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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만력 22년, 선조 27년(1594년)
1월 1일 새벽에 붉은 기운 일자(一字)와 같은 것이 하늘 남북으로 뻗치고, 정오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눈과 비가 왔다. 이날 명 나라 장수 유격(遊擊) 곡수(谷遂)가 경상도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에 도착하였다.
2일 곡수가 서울로 향하고 유격장군(遊擊將軍) 호(胡) 이름은 모름 가 군사를 거느리고 경상도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다음날 서울로 향하여 모두 요동으로 돌아갔다.
○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김덕령에게 선유(宣諭)하고, 또 충용(忠勇)장군이란 호를 주었다. 장군 김덕령을 위로하는 교지(敎旨)의 글은 아래와 같다.
왕은 이렇게 이르노라. 아! 내가 생각하건대, 예로부터 위태로울 때에는 반드시 충성을 품고 의를 지키는 선비가 나와서 세상에 쓰임이 되어 분주하게 힘을 써서 공업을 세워 혹시 이로 인하여 위태로움을 돌려서 편안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는 한갓 충의의 마음이 그만둘 수 없는 타고난 천성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국가 조종(祖宗)의 덕택이 사람을 감동시킴이 깊었던 것이다. 지금 왜적이 날뛰어 해가 지나도록 물러가지 않아서 위로는 종묘 사직을 지키지 못하여 궁궐이 잿더미가 되었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죽어 해골이 들[野]에 찼으니, 무릇 강토 안에 있는 이로 누가 부모 형제의 원수로서 마음이 아파서 이 적과는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겠는가마는, 아직 한 사람도 팔을 걷어부치고 의를 일으켜서 나라의 원수를 분히 여겨 앞장서서 세상에 드문 공적을 이루는 이가 없었다. 이 때문에 나는 밤낮 개탄하여 자리에 바로 앉지 못하고 팔을 어루만진 지가 오래였더니, 이에 본도의 순찰사 이정암(李廷馣)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네가 유문(儒門)에서 발신하여 순국할 정성이 있어 군중(軍中)에 발을 부치어 적을 토벌하는 뜻을 바치기를 원하여 원수부(元帥府)에 명령을 받들어 시골에서 군사를 모아 적진을 바라보고는 노하여 눈가가 찢어지며 한 자의 칼을 짚고는 말 위에 뛰어 타매 소문이 미치는 곳에 용기가 백배 난다 한다.
옛말에, “뜻이 있는 자는 일이 마침내 이루어진다.” 하였으니, 이는 어찌 절로 나오는 충의의 마음을 분발하고 조종의 길러준 덕택에 감동되어 세상에 쓰임이 되어 힘을 내는 자가 아닌가. 공업의 성취를 기대할 수 있겠도다. 나는 너의 뜻을 깊이 가상히 여기고 또 진중(陣中)의 군사들로 너와 힘을 같이 하여 국난에 달려오는 자도 역시 충의의 선비 아닌 이가 없음을 생각하여 특별히 충용(忠勇)이란 군호(軍號)를 주며, 근신(近臣)을 보내어 가서 너의 군사를 보게 하고, 인하여 위무하여 너의 나라 위해 충성 바치는 뜻을 표창하노니, 너는 마땅히 공경히 훈계하는 명령을 받아서 군사의 마음을 격려하고, 창과 갑옷을 정돈하여 별처럼 달리고 번개처럼 가서 원수의 지휘를 받아서 추한 종류를 섬멸하여, 기특한 공을 세운다면 벼슬과 상(賞)은 내가 너에게 아까지 않을 것이며, 너희 부하들도 그 공로에 따라서 벼슬과 상을 함께 받으리니, 너는 힘쓸지어다. 나의 명령에 어김이 없으라. 이렇게 교시하노니, 뜻함을 응당 알 것이다.
○ 충청도 홍산(鴻山)에 사는 송유진(宋儒眞)이 반역을 꾀하여 밀서(密書)를 전주에 보내기를, “임금의 죄악은 고쳐지지 않고 조정의 당쟁은 풀리지 않았다. 부역이 번거롭고 중하여 민생이 불안하다. 목야(牧野)에서 매처럼 드날리니 비록 백이숙제(伯夷叔齊)에게 부끄럼은 있으나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죄인에 벌주니 실로 탕무(湯武)에 빛이 되리로다. 운운.” 하였다. 어느 사람이 고변(告變)하면서 의병장 이산겸(李山謙)이 반역한다고 고하매 이산겸이 전주 무군사(撫軍司)에 변명하러 갔다가 잡혀 죽었다. 역적의 변이 어느 시대에 없으리오마는 그러나 임금과 신하의 분의는 지극히 분명하여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음과 같아서 문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적신(賊臣) 동탁(董卓)도 한(漢)을 붙든다고 핑계하였고, 난신(亂臣) 장방창(張邦昌)도 통곡하며 스스로 변명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난적의 괴수이면서도 난적이란 이름을 얻기는 싫어한 것이다. 지금 이 역적 송유진은 국가가 침략을 받는 기회를 타서 흉악하고 패역(悖逆)한 글을 지어 위로는 임금을 욕하고 아래로는 어리석은 백성을 꾀어서 명분(名分)이 거의 문란할 뻔하고 강상(綱常)이 거의 무너질 뻔하여 난리 중에 병든 백성들로 하여금 마침내 옥과 돌이 함께 타는 화를 면치 못하게 하였으니 통분하기 그지없다.
○ 충용장군(忠勇將軍) 김덕령(金德齡)이 전주에 가서 동궁을 뵈었다. 동궁이 친히 북정(北亭)에 나와서 그 용력(勇力)을 시험하게 하자 김덕령이 투구 쓰고 갑옷 입고 말을 달려 곧 담양으로 돌아갔다.
