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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아펜젤러, 언더우드를 도와 한국 개신교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며
근대 교육이 조선땅에 뿌리내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더불어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미국에서 서재필, 이승만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속하기도 했다.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는 이러한 그의 일생을 숨가쁘게 써내려간 전기문이다.
파란눈의 한국인 헐버트 김동진 지음 참좋은 친구 2010
31 1886년 5월 21일 미국 서부,
태평양을 넘나드는 유일한 항구도시이자 대륙 횡단철도의 기점인 샌프란시스코에
헐버트, Dalzell A. Bunker, 그리고 아내를 동반한 George W. Gilmore가 모였다.
그들은 드디어 6월 1일
5천 톤급 10노트 속력(시속 18킬로)의 소형 증기선 ‘City of Peking’에 몸을 싣고
일본 요코하마로 향했다.
소형 증기선으로, 더군다나 10노트의 느린 속력으로 태평양을 건넌다는 것이 몹시 불안했지만, 난생처음 대양 항해를 경험하는 젊은이들은 호기심과 함께 마음이 들떠 있었다.
북경호는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지 18일 만에 태평양을 건너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42 일본은 툭하면 일제 강점기를 통하여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에 공헌했다고 한다.
이러한 망언에 대해 우리가 꼭 던져야 할 질문은 “누가 일본더러 우리나라를 근대화시켜 달라고 했던가?”이다. 우리는 이미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가 우리의 자주적 발전의 기회를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51 다트머스 대학이 한국과는 참으로 인연이 많은 대학인 것 같다.
헐버트가 다녔던 다트머스 대학은
2009년 7월 1일 한국계 미국인 Jim Yong Kim 박사를 17대 총장으로 영입하였다
[그 김용은 오바마와 손잡고 세계은행총재을 2016년 연임까지 하고 있(었)다].
55 헐버트가 내한한 1886년 7월 서울은 콜레라가 창궐하여 도성 안에서
매일 1천 명이 넘게 죽어갔다.
헐버트는 비망록에 ‘언더우드 집 근처에 있는
昭義門이 아침에 열리면 매일 300~400구의 시체가 치워졌다.’라고 기록하였다. (서소문)
58 育英公院 학생 중에는 역적 이완용도 있었다.
헐버트는 회고록에서 ‘이완용은 고종을 폐위하는 데 앞장선 일본의 앞잡이’라고 비난하며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독립군을 배신하고 영국 제국군 편을 든
Benedict Arnold (장군)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61
1885년 8월에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배재학당이 학생 2명으로 시작하였고,
이듬해인 1886년 6월 선교사 스크랜턴 부인에 의해 이화학당이 학생 1명으로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대학 중 가장 오래된 연세대학교는 1885년 4월 10일을 개교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종의 후원으로 알렌이 설립한 廣惠院의 창립에서 비롯되었다.
광혜원은 13일 후인 4월 23일 濟衆院으로 개칭되었다.
제중원은 후일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고,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연희대학교와 통합하여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세브란스 병원은 미국인 Louis H. Severance가 1900년에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인 수만 달러를 기부하여 건립되었다.
세브란스는 고귀한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소위 ‘noblesse oblige’ 정신을 100년 전에 실천한 사람이다.
62 영어 발음 교정에 정성을 다해 헐버트는
영어를 가르칠 때 학생들이 f와 r 발음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했다.
헐버트는 자음이 계속 붙어 있고,
그 사이에 모음이 없으면 학생들이 발음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학생들이 strong을 발음하면서 ‘스 트 롱’이라고 세자로 끊어 발음하였으며
str을 붙여서 발음하는 것을 힘겨워했다.
단어와 단어의 연결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예를 들면 학생들이 will not을 willlot으로 발음하여 이러한 연음 현상을 교정하는 일에
헐버트는 애를 먹었다.
63 헐버트를 비롯한 미국인 교사들의 월급은 미국 금화 125달러였다.
이 금액은 조선의 현실에서는 큰돈이었다.
조선 관리들은 미국인 교사들에게 첫 월급을 금화 125달러 상당의 조선 화폐인
常平通寶 엽전으로 지급하였다.
교사들은 Mexican dollar로 바꿔야 그 돈을 쓸 수 있었기에 엽전을 시장으로 운반해야만 했다.
당시 조선 엽전 5,000개가 금화 한 개의 가치였으니
엽전의 부피가 어마어마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엽전을 옮기는데 말이 20여 마리나 필요했을 정도였다.
교사들은 관리들에게 다음부터는 월급을 멕시코 은화로 달라고 했다.
그러나 멕시코 은화는 위조화폐가 너무 많아 안전하지 않았다.
교사들은 다시 수표로 달라고 하여 그 후로는 일본 다이찌은행 수표로 월급을 받았다.
