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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0일(수)
* 시작 기도
주님...
도둑의 목적은 오직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이 오신 목적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되 억지로 버리거나 빼앗긴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의적으로 버리셨습니다(요 10:10-18).
나는 자칭 선한 목자라 칭하는 영적 지도자입니다.
하지만 나의 모습 어디를 봐도 선한 목자일 수 없음은 내가 알고 주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인정과 칭찬을 듣는지 모르나 과연 주님께도 그런 칭찬을 들을 수 있는지 묻는다면 아니올씨다입니다.
이런 나는 지옥의 아랫목이 딱 맞을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나를 구속하셨으니 이게 웬 은혜요 웬 사랑인지요?
오늘이라는 이 하루도 온전히 주님의 은혜 안에서 아버지의 품속에 거하기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을 두사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시어 말씀의 빛을 비추어 주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 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잠 27:13-27
제목 : 양 떼의 육신의 형편을 살피던 삯군이 영혼을 돌보는 목자로 바뀌다.
13 타인을 위하여 보증 선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을 위하여 보증 선 자는 그의 몸을 볼모 잡을지니라.
14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
15 다투는 여자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16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
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18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에게 시중드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
19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20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21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
22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
23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24 대저 재물은 영원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
25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
26 어린 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며
27 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의 음식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
* 나의 묵상
(23)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양 떼와 소 떼의 형편과 처지를 잘 살펴야 하는 이는 다름 아닌 목자다.
목자는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양 떼를 위하여 사는 자이다.
수 년 전에 다큐멘터리 하나를 본 적이 있다.
네팔에 있는 고산지대였는데 낮에는 비교적 따뜻했지만, 밤이 되니까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강추위가 몰려 왔다.
이렇게 추운데도 그 고산지대까지 간 이유는 그곳에 양들이 먹을 풀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취재하는 기자들과 목동은 어두워질 무렵에 텐트 안에서 저녁을 먹었다.
어두워지니까 딱히 할 것이 없는지라 기자들은 텐트 안에서 잠을 자려고 누웠다.
그런데 네팔 사람인 목동이 갑자기 모포를 한 장 들고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기자 한 명이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양들에게로 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추운데 왜 양들에게로 가느냐고 했더니 이렇게 추우니까 양들에게로 가서 양 떼를 살피면서 자려고 나가는 것이란다.
기자들도 놀라고, 그것을 보는 나도 감동이었다.
영하 20도 아래로 내려가는 혹한 속에서도 자신의 안위를 위하지 않고 양 떼를 돌보기 위하여 모포 한 장 달랑 가지고 양 떼와 함께 잠을 자는 그는 이 시대의 진정한 목자상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목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없다.
그리고 네팔처럼 그렇게 춥지도 않다.
그래서 그런 목자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목자는 양 떼나 소 떼를 먹이는 목자보다 영적 양 떼를 먹이는 목자가 진짜 목자이다.
사람의 영혼을 목양하는 목사들이 바로 이 시대의 목자라고 할 수 있다.
목사인 나는 과연 네팔의 목자와 같이 좋은 꼴을 먹이기 위하여 그런 푸른 초장으로 데리고 갔으며 또한 그 추위 속에서도 양들과 함께 잠을 잘 정도로 양들을 사랑했는지 되돌아 봐야 할 것이다.
산이나 들에서 양 떼를 치는 목동은 그들에게 영양가 있는 풀과 시원한 물을 공급해 주면 된다.
따라서 목동은 어디에 풀이 있는지, 어디에 물이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그들이 먹는 풀이 혹시 독초는 아닌지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짐승인 양과 소를 위해서도 목동의 이러한 헌신과 수고가 필요한데, 하물며 사람의 영혼을 목양하는 목사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짐승인 양이나 소는 극단적으로 잘못 돌봐서 죽는다고 해도 그만큼의 재물이 손해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의 영혼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나를 비롯한 수많은 목사들이 목자의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그들을 실족하게 하고 넘어지게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이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면할 수 있으랴?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펴서 그들이 잘 먹고 있는지, 잘 자라고 있는지, 혹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항상 확인해야 할 의무가 목자에게 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먹는 양식에 별 관심이 없는 자였다.
일용할 양식을 먹어야 양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데 나는 양들에게 쓰레기로 만든 죽을 먹이는 아주 악한 삯군 목자였던 것이다.
육신의 양식은 본인들이 알아서 먹지만, 영의 양식은 영적으로 어렸을 때는 목자인 내가 좋은 꼴을 먹여주어야 한다.