○ 전 회덕 현감(懷德縣監) 박광전(朴光前)은 왕세자 저하에게 백 번 절하며 말씀을 올립니다. 국운이 중간에 불행하여 흉한 적이 날뛰어 삼경(三京)이 함몰되고 승여(乘輿)가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천고에 다시 없던 변이었습니다. 다행히 황제의 은혜가 하늘과 같아 거룩한 위엄을 움직이니, 더러운 티끌이 잠깐 쉬어 한 구석에 물러가 둔쳤으니, 이것은 또한 천고에 다시 없던 경사입니다. 지금엔 승여가 환도(還都)하고 학가(鶴駕)가 남으로 내려오시어 우리의 군사 위력을 드날리고 우리 민심을 진정시켜 남은 백성들이 한관 위의(漢官威儀)를 다시 보게 되니, 무릇 혈기를 가진 자로서 누가 우리 임금의 아들이다라고 칭송하며 추대하지 않겠습니까? 인심이 분별하기를 생각하고 장수와 군사가 기운을 더하여 전복되려던 형세는 이미 돌려져서 회복될 터전이 장차 이루어졌으니, 모든 사람의 기뻐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하겠습니까? 신(臣)이 일찍이 시독(侍讀 왕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관직)이 되어 특별히 은총을 입었으니 비록 말직에 있었으나 정은 심상치 않았습니다. 당초에 변이 일어날 때에는 길이 막혔고, 흉한 적이 이미 물러간 뒤에는 항상 병에 걸려 남궁(南宮)에 섶을 안으려는 원[抱薪之願]을 이루지 못하고 속절없이 두릉(杜陵)이 시사(時事)를 감상(感傷)하는 눈물만 흘렸다가, 마침 오늘날을 당하여 비로소 와서 호소하니, 더디고 늦은 죄는 만 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시사가 예기하기 어려워지니 지혜 있는 선비도 계책이 없고, 흉한 칼날 지나는 곳에 용사도 손을 묶은 듯하여 성패(成敗)가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매였고 존망(存亡)이 순식(瞬息)간에 결정날 상황입니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항간에서 사람들이 사사로이 의론하기를, “적병이 좌도에서 철퇴하여 우도로 옮겨서 모두 거제로 들어갔으니, 그 마음이 언제나 호남에 있는 것인데, 명 나라 군사와 우리나라 여러 장수는 모두 팔거(八莒)ㆍ정암나루[鼎津] 등 상류(上流)에 웅거하였으니, 적진과의 거리가 하룻 길도 안 됩니다. 만약 적병이 진해(鎭海)ㆍ고성(固城)을 경유하여 바로 섬진(蟾津)으로 향한다면 의령에 있는 군사는 이미 족히 믿을 것도 못 되고, 섬진 위아래 60리의 진은 모두 피로하고 굶주린 군사라, 흉한 적의 기침 소리만 들어도 벌써 간 곳을 모르고, 팔거ㆍ정암나루의 구원도 벌써 미치지 못할 것이니, 전일에 진주의 함락이 족히 밝은 증거가 된다. 구례에서 분탕하던 적이 철수하여 저의 진(鎭)으로 돌아간 것은 하늘의 도움이요 인력은 아니다. 명 나라 군사에게 청하고 원수에게 명을 내려 병력을 나누어 진주ㆍ순천 등지에 진을 치고 방비하면 섬진의 군사가 급할 때에 구원병을 얻어서 진주의 실패를 면하여 호남도 무사히 보전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이 말이 또한 이치가 있는 듯합니다마는 다만 장막 속에서 숫대를 놀리는 것과 곤외(閫外)의 절제는 그 정밀한 것이 어찌 항간의 의론보다 못하겠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그러한 이유가 있을 것이니, 신이 항간의 의론을 가지고 감히 결단코 좇아야 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선 조정의 의론에 부쳐 보아 가부를 시험할 것입니다. 민심을 두고 말하면 그것은 국맥(國脈)이 관계되는 바이라, 전에 평일에 있어 고을의 수령과 변방의 장수들이 침노하면 약탈하여 이익은 아래로 돌아가고 원망은 위로 돌아갔으니, 증자(曾子)가 이른바 민심이 흩어진 지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근년 경인(庚寅)에 일본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나라에는 귀천(貴賤)도 없고 요역(徭役)도 없고 집집마다 곡식이 쌓여서 쓰기를 수화(水火)처럼 흔히 한다.” 하니, 변방 백성들이 이 말을 듣고 심히 부러워하였는데 임진의 변이 마침 그때에 일어나자 뭇 사람이 수군거림에 차마 듣지 못할 바가 있었습니다. 그 뒤에 적의 칼날이 미쳐 죽이고 불지르고 처자를 빼앗자 백성들의 마음이 비로소 원망하고 비로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우리나라의 다행입니다. 가령 저 적이 변방 백성을 선무(宣撫)하고 안위(安慰)하여 사탕발림을 하였더라면 민심이 어떻게 되었을지를 장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변이 난 뒤에 세민(細民)들이 호소할 곳이 없고 탐관들이 한이 없는 욕심을 방자히 하니, 말하자면 길어집니다. 아! 기왕의 인심은 이미 흩어졌거니와 장래의 인심을 수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방금의 일이 군사를 뽑는 것, 군량을 운반하는 것, 무릇 군무에 관한 일은 비록 심히 고통스러우나 생도살인(生道殺人)로 사세가 부득이하지마는, 긴하지 않은 공물(貢物)이나 명목 없는 납세에 대해서는 면제할 만한 것은 면제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가 부득이한 중에 또 부득이한 은혜를 베푼다는 것을 알게 하면, 백성이란 것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지극히 밝은 것이니 어찌 감동되어 돌아올 리가 없겠습니까?
오늘의 민생은 저 물에 뜬 풀과 같아서 조금도 생기가 없고, 오늘의 민심은 썩은 새끼로 말을 제어함과 같아서 심히 두려우니 백성을 몰아서 도적에게 보내 주는 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남으로 오시어 만백성이 우러러 쳐다보아 일분(一分)의 은혜라도 받기를 원하오니, 마땅히 자주자주 글을 내려 수령들을 타이르고 변방 장수를 신칙하여 남을 해쳐 저를 이롭게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며, 부로(父老)들을 불러 모아 어루만지고 구휼할 뜻을 표시하고 때로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항간에 드나들면서 백성의 고통을 물어서, 만약 여전히 변하지 않는 자가 있을 때에는 중하게 책하면 민생이 안정되어 민심을 이제로부터 수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계란 때문에 대장의 재목을 버리는 것은 사람을 쓰는 도량이 아니며, 백성의 기름과 피를 짜내는 것이 어찌 국가를 수호하는 도리이겠습니까? 민심을 수합함이 정히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물고기는 물에 의지하고 나무는 흙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 데에 의지함이 그 이치는 일반입니다. 물고기가 물이 없으면 목마르고 나무가 흙이 없으면 마르고 사람은 먹을 것이 없으면 죽는 것인데, 먹는 것은 전답에서 나오니 전답을 다루지 못하면 먹을 것이 어디로부터 나오겠습니까? 거년에 흉년이 들어 모든 곡식의 수확이 전보다 반이나 줄어들었는데, 요역(徭役)의 무거움은 전보다 10배나 되어 해를 넘기기 전에 집이 벌써 텅텅 비었습니다.
