜 돌아가셔야만 부활하실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시냐고 세금을 걷는 이들이 다가와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베드로는 내신다고 대답하고는 깊은 생각에 잠겨 돌아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 베드로에게 성전이 곧 아버지의 집임을 일깨우십니다.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 집의 주인이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도 베드로의 것까지 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여기서 왜 굳이 물고기를 잡아 그 동전을 바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물고기가 당신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굳이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베드로의 것까지 내주시기 위해 목숨을 바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 덕분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으실까요? 분명 하늘 나라에 사실 자격이 있으시지만, 아버지와 백성들로부터 더 큰 대접을 받으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개는 가만히만 있으면 사랑을 받습니다. 그런데 ‘개는 훌륭하다’에 보면 집에 들어오는 이들뿐만 아니라 주인까지 무는 개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한 번은 그런 개를 강 훈련사가 훈련하다가 손을 물렸습니다. 그러자 강 훈련사가 목줄을 잡고 단번에 제압합니다. 이때 가족들은 물린 강 훈련사가 아니라 자신들의 개가 그런 꼴을 당하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런 개와 살면 지옥입니다. 나중에는 자신들도 감당할 수 없어서 안락사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EBS 다큐 중 유튜브에 ‘귀여운 섬마을 강아지가 해녀 엄마 출근 시켜놓고 11년 동안 몰래한 행동?’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욕지도라는 섬에 오월이란 열한 살 강아지가 있습니다. 그 강아지는 선착장에 서 있다가 관광객이 내리면 관광객들을 이리저리 안내합니다. 여행하러 온 사람들은 강아지의 안내를 따라 구경하고 강아지를 안고 사진도 찍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 개가 욕지도에 버려진 개이고 먹을 것을 얻으려 이런 행동을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오월이는 욕지도의 유명인입니다. 이미 TV에도 여러 번 출연하였습니다. 그리고 엄마도 있습니다. 엄마는 해녀인데, 엄마가 외로울까 봐 육지에 나간 딸이 5월에 선물해 준 강아지가 오월이입니다. 엄마는 아침에 배를 타고 나가 저녁에 돌아옵니다. 엄마를 배웅하고 오월이는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관광객들을 이끄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11년 동안 보니까 관광객이 어디로 가는지 잘 알아서 그 일을 하고는 엄마가 돌아올 시간이 되면 선착장에 꼭 나가 있곤 하였습니다. 오월이 덕분으로 욕지도도 조금 더 유명해질 수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오월이가 지나가면 먹을 것을 줍니다. 덕분에 오월이 엄마도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오월이는 굳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엄마에게 사랑받습니다. 하지만 관광객들에게 욕지도를 소개하며 엄마와 마을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습니다. 이를 위해 굳이 하지 않아도 하는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개와 비교해서 죄송하지만,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께 사랑받는 분이시지만, 당신 나라를 자랑스럽게 하고 사람들에게 그 나라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심으로써 더욱 사랑받으십니다.
우리도 아버지께 사랑받고 이미 하늘나라에 사는 분들에게 더 사랑받으려면 그 하늘나라를 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늘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욕지도에 개가 오월이 혼자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월이는 욕지도에 엄마도 있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을 사람들도 있고 더군다나 섬도 아름답기에 욕지도를 떠날 마음이 없습니다. 이런 자랑스러운 마음이 그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더 친절하게 대할 힘이 된 것입니다.
