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숙녀시모음 5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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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을 길
천숙녀
추억을 꺼내 놓고
침목(枕木)으로 밟아간다
살아있는 것들을
품안에 끌어안고
첫새벽 새벽 별로 띄웠다
가을 길 함께 건너는 저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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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거울
천숙녀
거울을 마주하고 내 모습을 비춰본다
이목구비 또렷한 눈 코 귀 입 살아있다
내 모습 구석구석이 온통 우주다
어제는 살펴보고 돌아온 길 짚어보며
두 눈은 크게 뜨고 오늘을 바로 보자
입으로 하는 말들이 미래 창고 보물이다
설마라는 부정의 말 걷어내는 발걸음
성공은 준비된 자의 몫 저 하늘이 보장할거야
처연한 소리를 읽는 나이테로 키우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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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겨울 문밖
천숙녀
선릉역 4번 출구에
광고지가 흩어지고
란제리, 셔츠, 룸, 양주, 풀세트
보도블럭 어지럽다
접혔다 펼쳐지는 일
천 갈래 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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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곡비哭婢
천숙녀
굳은살 박힌 손가락 제 몸을 뚝 떼어
땅을 향해 입 맞추는 나뭇잎 마주한 날
낙화의 시퍼런 떨림에 숲들은 진지했다
둥글게 몸을 말아 닿았던 강섶이며
바다를 향하는 물꼬 틀던 그 날 일도
점점 더 닳아지는 살 파묻었던 고백까지
세상 짐 내려놓아야 가벼운 걸음인데
풀리지 않은 매듭을 아직도 들고 앉아
뜨거운 간을 내놓고 쪼아 먹혀 멍멍했다
한 세상 떠메고 날으던 날개 죽지
울음조차 나오지 않아 허기진 나를 위해
천지가 진동하도록 곡비로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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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공손히
천숙녀
한 꺼풀씩 길을 여는 희미한 흔적들
스쳐간 세월의 창 깨어나는 아침이면
물관탄
나팔꽃처럼
세상 안부 전한다
밤새 온 사서함엔 스팸메일 가득했다
삭제하며 휴지통 비우며 바다 처럼 포효하며
질경이 뿌리 뽑으려 악플 글 매달렸다
혀끝에 괸 독을 풀어야
너도 살고 나도 살지
새벽달 반짝이도록 공손히 떠받들면
바윗장
들어 올리는
두 팔 근육이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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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귀 울림
천숙녀
늬 누굴 만나려고
그리 바쁜 걸음일까
풀잎 부딪는 소리 있어
흩날리는 영혼 있어
바람에 찢겨졌는지
날갯짓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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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림 한 폭
천숙녀
개펄 같은 가슴팍은
노을 타면 알 수 있다
녹슬은 삽자루에
낡고 해진 삶의 고리
이랑을 훑고 지나며
층층이 숨겨진 한 폭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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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도처
천숙녀
탱자 울타리 건너오며 탱자 가시에 찔린 손
탱자의 노란 빛깔에 눈독 들인 탓인가
침針 세워 찌르고 있으니 찔려 곪을 수밖에
발밑에서 꾸물거리던 가려움증 번지는 일
길 없던 길, 길 걷더니 제 발등을 찍고 있어
그물에 활착活着한 날들 오도 가도 못하는 몸
두 눈을 감고서야 내 속이 보이는 길
내 안에 살아있던 잃어버린 것들마저
적과摘果철 솎음질에도 무사히도 넘어왔던
내 마음 넓혀 줄 가꾸고 싶은 정원 있다
몸을 찢고 오르는 비상의 꿈을 좇아
비바람 피할 거처 두고 기도처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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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깊어진 상처
천숙녀
먼 길 휘돌다보니 걷던 길 끊어졌다
시골집 도랑 옆에 목청 푸는 풀벌레
흔들려
깊어진 상처
오늘밤은 더 쓰라리다
건너 방엔 외로운 달 저 홀로 잠들지만
물꼬를 트고 들려오는 내 노래는 불면이다
구겨진
푸른 꿈들이
화폭 위에 난장이다
여기가 어디일까 내 머물 곳 어디일까
혀가 닿는 입안에는 침이 바짝 마르는데
고향집
대청마루가 들려준
하얀 소지燒紙의 기도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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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꽃 등
천숙녀
잎 다진 목숨 안고 나무 한 그루 떨고 있다
살과 뼈 뜨겁게 비며 아픔을 치유 하던
내 가슴 화석에 박힌 그리움 굴리던 곳
멀고 먼 하얀 길은 절간처럼 조용했다
나를 삼킨 슬픔의 입 붉은 해를 전송한다
흩어진 꿈의 조각들 헛 박음질로 달리는 손
낡은 생 페이지가 뒤꿈치에 밟혀질 때
자꾸만 헛딛는 언 발 녹여 쉬고 싶다
하늘 땅 단단히 묶어 꽃 등 하나씩 매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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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낙장落張