65 사상 초유의 임금이 직접 주관한 시험 시험은
고종이 직접 물어보고 답변 여하에 따라 4등급으로 나눠 직접 등급을 매겼다.
고종은 등급을 매길 때마다 교사들에게 자기의 평점이 맞는지를 확인하였다.
그런데 시험문제에 답하는 도중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다.
어떤 학생이 문제에 답하기를 ‘I do not know.’ 대신에 “I don’t know.”라고 했다.
이 학생은 ‘do not’ 대신에 줄임 말인 ‘don`t’이라고 대답하면서 실력을 과시한(?) 것이다.
그러자 고종은 답이 틀렸다고 했다. 그 순간 헐버트는 당황했다.
헐버트는 고종에게 ‘don`t’는 ‘do not’의 준말이니 맞는다고 설명하였다.
고종은 헐버트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72 헐버트는 육영공원에서 학생들에게 서방세계, 우주 등을 가르치면서 교재용 책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조선에 온 지 3년 만인 1889년
세계 지리, 천체, 각국의 정부 형태, 풍습, 산업, 교육 및 군사력 등을 망라한 총서를
한글로 저술하여 교과서로 사용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가 탄생한 것이다. 헐버트는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며 책 이름을 ‘士民必知’ 라 했으며, 영어로는 ‘Knowledge Necessary for All’, ...
77 헐버트는 서문 원문 끝에 자신의 이름을 영어 발음대로 ‘헐벗’이라고 한글로 표기 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 사람들은 그를 ‘헐버트’라 불렀으며,
우리 정부도 건국 공로훈장 수여시
‘헐버트 박사’라고 표기하였기에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그의 이름을 ‘헐버트’로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82 헐버트는 교육에서 3육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신문》에 한글로 기고한 <한국의 교육>이라는 글에서
心育, 智育, 體育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90 헐버트는 후일 미국에서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서신에
‘일본은 한국말로 된 어떤 한국 역사책도 없기를 바랐다.
일본 경찰이 영장도 없이 출판사를 급습하여 《대한력사》 책 전체를 몰수하여 불태워 버렸다.
95 언더우드, 아펜젤러와는 평생 친구였으며 뜨거운 동지였다.
언더우드가 병환으로 스위스에서 요양할 때는 그곳까지 찾아가서 쾌유를 빌었다.
아펜젤러가 1902년 6월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경번역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도중
그가 탔던 배가 제물포 남쪽 약 85마일 해상에서 다른 배와 충돌하여 난파되었다.
그 사고로 아펜젤러가 사망하자 헐버트가 발행하고 있던
《한국평론》은 사고의 경위와 함께 추모의 글을 실었다.
107 YMCA는 우리 민족사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한 개화, 구국 운동 단체이다.
YMCA는 1844년 역사상 최초로 영국 런던에서
격심한 정치적 변동과 산업혁명의 와중에 탄생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적, 사회적 격동기인 1899년부터 Y운동의 요구가 태동하여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립되었다.
YMCA 국제위원회는 1901년 P.L. Gillette를 한국에 파견하여
YMCA 창립의 준비 작업을 시켰다.
질레트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YMCA Advisory Committee를 조직하였으며,
헐버트가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한국평론》 1903년 4월호 사설을 통해
한국 청년들은 총명하고 열정이 넘치지만 갈 데가 없어 방황하며 허송세월만 하고 있으니,
이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교육의 장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갑오개혁 당시의 과거제도 폐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과거제도 폐지 자체는 찬성하나 아무런 대안 없이 폐지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그는 ‘고려 광종 9년인 958년부터 시작하여 거의 1천여 년의 전통을 가진 관리의 등용문인 과거제도를 아무런 대안도 없이 폐지하니 청년들이 방향을 잃고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다.’라면서
Y운동을 통한 청년교육 강화를 시급한 과제로 보았다.
117 세종 대왕의 민본 사상까지 파헤친 최초의 논문 헐버트는 1889년 《사민필지》를 한글로 저술하면서 한글의 우수성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심취하게 되며 특히 한글의 태동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였다.
그는 1892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월간지 《The Korean Repository》
창간호 [1월호]에 <The Korean Alphabet>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9쪽에 걸친 이 논문에서 헐버트는 ‘언어는 자연적 산물이고 문자는 인공적 산물이다.’라며 서두를 시작하였다.
118 헐버트는 <한글> 논문에 이어 《한국소식》 1892년 3월호에 <The Korean Alphabet Ⅱ>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8쪽에 달하는 이 논문은 같은 해 1월호에 기고한 논문 <한글>의 후속판이다.
이 논문에서 헐버트는 한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주로 다루었다.
그는 문자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한글의 구조를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와 비교하여 세밀하게 차이를 분석하였다.
그는 ‘한글은 문살문에서 찾지 못하는 것이 없다.