욕지도에 들어오는 관광객을 보고 짖고 하는 개가 있다면 그 개는 결국 욕지도에 머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를 자랑스러워하고 그 나라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어떻게 내가 하늘 나라를 소개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십자가의 열매는 결국 하늘 나라에서의 영광스러운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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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7,22-27: 성전 세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24절) 유대인들은 모두가 똑같이 이 성전 세를 반 세켈을 바쳤다(탈출 30,13 참조). 여기서 반 세켈을 내는 것은 자신을 바치는 것을 상징하며 세켈은 구원받은 사람을 상징한다. 주님께서도 성전 세를 내라는 요구를 받으신다. 성전 세를 바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약한 우리가 하느님의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복음에서 한 세금 징수원이 베드로에게 와서 예수께서 성전 세를 냈는지를 물었을 때 베드로는 내겠다고 대답하고 예수께 그 상황을 보고하였다. 베드로의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므로 다른 사람은 세금을 내어도 우리는 세금을 면제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위한 세금을 낼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셨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신다. 그것은 자신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인 것으로서 신앙인은 타인에게 표양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금 낼 돈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복음에서 보면 낚시를 해서 첫 번째 잡히는 물고기의 입을 벌리면 은전이 들어있을 테니 그것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세금을 내라고 하셨다. 물고기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 물고기는 한때, 불신앙과 미신의 물속 깊은 곳에 사로잡혀 세속적 쾌락이라는 폭풍과 불행에 싸여 있었다. 이제 물고기는 말씀의 가르침이라는 사도들의 낚싯바늘과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1베드 2,9) 주시는 말씀의 낚시 그물에 의해 하느님께로 높이 올려진다. 물고기 입에서 동전을 취하여 세금으로 내도록 하셨다.
예수께서는 땅에서도 동전을 취하실 수도 있었지만, 호수에서 기적을 이루신다. 우리는 모두 삶의 씁쓸한 혼돈으로부터 건져진 물고기이다. 우리는 사도들의 낚시 그물에 잡혀 온 물고기와 같다. 이 물고기들의 입에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동전이 물려있다. 이 동전은 우리 영혼의 빛과 육신의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다. 유대인들과 다른 민족들의 빚,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의 빚을 갚았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이 세금을 내라고 했기 때문이다.(탈출 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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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부르클린 사제관에서 지내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열쇠’입니다. 퀸즈의 사제관과 신문사의 숙소는 번호 키이기 때문에 열쇠가 필요 없지만 부르클린 사제관은 열쇠가 있어야 합니다. 부르클린에서 교우들을 만나고 사제관에서 하루 지낼 마음으로 열쇠를 챙겼는데 그만 다른 열쇠를 가져왔습니다. 당연히 열쇠는 맞지 않았고, 다시 신문사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급한 성격 때문에 때로 이렇게 곤란한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도 열쇠를 다른 것으로 가져온 것은 다행입니다. 예전에 성지순례를 갈 때였습니다. 한 자매님이 새 여권을 가져와야 하는데 구 여권을 가져왔습니다. 구 여권에는 미국비자가 있지만 유효기간이 지나서, 새 여권을 발급받았는데 그만 새 여권을 집에 두고 왔습니다. 아들이 급하게 집에서 구 여권을 가져와서 함께 성지순례를 떠날 수 있었지만 자매님은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저도 마음이 심란했는데 ‘그럴 수도 있지요.’라는 말을 들으면서 위로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크게 3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하느님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계명과 규정을 성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고, 하느님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부모를 섬기고, 거짓 증언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둑질 하지 않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않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방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한 때는 이방인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열쇠를 잘못 가져가서 사제관에 들어 갈 수 없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았지만 실천하지 않았기에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욕망과 욕심을 따랐습니다.
오늘 교회는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를 기억합니다. 신부님은 포로수용소의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 희망을 전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셨고,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이 별이 되셨습니다. 신부님은 이웃을 위해서 대신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콜베 신부님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제가 열쇠를 잘못 가져와서 사제관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처럼 저마다 욕망이라는 열쇠를 굳게 쥐고 있습니다. 교만이라는 열쇠를 굳게 쥐고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라는 열쇠를 굳게 쥐고 있습니다. 그런 열쇠로 세상의 문은 열 수 있겠지만 천국의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생명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병들어 가는 지구에서는 인간 역시 병들기 마련입니다.
한 주간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계획한 것들, 생각한 것들을 실천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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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전 세>
“그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마태 17,22-23)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도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왜 슬퍼한 것일까?
