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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인 탐험(11)] 박성룡 시인의 봄나들이 (2002.05.08)
『흔히 詩를 잃고 저무는 한때… 나는 이 果木의 기적 앞에 시력을 회복한다』그가 20년 전에 쓴 詩의 대상은 바람과 들꽃과 산맥 등 자연이 거의 전부였다. 중년이 된 지금 그의 詩안에는 인간이 主를 이루면서 삶의 의미에 시선을 두고 있다[朴成龍 시인 약력] 1932년 전남 해남 출생. 굉주고 졸업. 중앙대 졸업 「문학예술」에 「 郊外」 「花甁情景」으로 등단. 민국신문· 한국일보·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문화부장 역임. 현대문학상(1964), 한국詩協賞(1992), 대한민국 문학상(1992) 수상. 시집 「동백꽃」,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 「휘파람새」, 「고향은 땅끝」등 [李裕憬 시인 약력] 1940년 경남 밀양 출생. 경남고·외국어대 불문과 졸업. 1959년 「사상계」에 등단. 국제신보·조선일보 기자, 문화부장 대우. 스포츠조선 부국장 역임. 시집으로 「몇날째 우리 세상」 「우리의 탄식」 「초락도」 등. 李裕憬 시인 1950년대의 한국의 名詩 <果木에 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事態처럼/나를 驚愕케 하는 것은 없다.//뿌리는 薄質 붉은 黃土에/가지들은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모든 것이 滅裂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恍惚한 빛깔과 무게의 恩寵을 지니게 되는//果木에 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事態처럼/나를 驚愕케 하는 것은 없다.//--흔히 詩를 잃고 저무는 한 때, 그 가을에도/나는 이 果木의 奇蹟 앞에 視力을 回復한다.> 인용한 詩는 朴成龍 시인(70)의 「果木」의 전문이다. 1959년 당시 젊은 詩人들의 앤솔로지로 「新風土」라는, 洋裝(양장)에 곰보비닐 커버를 한 두툼한 시집이 나와 詩壇(시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거기 실린 그의 신작시가 이 「果木」. 이 詩는 짜임새나 선택한 언어들의 참신함 때문에 당시엔 새로운 서정시, 혹은 변형된 리리시즘(서정주의를 중시하는 경향) 詩의 한 표본으로 평가되었고, 지금도 1950년대 한국의 名詩로 손꼽는 데 아무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 詩에는 事態(사태), 驚愕(경악), 薄質(박질:메마름), 滅裂(멸렬) 恍惚(황홀), 恩寵(은총) 등 어려운 한자와 단어들을, 심지어 薄質이란 국어사전에도 없는 그 자신만의 造語(조어)를 동원하고 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쓴 이 한자어들의 뜻을 감안하면서 두어 번 읽어보면 詩가 갖고 있는 깊이와 이 詩人 특유의 상상력의 폭과 재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풋풋하고 희망적인 생명의 향기 같은 것에 도취할 수 있고, 자연을 들여다보며 구체적으로 노래한 詩가 사람들에게 주는 황홀감이 이런 것인가 싶기까지 할 것이다. 마치 <--흔히 詩를 잃고 저무는 한 때, 그 가을에도/나는 이 果木의 기적 앞에 시력을 회복한다>처럼.