지금의 동그라미가 원래 세모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말은 사실이며
자음과 모음 모두를 문살문에서 찾을 수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다면 ‘이보다 더 간단하게, 이보다 더 과학적으로 발명된 문자 시스템은 없다.’ 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20 그는 1903년 세계 유명 학술지에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기고했다.
그는 자신이 발행하고 있던 《한국평론》 1902년 10월호에 <The Korean Language>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 논문을 미국의 Smith Institution에 보내 미국 정부 및 의회에 보내는
1903년 Annual Report의 학술 논문 난에 수록하였다.
헐버트는 그 논문에서 한글의 창제 과정 및 한글의 우수성을 소개하였다.
그는 결론 부분 마지막 절에서 ‘한글은 대중 의사소통의 매체로서 영어보다 우수하다 Korean surpasses English as a medium for public speaking.’라고 한글에 방점을 찍었다.
이 논문은 한글의 우수성을 국제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글이다.
121 헐버트는 자신이 발행하고 있던 《한국평론》1903년 3월호에 집현전 학자이자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이름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밝혔다.
헐버트는 여러 글에서 성삼문을, 모음과 자음을 구분하는 등
한글 창제에 가장 공이 큰 학자로 보았다.
성삼문이 태어나기 직전 성삼문의 아버지는 하늘로부터 세 번의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첫 번째 질문은 성삼문이 태어나기 전 지붕 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면서 아들이 태어났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성삼문의 아버지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다음 날에 또 소리가 들리면서 같은 질문이 왔다. 또 아니라고 답변했다.
셋째 날 똑같은 질문이 왔다.
그때 성삼문의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났다고 답변하면서 왜 세 번 질문했느냐고 하늘에 물었다.
하늘에서 대답하기를 첫 번째 질문하는 날 태어났다면
그 아이는 ‘세계에서 가장 축복받는 사람이 될 것’이고,
두 번째 질문하는 날 태어났다면 그 아이는 ‘조선에서 가장 축복받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하는 날 태어난 아이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영예를 같이 나눌 수 있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성삼문의 아버지는 세 번의 질문이 있었다는 뜻에서 아들 이름을 三問으로 지었다고 했다.
헐버트는 그 글의 끝 구절에서 ‘실제로 성삼문은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아들 중 하나였으며,
한글 창제에 크게 공헌하여 모든 사람이 훌륭한 문자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라며
세 번째 질문의 의미와 똑같은 인물이 되었다고 했다.
[아마도 고전의 ‘一日三省'을 누군가 현대적으로 해석해 헐벗에게 이야기해 준 모양이다]
123 주시경과 헐버트
세종대왕 이래 한글 역사에 가장 빛나는 학자가
주시경이라고 많은 사람이 일컫는다.
헐버트와 주시경은 배재학당에서 선생과 학생으로 만났다.
주시경은 헐버트가 책임지고 있던 감리교 출판 기관인 삼문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했다.
두 사람은 학교생활을 통해,
그리고 한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정을 돈독하게 쌓았으리라 짐작된다.
특히 헐버트가 1889년에 《사민필지》를 한글로 저술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설파하였고,
1892년 <한글>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기에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한 주시경이 한글과 관련하여
헐버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리라 여겨진다.
헐버트와 주시경이 함께 추진했던 사업으로 추정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글의 ‘띄어쓰기’와 ‘점찍기’다.
《독립신문》 발간 이전까지만 해도 한글 표기에 띄어쓰기가 없었다.
한글 학계에서는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탄생과 함께
서재필, 주시경이 최초로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영어에는 띄어쓰기가 있고 점도 찍는 것을 볼 때 한글 발전에 진력했던
헐버트는 주시경과 이 부분에 대해 많은 논의를 했을 것이고,
그러한 논의가 띄어쓰기와 점을 찍는 제도를 새로이 도입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헐버트가 공동 편집인으로 있던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
1896년 1월호 학예란 Literary Department에 <Commas or Spacing>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이 시기는 《독립신문》 창간 몇 달 전이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점찍기와 띄어쓰기를 시도해 보면 한글을 편하게 읽을 수 있다면서
띄어쓰기가 필요한 예를 들었다.
‘장비가 말을 타고’라는 문장이 띄어쓰기가 없으면 ‘장비 가말[가마]을 타고’로 읽힐 수 있다고 했다. 이 글이 실린 학예란은 편집자의 코너다.
그 글의 끝에 T.H.Y라는 글쓴이의 필명이 나온다.
T.H.Y가 누구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한국소식》 편집실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한 사람으로 보인다. 필자는 그 사람이 윤치호라고 생각한다.
-헐버트의 제자 오성근이 남긴 메모 형태의 일기. 윤치호, 주상호 등의 이름이 보인다.
주상호는 주시경의 원래 이름이다.
127 앞으로 한글 연구가들이 헐버트의 논문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그의 한글 사랑뿐만 아니라, 논문의 질적 수준에 대해서도 객관적 평가를 내려
헐버트의 한글에 대한 업적이 올바르게 평가되기를 바란다.
