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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경의 칭의 교리의 첫 번째 근거: 창세기 15장 6절
3. 신약의 세 번째 인용: 야고보서 2장 23-24절!
(2) 왜 제단에 드릴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했는가?
5)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된 독자적인 해석!
●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칭의는 이미나 아직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것이다!
지금부터 설명해드리는 것이 야고보서 2장 해석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초유의 해석이고 지극히 중요한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관심을 가지고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가) 이 단락의 참 의미!
이 단락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21-25절입니다. 그중에서도 21절과 24절입니다.
야고보서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것은 로마서 4장 2-3절과 문자적으로 정면충돌합니다. 그래서 해석하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특히,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표현 때문에 더 어렵습니다.
야고보서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이것도 이신칭읠르 설명한 로마서 3장 28절과 정면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문자적으로 완전히 반대지요. 그래서 해석하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데이비즈(Davids, 130)는 학자들이 대부분 이 구절을 "신약신학을 위한 해석상의 최고 난제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이 두 구절은 서로 막상막하입니다. 둘 다 해석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아직까지 정확히 해석한 학자나 목회자가 한 명도 없을 정도입니다. 거의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저도 너무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2년에 걸쳐 세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네 번째 겨우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그것을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ㄱ) 매카트니의 견해의 장점과 단점!
앞에서 저는 21-25절 해석에 필요한 두가지 키를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 두 가지를 키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제가 그 두 가지를 통해서 21-25절을 풀어나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약 2년 전 21-25절에 대해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댄 매카트니의 견해를 읽고 제가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매카트니는 이 단락이 이미나 아직의 칭의가 아니라 믿음에 행함이 따라야 함을 설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이 단락은 행함 있는 믿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강함 공감을 느꼈습니다.
또, 매카트니는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생애를 한 덩어리로 보았고, 그래서 시간 차이가 무의미해졌다고 했습니다. 저는 처음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밤을 새워가며 씨름하고 연구한 끝에 결국 받아들였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이 단락의 문맥을 정확히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매카트니를 생각할 때 아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이미와 아직의 칭의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는 현재에 초점을 못 맞췄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단락이 이미나 아직의 칭의가 아니라 믿음의 특성(믿음에는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을 설명한 것이라고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놓친 것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 단락이 단지 이미나 아직의 칭의가 아니라 그 사이의 현재의 믿음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단락이 단지 믿음의 특성을 설명한 것이라는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가 조금 더 나아가 현재에 초점을 맞췄다면, 아브라함과 라합이 이미나 아직의 칭의가 아니라 그 사이의 현재의 순종을 예로 든 것이므로, 21-25절에 나오는 시기가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생애를 한 덩어리로 보았고, 시간 차이가 무의미해졌다는 주장을 펼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러지 못햇습니다. 그래서 이미나 아직의 칭의에 대해 설명한 것이 아니라고 한 후, 유대교의 해석을 통해 시간이 무의미해졌다고 주장을 펼침으로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저도 전에 오래도록 현재에 초점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매카트니의 견해를 분별할 수 없었고 저의 첫 해석을 포기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이 단락의 각 구절들을 한 구절씩 연구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 순간 문맥을 볼 수 있는 눈이 떠졌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힘들게 매카트니의 해석이 모순이고 참 해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저는 앞에서 설명한 두 가지 키를 통해 이 단락의 문맥을 파악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지독히 난해한 21-25절을 해석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저는 14절의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을 읽고 '어? 이것은 처음 믿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네. 이미 믿는 신자들의 믿음에 관한 것이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와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를 같은 뜻으로 혼동하는데, 같은 것 같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캐치했습니다. 전자는 원인인 거짓 믿음을 설명한 것이고, 후자는 결과인 미래적인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그 결과 야고보가 믿는 자에게 따라야 할 행함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 단락에서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또, 저는 15-26절은 미래의 구원에 대해 설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14절 후반절의 "구원하겠느냐?"는 "천국에 가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런데 15-26절을 보면 "천국에 가겠느냐?" 혹은 "지옥 가게 된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행함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들뿐입니다. 이것을 통해 저는 야고보가 과거나 미래의 칭의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의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21-25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성공할 수가 있었습니다.
ㄴ) 이 구절들에 나타나 있는 세 가지 난제와 그 해답!