『내 나이 20代 후반 가을에 쓴 것이었어. 광주 무등산 기슭의 도요지를 취재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마침 그때 高在騏(고재기) 선생이라는, 내 고교적 은사와 동행을 하게 되었지. 가을이 깊은 때라 산비탈 주위의 과수원에는 과실들이 주렁주렁 열려 빛을 내고 있었어. 무심결에 선생이 감탄을 하시더군. 「야 참 좋구나. 저 과일나무에서 익어 가는 과일들 좀 봐!」 이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더구먼. 詩의 소재를 발견한 것이야. 소재라고 하기보다는 영감이랄까 詩의 깨달음 같은 것이 그때 스쳐갔던 것인데, 서울로 올라와 단번에 쓴 것이 이 詩야』 1955년부터 1956년까지 문예지 「文學藝術」을 통해 「郊外」, 「花甁情景」 등으로 시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등단, 이후 40년 동안 주옥 같은 詩를 써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 「春夏秋冬」, 「휘파람새」, 「冬柏꽃」, 「꽃喪輿」, 「고향은 땅끝」 등 여섯 권의 시집을 낸 朴成龍 시인. 그가 10년째 詩壇에서 거의 「잠적」해 있다. 게다가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당수동 인정APT 105동 605호로 이사간 지난 4년 동안은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해왔다. 중요한 문학모임이나 施賞式 어디에서도 그를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문학잡지에서 그의 글을 본 지도 3년이 넘는다.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詩人인 그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일까? 하루 전 전화연락을 해놓고 혼자 그를 찾아갔다.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12시30분에 출발, 종로3가에서 1호선 수원행으로 바꿔 타고 성균관대驛에서 내려 플랫폼을 빠져 나왔을 때 시계를 보니 1시 50분을 넘기고 있었다. 전철 안에서는 내내 그의 산문집 「詩로 쓰고 남은 생각들」을 뒤적거렸지만, 내가 필요한 내용이 찾아지지 않아 심지어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1시간20분 정도를 이렇게 전철에서 소모시킨 것이다. 그의 집으로 찾아가는 여로는, 나의 길눈 어두움 탓도 있지만 멀고도 험했으며 교통사범으로 걸릴 뻔도 했다. 그가 사는 곳은 수원이라는 곳의 변두리 중 변두리로 택시운전사도 알지 못하는, 마을버스로만 접근이 가능한 그런 곳이었기 때문이다. 역구내에서 전화를 해봤더니 오른쪽 출구로 나오면 길 건너에 파란색 마을 버스가 있다고, 아파트가 종점이니 찾기 쉽다고 그의 부인이 설명했다. 매시간 정각과 20분, 40분에 버스가 오므로 그 시간을 맞춰야 한다는 부연 설명이 있었다. 나와서 두리번거렸지만 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마을 버스 정류장 표시가 없었던 것이다.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다 교통신호 위반을 해 순경으로부터 주의를 받았고, 택시를 잡아탔다가 운전사가 아파트 위치를 잘 모른다기에 그냥 내렸다가 요금 시비를 벌여야 했다. 역 주변에서 이렇게 40여분을 숨바꼭질을 하다 겨우 마을버스를 만날 수 있었다. 버스는 골목골목을 쏘다니다 들판을 건넜고, 큰길로 올라갔다가 좁은 길로 내려섰고, 아파트촌을 하나 들렀다 나와 다른 아파트촌 입구에서 섰는데 거기가 종점이었다. 아파트 구내에선 마침 화요일마다 열린다는 농산물직거래시장이 파장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오후 3시였다.
『아! 그만 하고 술이나 한 잔 하지』
꼭 4년 만에 만난 그는 얼굴은 살이 조금 붙은 것 같았다. 老色이 짙어지긴 했지만 해맑은 얼굴 색이었다. 바깥에서 햇볕을 쐬지 않았던 탓인 듯했다. 기다란 눈자위가 조금 짓무른 것 같았고 목소리의 끝이 조금 갈라지고 숨이 차 했다. 가래가 멎지 않아서라는 것이다. 메마르고 따뜻한 그의 손을 잡고 내가 『건강하게 보여서 좋네요』 했더니, 거기엔 미처 대답도 않고 의례적인 인사처럼 『이 먼 곳까지 찾아오느라 고생이 많았지야?』하며 가만히 웃었다. 그가 서울에 살 땐 나는 한때 그의 이웃이었고, 같은 성당에 다니는 敎友(교우)였고, 우리는 가톨릭 언론인 모임의 15년 동료였다. 말수가 적은 그와 나는 만나도 긴 이야기가 없었다. 짧은 문답이 고작이었고, 무슨 모임이라도 있으면 엑스트라들처럼 눈치나 보며 서있기 일쑤였다. 이웃으로 산 것은 1970년대 중반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서였다. 통금이 있던 무렵인데 자정이 임박해서 술이 거나해진 그가 수시로 소줏병을 들고 근처의 내 집 문을 두드리며 한숨 쉬듯, 탄식하듯 소리치는 것이었다.
