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9일(화)
* 시작 기도
주님...
날 때부터 소경된 것은 누구의 죄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그를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요 9:3).
그리고 그의 눈에 주님께서 당신의 침을 뱉어 이긴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신 것은 영적으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유대인을 표상하여 하신 것임을 압니다.
나 역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자였습니다.
날 때부터 눈 먼 소경과도 같았고, 내가 바로 자기들만 아는 자기주장의지로 가득한 유대인이었습니다.
내가 가야할 곳은 분명했으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나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사 도도히 흐르는 구원의 물줄기를 바꿔주셨습니다(롬 11:11).
그것이 주님의 은혜이며 긍휼이요 사랑이었음을 나는 미처 알지 못하였나이다.
이런 미련한 나를 맑은 물 곧 주의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시고 새 영과 새 마음을 내 안에 주시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옵소서.
소경된 자로 살 때에는 온 세상이 깜깜하여 소망이 없었지만, 이제 영의 눈을 떠 주님을 보게 되었나이다.
하지만 여전히 육신의 눈으로 세상에 한 눈을 팔고 살까 두렵사오니 주님을 보는 눈 외에는 소경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입술 외에는 벙어리가 되게 하소서.
주님을 떠나 살지 않도록 차라리 앉은뱅이와 같은 불구자가 되게 하소서.
오늘이라는 이 하루를 주님 안에서 살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 불구자로 서는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잠 27:1-12
제목 : 복음은 만물 위의 세계를 살게 하시는 신비요 비밀입니다.
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2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
3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돌보다 무거우니라.
4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5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6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7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8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9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10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11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으리라.
12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 나의 묵상
(6)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아픈 책망이란 타박상이나 상처를 말한다.
친구가 하는 책망이 마음에 상처를 낼 정도로 아프지만 그것은 나를 향한 사랑과 애정에서 비롯되었음을 말씀한다.
그러나 원수의 호의와 달콤한 말은 악의에서 비롯된 거짓 행동임을 지적한다.
세상, 즉 다수의 사람들은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달콤한 것, 편한 것, 쉬운 것, 큰 것, 넓은 것, 화려하고 럭셔리한 것, 쾌락(fun) 등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끝은 멸망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크고 넓은 길은 화려해 보이고 럭셔리하기 때문에 눈에 보기에 좋아 보인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은 생명이 아니라 멸망이다.
하지만 좁은 길은 볼품없고 협착하여서 찾는 이가 적지만, 그 길이 진짜다.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다름 아닌 십자가요, 그리로 인도하는 길은 복음의 길이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고 참혹하며 죽음이다.
그러나 그 길이 바로 복음의 길, 즉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주는 생명의 길인 것이다.
사람들은 복음을 듣기 싫어한다.
마치 복음을 전하면 자신이 실패한 사람 같고, 자신의 아픔을 파헤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에 걸린 사람은 수술을 해서 암세포를 잘라내야 하는 것이지, 그냥 덮고 빨간 약 바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픔을 수용하라고 가르친다.
십자가 복음은 이전에 쾌락을 즐기며 살았던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또한 현장에서 죄를 짓던 죄의 몸은 불구자라는 왕의 명령을 받아 이제는 옛날처럼 살 수 없는 자라는 사실 앞에서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장사 복음은 나에게 닥친 고난과 시련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이겨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나 혼자 그 고난의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고난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 고난이라는 무덤 안에 말씀과 함께 들어갈 때 그 안에 먼저 와 계시는 주님께서 그를 품어주신다.
그 무덤 안에서 주님과 말씀으로 깊은 교제와 사귐을 가질 때 주님께서 참된 평안을 주신다.
상황은 변한 것이 없고 여전하나 그 심령은 말할 수 없이 평안하고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 때 누리는 기쁨이 진짜요 바로 하늘의 기쁨이다.
이 하늘의 기쁨은 땅의 고통을 넉넉히 삼킨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 지기를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또한 그 고난의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그 고난을 수용하라는 복음을 전하면 두려워하고 공포에 떤다.
이는 자신의 이름이 비난 받는 것과 함께 당할 고난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고난당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 믿음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과 또한 아버지께서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 즉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되 감당할 시험과 피할 길도 허락하신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따라서 아버지가 자녀에게 고난을 주신다면, 그것은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에 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볼 때는 감당하기 힘든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에게 주신 아버지는 넉넉히 그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그리고 그 시험이라도 넉넉히 피할 길도 주신다.
여기서 말하는 피할 길이란 고난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그 고난의 무덤에서 생명이 피어나는 것을 말한다.