그러다가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스스로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나는 그들 스스로 먹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들에게 좋은 양식을 먹이지도 않는 자였다.
영혼이 잘 되려면 정말 영양가 있는 꼴을 먹여야 한다.
그런 영양가 있는 꼴은 이 땅에 있지 않고 바로 창세전, 만물 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는 목사요 영혼을 보살펴야 하는 책임을 맡은 목자로써 창세전, 만물 위의 세계를 알지 못하였다.
목사가 모르니, 성도들은 더 모르고 헤맬 수밖에...
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땅의 것을 먹이는 자였다.
예수 잘 믿어서 복 받아라.
예수 믿어서 하는 일 잘 돼라.
예수 믿어서 자녀들이 건강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 좋은 직장에 취직해라.
예수 믿어서 받는 복이라는 것들이 모두 만물 안에 속한 것이며 언젠가 다 사라지고 없어질 것들이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양들에게 양식이 아니라 독초를 먹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에게 감동을 줄 것인가에 대해서만 초미의 관심이 있었다.
오늘 설교를 듣고 성도들이 감동을 좀 받아야 될 텐데 하는 마음으로 여기저기서 감동이 되는 설교를 짜깁기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말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 즉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를 못했다.
영원한 나라의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
아니 알지도 못했기에 전할 수도 없었다.
이런 나는 목자가 아니라 죽기에만 합당한 삯군이었다.
목자는 자신이 치는 양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늘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성도들이 주일날 안 빠지고 교회에 잘 나오면 영적 건강 상태 100점을 주면서 더 이상 살피려고 하지도 않았다.
주일날 예배 참석 잘 하고, 교회 이곳저곳에서 봉사 잘 하고, 가정이 안정적으로 잘 살면 그것으로 대 만족이었다.
나는 영적으로 눈이 감겨진 완전 소경 목사였다.
그들이 정말 영적으로 잘 자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저 외적으로 비쳐지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목이 말라 죽어가면서 속으로 아우성을 치는데 목사란 놈은 그것도 모르고 만족감을 누린 채 제 배만 채우는 자였던 것이다.
성도들이 목마름을 해소해 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그것을 해갈시켜 줘야 할 의무가 목사에게 있음에도 나는 무엇으로 그들의 영적 목마름을 해갈해 주어야 하는지도 몰랐던 무식한 목사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목사가 돼서는 안 될 영적 사기꾼이요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솔직히 신학을 시작할 무렵 내 속에 ‘목사가 되면 그래도 사람들에게 존경과 인정은 받지 않겠나’ 하는 속이 시커먼 그런 마음이 있었다.
내가 무엇을 먹이고 입히고 신겨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내가 받고 누릴 영광을 먼저 생각하였던 자였다.
또한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고 하였다.
다른 소 떼가 아니라 나에게 맡겨주신 소 떼 말이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든 교인들 숫자 늘리는데 마음이 빼앗겨서 얼마나 양 도둑질을 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누구의 양이든 내 우리에만 들어오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인들을 모으려고 하였다.
정말 이 표현이 딱 맞다.
교인들을 모으려고 했다는 것 말이다.
오늘 한국 교회에 이런 양 도둑질이 난무하고 있다.
심지어 대형 교회 담임목사는 대놓고 이렇게 말한다.
“기왕 신앙생활 하는 것 큰 교회에서 여러 가지 문화를 누리면서 하는 것이 좋지 않으냐, 그러니까 작은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도 할 수 있으면 큰 교회인 우리 교회로 데리고 오라”고 지시한단다.
지금 목사들과 교회들이 미쳐가고 있다.
나 역시 이런 자로써 이런 것들을 통해서 결국 목사인 나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꾀하려고 했던 악한 자였음을 고백한다.
이런 나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았다.
삯군 목자로써의 패착과 부정, 영혼을 살리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죽였던 일, 나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하여 목회를 하였던 이 오만함과 패역함은 주께로부터 심판 받아 마땅하였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하나님의 처분만 바랄 뿐이었다.
목회나 사역은 경쟁이 아니고 오직 주만 바라보면서 나의 섬김과 헌신을 드리는 것이며, 무엇보다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고 사귐이 있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복음은 알지도 못하고, 말씀은 내팽개치고 오직 일에 매달려 교회를 크게 하려고 했던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였고, 그래서 마땅히 심판 받은 것이다.
그렇게 심판을 받은 나는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어서 교회를 사임하고 목회를 그만두었다.
그 후 한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선교사로 필리핀과 몽골로 나갔다.