당시에는 제자들에게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되살아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은 흘려듣고, 또는 안 듣고,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만 듣고서 슬퍼한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은 듣지 않거나, 들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자기 수준에서 알아듣는 말씀만 듣고서,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왜곡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경청하고 새겨듣고 묵상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4-27)
성전 세에 관한 규정은 탈출기에 있습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이는 누구나 성소 세켈로 반 세켈을 내야 한다. 한 세켈은 스무 게라이다. 그 반 세켈은 주님에게 올리는 예물이다. 인구 조사를 받는 스무 살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주님에게 예물을 올려야 한다. 너희 목숨에 대한 속죄로 주님에게 이 예물을 바칠 때, 부자라고 반 세켈보다 더 많이 내도 안 되고, 가난한 이라고 이보다 덜 내도 안 된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 속전을 받아, 만남의 천막 예식 비용으로 쓰도록 내주어라. 이것이 주님 앞에서 너희 목숨에 대한 속죄의 기념이 될 것이다.”(탈출 30,13-16)
<성경 부록에 있는 도량형 표대로 계산하면 스타테르 한 닢은 8명의 몫이 되는데, 세켈 한 닢과 스타테르 한 닢을 동일한 가치로 계산하는 방식도 있고, 그 방식대로 계산하면 스타테르 한 닢은 두 사람 몫이 됩니다.>
율법 규정에 있는 “부자라고 반 세켈보다 더 많이 내도 안 되고, 가난한 이라고 이보다 덜 내도 안 된다.”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똑같이’ 내야 한다는 뜻인데, 부자라고 더 내면서 생색내는 것도 안 되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면제하는 것도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 세를 면제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까 성전 세를 낼 의무가 없는데, 그런데도 성전 세를 내신 것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람’으로서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도 ‘사람’으로서 당하신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전 세를 내신 일은 십자가 수난에도 연결됩니다.>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계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앞의 14장에 있는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이(마태 14,33) 옳은 고백이었음을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라는 말씀은,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은 정당한 직무 수행을 하고 있으니 그들이 하는 일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이고,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의 정당한 직무 수행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우리말 번역은 별로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를 잡으라고 시키신 것은 베드로 사도가 어부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는 물고기 자체에 특별한 뜻은 없습니다. 다른 사도에게 시키셨다면,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잡은 물고기를 팔아서 돈을 마련할 수도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작은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것은, “봉헌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일”이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 때에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을 꾸짖으셨습니다.(마태 21,13)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왜 성전 세를 내셨을까? 이미 ‘강도들의 소굴’로 변해버렸다면, 성전 세를 내는 것을 거부하셨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 것은 바로 그 사람들의 범죄이고, 성전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닙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다음 말씀도 하셨습니다.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마태 23,21) 성전 세는 성전을 관리하는 사제들에게 내는 돈이 아니라, 성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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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초대 교회에서 물고기는 예수님의 신원과 관련된 중요한 상징물입니다. 로마의 카타콤베(땅속에 있던 신자들의 거주지와 무덤)에는 지금도 물고기 그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물고기는 당시 언어로 ΙΧΘΥΣ(이크투[티]스)인데, 초대 교회 공동체는 이 다섯 철자에 각기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적용하여 예수(Ι), 그리스도(Χ), 하느님(Θ), 아들(Υ), 구원자(Σ)의 이름을 떠올렸습니다. 마태오는 분명 이러한 초대 교회의 전통을 알고 있었기에 물고기와 예수님의 신비 특히 파스카 신비를 상징적으로 서로 연결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 세 논쟁과 관련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분의 신원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분께서는 성전 세를 낼 필요가 없는 성전의 주인 곧 하느님 아버지의 아드님이십니다.(26절 참조) 그럼에도 성전 세 논쟁으로 걸려 넘어질 이들을 위하여 호수에 가서 물고기를 잡아 입을 열고 동전을 꺼내 그들에게 주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27절 참조). 성전 세를 내는 것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맺는 유일무이한 관계를 내세우지 않으실 만큼 당신을 낮추십니다. 성경 말씀처럼 그분께서는 우리의 조건을 완전하게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비우시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8 참조)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물에 스스로 잠기는 것을 받아들이신 물고기이십니다. 그러시고는 당신의 부활로 베드로처럼 당신께 희망을 건 모든 이를 자유롭게 하여 주셨습니다. 당신과 베드로가 성전 세를 위한 동전 한 닢으로 연결되어 있듯(“나와 네 몫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자유와 구원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고귀한 자유의 선물 대신 바쳐야 할 유일한 동전 한 닢은 형제적 사랑의 세(의무)입니다.