132 외국에 나가 아리랑을 들으면 우리는 기쁨에 겨워 들뜨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이 찡해지기도 한다. 아리랑은 우리에게는 혼이요,
한과 희망이 공존하는 정신적 모태이다.
그런 아리랑에 최초로 음계를 붙인 사람이 헐버트다.
헐버트는 1896년 구전의 아리랑을 악보가 있는 아리랑으로 변화시켜 현대적인 아리랑 시대를
탄생시켰다.
그는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 1896년 2월호에 <Korean Vocal Music>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9쪽에 이르는 이 논문에서 아리랑에 서양 음계를 붙인 악보를
우리나라 최초로 선보였고, 아울러 시조 ‘청산아’와 경기민요인 ‘군밤타령’도 음계를 붙여
소개하였다.
헐버트는 이 논문에서 ‘아리랑은 한국인에게는 쌀과 같은 존재다.’라고 아리랑의 의미를 정의했다. 우리의 주식인 쌀에 아리랑을 비유한 것이다. 이는 그가 한국인들이 가진 아리랑에 대한 정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헐버트는 1906년에 출간된 《대한제국멸망사》에서 서민의 노래의 대표곡으로 아리랑을 제시하며 음계를 붙여 소개하였다.
134 본론에서는 한국에는 상류층 양반들이 부르는 ‘時調’, 서민들이 부르는 ‘아리랑’,
그리고 중간층이 부르는 ‘군밤타령’이 있다고 한국 성악을 분류하였다.
그는 ‘아르’의 어원에 대해 몇몇 사람에게 물어보았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아르’란 러시아를 뜻하는 ‘아라사’의 ‘아라’로 국기의 운명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어떤 이는 아리랑이 한자에서 왔으며 ‘나의 사랑하는 낭군 I love my husband’을 의미한다는 답변을 하였다고 기술했다. -아리랑 전문가 김연갑은 ‘나의 사랑하는 낭군’의 한자를 ‘我離郞’ 이라 했다.
136 아리랑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한민족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상임이사는 헐버트의 아리랑에 대한 기여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헐버트에 의해 아리랑이 우리 역사,
적어도 근대사에서 분명한 역사의 노래로 존재했음을 확인했다.
아리랑이 세계의 노래라는 위상을 갖고 있다면 그 배경에는 헐버트의 기여가 있었다.
이미 1세기 전에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으로서 한국음악을 독립적으로 다루어
오늘의 아리랑과 세계화를 예시한 것은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이 아니겠는가?
이러함에 우리가 아리랑 어록비를 세우게 된다면
그 제1호는 당연히 ‘헐버트 박사 아리랑 노래비’일 것이다.’
143 서재필은 미국에서 귀국한 지 4개월 만에
헐버트의 인쇄, 출판에 대한 전문 지식과 신문 제작에 필요한 인쇄 시설,
기술자 등을 십분 활용하며
1896년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탄생시켰다.
동국대학교 한철호 교수는 ‘서재필이 단시일 내에 한글과 영문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삼문출판사의 시설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독립신문》은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나누어 발행하였으며, 영문판은 헐버트가 사실상의
편집인이었다. [Dr. Jayson took charge of the Korean part and I assumed the English part]
155 그는 회고록에, ‘《Hermit Nation》 저자 William E. Griffis는 조선을 한번도 와 보지 않고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에 대한 책을 썼다.
조선에 직접 와 보지도 않고 일본 사람이 조선에 대해 쓴 글이나 이야기만 듣고 책을 썼기에
그 책은 진정한 조선과 조선 사람의 모습을 담을 수 없었다.’라고 기록하였다.
헐버트는 또 그 책은 유용한 정보도 있지만 너무 많은 오류를 기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헐버트는 ‘Morning Calm’이라는 말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한국소식》 1896년 5월호에서 헐버트는 ‘朝鮮’이란 말을 ‘Morning Calm’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주장하였다. 鮮의 의미는 ‘조용하다’라는 calm의 의미가 아니라 ‘곱다, 아름답다, 빛을 발하다’라는 뜻이며
‘朝鮮’은 ‘서광이 비치는 아름다운 아침’이라는 뜻이라고 정확히 조선의 뜻을 이해했다.
굳이 영어로 번역한다면 ‘Morning Radiance’나 ‘Radiant Morning’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말 감탄할 정도로 ‘朝鮮’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헐버트의 지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56 ‘한국은 난쟁이 나라가 아니다’ 헐버트는 1902년 그리피스에게 그의 한국에 관한 기고문과 관련하여 직설적으로 도전하였다.
그리피스가 한국을 방문도 안 해보고 ‘hermit’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헐버트의 마음이 상해 있는 판에 이보다 더한 일이 벌어졌다.
