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성냥팔이 소녀~!!
조 흥 제
하단표시하기요.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았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전에
인천항의 적군 방어시설의 규모를 알아 보기 위하여 첩보부대를 보냈다. 적진에 침투한 첩보부대와 북한군 사이에 벌어지는 숨 막히는 심리전과 탈출
장면이 그 영화의 주 스토리이다.
한국전쟁사에는 맥아더의 의뢰를 받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 함명수 대위에게 인천 근방의 적정을 살피라는 임무를 맡겼다. 그는 4~5명으로 구성 된 3개 팀을 만들어 적군에게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했다. 맥아더 원수는 그것만 가지고는 믿을 수 없었던지 클라크 대위를 대장으로 하는 미군 첩보대를 다시 보냈다. 그들은 영종도에
상륙하여 그곳 초등학교 교장의 도움을 받았는데 적군에게 발각되어 교장과 가족은 살해 당하였다. 클라크 대위는 천신만고 끝에 사전 약속한 시간에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 상륙함대 앞에 이상이 없다는 신호를 보냈다.
인천 상륙작전을 상영할 무렵, 18세의 나이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미군 병사를 한 신문사에서 초청하였다. 그는 신학대학 2학년에 재학 중 징집 통지서를 받고 6 주 동안 훈련을 받고
한국전에 투입됐다. 미 해병대 소속 중기관총 사수로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진격하던 중 적군의 사격을 받아 3명이 죽고 자신은 다리를 관통
당하는 총상을 입었다. 동맥이 끊겨 피가 콸콸 쏟아져 지혈이 안 되어 본국으로 가서 치료를 받고 군복을 벗었다. 하지만 한국전에서 죽어 간
전우의 울부짖음이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 그대로 있을 수 없어 군목(軍牧)으로 재 입대 해 월남전에 파견되었다.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였다. 월남전이 끝난 후 대령으로 제대했다. 그는 66 년 만에 인천항을 돌아보고 그때 다친 다리 때문에 계단을 오를 수 없어
자유 공원 정상에 있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볼 수 없어 안타깝다고 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모험이었다.
인천은 간만(干滿)의 차가 8m 이상이어서 썰물 때는 갯벌이 되어 움직일 수가 없어서 적군의 표적이 되어 모조리 격침될 위험이 있었다.
성공확률은 5,000분의 1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육군본부에서도, 참모들도 반대하였다. 하지만 2차 대전 때 맥아더는 일본군과 싸울 때마다
모험을 해서 이겼으므로 한국 전쟁의 승패는 인천에 있다고 보았다. 적군이 눈치 채지 못하게 목포와 원산을 상륙지점으로 소문을 냈다. 그렇더라도
적군은 인천항 방어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적 함정이 와도 몇 척, 많아야 몇 십 척으로 예상하고 월미도에 포대 진지를 구축하였는데 워낙
많은 적 함정(261척)이 와서 함포사격을 해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상륙함대는 상륙하기 전 월미도를 비롯한 인천 시내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직장 후배가 그때 인천에서 살면서 옆 집 애와 같이 놀았는데 어느 날 밤 새도록 포 소리가 났다. 아침에 나가보니 옆집은 흔적도 없었다. 그렇게
하고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이 1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자 낙동강 근방에서 싸우던 적의 주력부대는 앞-뒤에서 공격을 받게 되자 후퇴하기 시작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아니었으면 낙동강 전선을 유엔군이 돌파하려면 엄청난 희생이 따랐을 것이란 전문가의
예상이다.
그 기사를 보니 섬광 하나 ―오래 전에 본 미
군목의 선행―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90년대 초에 집 사람이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을 때 그 앞 의자에서 자고 인근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드렸다. 그 때 유명한 강도사가 교회에 간증하러 온다고 하여 낮에 시간을 냈다. 강사는 여자로 대학교수였다. 간증을 듣고 그 내용이 담긴 책을
사서 읽었는데 그 책을 아무리 찾아 봐도 없다. 이사 올 때 버리고 온 모양이다. 나는 필요한 것은 공책에 적어 놓는 습관이 있다. 다행히
92년도에 ‘성냥팔이 소녀’라는 제목을 붙여 적어 놓은 것이 있어 반가웠다.
