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그때 그는 왜?>
<33> 1649년 크롬웰은 왜 영국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했을까? (下)
1·2차 내전 겪고
공화정 탄생…국왕은 처형당해
의회서 왕성히 활동하던 크롬웰
신앙심 무장한 기병부대 양성 두각, 1차 내전 의회파 승리 이끌어
전쟁 과정서 장로파-독립파 분열
혼란 틈타 2차 내전 일으킨 찰스 1세- 반역죄로 유죄판결 받고 사형
독립파 중심 의회 공화정 수립, 크롬웰 죽은 후 왕정복고
네이즈비 전투에서의 올리버 크롬웰(1645년). |
1642년 8월 말 찰스 1세가 잉글랜드 중북부 노팅엄에서 기치를 내세우면서 왕당파와 의회파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계급적으로 누가 왕당파이고 누가 의회파인지를 명확하게 구별할 수는 없다. 귀족 중에서도 일부는 의회파를 지지했고, 평민 지주계층이나 자영농 중에서도 일부는 국왕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역과 종교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구분이 분명했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북부와 서부가 국왕 편을 든 반면, 상업이 발달해 있던 남부와 동부는 의회 쪽으로 기울었다.
결단의 동기와 그 결과
종교적으로 국교도들은 왕당파 지지자였던 데 비해 퓨리턴들(청교도)은 대부분 의회 편에 섰다.
내전 초반에는 나름대로 훈련된 병력과 유능한 지휘관을 지닌 국왕군이 우세했다. 그렇다고 의회군이 지리멸렬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초반에는 훈련상태가 미흡했으나 실전 경험을 쌓으면서 차츰 정예화됐다. 두 진영이 팽팽하게 맞선 상황에서 의회파가 잉글랜드에 장로교 수립을 약속하면서 스코틀랜드 군대와 제휴하는 데 성공했다. 1644년 1월 약 2만 명의 스코틀랜드 군대가 남하해 요크에서 의회군과 합류했다. 이후 7월 요크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의회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내전 승리의 분수령을 마련했다.
바로 이때 두각을 드러낸 의회군의 한 지휘관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케임브리지 인근 소도시 헌팅턴의 젠트리 가문에서 태어난 크롬웰은 17세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후 부친이 사망하자 대학을 중퇴하고 귀향해 상속받은 토지를 관리하면서 지냈다. 무엇보다도 그가 살던 잉글랜드 동부는 종교적으로 퓨리턴 또는 독립파로 불린 신교 종파가 매우 강한 지역이었다. 자연스럽게 크롬웰 역시 독실한 퓨리턴으로 평소 성서를 가까이하면서 생활했다. 하지만 약 20년간 이어져 온 크롬웰의 농목(農牧)과 기도 생활은 1640년 11월 그가 찰스 1세에 의해 소집된 일명 ‘장기의회’에 케임브리지 시의원으로 등원하면서 끝나게 됐다.
이제 런던의 중앙무대에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의회에서 의욕적으로 활동하던 크롬웰은 내전이 발발하자 군사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모병작업에 들어갔다. 하나님의 군대라는 경건한 신앙심으로 정신무장을 하고 엄한 규율로 훈련된 그의 기병부대는 곧 무적의 부대, 일명 ‘철기대(鐵騎隊·the Ironsides)’로 알려졌다. 크롬웰조차 참전 이유를 “인간으로서의 정치적 자유, 신앙인으로서의 종교적 자유를 위해서”라고 선언할 정도였다. 실제로 그는 장교 선발의 첫째 자격을 깊은 신앙심에 두었고, 전투 전야에는 온 장병이 합심해 기도했다.