작금의 교회의 현실은 복음을 따라가는 좁은 문이 아니라 세상의 화려함을 따라가는 넓은 문을 가려하기 때문에 심히 안타깝다.
모두가 크고 화려한 목회를 꿈꾸며, 예배당을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어 mega church를 끊임없이 지향하여 달린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미명하에 사람들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고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작은 교회, 개척 교회, 미자립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들의 꿈은 이런 대형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생명을 건다.
진짜 복음과 생명을 전하지 않는다.
그들이 볼 때는 복음을 전하면 교인들이 떨어져 나갈 것 같기 때문에 감히 전하지 못한다.
물론 몰라서 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바로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전하지 못했고, 단지 선배 목사들의 목회를 보고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목회인줄로 착각하였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떨어져 나간다는 불안함은 결국 교인들의 숫자가 목회를 하는 목사의 발목을 붙잡고 거기서 자유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대부분 격려하고 위로하며 칭찬과 응원 일색이다.
고난당할 때 고난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하기는커녕, 그들이 듣기에 좋은 소리, 위로 받을만한 말, 지금 잘 하고 있다면서 칭찬하는 소리에 성도들은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6절 말씀처럼 원수의 잦은 입맞춤이 그를 속게 만드는 거짓에서 비롯된 것이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법이다.
배구를 보면 선수들을 수시로 빼고 넣기도 한다.
감독이 코트에서 선수를 빼는 것은 주로 잘못하는 선수를 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팀의 에이스는 항상 선발로 나가고 또한 풀타임을 소화한다.
그런데 그 선수가 한두 번 실수를 하게 되면 감독은 그 선수를 빼서 벤치에 앉혀 둔다.
그 선수는 자존심도 상하고 기분도 좋지 않지만, 벤치에 앉아서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다른 선수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실수를 번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감독의 전술이다.
감독의 지시가 그 선수에게는 비록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그런 채찍이 자신을 바르게 세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에게 교인이 줄어든다는 것은 자신의 살점을 떼어내는 것과 같은 아픔이다.
이 고통은 모든 목사들의 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이 숫자에 연연하면 참 복음을 전하기가 어렵다.
나 역시 숫자에 민감하여 한 사람이라도 떨어져 나갈까 봐 항상 전전긍긍하던 자였다.
숫자가 줄어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성도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그들의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마음이 아플지라도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에 책망도 해야 하건만, 나는 대부분 칭찬과 격려 그리고 위로하는 목사였다.
언제까지나 등을 토닥거리면서 힘을 북돋워주는 그런 목사였다.
성도들에게는 좋은 목사요 목회를 잘하는 목사로 소문이 나고 칭찬도 받았다.
그런데 성도들의 신앙의 수준은 항상 제자리걸음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생명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생명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나타나는데 복음을 듣지 못하니까 언제나 위로 받는 설교, 칭찬 받는 말만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바꿔 말하면 내가 생명으로 살지 못했으며 또한 생명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인 복음이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복음을 전하는 목사이다.
교인 숫자에 민감하지도 연연해하지도 않는다.
국내 목회를 접고 지금은 베트남에서 한인 목회를 하고 있다.
더 이상 줄어들 교인도 없다.
단지 내가 목양하는 이 양들이 정말 복음을 통해서 아들의 생명으로만 살 수 있다면 더 원할 것이 없다.
아들의 생명으로 살아 이 땅에서 더 원할 것이 없이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삶, 그것이 바로 영생이기 때문이다.
(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은 말씀 묵상을 통하여 날마다 그의 영광을 보며 그 안에 거하는 것이요, 그 영광에 들어가면 진짜 더 원할 것이 없는 자가 된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 자리가 바로 주님께서 함께 하는 자리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들이 누릴 자리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영원의 시간을 뚫고 이 세상의 시간에 틈입하여 오시는 아버지의 영광은 나로 하여금 창세전, 만물 위의 세계를 살게 하시는 신비요 비밀이다.
나는 오늘도 그 신비를 맛보며 살아간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복음은 단순한 격려와 위로가 아니라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 고통을 통하여 참 생명을 얻나이다.
세상도 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고 말들을 하는데, 참 생명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 믿는 자들이 고난을 외면하고 멀리하고 있나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믿게 하셨고, 정말 내게 주시는 고난과 시련이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요 그 안에서 생명이 피어나는 것을 깨닫게 하셨나이다.
고난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무덤에서 주님과 함께 그 고난에 연합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그 안에서 생명으로 살아 세상에서 더 원할 것이 없게 하소서.
세상의 재미(fun)가 아니라, 하늘의 기쁨(joy)을 누리는 자 되게 하소서.
오직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로 만족하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