거기에는 숙명여대 이인복 교수가 교인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후의 삶이 간단히 적혀 있다. 이 교수는 어렸을 때 인천에서 살았는데 6․25 사변 때 피란을 못 가 아버지는 북한군에게 붙잡혀
갔다. 수복 후 국군은 그 아버지가 북한군에게 협조한 가족이라고 하여 14살 먹었던 이교수와 어머니, 동생을 학교 운동장에 세워 놓고 죽이려고
총을 겨누었다. 이교수는 병사에게
“아저씨, 우리를 죽이지 말고 살려
주세요.”
“나도 다섯 살 먹은 여자 애에게 총을 겨누고 싶지
않단다.”
라고 병사도 말했다. 동생이 여섯 살이었다. 그
병사가 고개를 숙이는데 목에 걸린 반짝이는 십자가를 보았다. 거기에 이상한 느낌을 얻어 살려 달라고 매달리자
그
병사는
“그래, 내가 너희 식구를 죽인 것으로 보고할
터이니 집에 가지 말고 멀리 모르는 곳으로 가서 살거라.”
소녀는 동생을 들쳐 업고 병 중에 있던 어머니를
끌고 뛰었다. 등 뒤에서 총 소리가 몇 방 들렸다.
소녀는 100리 쯤 떨어진 어느 마을에 가서 헌
천막을 얻어 치고 군 부대 근방이어서 양공주들이 버린 옷을 줏어다 꿰매 이불을 만들었다. 먹을 것이 없어도 차마 동냥은 못하고 어느 가게에 가서
일을 해 주고 큰 성냥 한 통을 얻어 와 작은 곽 몇 개에 옮겨 담았다. 그것들을 길 가에서 사과궤짝에 팔려고 올려 놓고는 오돌오돌 떨면서
앉아 있었다.
그때 미군들이 떼를 져서 옆에 있는 양공주 촌으로
들어 갔다. 그들 중 한국군 병사와 흑인 병사가 다가 와
“나는 신학 대학생이다. 이 흑인 병사는 신부님인데
우리 부대는 내일 전쟁 터에 싸우러 나간다. 군인들이 두려움을 잊기 위해 위안부에게 갔는데 우리는 기독교인들이라 그럴 수 없어 너를 도와 주고
싶어서 왔다. 너희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들과 함께 천막 방에 들어가자 한국 병사는 슬리핑
백에서 과자와 통조림을 꺼내 주었다. 그리고 흑인 병사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 소녀네 가족을 위한 기도라는 것을 신학대학생이 알려
주었다. 그들은 일어서면서 성경책과 십자가, 자기들이 덮고 자던 야전용 침낭을 주고 갔다. 며칠 후 그 병사들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녀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자기의 가진 것 모두를 불우한 사람에게 주고 전쟁터로 나간 이들의 이웃 사랑! 그녀는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소녀는 휴전 후 교회 계통의 도움을 받아 공부할
기회가 열렸다.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교에 들어 가 문학박사가 되고 대학 교수가 되었다. 자신이 성냥팔이 소녀 때 모든 것을 주고 떠난 신부와의
체험담을 책으로 엮어 팔아 그 돈으로 ‘나사렛 성가원’이란 불우한 사람들을 수용하는 시설을 만들었다. 거기에 재산, 정성, 노력을 몽땅 쏟아
부어 옛날 춥고 배고팠을 때에 흑인 신부와 한국군 병사가 베풀어 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은공을 갚으려 했다.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다시 살아났다. 하나님께서 백배, 천배 더 크게 역사하시는 것을 보고 그들도 천국에서 기뻐할 것이다”고 결론을 맺었다.
유엔군이 그때 지켜 주지 않았으면 우리는 북한 독재
치하에서 살아 갈 수 밖에 없다. 북한은 ‘인민을 위해서 정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최고 존엄을 위해서 인민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영하
20도 때에도 밖에서 들것을 들고 흙을 나르는 것을 우리는 텔레비전애서 보았다. 거기에 최고 존엄의 대민관(對民觀)이 담겨 있다. 그 통치
이념이 오늘의 가난한 북한을 만들었다. 6․25 사변 때 유엔군으로 하여금 대한민국을 지켜 주게 한 것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을
하나님께서 보호 해 주신 것이고, 북한이 점점 못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을 못 믿게 하고 마을마다 김일성 동상을 세워 그 앞을 지나 다니는 사람은
허리를 굽히고 인사하라고 해서인 것 같다.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는 명심보감 한 구절이 떠오른다.
= 옮 긴 글 =
"항상 건강하고 좋은 매일 매일 지내세요!!"
大 成 拜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