『어이 동상! 우리 술 한 잔 하더라고…』 그리하여 그와 나의 집은 「통금」이 지난 시간에도 술판으로 조금 시끄러웠을 정도였다. 그러나 술이 깬 다음날 만나면 그는 간단히 『어제 나 좀 과했지?』 하거나 모른 척하며, 일상의 조용함으로 돌아와 있곤 했었다.
『…난 원래 詩論(시론)이 없는 사람인게』 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30년 가까이 근무했고, 李殷相, 金珖燮, 毛允淑, 徐廷柱, 朴木月, 朴斗鎭, 具常, 金春洙 등 20여 명의 詩人들과 만난 장문의 기획기사로 깊은 인상을 남기던 그를 인터뷰하러 녹음기를 들이대자 그가 한 첫 말이었다. 자신의 시론을 내세우기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 일쑤 하는 연막의 말 같았다. 그는 천성적으로 눌변이기 때문인지 아무리 길게 물어도 설명이 부족하다. 詩에 관한, 혹은 詩壇이나 다른 詩人에 관한 불만의 이야기도, 그에게 옮겨지면 메아리가 없어진다. 반응이 늘 솜뭉치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뷰를 당하는 그보다 인터뷰에 나선 내가 더 말이 많아졌다. 게다가 그는 그의 부인더러 술상을 보라 하고, 나의 더듬거리며 캐묻는 질문에 지루한 듯 『아! 그만하고 술이나 한 잔 하지』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몸도 안 좋으면서 무슨 술이냐고 몇 차례 구박을 해줘도 그때마다 그는 『까짓 것 술까지 삼가며 오래 살면 뭣해!』하며 삐죽삐죽 웃기까지 했다. 그것은 일주일을 간격으로 두 번이나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다 그랬다.
『李형 술 좋아하잖아! 조오기 술 많이 있어. 매실주로 할까? 「청하」로 할까? 아니면 「백세주」 사놓은 것도 한 상자나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몇 종류의 술 상자가 열 개는 좋이 될 것 같았다. 마을버스밖에 다니지 않는 외진 곳인데다 노인네들에게 짐이 된다면서 조카가 승용차로 한꺼번에 구입해 실어다 준 것이라고 했다.
뒤늦은 출생신고
朴成龍 시인의 저작물에 실린 약력 난을 보면 대부분 출생 연도가 빠진 채로 있다. 젊은 여류詩人들의 그것처럼 나이를 밝히려 하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면 가장 최근에 나온 「고향은 땅끝」이란 시집 끝에 실린 「시인의 약력」에도 「전남 해남 출생. 광주서중, 광주고, 중앙대 졸업. 1955~ 56년 文學藝術誌에 詩…」로 돼 있다. 실제 나이와 호적의 나이가 너무 차이가 나 어느 것을 써야 좋을지 난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차이가 무려 네 살이나 된다. 앞에 내가 그의 현재 나이를 70으로 잡은 것은 1998년 나온 그의 詩選集「풀잎」에 「1932년 전남 海南産」으로 돼 있어서다. 나이 차이가 이렇게 된 것은 아들 하나 낳고 딸 넷이 내리닫이로 생겨 걱정을 많이 한 그의 부모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보자 애지중지하다 출생신고도 잊은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아니면 의료사정이 안 좋았던 당시, 혹시나 출생신고 후 사망이라도 하면 면사무소를 들락거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4년을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 시절을 해남과 광주에서 보낸 그가 그로부터 50년이 훨씬 지나 쓴 詩 「배고픈 다리」엔 당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나의 幼年시절은/배고픈 다리(橋)였다./泉[良]洞과 月山洞./西洞의 갈림길--성귀모퉁이에 살던/나의 유년시절은/참말로 배고픈 다리였다.//성귀모퉁이에서/南光州 녹슨 철길 건너/석탄가루 마시며/배고픈 다리 건널 때는/참말로 배고팠다.//종일토록 탈탈 굶고/솔뿌리(松根) 파서 어깨 메고/배고픈 다리 건널 때는/참말로 배고팠다.//…」 아무튼 이 뒤늦은 출생신고 때문에 朴成龍의 학창시절은 항상 또래들보다 최소한 2년은 늦었다. 남들이 모두 소학교에 들어가 3학년이나 4학년이 될 때까지 그는 골목에서 혼자 빈둥거려야 했다. 놀면 뭐하나 하며 2년 동안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한 것이 이 무렵이었다.