미국 동부 지역에서 발행되는 《New England Magazine》라는 잡지에
그리피스가 한국에 대해 기고를 하면서 그 제목을 <Korea, the Pygmy Empire>이라고 하였다.
그 기고문의 제목이 헐버트를 분노케 했을 뿐만 아니라, 기고문의 내용도 헐버트를 불쾌하게 했다. 헐버트는 《한국평론》 1902년 7월호에 그리피스 기고문에 대한 반박의 글을 썼다.
미국에서 ‘Pygmy’라는 단어는 아프리카의 왜소한 흑인종을 가리키면서
일반적으로 ‘작고, 지능이 낮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었다.
그는 반박문에서 ‘그리피스의 기고문 <한국, 난쟁이 제국>에는 한국의 미개한 사회적 풍속을 담은 사진도 많이 실려 있어 미국인들이 이 기고문을 읽게 되면
한국인이 마치 미개하고 지능이 낮은 열등 민족으로 비춰질 것이 뻔하다.’라고 분노를 표했다.
뿐만 아니라 그리피스 기고문 내용에는 오류가 너무 많았다.
백두산 천지의 수원지를 압록강과 두만강이라고 했으며 한국의 인삼 경작, 식물분포, 사회현상이 너무 왜곡되어 있었고, 많은 지명과 인명을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했다.
조선을 Chosen이라 했으며, 백제를 Hiaksi라 했다.
헐버트는 이 글에서 한국은 지금 개화를 앞당기고 있고,
정치형태도 변화하고 있어 더 이상 은둔 국가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그리피스에게 한국에 와 보고 한국에 대한 글을 쓸 것을 주문하였다.
헐버트는 글의 끝부분에서 ‘그리피스가 제목에 Pygmy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영토도 프랑스만큼 크고, 인구도 스페인의 1.5배가 되는 한국을 지능적,
신체적으로 아프리카의 토인 같이 표현하여 한국이 업신여김을 당했다.’라고 분개했다.
그가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었음을 읽을 수 있다.
163 대마도는 본디 신라의 속지
《한국사》에는 일반적인 역사 기술 외에도 고조선 시대의 강역 설정,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의병과 이순신 장군의 참모습,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다룬 ‘히로시마 재판 판결문’ 전문 등
우리가 흔히 접하지 못했던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자료들이 담겨 있다.
이 책은 또 대마도는 본디 신라의 속지였으며, 대마도의 땅이 척박하여 신라로부터 원조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헐버트가 《한국사》를 쓸 때는 한·일 간에 독도나 동해 문제가 전혀 거론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헐버트의 대마도에 대한 기술은 순수 역사 자료에 근거한 기록이며,
우리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165 필자는 《한국사》에 대한 한국 사학자들의 평가를 아직 들어 본 적이 없다.
헐버트의 한국 역사 연구시기로 볼 때, 그리고 헐버트가 참고한 책들이 순수한 우리나라 역사책이었음에 비추어 《한국사》는 일본 사관에 영향 받지 않고 순전히 우리 역사를 바탕으로 썼다고 생각한다. 그는 또 외국인으로서 이해관계나 정파에 구애받지 않고 객관적으로 역사를 기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점들이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170 한국 문제를 세계적으로 부각시킨 《대한제국멸망사》
헐버트는 이 책에서 자신의 모국인 미국을 거세게 비난하는 용기를 곳곳에서 보여 주었다.
그는 을사늑약 후 미국의 처신에 대해 ‘한국에 어려움이 닥치니
미국이 제일 먼저 한국을 저버렸다.
그것도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인사말도 없이 When the pinch came we were the first to desert her, and that in the most contemptuous way, without even say good-bye.’라면서 을사늑약 직후 공사관을 맨 먼저 철수한 미국을 비난하였다.
이어서 그는 ‘한국의 충신들이 나라를 잃은 분노로 자결을 하는 마당에
미국 공사는 정의를 짓밟는 자들과 샴페인 잔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라고 미국 공사를 질타했다.
178 헐버트가 왕립아시아학회 한국 지부 회부에 기고한 논문 <한국의 유산>의 일부.
헐버트는 ‘백제’는 한국인에 의해 세워졌으며, ‘서라벌’도 순수한 한국말이라고 했다.
서라벌을 ‘徐耶伐’로 표기했다.
179 헐버트는 ‘다듬이질을 보라!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독창성을 대표하는 것 아니냐?’라면서
게일의 주장은 견강부회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의 유산은 독창적이고 토속적이며 중국과 닮은 것은 예외일 뿐이다.
The points of similarity with the Chinese are the exception and that survivals of things purely native and indigenous are the rule.’ 라고 논문을 결론지었다.
헐버트는 참으로 심도 있게 한국의 독창성을 파헤친 사람이다.
한편, 헐버트는 회고록에서 ‘서울’이라는 이름이 ‘서야벌’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했다
the name Seoul was probably derived from So-ya-bul.