(제1독서 참조) 우리의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시고 죽음과 예속의 조건에서 우리를 자유로이 구원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 곁의 미소한 형제들을 돌보고 사랑하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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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유영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랑에는 조건이나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현대는 거의 예외없이 모든 나라가 세계화의 과정속에서 급속하게 20:80의 사회로 재편되어 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이 현실을 바라보고 있지만 소수의 용기있는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하여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조직적으로 이 현실에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부터 시작하여 프라하로, 그리고 그 당시 7월 20일에서 22일 사흘간 제네바에서 열린 주요 8개국 정상회의에서는 15만 명이 넘는 대규모 시위대가 주도권을 장악해버렸고 그 와중에서 1명이 총에 맞아 숨지는 불상사가 발생했습니다.
물론 이런 소수 선각자의 활약이 회담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고, 일정 부분 고통을 당하는 서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성과를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이 근원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습니다.
1987년 민주화의 봄을 되돌아보십시오. 수많은 학생과 국민이 피를 흘리고 투쟁을 해서 6.29선언이라는 항복을 받아냈지만 그것이 왜 속임수가 되었습니까?
국민들의 의식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혁은 지속될 수 없었고,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거의 200-300년 동안 발전되어온 민주주의를 30년 이상 유지해온 군인정권하에서 이루겠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국민의 의식수준만큼 발전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의 복음을 묵상해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서 이중으로 수탈당하고 있는 민중의 편에서 무력으로 그 불의한 체제를 뒤엎어버리고 하느님나라를 세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혁명을 원하지도 않았고,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기존의 질서와 제도에 대항하지도 않았습니다. 의식의 변화 없는 체제나 제도의 변화 그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죄악으로 얼룩진 이 세상을 무력이나 제도나 법을 통해 인간의 힘으로 정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인 변화는 개개인의 철저한 회개를 통해 우리가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할 때 하느님의 힘으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견하시면서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기에 꿋꿋하게 그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오늘 제1독서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너 이스라엘아! 너희 주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너희 주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가 보여주신 길만 따라가며 그를 사랑하는 것이요,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쏟아 그를 섬기는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너희가 받을 할례는 마음의 껍질을 벗기는 일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고집을 세우지 않도록 하여라."
사랑에는 조건이나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민족보다도 작은 민족인 이스라엘 선조들에게 마음을 쏟아 사랑해주셔서 그들의 후손을 선택해주셨듯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선택해주셨기에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뽑힌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의 질서하에서 대다수의 국민은 고통을 겪고 있는 반면, 가진 자들은 과실은 챙기고 책임과 의무는 노동자, 농민 등 가난한 자에게 전가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역사상 기득권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먼저 내놓은 적은 없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의식이 변화되어 요구할 때 그들은 할 수 없이 포기하는 것입니다.
성서의 수많은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구원역사는 하느님의 주도하에 가난한 자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암울하다 해서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의 역사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가난한 자들임을 명심하고 우선 우리의 마음의 껍질부터 벗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거기에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협조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는 고집을 세우지 않도록 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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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장면 다음에 성전 세에 대한 일화가 나옵니다. 죽었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실 예수님의 몸은 성전 그 자체입니다. 성전의 주인이 세금을 낸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지 않은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논쟁과 충돌을 피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세상 재물의 주인이심을 베드로 사도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낚시를 던지라고 하시며, 잡힌 물고기 입 속에 있던 스타테르 한 닢을 성전 세로 내게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두 사람 몫의 성전 세인 한 스타테르를 내면서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에 감탄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시는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제와 라삐로 행세하시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제와 라삐는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궁금증에 대답하십니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는 대답을 하십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자녀로 여기셨습니다.