천숙녀
밀봉된 사연 위로 굴착기掘鑿機 지나갔다
봄 틀어 올리던 손, 손등이 툭 터지고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내 삶도 엎드렸다
신발 끄는 땅거미 따라 무릎 접고 내려온 길
불면의 늪에 빠져 헤어나기 어려워도
얼룩진 내 삶의 낙장落張 빈 시간에 끼웠다
쓰러진 나를 안고 따뜻이 덥혀주는
봉분을 가르고 나와 사랑채에 앉으셨던
아버지 장침長針 놓으셨다 절뚝인 몸 쭉 펴지게
다 저문 해 질 녘도 정성껏 길을 닦고
꺾인 관절 일으켜 뚜벅뚜벅 걷도록
어둠도 무쇠 솥 걸어 고향을 끓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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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눈물로 짠
천숙녀
퍼득이는 아침햇살
떨림으로 다가와
눈물로 짠 그물 위에
칠월을 얹고 있다
헛헛한
빈자의 허기
채워주는 상차림
뿌리를 깊게 내려
심지心志를 키우면서
어둠의 벽을 쪼는
텃새가 그리운 날
낙관落款된
발자국 따라
얼레 감는 숙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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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달 하나
천숙녀
목숨의 분량을 재며
한 줄 노래 부르는 여기
온몸이 골다공증으로
턱뼈만 남아 삭아져도
묵정밭 마음 언저리
달하나 심는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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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동안거(冬安居)
천숙녀
단풍 숲 속을 헤치며 고스란히 태운 젊음
다닌 직장 변변찮아 퇴직금도 못 받았다며
외진 산
모롱이 돌며
쉬는 공부 중이란다
질화로엔 꿈 불씨 열심히도 지폈는데
소롯한 잿가루 한 줌 뿌릴 고랑 한 줄 없어
남은 생
동안거(冬安居) 들어
편안한 쉼터 짓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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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둥글게 깎아
천숙녀
논둑 지나 앞들까지
콩 꼬투리 터지는 소리
보자기를 펼쳐놓고 세월 속의 나를 싼다
뒤란의
마른 흙담이
상처 씻어 내리던 날
옹이도 풀어내면
나이테로 펼쳐질까
모난 생 둥글게 깎아 시접을 정리했다
시린 속
햇살을 받아
돋는 소리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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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똬리를 틀고
천숙녀
밟혀야 살아나는 푸른 피가 도는 보리
내 안의 수분들은 스스로 지켜내며
벌판에 누워 꿈꾸며 잎 잎마다 물들였다
생을 잡고 버티던 몸 발끝이 아려오고
넘어져 깨진 무릎은 오늘도 피멍이다
납작이 엎드렸다고 비굴이라 말하지 말라
베이지 않고서는 누가 아픔을 알까
꼭꼭 숨어 숨죽이고 있는 딱정벌레 한 마리
땅심에 똬리를 틀고 박음질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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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마음 밭
천숙녀
관절 타고 흐르는 휘청거리는 걸음
뜨거운 길의 흔적 장대비가 지웁니다
세상이
철커덕 닫혀
아무 일도 모릅니다
갈라 터진 마음 밭엔 가랑잎 쌓이지만
피멍 든 발바닥은 디딜 곳조차 없습니다.
숨찬 날
허물 덮으려
마중물이라도 부어보지만
내 속에 지친 상처 펌프 물로 씻길까요
아픈 기억 물려놓고 왈칵 안아 주시지요
닻줄을
놓았던 몹쓸 짓
다시는 안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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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맨발
천숙녀
버리지 못하는 집착의 길 한짐 씩 덜어내자
맞물린 톱니에 갇혀 견뎌야 했던 급류쯤
역류로 흐르는 소문은 참아온 내열耐熱이다
봄볕이 몰고 온 사연 소름으로 돋았다
꼿꼿이 서서 버티었던 발길 뚝 끊긴 사월
한바탕 춤사위였다 칼집 내어 버무리던
한여름 출렁이던 서녘 하늘에 노을이 탄다
땅을 치며 쏟은 눈물 목청 풀고 울었던 날
지독한 눈물이 있어 꽃으로 피는 거다
생의 순간 오늘 하루는 한 편의 드라마다
수맥으로 흐르면서 꿈틀거리는 목숨 줄
우주의 맑은 길 여는 가뿐한 맨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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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먼저 눕고
천숙녀
바람 불면 먼저 눕고 묵정밭 일구었다
고향 집 구들장은 늘 이렇게 뜨끈하다
질긴 삶 몸져눕더니 몽돌 되어 구르고
늪에서도 숨은 붙어 해 뜨고 지는 길 있어
봉함엽서 띄운 날 바람 한 줌 훑고 갔다
시간의 두께만큼은 방음벽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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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무너져 내린
천숙녀
검은 하늘이 빨려드는 시간
골목길 어둡다
무너져 내린 빈 집 터엔
소문조차 조용하다
가지 끝 피 묻은 세상도
세월 파도에 싸여 산다
화석으로 박힌
저문 산이 흔들렸다
하늘은 모래바람 불어
눈앞이 흐려졌나
어둠의 정수리 딛고
타는 저 주홍(朱紅)불, 불,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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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묵묵히 하루를