우리가 다루고 있는 21-25절의 해석이 어려운 이유는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행함으로'라는 말이 이신칭의에 반합니다.
둘째, '그때'라는 말 때문에 멘붕이 옵니다.
셋째,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 때문에 더 심히 헷갈립니다.
이 구절들을 이해하려면 이 세가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에 대한 답이 없는 것은 참 해석이 아닙니다.
특히, 댄 매카트니도 그렇고 학자들의 해석이 왜 자꾸 빗나가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는 문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진정한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A) 첫 번째 난제 - "행함으로!"
우리가 이 세 가지 난제의 답을 찾으려면 이것들을 무시하고 우직하게 문맥만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단락이 현재의 믿음을 다루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먼저 "행함"이라는 단어를 왜 사용했는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 단락에서 처음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할 때 어떤 것이 참 믿음이고,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의롭다 하시나를 다뤘습니다. 당연히 야고보가 말한 "의롭다 하심"은 이미나 아직이 아니라 그 사이 현재의 칭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조건이 같은 것이면서도 조금 다릅니다.
먼저, 이미의 칭의 때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습니까?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입니다. 물론 그 믿음 안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 즉 "마음으로 순종"(롬6:17)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을 행함으로 따로 분리시키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그것까지를 포함해서 믿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처음에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느냐? 믿음으로입니다(롬3:28, 갈2:16).
다음으로, 아직의 칭의 때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습니까?
심판 날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나를 보십니다. 그것이 바울의 고백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6-8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아직의 칭의)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처음에 믿었고 그 믿음이 참 믿음이라도, 그 후 믿음을 지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즉, 배교하거나 양심을 저버려서 믿음이 파선될 수 있습니다. 또, 그랬다가 회개하고 돌아서서 다시 행함 있는 믿음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심판 날 믿음을 끝까지 지켰나를 보십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최종적으로 의롭다 하십니다.
그러니 이미와 아직의 칭의의 자격이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현재의 칭의에 요구되는 자격도 다릅니다. 그렇다면 이미와 아직 사이 현재의 의롭다 하심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14절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믿음이 있노라"할 뿐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 바꾸어 말해서 '믿음'과 '행함'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그것은 거짓 믿음입니다. 행함이 있어야 참 믿음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때 믿음과 행함 둘 다를 보십니다. 처음에는 믿음만 보고 의롭다 하시지만, 그 후로는 믿음에서 나온 행함도 보고 의롭다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야고보는 21-25절에서 바로 그것에 대해 썼습니다. 그래서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행함으로"에 대한 의문은 해결이 되셨지요!
B) 두 번째 난제 - "제단에 바칠 때에!"
우리가 세 가지를 무시하고 우직하게 문맥만 보면, "제단에 바칠 때"나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의 "때"에 대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야고보는 지금 이미나 아직의 칭의가 아니라 그 사이의 현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 현재에 대한 예증이 필요했습니다. 때문에 야고보는 믿은 후 신앙생활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라합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드릴 때"나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라는 표현은 당연한 것이고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C) 세 번째 난제 -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문제는 "의롭다 하심"입니다. 문맥을 우직하게 보아도 "의롭다 하심"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모두 이것에 걸려 넘어집니다. '의롭다 하심은 처음 믿을 때 받는 것인데, 왜 이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지?'라는 의문이 들고, 그것을 도무지 뛰어넘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 해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문맥입니다. 그러므로 문맥이 그렇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왜 이때 의롭다 하심이라는 말을 사용했을까?' 하고 고민하고 풀어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단체로 학자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문맥이 아니라 '의롭다 하심'이라는 말에 꽂혀서 문맥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21-25절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럼 이것을 무시하고 문맥을 그대로 밀고 나가면 의롭다 함이 어떤 뜻이 됩니까? 야고보는 이 단락에서 이미나 아직 사이의 현재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미나 아직이 아니라 현재의 칭의에 대해 말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현재의 칭의라니 난생 처음 듣는 말이지요! 그래서 당혹스럽공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처음과 마지막 순간에만 신자들을 의롭다 하실까요? 아닙니다. 그중간에도 하나님이 의롭다 하지 않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의롭다 하시는 신자가 있습니다. 처음 믿을 때 의롭다 하셨다고 무조건 계속 의롭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배교하거나 범죄하여 믿음이 파선(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타락)되면 더 이상 의롭다 하실 수 없습니다. 때문에 참으로 처음과 마지막뿐 아니라 그 사이의 현재에도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지 않는 신자와 의롭다 하시는 신자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 단락에서 바로 그것을 다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한 "의롭다 하심"은 실제로 이미나 아직이 아니라 그 사이의 현재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이미와 아직뿐 아니라 그 사이에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약 2년 전이었습니다. 그것이 야고보서 2장 21-25절에 대해 완성된 저의 첫 견해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토대로 연구하여 많은 분량의 원고를 작성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뒤 해석이 바뀌면서 다 삭제해 버리고 간단히 요약한 것만 남았습니다. 이것이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처음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15장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처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아브라함은 12장에서 회심했는데 왜 15장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쓰여 있지?'