콜베 사제 순교자는 “저 사람 대신 내가 죽겠소.” 하고 말하며 주님의 벗인 프란치스코 가요브니체크를 대신하여 아사 감방으로 갔습니다. 신부님의 희생으로 절규와 비탄의 소리가 가득하였던 아사 감방은 기도와 사랑의 방으로 변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들과 만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가야 할 사랑의 길을 몸소 보여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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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임문철 시몬 신부님]
<성전세>
제주도는 국제자유도시입니다. 아직은 제대로 법과 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출입하고, 모든 물자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자가 면제되어야 하고, 관세가 없어야 합니다.
현재 제주도는 공항이나 부두에만 있는 면세점이 확산되어, 제주 전역이 무관세 지역이 되어 전 세계의 재화가 제주도에 몰려들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금이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재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필요한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실한 국민이라면 기꺼이 납세의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성전세를 내는 것을 유다인으로서 해야 하는 당연한 의무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머뭇거림도 없이 “내십니다” 하고 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시며,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고 하느님 아버지께 경배를 드립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참된 성전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으며, 따라서 우리도 성령이 머무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의무는 성전세를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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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때로는 기다려주자>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행동이 좋지 않은 사람은 서로 상종할 수 없으니 이쪽에서 삼가서 피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기다려야 하는 아량이 필요합니다. 맞서지 않는 너그러움이 요구됩니다.
성전 세를 거두는 이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은 로마 총독이 로마제국을 위해 거둬들이던 세금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인두세, 사람의 머릿수에 맞춰내는 세금이었습니다.
사실 세상의 임금들은 관세나 인두세를 남에게서 받아내지 자기 가족에게 부여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참 주인이시고 “성전보다 더 큰 분”(마태 12,6)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세금을 바치십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돈으로 성전 세를 내십니다. 호수의 고기를 잡아 그 입 안에 있던 돈으로 베드로의 몫과 주님의 몫으로 주도록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모습에는 손상을 입지 않으면서도 하느님께는 영광이 드려지며 인간의 비위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모습에 참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 안에서도 많은 일들을 접하면서 그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지 신중히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있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거나 일관되게 행동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엄격하게 정도를 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 실천하며 살아가는 데는 적절한 순서와 아량, 배려도 있어야 합니다. 비굴하게 물러서는 것같이 보이는 때 정말 참 지혜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는 아우슈비츠 감방에서 가족이 있으니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한 사람을 대신하여, 굶겨 죽이는 감방에 들어가 처절한 옥중생활을 하다가 감방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생전에 성모승천 대축일에 죽고 싶다고 한 그의 소원이 비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그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자비의 순교자”라 부르며 시성하였습니다. 콜베 신부는 의연하게 다른 포로들에게 “우리는 곧 천국에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격려하며 용기를 주었다고 합니다. 예기치 않은 일에 하느님 안에서 여유를 갖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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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그러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지금 당장 ‘남’이라는 글자를 써보아라. ‘남’이라는 글자는 ‘ㅁ’ 위에 ‘나’를 올려놓은 것이다. 그렇다. 남을 위해 살면 내가 더 돋보이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나’만을 위해 사는 사람을 향해서 사람들은 좋은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이기주의자, 위선자라는 말을 하면서 계속해서 깎아내립니다. 그에 반해 남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는 존경과 사랑이 멈추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위로만 올라갑니다. 결국 ‘남’을 위해 사는 것이 곧 ‘나’를 위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과 사랑을 받고 싶다면,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남’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남을 위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남보다 먼저를 나를 바라보려는 마음이 생길 때, ‘ㅁ’ 위에 올려진 ‘나’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계속해서 높아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랑을 강조하셨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을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를 따라야 하기에 당신이 먼저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모범을 따라 ‘남’을 위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모든 유다인은 매년 스타테르 반 닢의 성전 세를 바쳐야 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의 유지, 관리, 보수 등의 운영을 위해 유다인에게 부과된 종교세였습니다. 단, 사제와 율법 학자는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봉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제나 율법 학자로 평가하곤 했었지요. 그래서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마태 17,24)라고 베드로에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와 율법 학자처럼 단순히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높으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주인이 세금을 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오히려 세금을 받아야 할 분이십니다. 그러나 불필요한 논쟁과 충돌을 피하십니다.