지금 보는 바에 의하건대, 집에 조석의 먹을 것이 부족한 자가 반이 넘는데, 영남에 양식 운반하는 값과 주사격군(舟師格軍)의 양식이 매월에 쌀이 7ㆍ8석이나 되어 그것을 내고 나면 목숨 살아날 겨를이 없으므로 도망하고 유리(流離)하는 자가 서로 잇달아서 촌락이 비게 되고, 안고 붙들고 가는 이가 길에 잇달았고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서로 베고 있어 참혹함이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조금 잘 사는 집도 사사로이 저축한 것이 적발되어 관청에 보조하느라고 다 떨어지고, 전년 관곡(官穀)을 받은 것이 겨우 3분의 1이 되어 공사(公私)가 함께 곤궁하니, 식구는 어찌하며 군량과 종자벼[種租]는 어찌하리요. 이것으로써 말하면 적이 이르기 전에 나라의 백성이 먼저 뽑혀진 것이니, 오늘의 사세를 가생(賈生)으로 하여금 보게 하였더라면 어찌 통곡만 할 뿐이겠습니까? 백성이 농사 지을 절후는 이미 닥쳤는데, 혹은 종군하여 방비하러 멀리 가고 혹은 군사되기를 기피해 도망하고 혹은 일족(一族)을 피하여 돌아오지 못하여, 전답이 있는 자는 경작할 계책이 없고 전답이 없는 자도 소작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니, 이 형편으로는 좋은 전답이 장차 다 쑥대밭이 될 것입니다. 적이 만약 충돌하여 짓밟아 버린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피차에 버티어 해를 거듭한다면, 살아 남은 백성이 무엇으로 먹으며 방어하는 군사들은 무엇으로 군량을 하며, 백성이 어찌 백성이 되며 나라가 어찌 나라가 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밭 갈아 먹고 우물 파서 마시는 것은 비록 스스로 생활하는 방법이나, 농사철을 어기지 않게 하는 것은 실로 왕도(王道)의 시초이니 마땅히 권농사자(勸農使者)를 따로 두어 유민(流民)을 불러 모아, 건장한 젊은이로서 군사에 뽑혀야 할 사람 외에 나머지 노약자(老弱者)나 뿌리 없는 부호(浮戶)는 위무(慰撫)하고 보존하여 안심하고 농사를 짓도록 하고, 관(官)에서 종자벼를 주어 전답의 다소에 따라 고루 나누고 혹은 부자집 곡식을 모집하여 부족한 이를 보충해 주고, 또 아전들이 뇌물 받거나 침노하는 폐해를 금지하여 갈고 심고 매는 데 때를 놓치지 않게 하면 이것이 현명한 선후책(善後策)입니다. 방금 군사 뽑는 사자와 곡식 모집하는 사자가 잇달았으면서 권농하는 일에는 주장하는 자가 없어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망종(芒種)의 절후가 4월 중순에 있는데 만약 4ㆍ50일 헛되이 보내면 벌써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 수령이 백성의 일에 마음을 쓰는 이가 몇 사람이나 되는지, 혹은 주사(舟師)에 가고 혹은 지상전에 달려가고 혹은 조정에 심부름으로 출입하게 되니, 비록 백성의 일에 마음을 다하려는 이가 있어도 역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각 읍에서 각기 충후(忠厚)하고 부지런하고 일 잘 보는 한 사람씩을 선택하여 그 일을 맡게 하고, 또 권농사자가 돌아다니면서 감독하여 인력이 넉넉하지 못한 자나 종자벼가 부족한 자는 각별히 조처하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주면 오늘날의 우활(迂闊)한 듯한 계책이 마침내 후일의 훌륭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
아! 왜적이 득실득실하여 날뛰는 이때를 당하여 위에 아뢰올 다른 계책은 있지 못하고 이에 인심을 수합하여 권농하여 농사짓게 할 일로써 말씀을 올리니, 오활하고 절실하지 못하다는 기롱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50리밖에 못 되는 등(縢) 나라가 대국인 제(齊)와 초(楚)의 사이에 끼어 있었는데, 비록 맹자(孟子)의 재주로서도 계책을 낼 수가 없어, “이 계책은 나의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고, 또, “힘껏 착한 일을 할 뿐이다.” 하였으니, 어리석은 신의 소견은 이와 같은 데 불과하며, 방어하고 공격하는 계책과 군량을 운반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각기 맡은 사람이 있으니, 이것은 칠실(漆室)의 걱정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또 한 가지 아뢰올 말씀이 있으니 지난 임진년 변이 나던 처음에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의 군사가 용인에서 궤멸하고, 절도사(節度使 최원)의 군사는 근왕(勤王)하러 멀리 가서 도내에는 비어서 지킬 사람이 없고, 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이 서로 계속하여 패하였으므로 신이 전 현감 임계영(任啓英)ㆍ진사 문위세(文緯世) 등과 더불어 의론하기를, “만약 불행하여 적에게 포로가 된다면 살아도 죽는 것보다 못하니 기왕 죽을 바에는 차라리 의(義)에 죽자.” 하고, 이에 버마재비가 앞발로 수레바퀴에 항거함과 같은 무모한 계책으로 향병(鄕兵)을 일으켰는데, 보성(寶城)은 실로 처음 일어난 땅이 되고 장흥ㆍ남원ㆍ옥과ㆍ곡성 등 몇 고을이 서로 호응하여, 임진년 6월부터 지금까지 20개월 동안에 선비들의 집에는 재물이 이미 다되어 현재 있는 수량은 겨우 한 달 밖에 지탱할 수 없으니, 양식 없는 군사는 머지 않아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행재소(行在所)에 보고되었으므로 저이들 마음대로 스스로 해산할 수 없으니 실로 낭패입니다. 군사와 양식을 익호장군(翼虎將軍)에게 맡겨 합치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좌의병(左義兵)이 계원(繼援)하는 것은 다섯 고을에 불과하고, 계의병(繼義兵)이 계원하는 것은 1도가 힘을 같이 하는데 계의병은 이미 파하였으니, 그 보성ㆍ장성에서 계원하는 자는 좌의병에 속하기를 허락하여 보리가 익기 전의 군량을 보충하게 하면 스스로 붕괴되는 군사를 구제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무군사(撫軍司)에 명하여 의론해 처리하게 하십시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6일 충용장군 김덕령이 선문(先文)하기를, “길을 떠나 담양ㆍ순창ㆍ남원ㆍ운봉ㆍ함양ㆍ산음ㆍ단성ㆍ삼가ㆍ의령ㆍ함안ㆍ창원ㆍ김해ㆍ동래ㆍ부산ㆍ동해ㆍ대마도를 거쳐 일본 대판으로 향한다.” 하고, 또 영남에 다음과 같이 격문을 보내었다.
충용익호장군 김덕령은 공경히 영남 각 고을 여러 군자(君子)에게 고합니다. 아! 하늘은 앙화를 내린 것을 뉘우칠 때가 있고 나라는 항상 막히는 운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의(正義)를 잡으면 비록 위태했다가도 마침내 붙들어지고, 거꾸로 범하면 비록 강하더라도 반드시 멸하는 것은 이치가 원래 그러하고 사세가 그러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비상(淝上)의 적은 군사가 부견(苻堅)의 많은 군사를 꺾었고, 독부(督府)의 수군(水軍)이 능히 역량(逆亮)의 군사를 꺾었으니, 사실이 역사에 적혀 있고 때는 고금이 없습니다. 군사를 끌고 와서 두 번 해를 지나서 흉한 불길이 더욱 치성하여 언덕을 태우는 불과 같아 당당한 국세가 포개 놓은 알처럼 위태롭고 급박하여 백성들이 벌벌 떨어 왜옷을 입을 욕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람의 성냄이 이미 극도에 달했으니, 귀신의 벌이 장차 내릴 것입니다. 저는 일개의 철없고 어리석은 이로서 궁벽한 시골에서 생장하여 뜻은 글 읽는 데 있었고 업은 활 쏘고 말 달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간에 잘못 헛된 이름을 얻어서 장군의 막부(幕府)에 종사하다가 모친이 이미 늙었고 형이 또 전사하여 봉양할 사람이 없자 차마 멀리 떠날 수 없어 잠깐 군중에 있다가 도로 하직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위로 국치(國恥)를 생각하며 몇 번이나 밤중에 칼을 어루만졌으며 때로는 형의 원수를 분하게 여겨 매양 눈물이 밥을 적시었습니다. 가문에 화가 그치지 않아 모친이 이제 돌아가셨습니다. 가정에서 할 일을 대강 마치었으니, 몸을 나라에 바쳐야겠습니다. 종군(終軍)의 청함을 본받고자 하나 중엄(仲淹)의 상서(上書)를 아직 바치지 못했습니다.