이 의문과 함께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항상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을 보시되 현재의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처음 믿을 때뿐 아니라 그 후로도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모세는 15장 6절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처럼 썼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장에도 이것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로마서 4:21-22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이것은 창세기 15장이 아니라 12장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리킵니다. 햇수로 무려 14-15년 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믿음을 다루면서 그것이 의로 여겨졌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처음 믿을 때 뿐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언제든 의롭다 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것이 사실일 경우 야고보서 2장 21절이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깔끔하게 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독창적이고 새로운 주장입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많은 증거가 있는 믿을 수 있는 견해이기도 합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경우 그가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창세기 12장입니다. 그런데 15장 6절에서 의롭다 함 받은 것처럼 쓰여 있습니다.
또, 바울은 로마서 4장 22절에서 아브라함이 백 세 때인 창세기 21장의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처럼 썼습니다.
또한,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 21절에서 창세기 22장 이삭을 제단을 드릴 때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것들이 모두 제 견해를 뒷받침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이외에도, 라합은 정탐꾼을 다른 길로 가게 하기 전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믿었고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렇게 썼습니다.
야고보서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역시 처음 믿을 때가 아니라 그 후인데도 그때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또,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뿐 아니라 다윗의 회개시를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훨씬 전에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또한,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구절에 나오는 '의인'은 처음 믿는 자가 아닙니다. 신실한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현재의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처음 믿을 때나 마지막 심판 때뿐 아니라 언제든 믿음으로 살고 행할 때 그때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묻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의로 여기십니까? 믿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생애 중 믿음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때가 언제입니까? 맨 처음은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입니다. 그 다음이 15장이고, 또 그것보다도 극명하게 나타난 곳이 22장입니다.
히브리서 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래서 야고보가 믿음을 설명하면서 뒤의 두 사건을 예로 든 것입니다. 또한,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이 곧 의롭다 함이기 때문에 이때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쓴 것입니다.
야고보서 2:21, 25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여러분, 이해가 되시지요! 이처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을 이미와 아직뿐 아니라 그 사이의 현재에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은 이외에도 많습니다.
a. 처음뿐 아니라 마지막에도 의롭다 함을 받는다.
우리는 모두 처음 믿을 때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마지막 때 아직의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이처럼 '의롭다 함'이라는 단어를 처음뿐 아니라 마지막에도 사용할 수 있다면, 그 중간에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b.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이 곧 의롭다 하심이다.
