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진컴퓨터랜드의 신화와 그늘
컴퓨터 업계에 돌풍 일으킨 세진컴퓨터랜드, 군대식 노무 관리로 물의
기사입력시간 [307호] 1995.09.14 (목) 金恩男 기자
지난 8월19일 컴퓨터 통신 천리안의 ‘나도 한마디(go WORD)’난에 눈길을 끄는 글이 등장했다. ‘세진 컴퓨터 공화국의 직원 탄압 현장 고발’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주)세진컴퓨터랜드(사장 한상수)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던 시기인 만큼 이 글은 금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90년 부산에서 5평짜리 매장으로 시작해 대구·대전 점에 이어 올해 5월27일 서울 잠실에 8층짜리 빌딩 전체를 임대한(1층 은행 제외) 서울 1호점을 오픈하기까지 거침없는 성장세를 보여온 세진은 ‘컴퓨터 유통업계의 이단아’로 불리며 줄곧 풍성한 화제를 뿌려온 기업이다.
일반인에게는 신문·텔레비전·대중 교통수단을 총망라한 도전적인 광고 공세로, 컴퓨터 사용자들에게는 가격 파괴와 ‘평생 애프터 서비스’라는 파격적인 제도로, 경영자들에게는 성공적인 마케팅 전략의 모범으로 충격을 준 세진컴퓨터랜드는, 전국적인 브랜드로서의 입지를 막 구축하려던 시기에 터져나온 PC통신망 논란으로 상당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천리안과 똑같은 내용의 글이 나흘 후인 8월23일 다른 PC통신망인 하이텔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돼 갔다. 이 글에서 주장하는 세진의 구체적인 직원 탄압 사례는 다음과 같다.
△울산점 오픈을 하루 앞둔 지난 7월7일 서울 잠실점에서 울산으로 파견 근무를 나가 있던 여직원 1명이 한상수 사장에게 폭행을 당했다. 개막 준비로 어수선한 매장에서 한사장은 스티커 작업이 소홀하다는 이유로 “남녀를 동등하게 대해 주겠다”며 여직원을 주먹으로 때렸다. 여직원이 뒤돌아서서 울자 한사장은 다시 우는 것을 트집잡아 때렸다. 폭행을 당한 여직원은 그날로 사표를 썼다.
△7월 어느날 서울 잠실점에 근무하던 여직원 한 사람은 사적인 통화를 한다고 큰 꾸지람을 당했다. 그날 저녁 석회 시간에 전직원 앞에서 다시 인격적 모욕을 당한 여직원은 울면서 계단을 내려가다 넘어져 앞니가 모두 부러진 채 병원에 실려갔다. 한사장은 다음날 그 여직원을 해고 조처했다.
△7월 한달간 전직원 휴무 금지 조처가 내려졌다. 직원들이 피곤과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에서 8월20일 일요일 근무를 하는 도중 갑작스런 방송이 나왔다. 다음날 대구에서 단합대회가 있으니 전직원은 대구역 앞에 새벽 5시30분까지 집결하라는 방송이었다. 사전 예고가 전혀 없는 갑작스런 일정이었다. 청바지와 운동화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직원들에게 일괄 구입 지시가 내려졌고, 서울 잠실점의 경우 근무가 끝난 밤 10시에 대기해 둔 버스를 타고 전직원이 대구로 이동했다. 전국 각지 5개 점에서 모인 직원들은 잠도 제대로 못잔 상태에서 10km 구보를 했다.
△단합대회를 떠나기 직전 전격적인 임금 인상 조처가 발표됐다. 전직원의 임금 제도를 연봉제로 바꾸고 신입 평사원의 연봉을 1천8백만원으로 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이 발표는 하루 만에 번복되었다.
신입사원 절반이 한 달 안에 퇴사
이밖에도 이 글은 잦은 기합과 구보, 사장의 폭언·폭행, 약속 불이행 사례들을 다양하게 지적하였다. 이를 접한 통신인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것이 사실이라면 세진 불매 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주장은 최근 세진이 급속한 양적 팽창을 이루면서 초창기에 비해 애프터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는 컴퓨터 사용자들의 불만과 맞물려 증폭 효과를 빚었다. 또 하나의 반응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전에 성급하게 세진을 매도해서는 안된다는 신중론이었다. 특히 동종 업계의 강력한 견제를 받고 있는 세진이 부도설·대기업 관련설 등 온갖 루머에 시달려온 만큼 이러한 내부 비방 또한 경쟁사가 꾸며 퍼뜨린 것일 수도 있다는 지적 또한 설득력 있게 전개됐다.