마침 담양부사가 본도 순찰에게 잘못 천거하여 대의(大義)로 타이르고 나의 상복(喪服)을 중지시켜 나로 하여금 백 번 싸운 나머지의 군사를 수합하여 무딘 칼로라도 한번 베게 하였습니다. 스스로 돌아보고 생각건대, 몸에는 닭 묶을 힘도 없고 용맹은 재빨리 수레에 올라타기에 부끄럽습니다. 사람은 보잘것없는데 책임은 중하니 엎어질까 걱정입니다. 어찌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문득 초야(草野)의 천한 몸에게 맡겨진 것입니까? 실끝 털끝만큼도 갚지 못했는데 은총(恩寵)이 먼저 내렸습니다. 아! 군부(君父)께서 이미 난을 구하라고 맡기시는데 신자(臣子)가 감히 몸 바침을 사양하오리까? 나는 듣자오니, 의(義)를 배반하고 살기를 탐하면 용사도 겁쟁이가 되고, 충성을 분발하여 몸을 잊으면 나약한 자도 용감하게 된다 하니,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죽겠다는 대의는 용맹이 될 수 있고, 죄 있는 자를 치고 역적을 멸하겠다는 정의는 족히 기개가 될 수 있습니다. 어찌 구구한 혈기(血氣)의 용맹으로 이 적을 처치하겠습니까? 이러므로 나의 둔한 자질을 스스로 채찍질하여 심부름하기를 허락하고 먼 데 가까운 데 격문을 돌려 날랜 이를 불러 모으니, 용처럼 날아오르고 범처럼 뛰는 무리와 장수를 베고 기(旗)를 꺾을 무리들이 모두 양식을 싸 가지고 멀리 따르기를 원하여 끓는 물과 불에 뛰어들기를 사양하지 않고, 팔을 뽐내고 통분함을 품어 전일에 세 번 패한 것을 부끄러워하고 손에 침을 뱉고 기운을 더하여 장래에 아홉 번 칠 것을 계책하니, 곧 죽을 저 종자를 날을 받아 놓고 소탕할 것입니다. 이에 이달 22일로 기약을 정하고 좋은 날을 가려 깃발이 동쪽으로 가리키매 중황(中黃)이 좌우에 벌였으며 오앵(烏櫻 용사(勇士)를 말함)이 앞뒤에 나갑니다. 철기(鐵騎)는 바람처럼 달리고 긴 창은 번개처럼 나가서 군사는 정예하고 기계는 날래며 의리가 바르니 기운이 장해집니다. 이것으로 적을 대적하면 누가 감히 우리를 당하리요.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적을 알고 우리를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 하였는데, 적들은 천리에 건너와서 객지에서 수년 지내는 동안에 기후가 다르고 수토(水土)로 병이 나서 날랜 기운은 이미 평양에서 떨어졌고 간담은 또 행주(幸州)에서 깨졌습니다. 전일에 정병이라 일컬었으나 지금은 말세(末勢)가 되었으며 또 하졸들이 많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협박으로 따라온 무리들이 어찌 부모 처자 생각이 없으리요. 집 떨어진 지 이미 오래여서 시름 탄식이 바야흐로 깊을 것입니다. 하상(河上)의 변이 장차 곧 날 것이니, 솥 가운데 물고기가 어찌 오래 가리요. 때가 무르익었으니 섬멸하기를 어찌 늦추랴.
아! 적이 온 뒤에 참혹한 화를 호남이 홀로 면하였고, 7도는 다 화를 입었는데 그중에서도 영남이 화를 받음이 다른 도보다 또 심하였으니, 문무사부(文武士夫)와 노약남녀(老弱男女)로 죄 없이 죽은 이를 어찌 헤일 수 있으리요. 아비가 죽어 자식이 고아가 되고 남편이 죽어 아내가 과부가 되고, 그 집을 불지르고 고향을 떠나서 초가집 기와집의 잿더미가 눈앞에 가득하여 낙동강의 동쪽 진양(晉陽)의 남쪽에는 인가의 연기가 끊어졌고, 춥고 배고픔이 극도에 달하여 사람이 서로 잡아먹고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서로 베고 누워 원통한 울음소리는 위로 하늘에 사무쳐서 천 사람 백 사람의 원망함이 차마 말할 수도 없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여위고 약한 아이와 여자도 몽둥이를 들려서 적을 쳐야 할 것인데 젊고 건장한 사내가 어찌 칼날을 거두고 편안히 앉았으랴. 이는 정히 충의의 선비가 목숨을 바칠 날이며 호걸들이 수치를 씻을 기회라, 각기 공(公)과 사(私)의 원수를 생각하여 함께 고래[鯨鯢]를 잡아 죽일 것이어늘 하물며 장차 철수할 날이 멀지 않은 적들이 무시(無時)로 발악할 것이니, 이때에 미처 빨리 소탕하지 아니하면 전일의 화가 다시 조석에 있으리니 비록 뉘우치려 한들 이미 늦을 것입니다. 시기는 잃어서는 안되고 일은 두 번 시작하기 어려우니, 힘씁시다. 선비 백성들이여! 귀도(貴道)는 본시 절의를 숭상하였으니, 지금 이 적을 치는 일에는 사부(士夫)들이 반드시 응모(應募)하는 이가 있을 것입니다. 각 고을에서 충후(忠厚)하고 부지런하고 일 잘보는 사람을 선택하여 다소를 따라 각기 유사(有司)를 정하여 혹 용사를 불러 모으고 혹 말꼴[馬蒭]을 쌓아 놓고 혹 늙고 약하고 전장에 나가지 못한 자를 모집하여 군량을 운반하게 할 것입니다. 여러 군자는 각기 노력하여 잘 조처하고 계획해 주기를 원합니다.
22일 김덕령이 담양으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순창에 이르고 이튿날에 남원에 도착하여 광한루(廣寒樓)에 유진(留鎭)하여 날마다 군사를 교련하니 구경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남원 유학(幼學) 최담령(崔聃齡)으로 별장을 삼았다. 최담령이 일찍부터 장군이란 헛 명칭이 있었다.
○ 도원수가 호남 역당(逆黨)에서 보내는 격문은 아래와 같다.
대개 들으니 국가의 위급한 때에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순(順)’이라 하고 때를 틈타서 요행을 바라는 것을 ‘역(逆)’이라 한다. 순한 자는 하늘이 돕는 바요, 역한 자는 신(神)이 죽이는 바이다. 이치는 해ㆍ별보다 밝고 일은 도깨비에게 가리울 수 없는 것이다. 아! 너희들도 천성의 양심을 다 같이 가졌는데 어찌 앞에는 순하다가 뒤에는 역하는고, 하물며 솥에 물고기가 끓는 물에 든 것 같고 불난 집 들보에 노는 제비와 같다. 이런 장난을 하는 것은 전란 3년에 백성이 농사지어 편히 사는 즐거움을 잃었고, 국토는 개ㆍ돼지의 굴이 되어 부모가 어린애를 보호하기 어렵고, 손발이 스스로 심복(心腹)과 떨어져서 잠깐 흙탕물 속에서 장난하여 하늘 그물[天網]에서 빠져나가려 한 것이니, 정상이 불쌍한 일이지 마음이 어찌 그러하겠느냐. 지금은 흉악한 적이 이미 거북처럼 움츠러들고 국세는 날로 용이 날치듯 한다. 너희들을 잠깐 불문(不問)에 부친 것은 마음 돌릴 길을 허락한 것이요, 아직 두고 보는 것은 실로 개전할 시기를 기다린 것인데, 아직도 조가(朝歌)의 습성이 있어 광릉(廣陵)의 길을 막고 있다. 이것은 장강(張綱)을 만나지 못한 것이라 하필 우허(虞詡)를 기다리랴. 우리는 조종(祖宗) 2백 년의 은택을 입었다가 국가 천만세의 변을 당하였다. 몸에 겹갑옷을 입었으니, 주(周) 나라 백성이 창을 든 듯하고, 손에는 긴 칼을 두르니, 한(漢) 나라 군대가 창을 든 것과 겨룰 만하다. 옛 것을 고치고 새롭게 되는 이날을 당하여 어찌 옥과 돌이 함께 불타는 화가 있으랴. 항복 받는 막(幕)을 설치하여 바른 데로 돌아오는 사람을 기다리고 개과천선하는 문을 열어 골짜기에서 나오는 무리들을 받는다. 산과 숲은 원래 나쁜 것을 감춰주는 것이며 내와 못이 어찌 더러움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랴.