천숙녀
어둠 속에 우두커니 한밤을 앉아있다
온 몸 발갛게 물들인 끈질긴 추적의 덫
묵묵히 하루를 바쳤다 기도가 되는 열 손가락
소용돌이 회오리바람 내게로 와 멈춘 사월
눈을 뜨고 걷지만 허공에 붕붕 떠다니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 고개 숙이는 저녁 길
의미 없이 방류放流했던 지나간 시간들이
가슴에 인두질하여 잠들지 못하는 밤
이제는 젖은 내 아픔 겹겹이 덮고 싶다
젖어있는 것들 거두어 말려가며
번뜩이는 삶의 순간 뛰는 가슴 기다리며
무료히 숨 멎는 연습을 푸른 돛대로 세우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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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묵언
천숙녀
말못해 부풀어 오른
하고 싶은 말 한 섬이다
오랜 자갈길에
말문 트이는 날 있을까
헐뜯겨 생채기 난 몸으로
오늘도 묵언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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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물소리
천숙녀
눈빛에 젖어 드는 씻고 씻기는 말간 생生
마음 먼저 출렁이면 줄 빛살 새어드는
물소리 가두어두고 제 속살 찌워야지
부리 부비다 보면 날개 짓 펼 수 있으리
산의 발을 씻기며 땅 냄새 맡아 피어난
꿋꿋한 대궁 속에서 뿌리 내려 굳건할 터
숲다운 숲 만들기 위해 은하의 노래 부르자
무성한 말만 앞세우는 죽어있는 마음 밭에
시대를 유영遊泳하며 바다를 건너야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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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밤새 걷던 자갈길
천숙녀
등 푸른 삶 건지러 세상 바다에 던진 투망
물 깊어 물 밑자리 미처 못 본 캄캄한 눈
밀레의
이삭줍기로
멈춘 시간 깨웠다
그물에 걸려 온 건 밤새 걷던 자갈길
흙담 넘어 들려온 흔들림도 가누면서
명치끝
저린 가슴은
한 치 꿈 일구는 일
봄기운 움켜잡고 줄기 밀어 올려라
조각난 제 몸 닦아 몇 배로 불려가며
마늘밭
키워야 한다
아린 맛 길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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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버림으로
천숙녀
문 걸쇠 풀리더니 비밀의 숲 열려 지고
오랜 날 불 꺼졌던 부엌 창이 환하다
무명의
아침을 씻어
앞산 숲에 펼쳐 널고
무수한 발걸음에 짓밟혀도 살아났던
차가운 땅 더듬이로 엎드린 몸 긁히지 않게
내 안을
두루 살피며
일어서는 몸짓 있다
뜨락 가득 내려앉는 꿈은 아직 남아 있어
은수저를 닦으면서 새 밥 지어 올리는 손
초연히
버림으로 얻은
내일이 밥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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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벼랑에서
천숙녀
옷고름 풀어 헤치며 빈 가슴을 뒤집는다
벼랑 끝 여기에 서면 무엇이 보일까
마음 다 비우고 나면 벼랑 끝도 안전지대다
비워 내기 비워 내기 비워내기 읊으면서
발길 뜸한 모퉁이 돌아 감긴 세월 풀어 본다
무너진 가슴 켜켜이 탑塔 하나 쌓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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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부딪힌 몸
천숙녀
어스름 땅거미가 마을 앞 따라오면
깊은숨 몰아쉬는 녹음 꽉 찬 고향 숲길
고향 집 길을 열고서 대문 빗장 열었다
깊은 정 나누려고 담 높이 낮추었던
어깨를 기댄 그림자 마당 안 들어서고
방마다 환한 등잔불 손님 반겨 맞는다
굽이쳐 흐르다가 바위 턱에 부딪힌 몸
한 치 꿈을 키워 온 물오른 음성 귀에 닿아
지층 위 쌓여진 흔적 끝날 수 없는 생존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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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불끈 솟아도
천숙녀
무논에 둥둥 별이 떨어져 떠다니다
덮어야 할 일들이 산체(山體) 같은 회색도시
근육질 불끈 솟아도
풀 수 없는 저 그리움
곧거나 굽어진 길 쉼 없이 달려야 할 때
방지 턱 자세히 봐
과속하지 말라는 교훈 있어
바깥을 둘러보느라
핏발 선 눈 아프겠지만
촉 눈을 내밀고서 꽃부리도 만들면서
초秒 같은 세월 속에서
너럭바위도 뚫어보아
가득한 슬픔의 한恨 쯤
깊이깊이 봉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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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비탈진 삶
천숙녀
일손 끊긴 가장들 눈자위 붉어졌다
삶은 늘 비탈져서 뒤뚱이며 걷는 걸음
목메어
생목 오르고
쉰 물까지 토해내고
올 올마다 깊숙이 낡은 지문 묻어있다
무릎 기어오르는 강 시린 관절 앓다가도
속 깊은
상처 따위는
스스로 꿰매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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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뼈마디들
천숙녀
뼛속 깊이 파고드는 냉기를 밀어내며
시간의 레일 위를 쉼 없이 달려왔다
밤마다
푯대를 찾는
애절함을 만나면서
너른 바다 품속이 간절히 필요한 때
앞치마 눈빛 속에 평온의 뜰 펼쳐 들고
혹한을 견뎌낸 땅거죽 촉 하나를 틔웠다
어둠을 오르던 걸음 구리빛 근육 불끈 세워
북적대는 세상 속 움츠린 희망 건져 올리려
주름진
뼈마디들의