光州의 「零度」 동인 주도
그가 광주시 서석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입학자격검정고시를 봐 광주서중에 입학한 것도 이런 연령에의 콤플렉스를 벗어나려는 몸부림 때문이었다. 중학 때도 급우들보다 늘 조숙했고, 선도자였으며 아는 것이 많은 「늙은 소년」이었다. 훗날 그는 1956년 「文學藝術」 8월호에 실린 추천완료 소감에서 이렇게 썼다. 〈아버지는 愛酒家였다. 매일 독한 술에 취해 돌아오시면 철없는 나를 보듬고 울고 하였다. 전쟁이 격렬해지던 어느 해에 일본에 가신 아버지가 8·15 광복과 함께 돌아오셨으나, 오래지 않아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때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철없는 나를 불러 곁에 앉히고 하던 한 마디의 말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 괴롭다. 『너무 허망하다…』고 하신 말씀을. 이런 아버지의 氣質을 고스란히 타고난 나는 어릴 적부터 퍽 多情多感한 소년이었다. 처음 나는 그림을 좋아하였다. S중학시절- 나는 매일 방과 후만 되면 畵友들과 조그마한 아틀리에에 모여 목탄을 구워 가지고 손과 발이 꺼멓도록 석고 데생을 하였다.…〉 이 무렵 그는 일요일이면 캔버스와 이젤을 짊어지고 교외에 나가 풍경화를 그리곤 했다. 그런 어느 날 선교사 묘지가 있는 숲 속에서 눈먼 소녀가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 소리에 도취하고 충격을 받는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영영 그림을 버리고 詩에 몰두하게 된 구체적 동기가 되었던 것이라고 추억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며 다녔던 소년시절 교외에서의 스케치 체험은 훗날 그가 詩를 쓰기 시작했을 때 사물을 보는 방식을 신선하고도 원숙하게 만든 것 같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말에서 휴전이 성립되던 1953년까지 광주에는 徐廷柱 시인과 金顯承 시인이 피난을 와 있었다. 未堂이 「無等을 보며」와 「上里果園」 같은 역작을 쓴 것도 이 무렵이었다. 茶兄 김현승 詩人은 이북에서 광주로 피난 와 숭일고교에서 교감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詩를 쓰고자 한 광주의 문학청년들이 이 두 詩人을 따른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零度」라는 동인지였다. 광주고교 출신의 朴成龍과 한 학년 밑이 대부분인 詩人지망생들이 동인이었다. 朴成龍을 필두로 姜泰烈 鄭顯雄 朴鳳宇 金正鈺 尹三夏 朱命永 李逸 張伯逸 朴異汶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詩人으로 데뷔했고, 나머지는 연극, 평론, 철학으로 진로를 바꿨다. 이 가운데 박봉우와 윤삼하 詩人은 이미 세상을 떴다. 「零度」 동인지는 4호를 끝으로 그만두게 되는데, 朴成龍이 데뷔한 이후인 1956년엔 부산의 「新作品」 동인과의 교류도 주목할 만했다. 「신작품」의 金載燮이 대표로 광주에 와서 동인들과 연석회의를 했으며 광주대표 朴成龍이 부산으로 「답례방문」도 해 부산 詩人들과 술도 마셨다. 朴成龍은 또 「戰時 다이제스트」 란 잡지 기자로 대구 취재를 가서 대구에 머물러 있던 金宗吉 시인과 「文學藝術」로 데뷔를 시작한 許萬夏를 찾아 인사를 트기도 했다.