하물며 네 마음도 다름 아니라 잠시나마 목숨을 더 부지하려 함이리다. 이해를 설득시키노니 너희들은 귀를 기울여라. 일찍이 순과 역의 이치를 알아 빨리 충의의 본성으로 돌아오라. 너의 구렁이 구멍을 버리고 나의 군문(軍門)으로 와서 전에 없던 국치(國恥)를 함께 씻어 세상에 드문 공을 세운다면 산하대려(山河帶礪)의 맹세가 너희들의 거짓 약속과 비교해 어떠하며 금장옥부(金章玉符 높은 관직은 금장을 달고 옥부를 찬다)의 영광이 너희들의 거짓 벼슬과 비교해 어떠하겠느냐? 화를 돌려 복이 되고 위태로움을 버리고 편안한 데로 나아오는 것이니, 이것은 최상책이다. 찼던 칼을 풀어서 소를 사고 잡았던 활을 놓고 호미를 메어 너의 옛집에 돌아와 너의 옛 생업을 편히 하여 발해(渤海)의 땅이 안정되고, 영천(頴川)의 지방을 소요되지 않게 하면 황건(黃巾) 청독(靑犢 한 나라 말기에 반란을 일으킨 도적의 명칭)이 다 성인의 백성이 되고 죽게 되었던 넋이 마침내 태평의 영화를 누리리니, 이것은 다음가는 계책이다. 혹시 그릇된 생각을 고집하고 죄를 겁내어 항복하지 아니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더욱 많은 사람의 미움을 사고 산돼지나 긴 배암처럼 함부로 잡아먹는 독을 피우면 이것은 옛사람의 이른바. “천하의 사람이 다 드러나게 죽이려고 할 뿐 아니라, 또한 땅속에 있는 귀신도 이미 남몰래 베려고 의논하였을 것이다.” 함이다.
나는 마땅히 곰 같은 군사를 거느리고 범ㆍ표범 같은 장사를 몰아서 생포할 것을 잠깐 늦추고 먼저 죄를 문책할 것이다. 태산이 새알을 누르는 것과 같으니, 누군들 살아남을 종자가 있으리요. 불이 언덕을 태우는 것 같아서 쓸 수가 없으리라. 비록 황소(黃巢)와 흑달(黑闥 당 태종(唐太宗)에게 잡혀 죽은 도적)의 죽음을 면하려 한들 되겠느냐? 이것은 계책이 없다고 할 것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아! 지금 이 적변(賊變)은 옛적에는 없던 것이라, 위로는 종묘 사직의 통분함이요 아래로는 가정의 참혹함이라. 너희들 중에는 어찌 부형이 칼날에 죽고 처자가 더러운 욕을 당하고 집안의 세업을 탕진하고 백년을 살아온 터가 잿더미로 바뀐 자가 없느냐? 생각이 이에 미치매 나도 모르게 이가 갈린다. 너희들은 왜 동지를 모아서 공사(公私)의 분을 씻지 아니하고, 도리어 걸의 개가 요를 보고 짖고[桀犬吠堯] 나는 나비가 등불에 덤비어 자식으로서는 부형의 원수를 잊고 신하로서는 임금의 은혜를 배반하면서도 오히려 하늘을 쳐다볼 얼굴이 있고 땅을 밟을 발이 있느냐? 나의 격문을 보고는 응당 눈물을 흘리는 이가 있을 것이다. 마땅히 속히 앞날의 버릇을 고칠지어다. 어찌 좋은 계책을 도모하지 않는고. 하물며 시기는 잃어서는 안 되고 기회는 두 번 오기 어려운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나의 격문을 보면 머지 않아 마음을 돌릴 것이니, 너의 백골에 살을 부쳐주고 너의 죽은 것을 살려주는 것이니, 하늘에 대해서는 순(順)이 되고 사람으로서는 반역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만일 관망(觀望)하여 이리저리 끈다면 사람들이 모두 너희들의 몸을 해치려 하고 너희들의 살을 먹으려 할 것이니, 너희들의 까마귀처럼 어울리고 개미처럼 모인 형세가 어찌 능히 천벌을 면하겠느냐. 옛적에 대연(戴淵)이 육기(陸機)에게 항복하여 마침내 명장(名將)이 되었고, 서선(徐宣)이 한(漢) 나라에 항복하여 마침내 봉(封)함을 받았다. 이에 단거(單車)로 타이름을 잠깐 멈추고 먼저 한 종이의 글을 통지하노니, 어찌 너희들의 전일 죄악을 생각하랴. 후회가 없도록 하라. 종사관(從事官) 전적(典籍) 안희(安喜)가 지었다.
○ 이빈ㆍ선거이가 갈리고 이일(李鎰)로서 순변사를 삼고 이시언(李時言)으로 전라 병사를 삼았다. 이일이 경성으로부터 바로 의령으로 내려와서 주둔하였다.
○ 충청도 역적 송유진(宋儒眞)이 처형되었으므로 중외 대소 신료 기로 군민 한량인(中外大小臣僚耆老軍民閑良人) 등에게 다음과 같이 특사(特赦)하는 글을 내리다.
왕은 이르노라. 흉한 역적이 음모를 하여 이미 베이는 형벌은 거행하였으나 과실로 된 죄는 특사(特赦)하여 이어 흐뭇한 은혜를 베푸노라. 상벌을 분명히 하는 데 포고함을 어찌 늦추랴. 나는 덕이 천박한 이로서 과분하게도 큰 업을 이어받았다. 운수가 불행한 때를 당하여 종묘 사직이 수모를 겪고 전란이 오래가니 백성들을 걱정케 하였다. 휘파람으로 모인 무리들이 감히 흉악한 계획을 할 줄이야 어찌 뜻하였으랴. 역적 송유진 등이 국가가 위급한 때를 틈타서 반역의 미친 글을 지어 왕래하는 사람을 꾀고 소문을 떠벌리자, 소민(小民)들이 그 정상(情狀)을 알지 못하고 모든 곳에 그의 도당이 있다 하여 전마(戰馬)와 무기를 거두어 관군(官軍)에 가탁(假托)하고, 저장하였던 사재(私財)를 빼앗아 군량을 삼고 장차 내응(內應)하는 무리들을 얻어 큰 화가 거의 경성에 미칠 뻔하였다. 그들의 모집하는 통문을 보니, 실로 천지에 통한 죄악이었다. 다행히 신(神)과 사람의 도움을 힘입어 사전에 고발이 있어 도둑 개나 쥐처럼 날뛰던 것들이 하늘 그물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고 풀뿌리처럼 얽힌 것들이 모두 법의 처단을 받았다.
