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남저수지에는 장마철을 맞아 갈대와 물억새가 어른
주남저수지는 철새의 낙원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내내 철새들로 북적거린다. 한 철 머물렀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철새들과 더 먼 나라로 가기 위해 잠시 머물렀다 날아가는 나그네새들, 그리고 텃새들이 한 가족으로 사는 곳. 그 새들 만나러 주남저수지 간다.
지난주 며칠 연속 비가 내려서인지 수위가 제법 높다. 탐방길 저수지 쪽으로 호위병처럼 도열한 갈대와 물억새가 어른 키보다 더 높게, 검푸르게 자라 있다. 도로 쪽으로는 개망초가 지천으로 피어서 검푸른 풀들 사이에서 하얀 손을 마구 흔든다. 겨우 이삼십 분 걸었는데 덥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는다. 연일 이어지는 30도에 육박하는 더위를 실감한다.
탐방길에는 연인처럼 보이는 남녀 한 쌍이 모자도 없이 더위를 무릅쓴 채 저수지 풍경 사진을 찍으며 걷고 있다. 푹푹 솟는 더위 속인데도 탐방객이 많다. 옷을 곱게 입은 부인 몇이 양산으로 햇볕을 가리며 걸어가고, 단체 탐방객 몇 팀이 웅성거리고 있다. 노란 모자에 흰 반팔 옷을 입은 유치원생 20여 명이 쫑알거리며 지나간 자리엔 토끼풀꽃 같은 웃음이 통통 튀고 있다. 몇몇이서 또는 무리 지어 탐방로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엔 여행의 즐거움과 평화가 가득하다. 이곳에선 더위 따윈 무용지물이라는 듯이.
주남저수지에는 철새들이 연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가 있다. 활주로 없이도 수직으로 나는 놈도 있다. 청둥오리, 고니, 기러기들이 활주로를 박차고 오를 때마다 물안개들이 몸을 낮춘다. 새벽이면 자유형으로 단련된 식성 좋은 떡붕어들이 어젯밤에 삼킨 달을 토하고, 저수지 아랫목에 노숙해 있던 수초들이 이빨을 닦는다. 학원버스에 실려온 아이들은 관제탑 같은 탐조 전망대에 올라 망원경 하나씩 붙잡고 새들과 수화를 한다.
물이 물의 뼈와 물의 살로 빚은 물의 다세대주택, 천년을 동거해도 소유권 시비가 없는 아름다운 생명들의 따뜻한 한 이부자락 주남저수지. 평생 날개 하나 달지 못하고 생애의 이륙 한번 꿈꾸지 못한 갈대들이 오늘은 너의 활주로에 지친 첫발을 내리는 새들의 하강을 유도한다.
-이광석 詩 <주남저수지에는 새들의 활주로가 있다> 전문
탐방로를 걷다가 탐조대에 올라본다. 탐조대에 설치된 망원경 속으로 광활한 저수지 풍경이 가득 들어온다.
생이가래와 개구리밥, 자라풀, 노랑어리연 등의 수생식물이 저수지를 온통 초록으로 덮고 있다.
저수지 안 갈대섬 근처와 기슭 근처에 언제 누가 심었는지 군락을 이룬 연이 꽃을 피워 장관을 펼쳤다. 또 군데군데 백로와 오리류 같은 철새들이 모여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생각보다 철새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주남저수지 생태가이드 조규영 씨는 철새들이 먹이활동을 나갔기 때문이라 한다. 새들은 아침에 저수지 주변 논이나 하천으로 먹이활동을 나갔다가 저녁이 되면 무리 지어 저수지로 돌아온다. 흰빰검둥오리나 개개비는 새끼들을 키우느라 수초 속에서 지내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 와야 다양하고 많은 철새를 살펴볼 수 있다.
주남저수지는 창원시의 동읍에 있다. 용산(주남), 동판, 산남, 3개의 저수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규모 180만 평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곳은 강원도 철원 천통리, 천수만, 금강, 경남의 주남저수지 등을 들 수 있다. 경남지역만 하더라도 낙동강 하구를 비롯해 람사르 등록 습지인 우포늪 등 여러 곳 있다. 이 가운데서 주남저수지는 낙동강 줄기에 형성된 동남내륙지역 최대 철새 도래지로 유명세를 떨치는 곳이다.
3만 마리 이상의 가창오리와 세계적 희귀조인 재두루미(천연기념물 제203호), 노랑부리저어새(천연기념물 제205-2호), 흰꼬리수리(천연기념물 제243-4호)를 비롯 230여 종의 5만 마리가 넘는 철새들이 이곳에서 겨울을 난다.
여름에는 해오라기, 백로, 쇠물닭, 꼬마물떼새, 개개비, 찌르레기 등이 찾아와 번식하고 다시 남쪽으로 돌아간다. 그뿐 아니다. 도요새류, 물떼새류 등 나그네새들도 잠시 들러 이곳에서 쉬었다 간다.