애쓰는 문양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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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뼛속 깊이 파고드는
천숙녀
불어오는 비바람 피할 수 없다면
뼛속 깊이 파고드는 냉기 서린 방에라도 들자
밑둥치 삭아내려도
으스러질 운명이어도
푹 파인 허리춤엔 속울음이 윙윙대고
불어터진 통증은 핏빛으로 고여 있어
수척한 근심이 살고 있는
집 한 채를 헐어냈다
봉인封印된 꿈자리 따라 거침없이 유영遊泳하던
한 가슴 풀어 놓았던 절창絶唱의 꿈 어디쯤일까
속 맑은
샘물이 될까
부러지고 꺾이어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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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사월과 오월 사이
천숙녀
손때 짙게 묻어있는 서랍장을 열었다
서랍 속에 뒹굴고 있는 몽당해진 삶의 뼈
숨 가쁜
틈바구니에 끼여
참 많이 바빴겠다
이 악물고 입술을 짓씹는 나의 사월은 막장이다
뗏장을 한 삽 푹 떠 듯 내일을 푹 떠내어
제 세상
뽑아 올리는
오월 보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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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삶의 봇짐
천숙녀
묵직한 삶의 봇짐 꺼내놓은 툇마루
내 안의 흐린 안개 풀어놓은 고향마당
심중에
묻어둔 말들
밤새도록 비단을 짠다
곤곤한 살얼음판 조심조심 걷고 있다
밑바닥 더욱 깊어 햇살 비껴 날아가고
때묻고
남루했던 날
곁불 쬐는 먹먹함
바삭 마른 찬 겨울에 검불 되어 흩날려도
내가나를 오르기 위해 지하 계단 딛고 선다
땅 위에
지문을 찍고
넉 잠잔 누에 되어 고치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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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손등에 떨어진 눈물
천숙녀
날마다 시달리는 악몽에
생의 뼘을 재어본다
괴로워 헤집는 일 시들며 앓고 있다
밤 깊어
잠드는 날엔
아침 오지 않기를
우편함에 꽂혀있는
한 통의 풀꽃 편지
하얀 파꽃 따라와 맵싸한 울음 토하고
손등에
떨어진 눈물
자벌레로 기고 있다
찬 겨울 시멘트 바닥에 누워보면
불면을 베고 눕는 자리 젖은 슬픔 배어있다
골골이 찢긴 가슴 울음 밟고 일어설 때
지독히 매운 고추는 장독에서 삭고 있지
말 없는 세상에 들어 말문을 잃었어도
침묵의 행간 사이에 말문이 트고 있어
동여맨 매듭이 풀려 가얏고를 뜯는 손
토혈吐血 같은 한恨 맺힘은 속 바닥 깊이 긁어내고
지우지 못한 설움은 도르래가 감아올려
지친 몸 마음 세운 뒤 초목으로 청청하길
찬 겨울 시멘트 바닥에 누워보면 알게 되지
희미한 등촉 꺼진 밤이 얼마나 춥고 적막한지
곧은 뜻 편지함에 담아 새 생명生命의 씨앗 뿌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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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시린 등짝
천숙녀
잎 지고 물기가 빠진
힘줄이 앙상하다
발뒤축이 으깨지고
시퍼렇게 멍든 날
삐그덕 어긋난 빗장에
나무못 하나 더 박았다
잊혀 진 기억들이
꿈틀거리며 달려오고
아직도 살아있을까
꿈 한쪽을 씹으면서
귀퉁이 시린 등짝에
얼어버린 내 등짝 맞대어 보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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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시린 손
천숙녀
한 세상 굴곡진 길 징검돌 놓여있다
메마른 혀 속죄하며 몸 낮춰 걷는 걸음
절정의 향기 가득한 꽃밭 속에 이사 왔다
비정규직도 못된 슬픔 가둔 은가락지
바닥까지 비워내니 뒷모습이 까칠했다
내일로 촉을 세우며 지친 오후 밀어내곤
멈추지 못한 딸국질 나직이 잠재우고
등에 박힌 피멍울 전신을 휘감아도
벼린 날 번뜩이면서 칠월 숲에 들었다
문 밖에는 아무 일 없듯 시치미 뚝 떼지만
길을 열어 흘러가고 길을 열어 흘러들며
나이테 둘둘 감고서 시린 손 말려준다
☆★☆★☆★☆★☆★☆★☆★☆★☆★☆★☆★☆★
《37》
아직도
천숙녀
길인가 싶어 걷다보니
발등 위에 밟히는 발
가깝다가 멀어지는
햇살에도 시린 가슴
그대가 비껴서는 날엔
작은 쉼표 찍습니다
넘쳐나던 힘줄이
가을 지나 초겨울 길
부풀던 꿈 터트려놓고
서걱서걱 우는 갈대
멈춰 선 깡마른 넋이
누울 자리조차 없습니다
☆★☆★☆★☆★☆★☆★☆★☆★☆★☆★☆★☆★
《38》
야윈 몸
천숙녀
풀지 못한 매듭 있어
입술 문을 닫았다
발뻗고 싶었지만
웅크린 채 잠드는 밤
여태껏 살아 온 날들
손금으로 박혔다
세속의 무대에 올라
지휘봉 휘두른 손
눈뜨고도 짚은 허방
스러지는 거품 일 뿐
발끝에 목숨 꽂는 날
먼저 눕던 야윈 몸
미처 못 푼 매듭 줄은
선반 위에 올려놓고
실타래 풀어가듯
느릿느릿 걷다보면
숨죽여 울었던 날이
벼린 작두 날같이 시퍼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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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언 강
천숙녀
어금니 내려앉아
잇몸이 부풀었다
무디어진 입맞춤은
언 강을 건너가고
쉼표를 눌러 찍었다
독한 기억이 묻혔다
☆★☆★☆★☆★☆★☆★☆★☆★☆★☆★☆★☆★
《40》
연정
천숙녀
새잎이 돋는 아침
능선의 봄은 절창(絶唱)이다
생살 도려내는 아픔쯤
흙바람에 눕혀놓고
밤마다 새날이 오기를
내 마음 붉히고 있다
☆★☆★☆★☆★☆★☆★☆★☆★☆★☆★☆★☆★
《41》
유서
천숙녀
지하방 벙커에 들어
창을 내고 햇살 좇아
곰팡내 짙은 벽지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등 맞댄
틈새 사이로
움틔우는 그림자 하나
낮과 밤이 술래를 하며 지층地層을 쌓고 있다
쉬지 않고 일어서는 용암의 분출인가
사방이 눈부시구나 오늘의 아침햇살
생솔가지 꺾어 와
불 지피는 저 손길
억지로 태우려니
된 연기만 뿜어내지
젖은 몸
위안이 될까
휘몰이로 적는 유서 한 장
☆★☆★☆★☆★☆★☆★☆★☆★☆★☆★☆★☆★