이미 이달 25일에 역적 괴수 송유진 및 오원종(吳元宗)ㆍ김천수(金千壽)ㆍ유춘복(柳春福)ㆍ김언상(金彦祥)ㆍ송만복(宋萬福)ㆍ이추(李秋)ㆍ김영(金永) 등은 모두 능지처형(陵遲處形)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친척을 법대로 연좌(連坐)시키고, 잡아서 고발한 사람 홍우(洪瑀)ㆍ홍각(洪慤)은 모두 당상(堂上)의 자급(資級)을 주고 나머지 사람에게는 등급에 따라 상을 주었다. 이달 25일 새벽 이전에 범한 죄인으로 국가의 반역자나 자손이 조부모 부모를 구타하였거나, 처와 첩이 남편을 죽이려 한 것이나 종이 주인을 죽이려 한 것이나, 고의로 살인한 자나 독약을 쓰거나 푸닥거리를 한 자로 국가와 강상(綱常)에 관계되거나, 뇌물을 먹은 자나 강도 절도를 제외하고 잡범(雜犯)으로 사형ㆍ도형[徒]ㆍ유형[流]ㆍ부처(付處)ㆍ안치(安置)ㆍ충군(充軍)에 해당되는 자는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이미 배소에 이르렀거나 이르지 않았거나 다 특사한다. 감히 특사하기 전의 죄를 가지고 서로 고발하는 자는 고발한 그 죄대로 도로 처벌하고 벼슬에 있는 이는 각기 한 계급을 올리고 계급이 이미 극도로 높아서 더 올릴 수 없는 자는 친족에게 대신 준다. 아! 처단이 매우 엄하여 뭇 사람의 분노가 쾌히 씻어졌다.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중외(中外)에서 이 소식을 듣는 사람들에게 힘을 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생각건대, 우리 조종(祖宗)의 길러 놓은 백성이 난리와 굶주림으로 구렁에서 구르다 죽을 처지에 임박하였으므로 조그마한 역적의 헛말에 속은 것이라, 옥과 돌이 함께 탈 것을 염려하여, 협박에 따라간 무리들을 용서하여 혜택을 널리 입히려고 한다. 부역을 감하고 면제하여 시름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을 조금 위로하고 흩어져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보존하는 방법을 힘쓰려 한다. 각기 지극한 뜻을 알아서 깊은 걱정을 풀어 주길 바란다. 충심(衷心)에서 나온 이 포고를 잘 헤아려 아래에까지 인자한 은혜가 미치기 바란다. 화와 복은 자기 하기에 달렸으니, 벼슬하는 영광을 누리고 반복하는 무리들도 모두 새 사람이 되어 어깨를 쉬는 즐거움을 함께 하기 바란다. 이에 교시하노니, 잘 알리라 생각한다.
○ 동궁이 전주에 머물고 또 윤두수를 성주에 보내어 유독부(兪督府)를 보고 돌아왔다. 이때에 권율이 역시 성주에 있었다. 좌의병장 임계영이 부장(副將) 최억남(崔億男)과 더불어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하동에 들어가 지키면서 때때로 날랜 군사를 내어 고성ㆍ거제 등지에 매복하여 나무하고 풀 베는 적을 잡았다.
2월 2일 누른 안개가 사방에 막혀 하늘 해를 보지 못한 지가 거의 5ㆍ6일인데 호남ㆍ영남이 더욱 심하고 한 달이나 연달아 큰비가 와서 물이 났다.
11일 동궁이 전주로부터 공주로 향하였다.
○ 김덕령이 남원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영남으로 향하여 함양에 이르러 군사를 머물러 두고 가서 원수(元帥)를 보고 돌아와서 진주로 가서 주둔하였다.
27일 순변사 이일(李鎰)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곧 순천으로 가서 주둔하였다.
○ 경상 좌변사가, “이달 20일 후에 왜적이 본토로부터 무수히 나와 구병(舊兵)과 교대하였습니다.” 하고, 원수에게 왜적의 실정을 보고하였다.
○ 청정(淸正)의 군사 수천 명이 또 경주로 향하므로 본도 좌병사 고언백(高彦伯) 등이 막았다.
3월 3일 도독(都督) 유정(劉綎)이 성주(星州) 팔거(八莒)로부터 군사를 옮겨 전라도로 향하여 9일에 남원에 도착하여 성중에 주둔하였는데 군사는 5천여 명이었다. 접반사 김찬(金纘)이 따랐다.
20일 청정이 소왜(小倭) 임소지(林小智)를 안음(安陰)으로 보내어 독부(督府) 유정을 보기를 청하므로 유정이 남원으로부터 안음에 가서 보고 돌아왔다. 여러 장수들이 임지를 죽이기를 청하니 유정이 말하기를, “대장이라면 용서 없이 죽이겠지마는 작은 장수는 죽여도 이익이 없다.” 하였다.
○ 배신(陪臣) 허욱(許頊)을 중국에 보내어 곡식을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를 청하였다.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4월 민간에서 곤궁하여 큰 소 값이 쌀 3두(斗)에 불과하고 세목(細木)값이 수승(數升)에 차지 않고, 의복과 기물은 팔리지도 않고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여자와 고아는 출입을 못하고,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깔렸는데, 굶주린 백성들이 다투어 그 고기를 먹고 죽은 사람의 뼈를 발라서 즙을 내어 삼켰는데 사람의 고기를 먹은 자는 발길을 돌리기 전에 모두 죽었다. 슬프도다! 처음에는 왜적의 분탕질을 당하고 나중에는 탐관오리가 긁어 먹고 겸하여 흉년이 들고 부역은 중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다.
○ 중외(中外)에 애통교서(哀痛敎書)를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왕은 이렇듯 이르노라. 무릇 우리 중외 인민은 나의 애통한 말을 들으라. 덕이 없는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오랜 동안의 편안함에 마음을 놓고 이미 잘 다스려진 줄 알고, 백성이 아래에서 원망하여도 내가 듣지 못하고 하늘이 위에서 성내어도 내가 알지 못하여, 점차로 화란(禍亂)이 일어난 지 3년이 되었으니 내가 이제 와서 후회한들 어찌 돌리리. 아! 흉한 칼날이 지나는 곳에 백골이 산과 같아 천리가 텅비어 인가의 연기가 끊어졌으니 칼날 아래 죽은 불쌍한 우리 백성이 몇 만인이며 유리(流離)하는 사람이 눈앞에 가득 찼으나 구휼할 방책이 없어 구덩이에 자빠지고 개울에 엎어져 서로 깔고 베개하였으니 굶어서 죽은 불쌍한 우리 백성이 몇 만인가? 살아 있는 자도 찔리고 상한 남은 목숨이 굶주리지 않은 이가 없어 쓸은 듯한 땅에 맨몸으로 서서 살아갈 수가 없는데도 토색질과 학대함은 평일보다 배나 되고, 재물은 더욱 다 되었는데 납세는 번거롭고, 힘은 점점 다해가는데 부역은 점점 중하니 불쌍한 우리 백성이 어찌 조정에서 부득이 한 것임을 생각할 겨를이 있으리요.
아! 사내아이를 가지고 곡식과 바꾼다는 것을 옛말로만 들었는데 오늘날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식을 버리니 어찌하여 백성이 도적이 되지 않겠는가? 풀뿌리로 연명한다는 것을 옛말로만 들었는데 오늘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으니 어찌하여 백성이 도적이 되지 않겠는가? 모두 나의 은택이 내려가지 아니하고 나의 어루만짐이 잘못되어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다. 말이 이에 미치니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을 면목이 없다. 내가 깊이 불쌍히 여기니, 아픔이 내 몸에 있는 것 같구나. 아마도 나의 명을 받든 사신이 혹은 교만하고 횡포하거나 나의 지방을 지키는 수령들이 토색하는 것이 있어서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관원을 잘못 쓴 것도 역시 나의 죄이다. 백성은 나를 허물함이 마땅하니, 내가 어찌 사양하랴. 아! 우리 생민(生民)은 모두 나의 적자(赤子)이니, 내가 비록 임금답지 못하나 어찌 차마 앉아서 보고 안정시킬 방책을 생각하지 아니하랴.