첫 추천작은 연작시 「郊外」
朴成龍 시인은 자신의 詩的 스승으로 金顯承 徐廷柱 趙芝薰 李漢稷을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김현승 서정주와는 광주에서부터 시작해 서울에 와서도 꾸준히 왕래를 했고, 특히 새해인사는 빠뜨리지 않았다. 술을 잘하는 未堂과는 술친구로, 술은 못하지만 이야기를 좋아하는 茶兄과는 당신이 손수 끓여내는 향기 짙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곤 했다. 훗날 다형이 수색에 머물 땐 李東柱 시인 등과 함께 호남 출신 詩人들이 많이 모여 이른바 「水色 에콜」을 이뤄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조지훈과 이한직은 朴成龍이 「文學藝術」을 통해 데뷔했을 때 추천을 해준 분들이었다. 이 두 분 말고 편집주무를 맡고 있던 朴南秀 시인이 심사를 맡았지만 그는 추천기를 쓰진 않았다. 당시의 「문학예술」 詩 추천은 趙-李-朴 세 사람이 완전 합의해야 비로소 「합격」이 되었다.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신인으로 추천이 되지 않았는데 「좁은 문」으로 소문나자 다른 문예지를 통해 쉽게 등단하던 사람도 많았다. 이런 경향은 오늘날에도 흔하게 보인다. 투고돼 온 朴成龍의 詩 「郊外」를 본 3인의 詩人은 추천을 하기로 전격 합의했다. 우선 詩가 신선했고 知的이었으며 한자어를 교묘하게 다뤄 미소를 머금게 했다. 전후 모더니즘 영향 때문에 詩가 난해해지거나, 미당에 의해 소생되던 전통적 가락이 주조를 이루던 무렵이어서 詩 「郊外」는 이미지의 풋풋함과 세련된 언어가 크게 돋보였다. 나중 朴시인이 시집으로 묶었을 때는 그냥 「郊外」라는 제목 아래 Ⅰ, Ⅱ, Ⅲ으로 나눴지만 처음에는 「郊外Ⅰ」 「郊外Ⅱ」 식으로 발표했었다. 「Ⅲ」까지 묶은 詩 「郊外」의 전문을 인용한다. 「Ⅰ//無毛한 生活에선 이미 잊힌 지 오랜 들꽃이 많다.//더욱이 이렇게 숱한 풀벌레 울어 예는 西녘 벌에/한 알의 圓熟한 果物과도 같은 붉은 落日을 刑罰처럼 등에 하고/홀로 바람 외진 들길을 걸어보면/이젠 자꾸만 모진 돌 틈에 비벼 피는 풀꽃들의 생각밖엔 없다.//멀리멀리 흘러가는 구름포기/그 구름포기 하나 떠오름이 없다.//Ⅱ//풀꽃 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풀밭엔 꽃 잎사귀,/과일밭엔 나뭇잎들,/이젠 모든 것이 스스로의 무게로만 떨어져 오는/山과 들이 이렇게 無風하고 보면/아 그렇게 푸르기만 하던 하늘, 푸르기만 하던 바다, 그보다도/젊음이란 더욱 더 답답하던 것.//한없이 더워 있다 한없이 식어 가는 피 비린 終焉처럼/나는 오늘 하루 풋물 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Ⅲ//바람이어.//풀섶을 가던, 그리고 때로는 저기 北녘의 검은 山脈을 넘나들던/그 無形한 것이어./너는 언제나 내가 이렇게 한낱 나무 가지처럼 굳어 있을 땐/와 흔들며 愛撫했거니,/나의 그 풋풋한 것이어./불어다오./저 이름 없는 풀꽃들을 향한 나의 사랑이/아직은 이렇게 가시지 않았을 때/다시 한 번 불어다오, 바람이어.//아, 사랑이어.」
『詩 안 쓰겠다』 하자 趙芝薰이 뺨 때려