180 그는 1899년 《포럼》지에 기고한 <한국과 한국인>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한국이 지정학적으로 기묘하게도 중국, 일본, 러시아에 둘러싸여 힘겨운 삶을 살고 있으며
그들로부터 얻은 것은 약탈뿐이다.’라고 했다. 한국은 이웃을 잘못 만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관료들의 수구적 자세와 공공 의식 결여를 지적했다.
181 헐버트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뉴욕에서 발행된 정치, 사회, 환경, 문화 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사를 다루는 유수의 월간지인 《Harper’s New Monthly Magazine》지에
1902년 < Korean Invention>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7쪽에 달하는 이 글에서 ‘만약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면, 필요에 대한 인식은 발명의 아버지다.’라고 서두를 시작하였다.
이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설명하고 한국이 일구어낸 세계적 발명품 다섯 가지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첫째, 조선 태종 시대에 이동식 금속활자 movable metal type를
한국이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고 했다.
둘째, 거북선이라 불리는 철갑선tortoise war-ship을 세계 최초로 한국이 발명하였다고 했다. The enemies deemed the tortoise boat to a work of superhuman origin.
셋째, 한국이 현수교suspension bridge를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고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평양에 진주해 있던 일본군들이 남쪽으로 도망을 가자 이를 쫓던,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임진강에 도달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들이 안전한 다리가 없으면 강을 건널 수 없다고 버티자
조선 군사들이 현수교를 만들었다고 했다.
헐버트는 ‘급할 때는 항상 빼어난 창의력 발휘하는 조선 병사들이
칡넝쿨을 이용하여 나무를 묶고, 나룻배를 이용하여 다리를 건설하였다.’라면서
한민족의 창의성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리의 길이는 150야드나 되었고, 12만 명나라 군사와 조선 군사가 현수교를 건넜다고 했다.
넷째, 한국이 세계 최초로 폭탄 bomb and mortar을 만들었다고 했다.
(조선시대 이장손이 발명한 飛擊震天雷를 말한다) 다섯째,
한국은 순수한 소리글자pure phonetic alphabet인 한글을 만들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헐버트는 ‘세계 최초는 아니지만 순전히 독창적으로 만들어졌음은 칭찬받아야 마땅하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위대한 한글이 노예해방이나 다름없는
문맹으로부터의 해방 emancipation proclamation을 가져왔음에도
한국인들은 한글이 가진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헐버트는 ‘한자가 정부 문서의 공식 언어이며
관료들은 한글을 읽을 수 있다는 자체를 입에 거품을 물며 부정하고 있다.’라며
관료들의 한글 경시 태도를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시인 Chaucer가 영어 발전에 공헌했듯이,
소설가 Cervantes가 스페인어 발전에 공헌했듯이,
시인 Dante가 이탈리아어 발전에 공헌했듯이
한국에서도 누군가 한글을 발전시킬 수 있는 위대한 문필가가 나와야 한다.’라고 했다.
187 헐버트는 이 기고문의 결론 부분에서 ‘한국의 이러한 위대한 발명은 한국을 칭찬할 수도 있고, 아니 할 수도 있다.’라면서 그의 한민족에 대한 불만도 표시했다.
이러한 세계 최초의 발명품들이 한민족의 위대성을 말해 주기는 하나
그러한 훌륭한 발명품들을 더 이상 발전시켜 활용하지 못하고 사장시켰기에
헐버트는 한민족을 칭찬만 할 수는 없다고 한 것이다.
197 헐버트는 1895년 왕비가 시해된 직후 고종을 지키기 위해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까지 섰다.
204 1866년 6월 미국 선박 Surprise호가 난파되어 떠돌다 황해도 연안에 닿으면서
선장을 포함한 8명이 상륙하였다.
우리나라는 東方禮義之國 답게 그들에게 음식, 의복, 약품, 담배 등을 제공하면서 친절하게 대해 주어 안전하게 돌아가게 했다. 이것이 조선이 미국과 접촉한 최초의 사건이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866년 8월에 모험심이 강한
W. Preston 선장이 이끄는 미국 상선 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성까지 올라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음을 이유로 이들의 제의를 거절하며
철수할 것을 통고했다.
상선은 철수하라는 경고를 받고도 오히려 행패를 부리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계속되는 비로 높아졌던 대동강의 수위가 비가 그치면서 낮아지는 바람에
상선이 대동강의 羊角島 서쪽 모래톱에 박혀 버렸다.
불안과 초조에 쌓인 상선의 승무원들은 평양 사람들에게 강도, 약탈을 자행하는 불법 무도한 행동을 저질렀다.
그러자 조선은 상선에 포격을 가하고 급기야 뗏목에 불덩어리를 실어 배에 부딪쳤다.
상선은 불에 타 격침되고 승무원들은 몰사당했다.