각 도의 민력(民力)이 이미 다 되었으니 일에 따라 진상(進上 지방의 특산물을 궁중에 바치는 것)을 감면하고, 군사의 곤궁하기가 이미 극도에 달하였으니 과번(過番)한 자는 영원히 그 가포(價布)를 면제하겠으며, 지방의 수령이 이 어려운 때를 당하여 탐욕과 혹독함이 더욱 심하니 아울러 적발하면 낱낱이 엄중히 다스리겠으며, 군량과 쇄마(刷馬)의 일은 모두 색리(色吏)에 맡겼더니 원망이 길에 가득하였으니 재량해 변통하여 균일하게 하기를 힘쓰겠으며, 군사를 정예(精銳)하기를 힘써야 하고 많기를 힘쓸 필요가 없으니 뽑혀 온 군사 중에서 정예하지 못한 자는 모두 태거(汰去)하고 침노하여 소요스러운 폐단이 없도록 하겠으며, 공(功)에 대하여 상을 주는 것은 마땅히 때를 넘기지 않아야 할 것인데도 문서가 날로 쌓여 고사(考査)하기가 더디어 공을 세운 사람으로 하여금 조정의 상을 받지 못하게 되니, 모두 있는 곳에서 스스로 말하면 감사가 즉시 보고하여 상이 지체됨이 없도록 하겠노라. 백성의 곤궁함이 이때와 같음이 없어서 이미 거꾸로 매달린 듯한 원망이 극에 달하였으니 어찌 제거해야 할 폐단이 없겠느냐? 방금 십분 강구하여 백성에게 편리하도록 힘쓰겠다. 아! 무릇 우리 중외(中外)의 백성들은 나의 지나간 허물을 용서하고 내가 장래에 새로워질 것을 허락하여 지금은 우선 참고 견디어 다른 날 태평할 때에 각기 생업을 편안히 하면 즐겁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잘 알리라 생각한다.
○ 초야(草野)의 보잘것없는 신하가 엎드려 애통(哀痛)의 교서(敎書)를 보고 깊이 성상(聖上)의 인자하신 은혜에 감동되고, 소민(小民)들의 곤궁하고 박절함을 크게 분하게 여겨 이 한 목숨 돌보지 않고 감히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8도 가운데 호남이 겨우 목에 숨이 붙었는데 백성이 곤궁하기는 이 도가 더욱 심하여 굶어 죽은 송장이 들에 쌓였으며,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고 사방이 황폐하여 쑥대가 들을 덮었고 불쌍한 남은 백성들이 거의 다 죽게 되었다. 우리 성상께서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곧 위의 교서를 각도에 반포하시어, 첫째로 안정시키고 위무하기 위하여 우선 진상(進上)을 감하고 가포(價布 진상 물품에 대가(代價)로 내는 포목)를 면제하여 백성의 힘을 펴주려 하여 당신을 박하게 봉양(奉養)함을 관계하지 않고, 군량 운반을 잘 살피고 쇄마(刷馬)의 증발을 균일하게 하여 백성의 괴로움을 쉬게 해주어, 간악한 관리의 폐단을 누르고 군사를 뽑느라고 침노하며 소요스러운 폐단을 막고, 공 있는 사람이 상 받을 길을 열었다. 방백(方伯)은 마땅히 국가와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여야 할 자들이니, 애써서 글을 돌려서 백성의 잡역(雜役)을 덜게 하고 농사를 권장하고 혹은 도사(都事)를 혹은 차원(差員)을 보내어 민간에 드나들면서 백성의 고통스러운 바를 묻게 하여 임금의 말씀을 따르고 임금의 뜻을 받들어야 하거늘 수령들은 우리 임금의 신하가 아니란 말인가? 지극한 임금의 은혜를 받지 않았단 말인가? 임금의 뜻을 받들지 아니하고 백성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교서(敎書)를 보고는 소매 속에 넣고 발표하지 아니하고, 창고에 곡식을 쌓는 것은 군량에 대비함이라 칭하고, 도사나 차원이 온다는 것을 들으면 군량을 핑계대고, 부정을 적발하는 일과 진상을 감하는 것과 가포를 면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백성의 귀를 막고 구태를 그대로 지니고, 군량의 조달과 쇄마의 증발에도 교서는 들은 체도 않고 전보다 배나 남용하고, 군사는 정예함을 위주로 하여 태거하라는 명령에 대해서는 더욱 교서를 다행으로 알아 이에 의거하여 더욱 조종하여 부자는 정예하지 못한 군사로 돌리고 가난한 백성은 정병(精兵)으로 돌린다.
더구나 공을 상주는 은전은 직책 가진 자의 뜻밖의 일이다. 친근한 이 가운데서 드러내는 일을 마지 않아 사람들의 말에 상관도 없이 제 마음대로 보고하여 상세한 증거가 없는 자도 문득 높은 계급에 올랐고, 구휼(救恤)하라는 명령은 수령들이 긴요치 않게 여기는 바여서 관청의 창고에 저장한 곡식을 제 것으로 만들고, 반 섬의 벼와 두어 말의 콩으로 구휼한다는 이름만 내고 밤낮으로 애써서 계획하는 것이 가족의 풍족한 생활과 권문(權門)에 붙을 길과 금은과 비단을 사들이기에 욕심이 한이 없고, 창고의 곡식을 다 소비하고 거의 없어지면 도리어 민간에 흩어져 있다고 허위 문서를 꾸며서 추수 때가 되면 백성이 갚지 않아 결손되었다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되, 혹시 진위(眞僞)를 분석하다가 도리어 곤장을 맞아 죽는 이도 있으므로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묵묵히 납입하여도 끝이 나지 못하였다. 만약 뒷날 병신년에 체찰(體察) 이원익(李元翼)이 감면해 주는 어진 정사가 아니었더라면 곡식은 보지도 못한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반드시 모두 곡식을 먹은 자에 손이 죽었을 것이니, 위태롭고도 위태로웠다! 슬프다! 이때에 전염병이 겸하여 치성하여 굶주린 백성이 더욱 죽었으니, 국운과 인명의 불행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 권율이 중 총섭(摠攝) 유정(惟政)에게 청정(淸正)을 서생포(西生浦)울산의 포명(浦名) 에 가서 만나보고 화호(和好)로써 타이르도록 하였는데, 청정이 말하기를, “3도를 베어 일본에 속하게 하면 군사를 파하고 귀국하겠다. 운운.” 하였다.
○ 배신(陪臣) 윤근수(尹根壽)를 북경에 보내어 세자(世子)를 책봉(冊封)해 줄 것을 청하였더니, 예부 상서(禮部尙書) 범겸(范謙) 등이 답하기를, “조선이 난리를 만나서 세자를 세워서 천하 인심을 붙잡아 둘 데가 있게 하기를 청하니, 자기의 종묘 사직을 위하는 계책으로서는 옳지 않음이 아니나, 혹 1도를 전적으로 맡겨서 약간의 권한을 주어 한결같이 절제사의 권한이 나누이지 않게 하였다가 나라가 안정이 되어 과연 난을 평정시킨 기이한 공이 있다면 새로 조처할 것을 의론하여도 무방하고, 책봉을 가벼이 할 수 없다는 등의 황제의 명령을 받들었으니 너희들의 이러한 말은 가벼이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 김덕령이 진주에 주둔하여 그 군사를 사역하여 둔전(屯田)을 크게 설치하였다. 또 원수가 전주 출신을 전속시키라는 조정의 명령으로 각 도의 의병을 파하고 모두 충용군에 속하게 하니, 전라 감사가 공문을 보내기를, “조정에서 이미 각 도의 의병을 파하고 본도의 좌우병도 또한 파하였으니, 그 나머지 의병 등도 그대로 두어 폐습(獘習)을 기를 수가 없다. 적개의병장(敵愾義兵將 변사정(邊士貞))은 나이 70이 된 늙고 병든 사람으로 수년 전장에서 그 공이 많았으니, 남원 교룡산성 수어장(守禦將)으로 정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지키게 하라.” 하였다. 이때에 처영(處英)이 이미 성 수축하는 역사(役事)를 마치었다.