이한직 詩人은 추천기에서 詩 「郊外」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고 잡지사의 추천 방법과 추천 이후의 개인적 소감만 적었다. 그러나 3회째 추천된 「花甁情景(화병정경)」은 趙芝薰 시인이 추천기를 썼는데, 지훈으로선 모처럼 「토를 달지 않은」 극찬을 하고 있다. 1956년 7월 호에 실린 그의 글을 인용한다. 「이 달에는 朴成龍君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였다. 이미 발표된 두 편도 그의 재질을 엿보이게 하는 바 있었지만, 이번 작품은 일단의 進境이 있었다. 「花甁情景」은 맑고 의젓한데다가, 一抹의 페이소스를 곁들이고 있다. 소박한 李朝白磁를 대상으로 한 전통의 파악이 지성의 세련을 거쳐서 한결 깊이가 있고 모럴이 또한 건실하여 읽어서 溫暖(온난)함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좋다』는 찬사 한 마디를 붙여준다」 이 때문인지 지훈은 朴成龍을 유다르게 총애했다. 데리고 다니면서 술을 먹였고, 서울 성북동 자신의 집에 일쑤 朴成龍을 끌고 가 밤새도록 대작을 하곤 했다. 1962년 朴成龍이 단칸방에 신혼살림을 차렸을 때도 지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봐야겠다」며 찾아와 그의 신부를 정신없게 만든 일도 있다. 하루는 명동의 막걸리 집에서 芝薰을 모시고 朴成龍 千祥炳 등 젊은이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말을 함부로 하는 천상병을 보다 못한 朴成龍이 그를 나무랐고, 이를 계기로 언성이 높아졌다. 지훈이 화를 내며 『그만두지 못해!』 했는데 朴成龍이 대뜸 『선생님, 이런 자가 詩 쓴다고 설쳐대면 저는 인자부터 詩 그만 쓸 것이오』 해버렸다. 얼굴이 달아오른 조지훈이 『자네 방금 뭐라 캤나?』 소리치며 朴成龍의 뺨을 한 대 갈긴 것이었다. 그러나 지훈은 朴成龍이 실업자가 되자 취직에 앞장선다. 1965년이었다. 靑馬 柳致環에 이어 한국詩協 회장으로 있던 지훈은 詩協 회원들과 함께 韓日會談 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시인협회 창립 멤버이기도 한 朴成龍이 서명을 한 것은 당연했다. 한데 그 무렵 朴成龍의 직장은 정부 기관지나 다름없었던 서울신문이었다. 韓日회담 반대 서명 詩人들의 명단 속에 朴成龍이 보도되자 회사는 그를 해고시켜 버렸다. 朴成龍이 졸지에 직장을 잃게 된 것이다. 조지훈이 앞장서고 시인협회 임원들이 나서 朴成龍 구명운동을 벌였다. 그래서 한국일보의 「주간한국」에 취직이 된 것이다. 朴成龍은 한국일보에서 5년을 근무하다, 「시시껄렁한 기사 쓰는 일이 지겨워서…」 사표를 쓰고 지금 인천시에 속해진 부평으로 가 2년여 동안 벼농사를 짓는다. 그러나 농사일은 농사꾼 아들인 그로서도 벅차고 어려운 일이었다. 농사는 잘 안되고 돈 사기까지 당한 그는 논밭 3000평을 빚잔치로 처분하고 다시 언론계로 돌아온다. 1972년 서울신문 문화부로 복직이 된 것이다. 그 후 그는 서울신문에서 20년 가까이 있다가 정년을 맞아 은퇴한다. 지훈이 모처럼 「극찬」을 한 추천완료詩 「花甁情景」의 전반부는 다음과 같다. 「그는 나이 어린 姙婦모양/아래가 불러 앉아 있었다.//모란이 花紋을 이룬/붉고 또 푸른 커튼을 제치면//아침 햇살에는 사뭇/눈부신 빛깔을 머금고,//옛날- 아 실로 먼 옛날/나이 어린 어머님이 나를 배듯//꽃 항아리는 姙婦 모양/배가 아래로 불러 앉아 있었다.//…」 나는 1959년 5월께 월간 「思想界」 편집실을 찾아갔는데 거기 근무하고 있던 朴成龍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해 3월호를 통해 朴南秀 시인 추천으로 데뷔했던 나는 外大에 등록하고 곧바로 서울 종로2가의 지금은 길이 돼 버린 한청빌딩을 「방문」했다. 사상계사가 그 건물 3층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 있던 孫世一 선배(본지 연재 「李承晩과 金九」 집필자)가 朴시인을 소개하여 우리는 인사를 나눴다. 朴成龍 시인은 그때 표정 없이 앉아 있다가 『일이 쌓여서…』 하고는 자기 자리로 가서 일에 열중하던 것이었다. 열등감이 잔뜩 든 나는 孫선배로부터 박남수 선생 댁 주소와 대강의 도면을 얻고 서둘러 편집실을 나왔었다.