《42》
인두로 지지면서
천숙녀
초록 울컥 쏟아지는 유월 달력 뜯어냈다
빈칸마다 빼곡했던 모종 이야기 남아있어
귀담아 듣지 못한 말 일기장에 옮겨 적고
땅 밑으로 깊숙이 젖은 맨발 엎드리는
잎새들이 목욕하는 물터 찾아 나선 길
질척한 늪 물에 갇혀 발 빼내지 못한 지금
종일 움켜쥐었던 아귀힘을 풀고 손을 펴면
애끓던 주름살을 인두로 지지면서
손바닥 오랜 무늬가 땅의 시간 덮었다
☆★☆★☆★☆★☆★☆★☆★☆★☆★☆★☆★☆★
《43》
절뚝이며
천숙녀
시큰거리는 무릎 병 있어
헛디뎌 미끄러졌지
몇 번이나 발목 삐어
절뚝이며 걸었던 날
접질린
뼈마디 찾아
침(針) 한 대로 어루는 오후
☆★☆★☆★☆★☆★☆★☆★☆★☆★☆★☆★☆★
《44》
젖은 이마
천숙녀
가파른 삶 걸어온 길 피울음 퍼 올렸다
행간을 밟아오던 담쟁이의 푸른 숨결
귀 잘린 고흐처럼이라도 자화상 언제 내걸까
저며 둔 속내 어둠 길어지는 한나절
삐거덕 몸이 울어 숨 고르지 못한 날들
모서리 윤나게 닦아 둥근 율律 품고 살아
기다림에 기울어 손가락을 꼽는 하루
새벽달 어둠을 걷고 새살 밀어 올렸다
연초록 물감을 풀어 젖은 이마를 닦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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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짓밟히더니
천숙녀
앞섶을 열어놓고 7月 하늘 쪽물 부어
드리운 품안에서 새순으로 날개 돋는
허기를 채워야 했다 맨손으로 오르는 벽
바람 부는 동천冬天 아래 주저앉은 들풀 좀 봐
구르고 짓밟히더니 넋 푸르게 물길 트네
못 지운 삶의 흔적에 묵은 체증 내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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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짧은 편지
천숙녀
뒷골목을 배회하며 진흙탕 휘저었다
따돌리지 못한 냄새 먹고 먹어도 허기진 날
어쩌면 가을날쯤에 맥脈 놓을까 생각했지
내리쬐는 따가움에 가릴 것 없다 해도
땡볕 호미질에 하얀 옥니 내보이며
풀뿌리 거푸집 쳐 놓고 기울진 마음 세웠다
푸른 이끼 앉은 세월에 붉은 밑줄 그어지면
불타는 심장을 꺼내 새 살 밀어 올려야지
젊은 날 짧은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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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처진 어깨
천숙녀
북적대는 세상 길목 분분히 꽃 진 자리
흐리고 침침한 눈 사물들이 보이지 않아
아픈 곳 눈동자
씻어 또렷하게 닦았다
가라앉은 삶을 훑어 메우는 하루 셈이
겨울잠 굳어진 몸 처진 어깨 깃을 세워
다듬이 방망이 소리로
앞마당에 울렸다
늦잠을 깔아뭉갠 걸음이 분주하다
한 꺼풀 나를 벗겨 일으켜 세우는 강
깨어져 뒹구는 벽돌
푸른 화폭에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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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푹 젖은
천숙녀
들꽃 만나러 나섰다가
느닷없이 비를 맞아
한나절 소낙비에 한 생이 푹 젖었다
제 속살 비춰지는데
속사정이 필요할까
삼켜지지 않는 입속 말
꾸역꾸역 집어넣고
가을 하늘 귀퉁이에 축軸 놓아 버렸으니
어둠 속 촛불이 되어
업장으로 탈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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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하류에서
천숙녀
뼈가 숭숭 보이는 가슴팍 안고
하류로 하류로만 떠나던 날
기억의 저편을 더듬어
봄꽃 엽서 등불 켜며
말라서 바스라져도
향기만은 저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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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한민족 독도사관 연구소
천숙녀
초겨울 매운바람이
등짝을 밀어냈다
이마를 짚는 손길
웅크리고 앉았다가
깊숙이
파고든 햇살
푸른 목숨으로 살고 있다
스무 계단 지하 벙커에
독도사관 머물고
이십 구년 달려와 돌아 갈 수도
멈출 수도 없는 길
목울대
붉어진 걸음
초승달로라도 뜰까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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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숙녀시모음 4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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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을 산
천숙녀
어느 사이 가을 능선에 흰 머리가 듬성하다
허리 굽혀 한 생애 마무리하는 어머니
그리워 밤새 달려가 이부자리 펴 드렸다
이부자리 밀쳐내고 구들장에 등 눕히자
세상을 덮고 있던 지뢰밭을 지나오시며
얼마나 고단하셨는지 가을 산으로 타 버렸다
☆★☆★☆★☆★☆★☆★☆★☆★☆★☆★☆★☆★
《2》
공
천숙녀
깨어진 화분에도 고추 모종 심어놓고
지지대를 세운 뒤 흙손을 털며
돌아서 걷는 걸음에게 눈물을 들킨다
너무 많이 가져 등짐이 무거운가
숨 멎는 그날에는 이 모두가 족쇄인데
푸성귀 한 소쿠리를 말간 물에 씻어냈다
☆★☆★☆★☆★☆★☆★☆★☆★☆★☆★☆★☆★
《3》
깊은 잠
천숙녀
붉은 영정(寧靜) 당겨 덮고 아버지 깊은 잠 드셨네
길이 곧게 펴지던 날 그 길 따라 떠나셨다
내 눈물 땅을 적시고 노을처럼 번져갔어
봄볕이 너무 짧아 철커덕 닫힌 문
뼈마디 매운 울음이 꼿꼿하게 서성였어
저무는 하늘 향하여 무릎 꿇고 엎드렸다
☆★☆★☆★☆★☆★☆★☆★☆★☆★☆★☆★☆★
《4》
나를 찾아
천숙녀
떠나는 길
. . . . . .
둘러맨 바랑 한 짐
마음가는 대로 길을 걷다
한 조각 퍼즐이 되어
가로장 딛는 해진 발
☆★☆★☆★☆★☆★☆★☆★☆★☆★☆★☆★☆★
《5》
난蘭
천숙녀
등짐이 버거운 날은
책을 읽어도 배가 고프다