그의 부대 명성이 높아지면서 크롬웰에 대한 의회파의 신뢰도 깊어졌다. 의회군 수뇌부의 교체를 계기로 크롬웰은 신임 총사령관 페어팩스 경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자신의 기병대인 철기대를 표본 삼아 의회군을 잘 훈련되고 규율이 살아있는 군대, 즉 ‘신형군(New Model Army)’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새로운 부대는 의회에서 급료를 받았고, 무엇보다도 종교적 사명감이 투철한 퓨리턴 장교들에 의해 통솔됐다. 이러한 군대라면 승리는 보장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과연 1645년 6월 네이즈비(Naseby) 전투에서 의회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패전했으나 찰스는 여전히 영국의 국왕이었다. 그렇다면 왜 찰스는 얼마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까? 내전 승리 직후 불거진 의회파의 분열이 2차 내전 발발의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전투 승리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어떠한 입헌적 정부와 개혁교회를 세울 것인가 하는 어려운 과업이 남아있었다. 더구나 전쟁 과정에서 의회파는 장로파와 독립파로 분열된 상태였다. 전자가 의회를 세력 기반으로 하면서 종교적으로는 장로교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비관용적인 태도를 취한 데 비해 후자는 군대를 축으로 하면서 종교 면에서는 개별 교회의 독립성과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관용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당시 의회 의원이자 군 지휘관이던 크롬웰은 두 집단 간에 조정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결국 군대, 즉 독립파와 운명을 함께하기로 작정했다. 무력을 장악한 덕분에 장로파 제압에 성공한 크롬웰에게 이번에는 독립파 내부의 분열이라는 복병이 나타났다. 독립파 군대 내에서 고급장교들과 사병들 간에 견해차가 첨예화됐던 것이다. 거친 논쟁 과정을 거친 후 1647년 10월 런던 교외에서 군 평의회를 개최해 가까스로 해결했다. 그런데 문제는 국왕 찰스였다. 의회파가 분열로 혼란한 틈을 타서 그가 스코틀랜드의 귀족들과 결탁, 1648년 2월 재차 내전을 일으킨 것이었다. 다행히 8월에 벌어진 프레스턴 전투에서 크롬웰은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이제 군대가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섰다. 동시에 국왕에 대한 불신과 분노는 폭발 직전으로 치달았다. 군의 부상(浮上)을 두려워한 의회가 국왕과 타협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마침내 군대가 행동을 개시했다. 1648년 12월 프라이드 대령이 이끄는 일단의 무리가 의회에 난입해 장로파 의원들을 봉쇄한 채 100여 명의 독립파 의원만 모아놓고 국왕의 반역죄를 심리할 특별 법정의 설치를 결의했다. 이어진 법정 재판에서 찰스는 신민에 대한 압제자이자 살인자로 유죄판결을 받은 후 1649년 1월 런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당했다.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크롬웰과 독립파 위주의 의회는 아예 군주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나아갔다. 물론 귀족원과 국교회도 폐지됐다. 독실한 퓨리턴이던 크롬웰은 개인의 야망보다는 신의 섭리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매사를 처리하고자 노력했다. 신생 공화국 정부는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할 때까지 그런대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는 호국경(護國卿)으로서 군대의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은 크롬웰 개인의 영도력에 의지한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죽은 후 의회는 공화국의 종언과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1660년 찰스 2세를 새로운 국왕으로 맞아들였다.
영국 통치자로 임명되는 올리버 크롬웰. |
사건의 역사적 영향
두 차례의 내전까지 치른 후 탄생한 공화국의 운명은 어이없게도 이의 설계 책임자였던 크롬웰의 죽음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1640년경부터 거의 20년간 지속된 내전과 혁명은 이후 영국 역사 및 유럽사에 중요한 흔적을 남겼다. 우선, 크롬웰의 활약과 통치는 종교적으로 영국에서 비국교파의 위상을 굳건하게 만들었다. 평생 성서를 곁에 놓고 기도하는 사람으로 산 크롬웰의 통치기를 통해 영국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린 퓨리터니즘(puritanism)은 이후 영국을 종교적 관용과 개인 자유의 본고장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퓨리턴들이 견지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종교적 관용과 신앙의 자유, 즉 ‘자유의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영국이 확실하게 입헌군주정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내전과 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의회가 영국민의 민의를 반영하는 구심점이 되면서 국왕의 권력도 제어할 수 있다는 인식이 폭넓은 공감대를 얻었다. 당시 유럽 대륙에서는 국왕의 절대성이 강화되고 있었음을 고려할 때 섬나라 영국에서 벌어진 ‘국왕 처형’은 충격적인 사건임이 분명했다. 민의를 과도하게 무시할 경우 국왕조차 죽음에 이를 수 있음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사상적으로도 내란 시기는 ‘백가쟁명’의 시대였다. 다양한 계층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 수준 높은 정치이론과 정부의 작동원리를 설파했다. 이들 중 언론의 자유를 옹호한 존 밀턴과 명저 『리바이어던』을 통해 주권 절대성의 원리를 주창한 토머스 홉스는 이후 서양 정치사상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내주 육사 명예교수>
추억의 영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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