『내가 그때 사상계사에 가서 근무한 건 박남수 선생 때문이었어. 「文學藝術」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자 그가 사상계사의 편집고문을 맡았지. 종합잡지인 사상계에 문학 난을 대폭 확충하기로 했고 신인 추천제에다 나중엔 東仁文學賞까지 만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이야. 나는 그 전엔 新太陽社에 있었는데 「사상계」가 너무 잘 돼가니 비슷한 잡지 「新太陽」이 될 턱이 없어서 망하고 말았어. 박남수 선생이 실업자 신세가 된 나를 오라고 하더군. 그래서 가 있었는데, 거기서 1년 남짓 근무했던 거야』 朴成龍 시인의 시적 편력은 그의 삶처럼 안정이 돼 있다. 20代 초반에 시단에 데뷔할 무렵의 詩들은 자연주의적 서정시의 세계였고, 30代 후반부터는 사회적 관심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詩를, 그리고 50을 넘기면서부터는 自我에 대한 성찰의 詩를 많이 썼다. 그렇다고 求道적이거나 어설픈 깨달음의 詩 같은 것을 쓴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그는 詩를 포기하기 시작한다. 되지 않는 詩를 쓰며 자신을 연명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 탓일 것이다.
자연주의자 朴成龍의 詩 세계
그가 유일하게 쓴 자신의 글 「孕胎記 -나의 境遇」를 읽어보면 그의 20代와 30代 초반시절 詩에 임하는 자세나, 사물에서 詩를 구하는 구체적 방법론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 저런 것을 관찰할 때 전체적인 全景을 보기도 하지만, 되도록 구체적인 개별 관찰에서 더 강렬한 충격을 느낀다. 풀 이파리 하나, 꽃 이파리 하나, 곤충의 날개 하나, 여치소리 한 줄기, 귀뚜라미의 울음소리 한 가닥 한 가닥을 한참씩 관찰하고 있으면, 무엇인가가 곧 내 내부에서 波文하는 것을 느낀다. …폭 넓은 詩語의 개발, 새로운 리듬의 창조, 다각적인 호소력의 연구가 오늘날의 詩人들에게는 있어야 마땅하겠다. 그러나 눈에 띄는 作意, 소화되지 못한 思想, 기계화된 詩語의 나열은 현대의 우리나라 詩人들에게 가장 경계해야 할 문제점이 아닌가 한다」 그는 데뷔 이후 13년 만에 첫 시집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을 냈는데, 거기에 실린 많은 작품들은 사물의 미세한 부분에 대한 관찰로 채워져 있다. 새로운 詩語도 많이 개발해 놓고 있다. 예컨대 「不隨意筋(불수의근)」, 「屈折率(굴절률)」, 「科屬(과속)」, 「保護色(보호색)」, 「物質交代」, 「變溫動物(변온동물)」, 「綠素(녹소)」, 「鮮度(선도)」, 「失語症(실어증)」, 「修辭學(수사학)」, 「食餌療法(식이요법)」, 「抗生劑(항생제)」, 「IQ」, 「喬木限界(교목한계)」 등 그때까지 詩에서 전혀 쓰여지지 않던 말들을 과감하게 詩語로 차용했던 것이다. 시집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 후기에서 그는 「…(여기 실은 詩들에 대해) 한없는 서글픔과 함께 애착을 갖고 있다. 나의 20代와 30代에 갖고 있던 備忘의 자취들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고 썼다. 그래서 그는 첫 시집에 수록된 詩들 일부를 두 번째 시집인 「春夏秋冬」에도 넣었고, 세 번 째 작품집 「冬柏꽃」에도 일부 수록했다. 이 세 번째 작품집은 선집 시리즈로 新作(신작)도 일부 포함돼 있다. 세 번째 시집에 실린 「어느 나루터에서」란 詩를 인용한다. 1975년 8월에 발표된 것이니까 그가 추천된 지 만 20년이 되는 시점의 작품이다. 추천작 「郊外」와 비교하면 재미있을 것이다. 「떠나가는 사람들과/到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잔잔한 물 무늬를 이루고 있다./千年萬年 人間史의/때묻은 잔주름.