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부모님에 의존해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동
생에게 내 삶을 맡길 수도 없잖아요."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봐요. 집이나 시설에 있을
때 나 자신은 없다고 생각해요. 내 생각과 의지가 반영이 안되니까요.
집에서 자립할 때만이 나 자신을 찾게되고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난 9일 정립회관 1층에 자리잡은 동료상담활동가실. 컵을 들어 혼자
서 물을 마실 수 없을 만큼 장애가 심한 중증장애인들 사이에서 자립
생활의 의미에 대한 의견이 오갔다. 동료상담가 활동을 하고 있는 독
립생활연대 박현(28·지체장애1급) 간사는 "왜 우리는 자립생활을 해
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3개월 동안 자립생활을 공부해온 중증
장애인들이 나름대로 자립생활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올해로 33살이 된 뇌병변 1급장애인 이규식씨는 지난해 9월 인생에 있
어서 큰 결심을 했다. 피노키오자립생활센터 조직부장으로 일하고 있
는 그는 '자립생활'을 몸으로 실천하기 위해 집에서 독립한 것이다.
"언제까지 식구의 도움에 의지해 살수만은 없잖아요. 장애인단체에서
일해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부족한 것은 주위 사람들의 후원을
통해 살아보니 그럭저럭 살만해요."
이씨는 "중증장애인의 자립을 위해서는 먼저 사회가 변해야한다"며 지
난해부터 시작된 장애인 이동권 쟁취 운동의 선봉에 서오기도 했다.
최근 이곳저곳에서 자립생활을 이야기하는 장애인들이 하나둘씩 늘고
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일부 '자립생활'의 이념에 먼저 눈뜬 장애인
들은 집에서 독립해 자신만의 삶을 찾아 나서고 있다. '자립생활'을 지
향하는 중증장애인들의 자조 모임도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생겨나고 있
다.
2000년 7월 피노키오자립생활센터(소장 정만훈)가 문을 연 이후 같은
해 8월 광주에서 우리이웃자립생활센터(소장 마동훈)가 공식 활동을
개시했으며 2001년 2월에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회장 윤두선)가 결
성됐다. 또 최근 대구에서 밝은내일 자립생활센터(소장 최창현)가 공식
오픈을 했으며 전주에서 손수레자원봉사대 부설로 자립생활센터가 준
비되고 있다. 장애시민행동이 최근 성동장애인복지관에서 발대식을 갖
기도 했다.
이중 피노키오자립생활센터에서는 중증장애인 체험홈과 활동보조인사
업, 전동휠체어 교육사업 등을 펼치고, 우리이웃자립생활센터도 자립생
활 체험홈 운영, 세미나 개최 등의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에 앞서 지난 1996년 7월 대전정서학습장애아부모회가 정신지체인의
자립생활을 위한 대전자립지원센터를 설립, 소장인 유병우씨가 시의
조례 제정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당사자주의를 포함한 자립생활운동의
지향하는 여러 가지 목적을 표방하고 있지는 않았다.
자립생활센터는 아니지만 이미 1999년 7월부터 한국자립생활연구회(회
장 이광원)가 결성돼 2000년에는 정립회관과 함께 자립생활 전국순회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한편 2001년 7월에는 정립회관 동료상담과
정을 수료한 중증장애인들이 주축이 돼 전국의 자립생활활동가들이 네
트워크 조직인 한국자립생활네트워크(회장 최용기)를 결성, 현재 약 70
여명의 활동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와 함께 복지관이나 복지시설, 장애인단체에서도 자립생활 이념을
바탕으로 한 프로그램을 속속 도입하고 있다.
정립회관(관장 이완수)의 경우 1997년 미국의 버클리자립생활센터 연
수를 시작으로 자립생활지원에 나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자립생활운동
의 '메카'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정립회관은 1998년부터 일본의 휴먼
케어협회와 함께 세미나, 동료상담교실, 직원 연수, 강연회, 중증장애인
자립생활체험 프로그램 등 활발한 자립생활지원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2001년 2월 국립재활원(원장 김병식)에서도 직업훈련과정을 폐지하고
재활 프로그램의 일부로 자립생활 프로그램을 도입했으며 최근 제주
탐라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동료상담교실을 시작으로 자립생활 프로그
램을 실시하고 있다. 한사랑마을 또한 자립생활을 표방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으며 장봉혜림원에서도 정신지체 장애인을 위한 자립생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소장 김정렬)에서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지원을 받아 지난 3년 동안 유료도우미사업을 실시하는가 하면 연금제
도 개선, 전동휠체어보급운동 등의 활동을 실시하고 있다.
한편 학계에서는 '자립생활운동은 향후 장애인복지 발전의 대세가 될
것'이라는 공감대 아래 자립생활 관련된 연구자료를 속속 발표하고 있
다.<표 참조> 특히 삼육대 정종화 교수를 비롯해 한신대 변경희 교수,
가톨릭대 오혜경 교수 등이 그 중심에 서있다.
한국자립생활연구회 이광원 회장은 "자립생활 이야기가 본격화된 것이
약 5년 정도 됐지만 아직 자립생활의 이념이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깊
숙이 퍼져있지는 않은 상태"라며 "우리나라에서 자립생활운동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