밥 한 사발 맹물에 말아 꾸역꾸역 삼키고 나면
파랗게 질린 볼떼기
한 끼 삶 건너왔다
돌 틈에 내린 뿌리가
산을 키우는 난蘭이었다
☆★☆★☆★☆★☆★☆★☆★☆★☆★☆★☆★☆★
《6》
놓친 봄
천숙녀
청춘이 빠진 자리에 청춘 당겨 앉히려고
허연 머리에 검정 물들여
한 달쯤 젊고 싶다
초록빛 압축된 시간을
봄 언덕에 펼치는 손길
올봄은 유난히 빨라 봄을 놓쳐 버렸다
입술을 깨물면서
진달래꽃도 피우면서
껍질은 제 속살 녹이며
싹 틔워 있었고
걷던 길 누웠다 고랑 있어 끊어진 길
아무도 보이지 않아 함께 걷던 우리 이름
짜디짠 눈물 훔치며
논두렁 길 걷고 있다
얼마를 더 살고 나면 적절하고 적절해질까
걸어온 길 걸어갈 길 아득했고 아득하다
노숙자 길바닥에 앉아
움켜쥔 껍질 내던졌다
☆★☆★☆★☆★☆★☆★☆★☆★☆★☆★☆★☆★
《7》
눈물 꽃
천숙녀
반듯이 누웠던 하온이가 끙끙대며 뒤집는다
하온이처럼 나도 따라 구르면서 뒤집었다
묵직한 목화 솜이불
씩씩하게 걷어찬 발
누군가 동아줄을 던져주고 있었다
좋은 눈빛 건네주며 내밀어준 어깨 있다
매웠다 와사비보다
울컥 쏟는 눈물 꽃
☆★☆★☆★☆★☆★☆★☆★☆★☆★☆★☆★☆★
《8》
눈물로
천숙녀
어머니 부르던 소리 귓전에 와 닿는다
색 바랜 문창살에 창호지를 바르던 손
저물녘 갈퀴손으로 빗질하시던 어머니
어머니 숨결 배인 그 자리는 비어있어
꺾이고 패인 주름 이 깊은 그리움
쓰디쓴 육모초즙을 눈물로 마십니다
☆★☆★☆★☆★☆★☆★☆★☆★☆★☆★☆★☆★
《9》
눈물샘
천숙녀
풀뿌리 아픔을 딛는 칠월 하순 어느 날
수첩을 펼치면서 푸른 숲이 들어선다
불모의 빈자리마다 초록 물감 엎지르며
이 세상 구석구석 울리는 법고 소리
영혼은 시간을 잡고 현絃을 당겨 조이면서
푸른 싹 기다리는 속내 눈물샘 터트렸다
뒤 곁에 모여 앉은 속 깊은 항아리들
너른 바다 품기 위해 쪼는 햇살 받으면서
무명천 펼쳐 들고서 문패를 닦고 있다
☆★☆★☆★☆★☆★☆★☆★☆★☆★☆★☆★☆★
《10》
두통
천숙녀
뒷덜미가 당긴다 역류하는 이 슬픔
속주머니 숨겼어도 꾸역꾸역 비집다
우묵한 그림자 안고 깊은 잠을 청하는 밤
형체도 없으면서 광풍을 몰고 왔다
제 풀에 주저앉아 몸의 무게 줄여야 해
팔 다리 가위 눌렸다
멍든 분재 인두질이다
☆★☆★☆★☆★☆★☆★☆★☆★☆★☆★☆★☆★
《11》
뒷모습
천숙녀
누군가 나를 밀쳐 다급히 달려갔다
내 눈에 보인 것은 달리는 뒷모습뿐
골목길 들어서더니 꼬리까지 사라졌다
휴대폰 저장해 둔 이름을 지워간다
2호선 순환 열차 에도는 발자국들
사나흘 폭포수에 첨벙 지친 몸 씻고 싶다
밤새운 새벽 별은 밝은 둘레 울타리 쳐
밥상에 봄 올리고 식탁 의자 내 놓았다
속울음 눌러 삼키고 처마 끝에 짓는 복
☆★☆★☆★☆★☆★☆★☆★☆★☆★☆★☆★☆★
《12》
등나무
천숙녀
뒤틀면서 꾀고 오른 등나무 손길 보아
밖으로 겉돌면서 십수 년 지난 세월
아직은 푸른 바람에 실려 오는 등꽃 있다
지난 밤 가위눌린 사연들은 쓸고 싶어
뼈마디 성성하던 바람을 다스리며
덮어 둔 일상의 그늘 차일마저 실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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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등燈
천숙녀
두꺼운 벽 견고히 쌓아오진 않았었나
윗목으로 밀쳤던 등燈에게 이름 불러 내어건다
낡은 등 심지 키우면
돋운 만큼 보이는 세상
모진 세월에 갈 켜 닮아진 손가락 끝
절망 뚫고 오르는 길 누가 나더러 함부로 말해
직선의 끄트머리를 향해
등燈 피울 기름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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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말리고 싶다 발
천숙녀
종일 밟고 다녔던 발바닥
하루를 접어 말리고 싶다
아문 딱지 떼어내고 맨발 씻겨 주는 밤
다 해져 꺾이고 패인 발
맥을 짚고 풀어야지
바깥으로 비스듬히 닳아 있는 구두 굽
조임을 위해 나사 돌리듯
발목 끈을 묶으면서
뒤축에 단단히 박힌
금속 심지에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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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말씀
천숙녀
말을 하지 않아도 불쑥 돋아 감기는
그대를 향한 푸른 불꽃
나를 내려 앉히는
비워라
용쓰지 마라
행간마다 숨겨진 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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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못 짜본 베
천숙녀
어제는 종일토록 물레를 돌렸다
한 치도 못 짜본 베
초록 연가 부르면서
짜야 할 생애 마디들
능직綾織으로 평직平織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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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몽돌
천숙녀
처음부터 둥근 상像 몽돌은 아니었다
이리 저리 휘둘리며 단단한 몽돌로 굴러
걸쭉한 땀방울들이 몸져누운 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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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무지개 뜨는
천숙녀
아등바등 걸어온 길, 돌아보니 일탈逸脫이야
오기와 과욕 가슴에 품고 발바닥 닿도록 누볐을까
여태껏 아랫도리 감싸 줄
옷 한 벌 장만하지 못했는데
해지는 서창 하늘엔 노을이 붉다
비바람에 할퀸 자국 흥건히 고인 땀내
맨땅 위 공허로 쳐질 파도 짓 수채화여
세차게 불어온 폭풍 잠들 날 있을까
햇살 나붓이 반겨 으깨진 상처 쓰담아 주는
마른하늘에서도 일곱 빛깔 무지개 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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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민들레 홀씨
천숙녀
민들레 홀씨를 날립니다
툇마루 걸터앉아
봄볕 쬐고 있습니다
당신도
따뜻할까요?
봄볕도 홀씨처럼 날리고.