성전 세를 내지 않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한 공격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 아니라는 이유가 됩니다. 예수님의 신원을 부정하는 것으로 죄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죄의 영역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지요. 그래서 성전 세 논쟁으로 걸려 넘어질까 봐 베드로에게 낚시를 던지라고 하시며, 잡힌 물고기 입 속에 있던 스타테르 한 닢을 가지고 자신과 베드로의 몫으로 성전 세를 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배려와 사랑을 보면서 우리의 배려와 사랑을 바라봅니다. 정의만을 외치면서 사랑의 마음을 완전히 버리는 모습, 합리적이지 못한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사랑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모습, 세상의 법칙을 내세워서 주님의 법칙인 사랑을 잊어버리는 모습 등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처럼 ‘나’보다 ‘남’에 대한 사랑이 우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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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부딪히지 않으니>
마태오 17,22-27 (수난과 부활에 관해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성전 세를 바치시다)
제자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부딪히지 않으니>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마태 17,27)
빛은
부딪히지 않고
비출 뿐이니
감추려는 이조차
마침내 품는다
물은
부딪히지 않고
흐를 뿐이니
멈추려는 이조차
마침내 적신다
바람은
부딪히지 않고
불 뿐이니
맞서려는 이조차
마침내 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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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마음의 할례>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분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어떤 존재인지 신명기는 오늘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라,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것이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에게만 마음을 주시어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오늘 이처럼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자손들인 너희만을 선택하셨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아버지신데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마음과 사랑을 주시어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민족 가운데 선택된 민족 곧 선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은 사랑치 않고 이스라엘만 사랑하신다고, 이스라엘이 오해할까 봐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이방인들도 사랑하신다고 신명기는 또한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이 이러하시니, “너희도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신명기는 얘기하고, 아울러 괜히 선민의식 때문에 교만하지 말라는 뜻으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마라.”고도 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뽑힌 이유는 다른 민족들 위에서 거들먹거리고 무시하고 군림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경외하고 섬기고 사랑하듯이 그 백성도 사랑하고 섬기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제가 이 얘기를 길게 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 뜻을 모르고 잘못된 선민의식과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런 이유로 저는 이스라엘 족속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이 아닌 인간적인 이유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싫어하고 그래서 주님 때문이 아니면 이스라엘에 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에 비해서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성전 세를 내십니다. 성전 세를 받으셔야 할 분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권을 내려놓으시는 주님의 모범이지요.
이런 주님의 모범과 신명기의 가르침에 비추어 우리는, 아니, 저는 반성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 백성인 신자가 되고, 제가 사제가 된 것은 하느님의 크나큰 은총이고, 하느님께서 이 은총을 주신 것은 하느님의 다른 자녀들을 섬기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마치 부모가 큰아들에게 재산을 더 물려준 뜻과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것으로 조상들 제사를 책임지고 봉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자녀들 곧 형제들을 도우라는 뜻 말입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 신앙의 유산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다른 사람보다 먼저 소유하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먼저 알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내 것으로 꿀꺽 삼킬 것이 아니라 나눠야 하고, 나만 그 행복을 누릴 것이 아니라 같이 누리자고 이웃을 초대해야 합니다.
나만 행복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미안한 것입니다. 나만 행복한 것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도 아니고, 그러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유산도 아닙니다.