추적해본 결과 천리안과 하이텔에 각각 ‘RAPITER’와 ‘fisicsta’라는 ID(사용자 기호)로 맨 처음 글을 올렸던 사람은 동일인으로, 제3자의 ID를 빌려 쓴 것으로 확인됐다. ㅎ대학 3학년인 온아무개군(25)이 그 주인공이다. 애인이 세진에 근무하고 있다는 온군은 ‘도저히 상식으로 납득할래야 납득할 수가 없는’ 세진의 행태를 여론의 힘을 빌려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애인의 증언을 대신 정리했다고 말했다. 온씨가 글에서 인용한 편지는 지난 7월 중순 세진을 퇴사한 송아무개씨(26)가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식솔이 있음에도 한달만에 퇴사를 결심해야 했다는 송씨는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모멸감이 너무 컸다”고 세진에서 보낸 기간을 회상하면서 “고속 성장의 이면에 가려진 세진 직원들의 고통을 알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현재 세진에 근무하고 있는 직원이나 경영진 또한 PC통신에 올라 있는 내용 대부분이 사실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과장이 섞인 부분은 있지만 사건 자체는 모두 실제로 일어났었다는 것이다. 직원들은 울산지점에서 폭행 당한 여직원은 광고디자인실에 근무하던 김아무개씨(24), 계단에서 이가 부러진 다음날 퇴사했다는 여직원은 경리과에 근무하던 이아무개씨(25)라고 확인해 주기도 했다. 김씨가 퇴사한 후 한달 안에 광고디자인실은 구성원 5명 전원이 사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단, 회사측은 폭행 부분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인터뷰 기사 참조). 울산점 개막 전날 폭행을 당했다는 여직원에 대해 세진의 김경중 이사는 “때린 것이 아니라 어깨를 세게 흔들었을 뿐”이라고 부인했다.
그러나 직원들은 폭행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고 증언한다. 서울 잠실점에 근무하는 이아무개 대리는 “조회 시간에 불려나가 맞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한번은 분을 못이긴 사장이 아무개 지점장의 셔츠 앞자락을 잡아당겨 명찰이 뜯긴 일도 있다”고 말한다. 한사장의 주특기는 직원을 세워 놓고 오금을 걷어차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문제는 사건을 보는 시각이라고 직원들은 입을 모은다. 세진을 떠난 사람과 세진에 몸 담기로 결심한 사람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회사측도 인정하다시피 입사한 사람 중 절반 이상이 교육 과정인 한달 안에 세진을 떠난다. 폭언이나 폭행, 군대식 규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이 시기에 모두 떨어져 나간다. 서울 잠실점에 근무하는 이아무개 대리는 “이러한 스파르타식 규율이 세진 급성장 신화에 어느 정도 밑거름이 되었음을 인정한다. 오히려 문제는 회사에 평생을 걸어보려 했던 사람들조차 끊임없이 흔들리게 만드는 경영진의 무원칙한 모습이다”라고 지적한다.
“사장 독주가 가장 큰 문제”
연봉제 소동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연봉제 발표를 하루 만에 없던 일로 뒤집은 이유에 대해 김경중 이사는 “고마워할 줄 모르는 직원들에 대해 사장님이 화가 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후 직원들의 분위기가 술렁대고 PC통신에 문제의 글이 오르자 한사장은 연봉제를 8월1일부터 소급해 적용하겠다고 서둘러 발표했다.
인사 제도도 직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한상수 사장은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교육(수습) 기간에도 직급을 달아줄 수 있다”고 공언해 왔다. 실제 입사한 지 2주 만에 대리로 진급했다는 남아무개씨는 “다른 조직과 달리 자신이 노력하기에 따라 바로 성과가 주어진다는 것이 세진의 큰 매력이다”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그러한 파격적 인사가 전적으로 사장 개인의 주관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무원칙하게 행해지는 강등은 직원들에게 더욱 위협적이다. 지난 7월 부산점의 방아무개 과장은 전화 받는 목소리가 작다는 이유로 사장으로부터 서울로 즉각 올라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다음날 일반 사원으로 강등돼 매장 앞에서 인사하는 일을 하게 된 그는 그날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측은 이 사실을 본보기감으로 게시판에 공고했다.
문제는 이러한 무원칙이 바로잡힐 전망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일부 사원들은 가장 큰 원인을 한상수 사장의 독주에서 찾는다. 맨주먹으로 시작한 세진을 5년 만에 1년 매출액 3천억원을 넘보는 기업으로 성장시킨 한사장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원은 적지 않다. 반면 ‘자기가 제왕인 줄 착각하는 사람’ ‘목소리 큰 사기꾼’이라는 인신공격성 비난조차 서슴지 않는 사원이 공존하는 것 또한 세진의 현실이다. “사장의 마인드가 바뀌지 않는 한 세진의 종말은 시간 문제다”라고 단언하는 한 사원은 “이대로라면 세진에 평생을 몸바쳐 보려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하루빨리 독립해 자기 회사를 차릴 욕심으로 노하우를 배우려는 사원만 남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하는 사원들도 생기고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한 직원은 “기형적인 통로이기는 하지만 PC통신을 통해서나마 이렇게 문제가 제기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며, 만약 경영진에 아무런 변화 조짐이 없을 경우 노조 결성이라는 대안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세진의 노사 모두는 세진 내부 문제가 더 이상 확대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 문제를 처음 PC통신망에 제기했던 온군 또한 이렇게 얘기한다. “세진이 망하기를 바라고 한 일이 결코 아니다. 세진은 컴퓨터 유통에 ‘서비스’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 소비자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주었다. 세진이 하루빨리 정상적인 노사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소비자의 바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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