밥
천숙녀
한 사발 아침밥이 비닐 속에 뭉클하다
묵은 김치 참치 햄 넣고 푹 끓여낸 반찬이다
관우 형 밥을 지었고 화수 씨가 끓인 찌개
허기진 빈속을 채워 문을 열고 나서는 길
지친 등 도닥이면서 어깨를 내어준다
한 그릇 따뜻한 밥이 꿈을 심고 하루를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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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빨래
천숙녀
장롱 속 이불 홑청을 비벼 빨아 널면서
오늘은 볕살이 좋아 발가벗고 매달렸다
길 잃고 떠밀려가던 내 목쉰 아우성도
☆★☆★☆★☆★☆★☆★☆★☆★☆★☆★☆★☆★
《21》
서성이다
천숙녀
밤새도록 변방을 서성였다
밟힐수록 향기 나는 초록 꿈
방랑의 어디쯤 여울 바다로 흐르는지
날마다 속을 비우며 지평을 따라 꿈꾸는지
버티는 벽 속은 왜 저리도 단단할까
막막한 어스름 위에 손톱으로 자국을 내고
아버지 침(針) 놓아 주셨다
어혈(瘀血) 풀어 주셨다
☆★☆★☆★☆★☆★☆★☆★☆★☆★☆★☆★☆★
《22》
수채화
천숙녀
파장의 함지박 이고
썰물 지는 노을 길 걷는
고샅 구르던 몸 씻겨줄
물 한 두레박 퍼 부었다
슬픔이 파랗게 흔들려
우물을 파고 있는
☆★☆★☆★☆★☆★☆★☆★☆★☆★☆★☆★☆★
《23》
시 한편
천숙녀
집안 가득 꽃들이 붐비더니
꽃잎으로 찔러오는 낱말들
비로소
가부좌 풀고
시 한 편을 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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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아침
천숙녀
우리 집 옆 골목에 거푸집을 치고 있다
가로세로 탄탄히 묶고 보온덮개로 씌웠다
안에서 일어나는 일 간섭 말라 이르는지
포크레인 들락이며 헌 집은 허물어졌고
움푹 파 놓은 깊은 터에 벽마다 박히는 쇠
뼈마디 새롭게 세웠다
토목공사 중이란다
어떤 집이 세워질까 지켜보는 눈빛들은
바람 따라 한곳으로 쏠리는 시선들
어제의 터널 지났다
만선 가득할 아침이다
☆★☆★☆★☆★☆★☆★☆★☆★☆★☆★☆★☆★
《25》
아침나절
천숙녀
남편과 아들, 딸아이도 외출이다
커피 한잔에 햇살 몇 올 잡아당겨
육신의 방안에 있어도
마음은 먼 봄나들이
나물 캐던 고향 들녘 묻혀진 학창시절
청운靑雲이랑 하늘이랑 나비 되어 싸다니다가
열두 번 종소리에 깨어
먼지 낀 창을 닦는다
☆★☆★☆★☆★☆★☆★☆★☆★☆★☆★☆★☆★
《26》
아픈 강
천숙녀
마음 떠난 그림자도 살 비비던 그 사람도
돌아보면 아픈 강, 물소리로 울고 있다
모든 것 지워야겠지 깊이 파인 물소리 같기도 한
긴 목을 늘여놓고 마주했던 시간들
땅을 파고 뒤집으며 여문 씨앗 심었는지
강물을 넘나들면서 살던 끈 풀고 있다
흑백사진 속에서는 통기타를 튕기면서
땅을 밟고 춤을 추며 강강술래 돌고 있어
풀리던 생각들이 모여 낮게 하늘을 날고 있다
☆★☆★☆★☆★☆★☆★☆★☆★☆★☆★☆★☆★
《27》
안경
천숙녀
대책 없이 살아온 날
회오리와 마주쳤다
끌어안던 눈빛들
짓이겨져 쓰러진 자리
때맞춰 내리던 장대비
안경테를 벗겼다
눈이 아파 보이지 않고
귀가 멀어 들리지 않아
만신창이가 된 모습은
부엉이가 물고 날아가
서러움 기억나지 않아
뜬 눈으로 곱씹은 아픔 같은 거
☆★☆★☆★☆★☆★☆★☆★☆★☆★☆★☆★☆★
《28》
안부
천숙녀
당신으로부터의 젖은 편지
......
애써 파종을 위해
흙 몇 삽을 구했다
열일곱
덜렁가시나
갈래머리처럼...
당신이 참 그립습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
《29》
어디쯤
천숙녀
지난겨울 가시에 찔린
날개와 부리 있어
어디에 있을까
떨어져 나간 내 부리
내 깃털
어디쯤에서
숨죽여 누웠을까
☆★☆★☆★☆★☆★☆★☆★☆★☆★☆★☆★☆★
《30》
옛집
천숙녀
쪽진 은비녀 단정한 우리 엄마
옛집이 그리워 세월 묻은 빗장 여니
눈시울 붉게 물들어 주름살로 내렸다
살아 온 날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비조산 앞마당에 물러앉은 긴 그림자
꼬맹이 등잔 밑에서 골목길을 내달렸다
☆★☆★☆★☆★☆★☆★☆★☆★☆★☆★☆★☆★
《31》
오후
천숙녀
풀지 못한 숙제를 두고
한 폭 그림을 그리는 오후
마음 헹궈 널며 두 눈 닦고 귀 씻어도
명치끝 단단한 옹이 풀어질 날 있을까
형틀에 칭칭 감긴 속마음 풀길 없어
긴 목에 목줄을 걸고 내 몸 찢듯 터트렸다
끓이다 여물어 터진 엽서 한 장 띄웠다
☆★☆★☆★☆★☆★☆★☆★☆★☆★☆★☆★☆★
《32》
유월 오면
천숙녀
나무들 잎새마다 당신으로 물들이고 싶어
가지마다 열리고픈 열매이고 싶어
어린 딸
젖 망울처럼
수줍은 열매가 익고 있다
☆★☆★☆★☆★☆★☆★☆★☆★☆★☆★☆★☆★
《33》
자하연 팔당공원
천숙녀
마음 가는 곳 따라 걸음 떼고 싶은 날