선교의 이유, 복음 선포의 이유가 여기에 있고, 선교의 사명, 복음 선포의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깨닫고 신명기 말씀처럼 우리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마음의 할례란 마음에서 교만이나 특권 의식 같은 것을 벗겨내고 마음에 연민과 사랑만 남게 하는 것이고 다른 이의 구원에 대한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꾸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사랑과 함께 마음을 주셨다고 신명기는 말하는데 그 마음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의 마음 곧 관심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이점을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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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별력의 지혜>
-사랑이 답이다-
어제 읽은 순교성인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한 “푸른하늘을(김수영;1960.6.15.)” 이란 시를 나눕니다. 주님의 전사로, 영적혁명가로 치열한 간고분투艱苦奮鬪의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수행자들이라면 즉시 공감할 것입니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 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내일 성모 승천 대축일을 앞둔 오늘은 만 47세에 순교한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20세기에 시성된 최근의 성인입니다. 폴란드인이자 꼰벤투알 프란치스코의 수도사제로 유난히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강했던 성인은 성모신심단체인 성모기사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성인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정복당한 폴란드에서 유대인을 숨겨주었다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끌려 갔으며 그곳에서 탈옥한 수감자를 대신하여 스스로 죽음을 자원하며 순교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1982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에게 '자비의 순교자'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시성식을 거행합니다. 그는 수감자들의 주보성인이기도 합니다. 그가 죽음을 자원하든 장면은 늘 읽어도 감동적입니다.
-“도망친 놈이 안 잡혔다. 너희중 10명이 저 아사감방에서 죽어야 한다”
수용소장은 10명을 .채워가고 있을 때, 그 대열에서 한 사람이 뛰어나오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나는 안돼. 나는 죽을 수 없어. 내가 죽으면 나의 처자식은 어떻게 살란 말이냐?”
그 숨막히는 상황에서 포로들의 대열을 뚫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오는 사람이 수용소장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합니다.
“저 사형수 대신 내가 죽겠소. 나는 처자식도 없고 쓸모없는 사람이오.”
“도대체 너는 누구냐?”
“가톨릭 사제요.”
“좋다, 함께 가라!”
그리고 그는 아우슈비츠 아사 감방에서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죽으니 그의 이름은 막시밀리안 콜베이다.-
사랑의 절정이요 분별력의 지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새삼 사랑은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사랑의 선택이, 사랑의 희생이 없었다면 콜베 신부는 성인이 되지 않았음은 물론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콜베 신부가 목숨을 구해준 가요브니체크는 1995년 3월13일 94세의 나이로 천수를 다할 때까지, 콜베 성인의 영웅적 사랑이 널리 알려지도록 세계 각지에서 강연했으며 시복식과 시성식에도 참여했습니다.
콜베 성인의 사랑의 선택과 죽음의 결단이 놀랍고 감동적입니다. 그의 평상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반영입니다. 다음 제1독서 신명기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마라.
주 너희 하느님은 신들의 신이고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얼마나 많은 이방인들, 이주민들이 살고 있는지요.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이방인들로 떠돌 때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었던 조상들의 모습을 상기한다면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과 무시도 많이 약화될 것입니다.
얼마전 지중해를 바라보며 난민들의 공동묘지가 됐다며 슬퍼하던 교황님 사진을 잊지 못합니다. 북아프리카에서 보트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온 난민이 지난해 9만명이며 9만 명은 지중해에서 난파되어 수장됐다는 것이니 말그대로 지중해는 이들의 공동묘지가 된 것입니다. 참 부끄럽고 슬픈 현실이자 오늘날 전인류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두 번째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고, 제자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합니다. 늘 당신의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이어 부활에 궁극의 희망을 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경천애인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셨던 주님이심을 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하느님의 시야를 지니고 살게 합니다.
오늘 성전세를 바쳐야 하는 문제를 주님은 이런 사랑에서 나오는 분별력의 지혜로 지체없이 해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성전의 주인이기에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바친다 하시며 다음 같이 명쾌한 답변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숫가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모두가 주님의 것이며 전능하신 주님께는 기적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초점은 자연이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성전세를 바친다는 것입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 작은 것을 탐내다가 크게 잃는다는 사자성어가 생각납니다.