그러다 코로나로 인하여 더 이상 외국 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국내로 들어왔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역을 쉬다가 지금의 베트남으로 와서 한인교회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공의의 심판 이후에 이제는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다.
숫자가 많은 교회가 부럽지도 않다.
그저 나에게 맡겨주신 양 떼들에게 나의 마음, 아니 주님의 마음으로 다가가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일용할 양식인 복음을 전해 줄뿐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 양 떼와 소 떼를 잘 보살피는 것이 있겠는가?
지금은 맛이 없다고 아우성쳐도 분명히 그 맛을 알 때가 오리라 확신한다.
땅에서 난 자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고 그것들만 좋아하며 그것들만 먹으려 한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자는 위로부터 나온 영원한 양식인 말씀, 즉 복음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복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이 복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복음은 하나의 수단이요 생명이 목적이다.
나는 오늘도 복음으로 계시된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 위에 계신 아버지와 교제함으로 그 영광을 본다.
세상 소망이 다 사라져 가도 주의 사랑은 끝이 없기에 살아가는 순간순간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는다.
의심의 안개와 근심의 구름으로 가득한 땅의 것이 아니라, 기쁘고 참된 평화가 있는 영원한 그곳으로 나는 오늘도 달려간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돌보시며, 주님의 양이요 소인 나를 인도하신 나의 주님, 나의 큐리오스, 나의 주인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린다.
그 주님이 바로 온전한 목자요 선한 목자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당신의 양인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시며 죽으셨고, 심지어 내가 가야 할 지옥에까지 내려가셨다.
영혼이 잘 되게 하기 위하여 때로는 우리의 육신에 고난을 주시기도 하고, 형편을 어렵게도 하신다.
하지만 그것을 통하여 영혼이 잘 되어 아들의 생명으로 영생을 누리는 자가 진정한 복된 자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육신이 아무리 잘 된다고 하여도 7-80년이다.
그러나 영혼은 영원한 것이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썩어진 몸도 주님 재림하시는 날 다시 거룩한 몸으로 부활하여 나의 영혼과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영혼을 위한 삶은 육신도 살지만, 육신을 위한 삶은 영혼도 죽고 육신도 죽게 된다.
물론 이 땅에 사는 7-80년의 육신의 인생이 결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양을 먹이는 영적 목자로서 우리 양들이 건강하고 부요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원한다고 하여 모두가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의해서 때로는 가난하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부도를 맞을 때도 있으며, 때로는 중한 질병에 걸리기도 한다.
어떤 때는 이런 것들이 회복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있다.
문제는 이 때 자신의 참 신앙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이다.
회복시켜 달라고 울고불고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내게 주신 분복(分福)임을 알고 그것을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며 자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상황적 무덤이라면 잠잠히 말씀 앞에 머물며 주님과 깊은 교제와 사귐을 가지면 된다.
그 때 나도 알지 못하는 참된 평화가 임하게 되는데 그 자리가 바로 영생의 자리요,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자리인 것이다.
다른 크고 멋진 교회를 부러워하는 목사가 아니라, 이제 내게 주신 양 떼에 내 마음을 두어 자족하며 그들에게 온전한 복음을 전하여 생명으로 살게 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나에게 주신 양 떼의 형편을 살피며, 내 소 떼에게 마음을 두기보다는 남의 양 떼를 부러워하며 그곳을 바라보고 마음을 빼앗기는 자였나이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양 떼를 모았을까 생각하며 하염없이 부러움에 사로잡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나이다.
나는 지극히 물량주의에 빠져서 크고 높고 많고 화려한 것을 부러워하던 자였나이다.
욥의 친구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땅의 것에 치심 하여 그것으로 보상받고 싶어 하는 번영신앙이 나를 지배하였나이다.
내게 주신 양 떼에게 정말 생명의 양식을 먹이기보다 쓰레기 잡탕을 먹여, 배탈이 나게 만들었고 하나님이 주기 원하시는 양식이 아니라 그들이 좋아하는 불량식품을 먹이는 삯군 목자였나이다.
주님은 그런 나를 심판하셨으며, 그 심판이 나를 살렸나이다.
말씀 앞에 서면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쓰레기 잡탕을 먹이는 목사가 아니라 정말 주님이 주기 원하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이는 목자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여 그 안에서 성도들이 생명을 얻어 날마다 영생을 맛보고 누리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나의 마지막 사명입니다.
나에게 맡겨주신 이 양들이 목사인 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성숙하여 각자가 말씀 앞에 나아가 스스로 주님과 교제와 사귐을 가지며 그 안에서 주의 영광을 보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한 사람 한 사람 주님을 따라가는 주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고,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