가려운 곳 긁어주던 그 손길 그리워져
달렸다
자하연 팔당
공원묘지 추모공원에
“주님의 은혜가 내게 차고 넘쳤나이다”
1917년 12월 2일생 1994년 11월29일 소천
어머니 최봉자의 묘 결빙 녹여 주셨다
어머니 떠나신 지 이십 오년 지난 세월
단 한시도 잊은 날 없어 늘 곁에 머무시며
휘모리 뛰던 가슴도 꾹 눌러 도닥여 주신
엉클진 마음 밭에 촉진제를 뿌려주고
몸 눕히는 강줄기로 혀끝의 독毒을 풀어
생채기 남긴 가슴을 말갛게 우려 주시던
내 삶이 각박하여 결結 삭아 무너질 때
어머니 묘소 앞에 옥죄던 손 풀고 나면
물관에 눈 귀 씻듯이 늦가을이 여물었다
☆★☆★☆★☆★☆★☆★☆★☆★☆★☆★☆★☆★
《34》
잠시 쉬는 동안
천숙녀
탄력 잃은 어깨가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
낯두꺼운 구름이 의자를 갉고 있다
한나절 문신으로 남아 몇 배는 더 부풀려지고
소나기 한줄기 뿌리고 지나갔다
얼룩 묻은 발자국들 흙 묻은 손 씻겨놓고
은하銀河가 은하銀河를 뚫고
출렁이며 지나갔다
☆★☆★☆★☆★☆★☆★☆★☆★☆★☆★☆★☆★
《35》
지문
천숙녀
몸속에는 둥근 마음 키워가며 사는 날
가슴에 금이 갔다
숨이 턱 막힌 영혼
공기도 굳어져 갔다
아무도 모르게 차양을 쳤지
영혼이 가려웠다, 가려워 긁던 손가락 끝
시들시들 말라갔다
지문이 사라졌다
손가락 지워진 지문을
나이테로 더듬어보는 저녁
☆★☆★☆★☆★☆★☆★☆★☆★☆★☆★☆★☆★
《36》
찔레 향기
천숙녀
걸음마다 밟히는 유년 고향길
촘촘히 깔아놓은 뭉게구름 피어나고
골마다 찔레 향기가 그득했던 엄마 냄새
앉은뱅이 경대를 단정히 꺼내놓고
가을볕이 좋다시는 엄마를 앉히셨다
얼레빗 머릿결 쓸며 곱게 빗고 계시네
따스한 풀방석이 지천에 펼쳐있어
서로에게 무엇이 될까 깊어지는 조화 속에
쉼 없이 길 없는 길 위를 걷고 계신 우리 엄마
☆★☆★☆★☆★☆★☆★☆★☆★☆★☆★☆★☆★
《37》
차향 앞에서
천숙녀
꾸들꾸들 뒤틀린 몸
여린 속잎이었다
수천일 시간을 덖은 마음 밭 우려내며
소반 위 찻잔 속으로
쉼 없이 걸어왔다
접히고 꺾여져야
깊은 생(生) 만난다지만
차향은 입 안 가득 볼우물로 채우고 싶어
사랑채 잉아 대에 걸려
그대 발자국 소린가 가만히 있다
☆★☆★☆★☆★☆★☆★☆★☆★☆★☆★☆★☆★
《38》
참는 자
천숙녀
참을 인忍 글자 보며
열 번도 더 적어본다
참는 자는 어리석다고 물 흐르듯 이해하란다
참을 인忍
천수답처럼
비 안 오면 망치는 일
☆★☆★☆★☆★☆★☆★☆★☆★☆★☆★☆★☆★
《39》
청소
천숙녀
어지럽게 널려있는 책들은 가지런히
밤새워 쌓여지던 뇌리 속 갈등마저
이 아침 딱딱한 말에게 걸레질하고 있다
웃자란 잡풀들 금이 간 담장 벽에도
빗자루 끝 엉겨 붙은 오욕칠정 덩어리
한 곳에 쓸어모은 불씨 불쏘시개로 태웠다
☆★☆★☆★☆★☆★☆★☆★☆★☆★☆★☆★☆★
《40》
콩 꼬투리 툭
천숙녀
여름 한 철 푸르던 날 콩 꼬투리 툭 터졌다
곪아서 문드러진 부서지는 노래
앞질러 달려가더니 몸을 풀고 누웠다
잡초들이 퍼질러앉아 넓은 들 지키고 있다
드러내진 못하지만 올곧은 땅 개간 중이다
삶의 길 완창完昌을 위해 두 손 모아 경經을 읽는
☆★☆★☆★☆★☆★☆★☆★☆★☆★☆★☆★☆★
《41》
파장
천숙녀
달뜨는 마음 꾹 눌러도 어깨가 결린다
자리 뜨는 파장罷場길 아무리 주물러도
꼿꼿한 몸을 세우려 자맥질로 일어서는
마음을 추스르며 속 깊은 얘기 들어봐
“한 사흘 굶어 본 사람 손들어 보실래요?”
툭 터진 꽃씨 봉투를 잠시 몰래 열어 봤다
서로 깊이 흐르며 푸른 꿈 덧칠했던
푸르고도 시린 물 두레박질 퍼 올렸지
깜깜한 밤을 견뎌낸 숨은 꽃의 가슴앓이
보채는 안부 인사엔 짧은 엽서 말 줄임표
억새풀에 베인 손 입술 질끈 깨물더니
지나온 발자국 따라 은하수로 흐르고 있어
☆★☆★☆★☆★☆★☆★☆★☆★☆★☆★☆★☆★
《42》
호롱불
천숙녀
유년 일기장엔 호롱불이 켜져 있다
심지 돋우는 무의無依 푸른 기운 가득하고
제 어미 속 살 찢고 나와 생生의 굽 갈아 끼우고
☆★☆★☆★☆★☆★☆★☆★☆★☆★☆★☆★☆★
《43》
환절기
천숙녀
말갛게 비벼 헹군 빨래가 뒤엉켰다
말끝마다 분분한 폴싹거리는 먼지들
마을엔 풍문이 떠돌아 귓속을 후벼 판다
고막까지 건드려 머리가 아파온다
묵은 고름 끈적끈적 고여지고 있는데
어머니, 건조주의보 언제쯤 걷힐까요
☆★☆★☆★☆★☆★☆★☆★☆★☆★☆★☆★☆★
《44》
환한 꽃
천숙녀
상봉동 지하 방에도 별이 뜰 수 있을까
건조한 머릿결 참빗으로 빗겨본다
짠 눈물 목구멍으로
참 많이도 삼켰잖아
숲으로 날고 싶은 새 푸드득 날아올라
표정 잃은 얼굴에도 입 꼬리 올라가고
손마디 새기는 나이테
살 속 깊이 박혀있다
☆★☆★☆★☆★☆★☆★☆★☆★☆★☆★☆★☆★
《45》
침묵
천숙녀
응달에서도 숨을 죽인 동면(冬眠)을 일깨우면
지축을 뚫고 걷는 푸른 새싹 있어
파란 꿈 촉심을 뽑아 물레를 잣고 있다
☆★☆★☆★☆★☆★☆★☆★☆★☆★☆★☆★☆★
첫댓글 좋은글 다녀갑니다
좋은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