모든 덕이 어머니가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불필요한 문제를 야기시키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라는 말씀입니다.
일의 성취를 위한 세 필수적 전제 조건이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이라 하는데 균형감각이 바로 분별력의 지혜에 해당되겠습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분별력의 지혜는 은총의 선물이자 사랑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가기 때문에 분별력의 잣대는 사랑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주님의 전사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바둑은 인생사의 축소판이라 합니다. 바둑의 십계명이라 할 수 있는 위기십결, 역시 삶의 지혜, 분별력의 지혜에 좋은 도움이 된다 싶어, 영적승리의 삶을 위해 필요하다 싶어 나눕니다.
1.부득탐승(不得貪勝) : 승리를 탐하지 마라
2.입계의완(入界宜緩) : 상대의 세력권에 깊이 들어 갈 때는 여유를 가져라
3.공피고아(攻彼顧我) : 공격하기 전에 먼저 나를 돌아보라
4.기자쟁선(棄子爭先) : 희생하더라도 선수를 쟁취하라
5.사소취대(捨小就大) :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6.봉위수기(逢危須棄) : 위기에 봉착하면 불필요한 것은 버려라
7.신물경속(愼勿輕速) : 서두르지 말고 신중 하여라
8.동수상응(動須相應) : 흐름을 타라
9.피강자보(彼强自保) : 상대가 강한 곳에서는 자중하라
10.세고취하(勢孤取和) : 고립되었을 때는 화친하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분별력의 지혜와 사랑을 주시어 우리 모두 삶의 현장에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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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마태17,22-23)
<대신 죽는 삶!>
오늘 복음(마태17,22-27)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는 말씀과 성전세를 바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랑의 순교자이신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신부님은 폴란드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형제이셨고, 성 프란치스코의 세 수도회(작은형제회.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카푸친 작은형제회) 중에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이십니다.
콜베 신부님께서는 성모신심이 크셔서 원죄 없으신 성모기사회(1917년)를 만드셨고,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때에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선교(1930-1936년)하셨습니다.
"내가 대신 죽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콜베 신부님의 찬란한 영광은 폴란드의 나치 침공 때, 유다인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죽음의 형무소라고 불렸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써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신 일입니다. 탈옥 사건의 벌로 열 명이 죽게 되었을 때, 가족들을 생각하며 울부짖는 한 형제를 대신해, "내가 대신 죽겠다."고 자원하셔서, 아사(餓死)의 형벌로 순교하셨습니다.
'대신 죽는 삶!'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대신 죽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친구인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기 때문이고,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3)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너를 위해 죽어야 생명을 얻는, 내가 죽어야 부활하는 '신비의 신앙이요, 역설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리고 예수님의 뒤를 그대로 따라간 콜베 신부님처럼, 우리도 벗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이웃을 위해 나를 내어놓는 순교의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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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5IoQ0XUVZ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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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렇다면 자녀들을 면제받는 것이다."(마태 17, 26)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서로를 가두는
감옥과
무덤에서도
사랑의 꽃은
피어납니다.
사랑은
버텨주고
받쳐주고
내빼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을 지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빛과 소금의
정체성을 다시
만납니다.
우리의 삶에서
치러야만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고통은 사랑을
성장시킵니다.
삶에서 만나는
참된 사랑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으로
우리는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아픔을 치유하고
사랑을 보호하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진실한 뜻과
진실한 실천은
가장 혹독한
시대를 뛰어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됩니다.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는 사랑을
성 콜베 사제는
온 삶으로
실천하십니다.
희망을
지키는 것은
또 다른
희망입니다.
삶이 죽어가는
비명과 통곡을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저앉아버린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희망이 사랑입니다.
세상의 적(敵)은
언제나 우리의
무관심이었습니다.
사랑의 여정을
지켜낸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살다 떠날 지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에게서
뜨겁게
배웁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고통스레
죽어간 소중한
분들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역사는
무관심이
빚어내는
살육의 역사가
아닌
사랑의 역사로
바꾸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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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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