//그러나 떠날 수도/돌아올 수도 없는 뿌리깊은/한 그루의 나무/그것은 다만 그 그늘로 해서/거기 큰 湖水를 파 발을 잠궈/서 있었다.//來往을 한다는 것은 원래/눈물이었다./人間은 다만/하나의 섬./거기 그 자리, 거기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하나의 외로운/섬이었다.」 그가 20년 전에 쓴 詩의 대상은 바람과 들꽃과 산맥 등 자연이 거의 전부였다. 자연의 신선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년이 된 그의 詩에는 인간이 主를 이루면서 삶의 의미에 시선을 두고 있다. 사람의 왕래는 원래가 눈물이었으며,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외로운 섬과도 같다는 것이다. 자연의 삶(나무)과 인간의 삶(섬)을 「나루터」라는 한 상황에서 연관시켜 보려는 노력을 이 詩는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朴成龍을 처음 만난 것은 1956년 무렵 대구에서였다. …그는 그때도 수척한 편이었고 말수가 적었고 말소리도 나직나직했다. 한 마디로 겸손하고 다분히 소극적인 인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첫 번째의 추천작품인 「郊外」는 결코 평범한 작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규모나 풍격에 있어 신인의 작품으로는 예외적일 만큼 인상적이었다.…중년기에 접어들면서부터 朴成龍의 詩 세계는 현저하게 자기 신변의 일상과 생활 쪽으로 기울어진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詩的 정력도 줄고 긴장도 해이되는 것이 상례이다. 朴成龍도 詩人으로서 이 상례를 벗어나는 것 같지 않다」 金宗吉 시인이 朴成龍 시인의 詩選集 「풀잎(1999년 창작과비평사 간행)」을 해설하면서 쓴 글이다. 김종길 詩人은 이 글에서 詩 「교외」를 당시 우리 시단을 통틀어서도 가장 원숙한 시적 음성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徐廷柱의 「無等을 보며」나 「光化門」과 비슷한 나이의 톤이라고 칭찬했다. 金시인은 해설 끝에다 朴成龍 시인의 詩 몇 편은 우리 현대시 유산에 名篇을 남겼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1987년에 낸 시집 「꽃 喪輿」에는 50代 중반을 넘기는 중년의 일상이 잔잔하게 그려져 있다. 아침 뒷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향 생각에 잠기고, 「답답한 날이면 壁을 마주하고 正坐」하기도 하는 그런 한가한 삶 말이다. 이 시집의 自序에서 그는 「나는 歷史를 볼 때나 社會現象을 볼 때나, 사람 됨됨이를 평가할 때, 否定的인 面보다는 肯定的인 面, 어두운 쪽보다는 밝은 쪽을 중시하는 편이다. 그래서 나의 詩篇(시편)들 역시 그런 경향을 다분히 띠고 있을 것이다」고 적었다. 사물이나 사건을 대하는 이런 긍정적인 자세는 그의 초기 詩에서부터 일관되게 지속된 것이 아닌가 한다. 「…뭐 그렇고 그런,/인생살이 끝판 같은 쓸쓸함이/엄습해 올 때가 있다.//그것은 봄여름 가을 겨울 없이 요즈음의 나에게는 어느 때 어디서건 밀어닥친다.//내가 가진 것과 못 가진 것, 부러운 것들과 혐오스러운 것, 슬플 때나 즐거울 때 가리지 않고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시도 때도 없이 짙은 안개자락 밀려오듯 그런 외로움이 엄습해 올 때가 있다.//나도 이젠 늙어 가는가」 인용한 詩는 그의 마지막 신작시집 「고향은 땅끝(1991년 문학세계사 간행)」에 실린 「늙는다는 것」의 후반부다. 이 詩를 쓸 무렵은 그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