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까지 여수에서 장로 부부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제게는 장로님들과의 마지막 수련회이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의 사랑도 듬뿍 받았습니다.
모든 시간이 은혜로왔지만 여수 애양원 교회에서 있었던 성찬식 때 받은 은혜가 특별했습니다. 손양원목사님께서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하시고 기도하셨던 그 예배당에서 하는 성찬식이었기에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애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주님께서 제게 주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날의 성찬식이 수련회 프로그램의 하나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식적인 신앙을 경고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두려운 일이 형식주의 신앙에 빠지는 것입니다. 저는 4대째 신앙 가문이고 3대째 목사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큰 복이지만 또한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형식주의, 종교생활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바리새인들이 그와 같았습니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 신앙생활 잘한다고 속기 쉬우니 더욱 위험합니다.
주님은 자신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돌아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장로님들께 처음 장로가 되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더욱 친밀히 동행하게 되었습니까?’ ‘장로님을 보면 예수님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까?’ ‘더 사랑이 많아졌습니까?’ ‘기쁨이 더 넘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더 겸손해졌습니까?’ ...
성찬의 은혜의 눈이 뜨인 후 성찬식은 제가 형식적 신앙에 빠지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성찬 때 빵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된다는 화체설을 믿습니다. 이것은 가톨릭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임재에 대한 신앙을 지켜주는 강력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이라면 꼭 화체설을 주장할 이유는 없습니다. 성찬 때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우리는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 마음에 거하여 계십니다. 그 놀라운 은혜를 성찬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찬을 통하여 주님의 임재의 믿음이 새로워졌고 계속 견고해졌습니다. 이번 애양원 교회에서의 성찬식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성찬식 조차 형식적 예식으로 변질될 수 있음이 두렵습니다. 실제로 교단 회의 때나 교회 모임에서 성찬대를 둘러싸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성찬식을 집례하고 보좌한다고 성찬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1장에서 형식적으로 성찬을 받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고전 11:29-30)
형식적으로 성찬을 받지 않으려면 성찬받을 때 정말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찬을 통하여 주님과 한 몸되었음을 다시 확인하여야 하고 성찬 후에 진정으로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성찬받은 자임을 계속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나는 성찬받은 사람이다’ 이 사실만 분명히 기억하고 살아도 형식주의 신앙에 빠지지 않습니다.
여수 애양원 교회를 다녀오면서 다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손양원목사님만 아니라 여수 애양원 교회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훌륭한 선교사님들과 여러 목사님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한센씨 병 환자인 애양원 교회 성도들이 귀하였습니다. 한센씨 병 때문에 애양원에 와서, 억지로라도 새벽마다 일어나 기도하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고 나니 한센씨 병 때문에 영적으로 살았음을 깨닫고 한센 씨 병 조차 감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 분위기와 흐름이 이어졌기에 손양원목사님의 삶도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번 장로수련회에 은혜가 컸던 것이 장로님들이 매일 동행일기를 통하여 주님과 동행하였고 나눔방에서 깊이 영적으로 하나되었던 것이 수련회로 이어졌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