칭의에 대해 성경에는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두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또,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 또는 그 결과가 의롭다 함입니다. 서로 같은 뜻입니다. 로마서 4장 2-3절도 그것을 뒷받침해줍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두 가지가 서로 동의어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 6절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백 세 때의 믿음도 의로 여기셨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처음 믿을 때뿐 아니라 다른 때도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15장 6절에서 의롭당 함을 받은 것처럼 씁니다. 물론 그 구절의 "믿으니"는 이때 처음 믿은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믿어 온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믿으니"에 그때 4-5절의 약속을 믿은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의 믿음뿐 아니라 이때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처음이란 개념이 아니면 이때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7-2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백 세 때의 믿음입니다. 17-21절을 볼 때 백 세 때의 믿음임이 분명합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런데 그때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22절). 이를 통해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표현을 이미와 아직뿐 아니라 그 사이에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c. 하나님은 항상 현재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하나님은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또, 현재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현재의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의로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처음 의롭다 함을 받았을 때도 전에 안 믿었으나 그 순간 믿었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은 것 아닙니까? 그때도 현재의 믿음을 보신 것이고, 그 후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 모두 믿음을 보시고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처음에는 믿느냐를 보시고, 마지막에는 그 믿음을 지켰느냐를 보시고, 현재는 그 믿음으로 살고 있느냐를 보십니다. 즉, 언제나 믿음을 보시고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그것이 의롭다 함입니다. 그러므로 이미나 아직뿐 아니라 그 사이에도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저는 히브리서 10장 38절이 그것을 뒷받침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만약 우리가 믿은 후에 뒤로 물러가면 어떻게 될까요? 39절의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더 이상 의롭다 하시지 않습니다. 계속 믿음으로 사는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순간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고, 그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한편, 창세기 22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한 장입니다. 라합의 경우도 완전히 생사의 기로였습니다. 그때 순종을 안 하면 끝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때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합니다. 그런데 꼭 이런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어도 배교하면 끝나고, 양심을 저버리고 타락하면 끝납니다. 때문에 저는 행함 있는 믿음으로 사는 다른 모든 순간에도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고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d. 성경이 이미와 아직 사이에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성경에서 야고보는 이미와 아직이 아니라 그 사이의 현재를 상대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마디로, 그런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적으로 사용 가능한 정당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의 칭의에 대한 간접적인 구절은 더러 있지만(딤후4:8의 "의의 면류관"과 갈라디아서5:5의 "의의 소망" 등) 직접적인 구절(표현)은 로마서 2장 13절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문맥을 보면 심판대에서)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그런데도 모든 학자가 아직의 칭의를 인정합니다. 그런뎅 이미와 아직 사이의 믿음과 행함을 보고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은 야고보서 2장에만 세 번 나옵니다.
야고보서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야고보서 2:25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또, 로마서 4장에 나오는 각각 다른 시기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도 이것을 뒷받침해줍니다. 왜냐하면 둘 다 창세기 12장이 아니라 그 후이고, 두 곳에서 모두 의로 여기신다는 것과 의롭다 하심이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2-3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로마서 4:22-25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것만 해도 몇 번입니까? 다섯 번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까요? 성경이 우리 생각과 다르면 우리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성경을 바꾸려고 하면 안 됩니다. 당연한 말이지요! 그런데 왜 사고의 틀을 깰 생각을 하지 않고 이미와 아직의 칭의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거기에 맞추어 이 단락을 해석하려고 할까요? 솔직히 말하면, 전에 소개한 학자들의 대표적인 네 가지 해석들 모두 이런 신학적인 프레임에 성경을 짜 맞추고 억지로 해석한 것들 아닙니까? 이런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칭의에 이미와 아직이 있다는 것도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목회를 하면서도 오래도록 몰랐습니다. 오금동에 와서야 알았습니다. 옛날에는 모두 이미의 칭의만 알고 있었고, 아직의 칭의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성서신학자들이 연구하고 책들을 출판해서 아직의 칭의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퍼져서 지금은 거의 모든 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생소하다는 이유로 배척하면 안 됩니다. 처음 듣는 것도 성경적이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이미와 아직 사이의 현재에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제가 설명해드린 이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21절과 24-25절을 읽어보십시오. 그새 다 잊어버리시지는 않으셨나요? 그 세 가지는 이것입니다.
첫째, 이 단락은 믿고 있는 신자들에 관한 것이고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행함"을 들고 나온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둘째, 역시 믿고 있는 신자들을 다룬 것이므로 "제단에 드릴 때"와 "다른 길로 나갈 때"라는 시기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이미와 아직 사이의 현재의 순종을 예로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린 대로 이미나 아직뿐 아니라 그 사이의 현재에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표현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결국 21절과 24-25절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들 중에 하나님은 누구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그 사람을 여전히 의로 여기시는가? 아브라함이나 라합처럼 믿음이 있노라고 할 뿐 아니라 행함이 있는 자다! 라는 뜻입니다.
이제, 이것을 염두에 두고 그 구절들을 읽어보십시오.
야고보서 2:21, 24-25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어떻습니까? 서로 모순이 되고 난해했던 이 구절들이 신기하게 술술 이해가 되시지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고 전혀 모순이나 이상한 것이 없지요. 무엇보다, 성경저자가 사용한 표현을 억지로 바꿔야 할 필요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저는 바로 이런 것들이 제가 설명해드린 것이 참 해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