5월 연달아 비가 왔다. 10일부터 11일까지 큰비가 와서 물이 넘쳐서 인가가 떠내려 간 것이 몹시 많았고, 26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비가 그쳤다.
○ 이때에 학가(鶴駕)가 공주에 머물렀다.
27일 전라 병사 이시언(李時言)이 산음(山陰)으로부터 남원(南原)에 이르러 다음날 전주로 향하여 그 뒤에 영남으로 도로 들어갔다.
○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이 이에 이르러 더욱 심하여 골육(骨肉 부자형제(父子兄弟))이 분리되어 길가는 사람 보듯 하였다. 내가 마침 성중(城中)에 이르렀을 때에 명 나라 병사 한 사람이 취하고 배가 불러 지나가다가 길 가운데서 구토를 하자, 굶주린 백성 천백 명이 일시에 달려가서 머리를 모아 주워 먹는데 약한 자는 달려들지 못하고 물러서서 눈물만 흘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독부(督府) 유정(劉綎)이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쌓인 것을 보고 참혹히 여겨 진소(賑所)를 동문 밖에 설치하니, 굶주린 백성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천백 명의 무리가 거기에 힘입어 조금 연명하다가 그 뒤에 모두 그 옆에서 죽었다.
○ 각 도 곳곳에서 도적이 일어나서 천만 명씩 떼를 지은 것이 몹시 많았다. 남원 사람 김희(金希)ㆍ이복(李福)ㆍ강대수(姜大水) 등이 동촌(東村) 추동(楸洞) 깊은 골에 당을 모아 우도(右道)의 도적 고파(高波) 등과 서로 호응하여 대낮에 횡행하여 드나들며 도적질을 하여 무산(毋山) 북촌의 인민과 연결하여 저들에게 따르지 않는 자나 길가는 자나 촌사람이 관청에 가는 자나 거리에서 머리를 모아 의논하는 자는 가만히 그 도당을 보내어 묶어서 진중으로 끌고 가서 모두 죽였다. 백성들이 겁내어 거리에서 서로 눈짓하고, 길이 막히어 사람들이 통행하지 못하고 군사가 날로 성하나 관이 능히 금하지 못하니, 진안(鎭安)ㆍ장수(長水)ㆍ운봉(雲峯)ㆍ남원(南原)의 지경에 길가는 사람이 끊어졌다. 이때에 양맥(兩麥)이 성숙하였는데 큰 도적에게 붙지 않은 자가 함부로 도적질을 하여 밭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이 살해를 당하였다.
○ 종성(鍾城) 지경 역수부 야인(易水部野人)과 깊은 곳에 있는 모든 종낙(種落)들이 끌고 침입하여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고, 또 영건보(永建堡)를 포위하므로 9월에 병사(兵使) 정현룡(鄭見龍)으로 하여금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본적(本賊) 석채(石寨)를 쳐서 함락시켜 머리 3백 급(級)을 베었다. 고사에서 나왔다.
6월 3일 새벽에 지진이 있어 오시(午時)에 천지가 진동하고 큰비가 오고 다음날 또 천둥이 치고 큰비가 왔다. 원수 권율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다음날 구례로 향하여 영남으로 돌아가 산음(山陰)에 주둔하였다.
○ 전일에는 민간이 비록 군색하였으나 혹 곡식을 저장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소ㆍ말ㆍ잡물을 팔고 바꿀 곳이 있었고 또 관곡(官穀)을 내어 놓아 여러 곳에서 팔기도 하더니, 지금은 공사(公私)가 함께 고갈되어 시장에 한되의 쌀도 없었다. 이때에 소ㆍ말이 있는 자가 명 나라 병사에게 파니, 하루에 소 1백 마리를 도살하고 사경(四境)에 소ㆍ말ㆍ닭ㆍ개도 역시 다 없어졌다.
○ 전주 부윤 홍세공(洪世恭)으로 본도 순찰사를 삼고, 이정암(李廷馣)은 도로 전주 부윤이 되고, 김경서(金慶瑞)는 경상 우병사가 되었다.
○ 김희(金希) 등이 여러 번 거창ㆍ안음ㆍ함양 지방에서 도적질하므로 본도 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원수의 명령을 받아 수색하여 잡게 하였더니, 군사가 무너져 퇴각하였다. 권율이 또 상주 목사 정기룡(鄭起龍)으로 독포대장(督捕大將)을 삼아서 김희를 토벌하였다. 이때에 영남 사람 임걸년(林傑年)이 또한 도당을 모아 지리산 반야봉에 주둔하고 출몰하며 도적질을 하였다.
7일 천둥이 치고 큰비가 왔다.
○ 경상 우병사가 원수에게 보고하기를, “언양군(彦陽郡)에서 온 보고에 적중(賊中)에서 도망쳐 온 사람이 말하기를, ‘새 왜놈이 본토로부터 나온 것이 전일의 3배나 되는데 세 길로 나누어 대명(大明)에 범하기를 목표로 하여 한 대는 제주로부터 서해ㆍ의주로 향하고, 한 대는 진주ㆍ남원을 경유하고 한 대는 선산ㆍ상주를 지나 전과 같이 경성으로 올라와서 모두 의주(義州)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하오니, 내지(內地)의 방비를 날로 새롭게 조치할 일로 명령함이 어떠하옵니까?” 하였다.
○ 이때에 3도 수사가 여러 장수를 인솔하고 모두 한산도 통영(統營)의 휘하(麾下)에 유진(留鎭)하였다.
14일 순찰사 홍세공이 전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여 그대로 머물렀다.
○ 승지 이덕열(李德悅)을 남원으로 보내어 독부(督府)에 문안하게 하였다. 25일에 이덕열이 남원에 도착하여 김찬ㆍ홍세공과 유정을 모시고 연회를 베풀고 다음날에 승지는 경성으로 돌아가고 감사는 전주로 돌아갔다.
○ 영남 여러 둔(屯)의 왜적들이 오랫동안 수자리[戍]에 노역하는 것을 싫어하여 우리나라에 항복하여 붙는 자가 많이 있었는데 김응서(金應瑞)가 항복받은 것이 거의 1백여 명이 되었다. 그 괴수는 김향의(金向義)인데 그 무리들과 더불어 전공을 많이 세워 벼슬이 통정(通政) 가선(嘉善)에 이르렀다. 그 뒤 30년간에 항왜(降倭)들이 밀양 지방에 모여 살아 농사와 길쌈에 힘쓰고 자손을 길렀는데, 그 마을 이름이 항왜진(降倭鎭)이다. 항복한 왜구로서 우리 나라에 공이 없는 자는 서북 지방에 놓아 살렸다가 뒤에 다 베어 죽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성낙훈 양대연 (공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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