뭍으로 올라온 몇몇 생존자들은 모두 참수되었다. 이것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5년 후인 1871년 John Rodgers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가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보복과 개항을 촉구할 목적으로 강화도 해안에 다다랐다.
조선 정부는 함대의 즉각 철수를 요구했으나 미군은 응하지 않았다. 결국 전투가 벌어졌고
조선이 무참하게 패배하여 수백 명이 죽고 미군은 한 명이 죽었다.
이 사건이 辛未洋擾(1871 고종 8)다.
237 1907년 봄 YMCA 성경 선생인 김인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일본군 막사가 있는 한강 근처에 부동산이 있는데 일제가 그 땅을 빼앗아 홍등가를 지으려 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부동산 가격은 13,000엔 정도였다.
헐버트가 도와주는 길은, 13,000엔의 수표를 주고 사되 헐버트가 돈이 없으니
부동산 주인이 수표를 그냥 가지고 있는 방법뿐이었다.
두 사람은 계약서를 만들고 수표를 교부했다.
헐버트는 매입자로서 그 땅에 울타리를 쳤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쳐들어와 울타리를 헐고 그곳을 점령해 버렸다.
헐버트는 이에 대해 미국 총영사를 통해 통감부에 항의했다.
이 문제가 통감에게까지 보고되고, 통감도 어쩔 수 없이 보상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일본은 보상금 1,000엔만 주고 나머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주지 않아 결국 소송을 했다. 그런데 그 재판이 7년을 끌었다.
그러다가 일제는 세금을 안 냈다는 이유로 부동산을 동양척식회사로 넘겨 버렸다.
그러나 당시 외국인은 규정상 세금을 내지 않았다.
외국인한테도 이 지경이었는데 한국인들은 얼마나 일본의 횡포에 시달렸을까?
240
개성 부근 풍덕면에 있는 경천사라는 절에 높이가 13m가 넘는 10층 석탑이 있었다.
이 탑은 기단과 조각이 섬세하게 새겨진 걸작 유물이다.
탑의 1층 몸돌에 고려 충목왕 4년, 1348년에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 탑은 중국의 왕실이 한국에 선물한 것으로 사람들은 병을 치료하는 데 큰 효과가 있다고
믿어 이 탑을 藥皇搭 이라고도 불렀다.
경천사 석탑은 현재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 궁내부대신인 田中光顯가 1907년 1월 황태자 순종의 결혼식에 축하 사절로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다나까는 무엇인가 기념물을 한국에서 가져가고 싶었다.
그러던 중 경천사 10층 석탑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때 다나까에게 경천사 석탑에 대한 정보를 주고 석탑을 일본으로 가져가도록 부추긴 사람은
을사오적의 한 명인 내부대신 이지용이라고 헐버트는 한 회견 기사에서 밝혔다.
다나까는 급기야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석탑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하였다.
참으로 오만무도하고 불손한 행동이었다.
헐버트는 후일, 만약 외국 사절이 미국 대통령에게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달라고 하면 어떠했겠느냐며 다나까의 방자함을 비난했다.
고종 황제는 이 탑은 600여 년 전에 세워진 역사적 유물로서 황제의 재산이 아니라
온 백성 전체의 문화유산이기에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없다면서 다나까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다나까는 고종 황제의 거절에 아랑곳하지 않고 85명의 일본군을 경천사에 보내
석탑을 뜯어내 우마차에 싣고 일본으로 가져가 자기 집 뒤뜰에 세웠다.
243
석탑 탈취 사건이 국제적으로 보도되어 비난 여론이 들끓자
통감부는 석탑의 반환을 일본 정부에 요청하였고,
일본은 이 석탑을 1919년에 가서야 돌려주었다.
한국 사람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에
두 외국인 헐버트와 베델의 필사적인 투쟁으로 이 사건이 국제적으로 알려져
결국 석탑이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석탑은 조선총독부 창고에서 뒹굴다가 해방 후 경복궁에 복원되었다.
그리고 2005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개관과 함께 그곳으로 이전되었다.
289 스티븐스의 죽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는 1908년 張仁煥, 田明雲 의사의 저격을 받고 비명횡사했다.
스티븐스가 1908년 3월 2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헐버트에 의하면, 당시 소문으로는 스티븐스가 일본의 한국 병합에 대한 미국의 동의를 얻어내고자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워싱턴으로 가는 중이었다.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진 언론과의 회견에서
‘한국인 대부분은 일본 통치를 환영하고 있으며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이후로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다.’라는 등의 친일적 발언을 했다.
그의 발언이 《San Francisco Chronicle》지 등에 기사화되자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인들은 격분했다.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역에서 워싱턴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전명운은
3월 23일 아침 리볼버 권총을 가슴속에 품고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역으로 갔다.
스티븐스는 페리를 타고 오클랜드로가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동부로 갈 예정이었다.