주남저수지 일대는 과거 낙동강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배후습지로 전체가 갈대로 덮인 ‘갈대의 나라’였다. 1920년대부터 농경지가 들어서기 시작해 용수공급과 홍수조절을 위해 백운산, 구룡산 등 산지 밑에 9km의 제방을 쌓아 이 저수지를 만들었다. 인공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 주남저수지는 이제 철새들의 낙원이면서 살아있는 생태박물관으로 조명되고 있다.
사계절 내내 주변에서 살아가는 까치, 박새, 꿩, 직박구리, 오목눈이류 등 텃새들이 알을 낳고, 그 알에서 부화한 새끼들을 키우며 서로 영역다툼을 하느라 시끌벅적한 주남저수지엔 생동감이 항상 넘친다. 새만 아니라 온갖 식물과 곤충이 자태를 뽐내며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춤을 펼친다.
저수지 주변 들판 논두렁이나 농수로 주변에는 민들레, 꽃다지, 부들, 고들빼기, 봄맞이꽃, 광대나물, 개불알꽃, 뚝새풀, 자운영, 제비꽃, 치칭개, 노랑어리연꽃, 노랑꽃창포 등등의 꽃들이 지천이다.
탐방로를 따라 주남저수지를 한 바퀴 돌아 나오면 둑길 아래 들판에 조성한 연밭의 희고 붉은 연꽃이 장관이다. 곳곳에 수련들도 고운 얼굴을 보여준다.
연밭 옆에는 2008년 창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10차 람사르총회를 기념하여 만든 람사르문화관이 있다. 입구의 돌솟대와 나무솟대가 정겹게 방문객을 맞는다. 솟대는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상징물로 2004년 세계박물관협회가 선정한 한국대표 문화 가운데 하나다.
람사르문화관에는 한국의 습지와 세계의 습지 현황 등이 전시돼 있고, 습지의 중요성과 람사르총회의 역할 등이 상세히 소개돼 있다.
바로 옆 생태학습관을 살펴보고 다시 주남저수지 초입의 나무로 만든 생태로를 걷는다. 수면에 펼쳐진 수련 잎들 사이로 삐죽삐죽 고개를 내민 꽃봉오리들. 진흙 속에서 자랐지만 결코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수련들. 나는 새벽에 수련을 본 적이 있다. 자욱한 새벽의 물안개 속에서 파릇한 허기처럼 돋아나던 그리움, 그리고 시퍼렇게 드높은 하늘이 되던 저수지의 풍경.
주남저수지, 새가 날아오르는 길에는 새벽과 아침 사이의 여운이 있다
수련 꽃봉오리들이 옹알이하며 보드랍게 빨아먹는 뿌우연 젖, 자꾸 감추고 싶어 하는 물안개의 부끄러움이 있다, 그 사이에서
차츰 저수지를 더 웅숭깊게 하는, 촉촉하게 젖은 아침의 마알간 눈
그 눈빛이 너를 불러온다
아직도 마음 한쪽 끝이 붙잡고 있는, 공복의, 파릇한 허기 같은 그리움
일제히 물안개 지우며 선명하게 펼쳐지는 저수지 풍경 같이
햇살 속에 놓여져 이제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마음이 투두둑, 터지는 실밥 같은, 수련 꽃봉오리를 열려는지 다문 입 자꾸 움찔거린다
새떼를 떠메고 날아올랐던 저수지가 시퍼렇게, 드높은 하늘이 되는 순간이다
-필자 拙詩 <수련을 위하여> 전문
동읍과 대산면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주천강에 놓인, 거대한 판석으로 만든 주남돌다리(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25호)를 거쳐 동판저수지를 둘러본다. 왕버들이며 갯버들 같은 버들류가 검푸른 숲을 이루고 있다. 원시림을 보는 듯하다.
벌써 저녁이다. 먹이활동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철새들을 뒤로하고 주남저수지를 빠져 나와 다호리 고분군(사적 제327호)과 신방리 음나무 군락(천연기념물 제164호)을 둘러본다.
동읍의 다호리 고분군은 통나무를 파내고 만든 목널이 출토되고, 문자 생활의 증거인 붓과 가야금의 원조인 현악기 등이 나와 한국고대사의 공백기인 고대국가 형성 시기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준 곳으로 평가된다.
400살 먹은 음나무 군락은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문화적 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높이 30m, 지름 1.8m에 달한다.
신방초등학교(新方初等學校) 뒤의 길가 언덕에 있다. /글·사진=배한봉 시인/
첫댓글 주남 저수지가 철새로만 유명한 줄 알았는데 끝없이 펼쳐진 연꽃길이 장관이군요. 언제 기회가 되면 한번 가봐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