페리 부둣가를 서성이는 전명운의 눈앞에 호텔 버스에서
한 서양 사람이 동양 사람과 함께 내렸다.
서양 사람은 분명히 스티븐스였다.
동양 사람은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총영사 Chozo Koike였다.
그 순간 전명운은 스티븐스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불발이 되었다.
전명운은 당황하면서도 스티븐스에게 달려들어 권총 뒷부분으로 그의 면상을 내리치면서
격투가 벌어졌다.
전명운은 몸이 건장한 스티븐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전명운이 도망쳤으나 스티븐스에게 붙잡히면서 두 사람 사이에 심한 격투가 벌어졌다.
바로 그때 어디에선가 동양 사람이 나타나 스티븐스에게 권총을 발사했다.
그는 한국인 장인환이었다.
그의 첫발은 전명운의 어깨를 맞혔다.
2발과 3발은 스티븐스의 등을 맞히고 복부를 관통했다.
그 사이 경찰이 나타나 장인환은 체포되고 스티븐스와 전명운은 병원으로 실려갔다.
스티븐스는 실려 가면서도 자신은 기필코 살아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스티븐스는 그의 뜻과는 달리 이틀 후인 3월 25일 사망하고
전명운은 치명상이 아니어서 치료 후 구금되었다.
전명훈과 장인환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전명운은 무죄로 석방되었으며, 장인환은 2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0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각각 상대방의 스티븐스 저격 계획을 모르고
각자 자신들의 결심에 따라 독자적으로 샌프란시스코 부두역에 갔다고 경찰 조사에서 진술했다.
스티븐스에 대한 한국인들의 원한이 얼마나 컸으면
사전 계획도 없이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장소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
스티븐스가 살해되자 일본 정부는 발칵 뒤집혔으며 이토 히로부미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는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비명에 갔다.
두 역사적 사건이 1년 반 사이에 국내가 아닌 미국과 중국에서 일어났다.
이토 히로부미의 국제 대변인인 스티븐스의 죽음은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에 대한 예고였는지도 모른다.
322 헐버트는 1944년 ‘Korean Affairs Institution’에서 간행한 《The Voice of Korea》라는 책자에 <The Opening of Korea>이라는 글을 네 차례에 걸쳐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고종 황제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동양의 역사가 바뀌었으며, 미국이 친일 정책을 썼기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323 일제 강점기는 민족사에서 참으로 불행한 역사이다.
우리는 ‘약육강식의 법도 법이다’라는 억지를 일삼았던 일제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일제의 조선 침략은 1875년 운양호사건을 필두로 치밀한 계획 속에서 진행되었다. 운양호사건에 이어 1876년 일본과 맺은 최초의 국제조약인 강화도조약,
1894년의 청일전쟁,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 1904년의 한일의정서,
1904~5년의 러·일 전쟁은 일본의 한국 강점을 위한 단계적 음모였다.
이어서 1905년 을사늑약을 거쳐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우리는 완전히 나라를 빼앗겼다.
344 금괴와 엔화로 덕화은행에 예치 고종 황제는 1903년 12월 서울에 있는 독일 공사관의 주선으로 자신의 내탕금을 상하이에 있는 덕화은행에 예치했다.
첫 예치금은 덕화은행의 책임자 J. Buser가 서울에 직접 와서 금괴 23개와 일본 화폐 150,000엔을 합한 도합 180,000엔 상당을, 고종 황제의 내장원으로부터 받아갔다.
이는 덕화은행의 책임자가 써 준 1903년 12월 2일 자 영수증이 증명하고 있다.
영수증에는 상하이에 가서 금을 현금으로 바꾼 뒤
최종적으로 예치금 금액이 확정된다는 문구도 있다.
또한, 영수증 끝 구절에
‘이 예치금은 황제 폐하의 지시에 의해서만 처분된다
to be kept at the disposal of His Majesty the Emperor of Korea.’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고종 황제의 지시에 의해서만 인출할 수 있음을 보증한 것이다.
상하이에서 금을 매각한 뒤 정산한 1차 예치금의 최종 확정액은 당초 예상했던 180,000엔에
조금 못 미친 174,000엔이었으며 독일 화폐로는 365,400마르크였다.
덕화은행은 이 돈을 독일 베를린의 할인은행 Disconto-Gesellschaft을 통해
독일 유가증권에 투자했다.
370 나라 전체 세입의 1.5%나 되는 소중한 돈 고종 황제 내탕금 문제는
돈이 많고 적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은 침략주의 역사의 증거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건을 돈의 액수를 떠나 민족정기를 세우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일본이 탈취해 간 251,411.01엔 [526,969.92 마르크]이 한민족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돈이었는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돈이 당시 미화로 얼마였을까?
헐버트는 당시 이 금액을 미화 약 200,000달러[some $200,000] 라고 자신의 글에서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