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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여자 공비 정순덕의 살인행각 -1- 2004년에 사망한 지리산 최후의 여자 공비 정순덕을 아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나 모르시는 분이 더 많을 듯하다. 한국 전쟁 동안 전선 후방 남쪽 지리산 지역에 둥지를 틀고 치안과 경제를 위협하던 일 만여 명의 공비들을 군과 경찰이 끈질기게 토벌하였다. 휴전 후 1956년경에는 총 두목 이현상을 비롯해 주력은 거의 소멸된채로 단 50여 명 만이 지리산 언저리 산간 지역에 붙어서 도둑질로 명맥을 이어갔다. 경찰은 이들을 망실공비[亡失共匪]라는 무리로 분류했다. 경찰들은 지리산 주변의 공비들이 소멸되고 지리산 출입금지가 해제 된 1960년대에 들어서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아직도 댓 명의 공비들이 도둑질과 살인질을 해대어 주민들을 불안하게 했기 때문이다. 50년대 후반부터 국내 언론은 지리산에서 방황하는 망실공비중의 한 명이 정순덕이라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지금 상식으로는 상상이 안 되지만 남한을 좀쓸던 공비들중에 여성 공비들이 정말 많았었다. 한 공비 부대에서는 풍기문란 방지를 위해서 여성들만 모아 일개 소대의 여성부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이 소대원들은 특히 목포의 M여고 출신들이 많아 M여고 부대라고 불렸었다. ------------------------------------------- 여자 공비들이 넘쳐나게 많으니 공비 두목들은 용모가 반반한 여자를 데리고 살았다. 이현상, 남도부, 이영회, 방준표 등 두목급 공비 지도자들 모두가 소위 말하는 산중처[山中妻]가 있었고 일부는 아기까지 낳았다. ------------------------------------------- 경찰은 정순덕이 속한 공비조는 3인조로, 두목급되는 자는 북에서 내려온 이응조라는 40대 남자였고 다른 남자 대원인 산청군 삼장면 홍계리 출신의 이홍희가 있었고 그리고 이들 사이에 정순덕이 끼어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정순덕은 산청군 삼장면의 내원리의 빈한한 농가 태생으로 4남매 중 두 번째였다.(1933년 생) 그녀는 아주 이른 18세이었던 1950년 1월에 성석조라는 옆 동네 청년과 결혼했다. 정순덕 집안에서는 병약하여 소박맞고 돌아온 언니 때문에 힘들어진 집안 식량 사정에 입 하나라도 덜어 해결하자는, 정말 불쌍한 이유로 보낸 시집이었고 성석조 집안에서는 어머니가 죽어 살림살이를 해줄 여자가 필요하여 맞은 며느리였다니 참 힘든 시절의 결혼이었다고 하겠다. 두 사람은 금슬이 좋았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 생활은 얼마가지 않았다. 북한군이 진주하자 성석조는 적색 분자가 되어 활동하다가 북한이 패주하자 산으로 달아나서 공비 부대의 자동소총 사수가 되었다. 성석조는 좀 얼띤 성격으로 뭘 잘 모르면서도 주변에 휩쓸려 돌아다니다가 얼떨결에 공비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사실 정순덕은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먼 환경이었다. 그녀는 경찰의 닥달에 시달리다가 단지 남편을 찾기 위해 입산했다. 그러나 두 부부는 별로 길게 같이 살지 못하였고 1952년 1월 성석조는 토벌군에게 사살되어 정순덕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오갈데 없는 젊은 과부 정순덕만 살아남아 충실한 빨치산으로 변모해갔다. 시골 농부의 억척스런 아낙으로 가정을 이끌어가며 아들 딸 잘낳고 평범한 노년을 맞았을 정순덕을 한국민이 겪은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13년의 공비 생활과 21년 6개월의 교도소 생활을 하게하는 비운의 여인으로 만들었다. 산청 경찰서의 끈질긴 수색과 매복에 걸린 정순덕과 이홍희는 입산 13년만인 1963년 11월 18일 새벽에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의 한 농가에서 산청 경찰서 김영국 경사와 박기덕 순경이 쏜 총탄 세례에 이홍희가 사살되고 정순덕은 오른쪽 다리에 두 발의 실탄을 맞고 체포되었다. (두목 이응조는 미리 죽었음 -후에 설명-) 실탄이 허벅지에서 골반 뼈로 관통해 절단 수술을 받은 그녀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달픈 여생을 살아야 했다. 정순덕은 법정에서 사형을 구형받았지만 선고에서 종신형이 확정되어 오랜 복역을 하다가 1985년 석방되었다. 그녀는 1964년에 이미 전향서에 서명을 했었기 때문에 그 점이 참작되었을 것이다. 정순덕은 여자 빨치산 출신이라는 희귀성이 있었는데다가 그의 자전적 책이 출판되어 많이 알려졌다. 석방 뒤에 정충제라는 분이 그녀를 집에 모시고 살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관계되는 주변 사람들을 광범하게 정밀 취재해서 쓴 “실록 정순덕‘이라는 책이 1989년에 출판되었다. 당시는 진보주의자들이 크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였다. 금기시되었던 과거 좌익들의 활동이 관심을 끌어 남부군이라는 책을 비롯해 여러 빨치산 관계 서적들이 출판되었었다. 정순덕은 그 뒤에 계속 외롭게 외다리로 여기저기 전전하며 살았고 진보 편향의 인간들이 자주 접촉하자 세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관심과 동정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 정순덕과 이홍희가 체포 될 때 소지했던 칼빈총 그러던 그녀가 비교적 크게 언론에 오른 것은 김대중 정부에서 비전향 장기수들을 대거 북으로 보낼 때였다. 그녀는 북송 되기를 희망했었다. 고달픈 생활은 버티기가 힘들어서 북행을 희망한 것이지만 이번에는 보수 진영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잠잠했던 그녀는 언론에 반짝 점멸했다. 하지만 당국은 이미 전향서를 제출했다는 이유로 그녀의 북행 신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언론이 잠잠해지나 했더니 2004년 그녀가 고통 많은 세월을 하직하고 저 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이 다시 들려왔다. 2 편 보기 -> click! |
최후의 여자 공비 정순덕의 살인행각 -2- 그러나 귀순 공비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쳤던 당시의 정부가 체포 된 그녀에게 사형을 구형했었던 사실을 상기해보기로 한다. 그 사실은 그녀의 어떤 범죄가 그런 극형을 구형하게 했는가하는 어두워진 이면사를 밝히지 않을 수가 없다. 정순덕은 입산한 후에 처음에는 간호요원과 취사담당으로 일을 하다가 군경의 토벌이 거세져 공비들의 숫자가 대폭 줄어들자 총을 들고 전투에 나섰다. 1950년대에 몰려 다니며 갖은 못된 짓을 하던 3인조는 1960년대로 들어서자 조장인 이응조가 먼저 사살되었고 이홍희와 정순덕 두 사람이 2인조가 되어서 피신해 다녔다. 이응조가 사살 된 뒤 그 시신을 정순덕과 이홍희가 매장 해버려서 이 사실을 알지 못한 경찰은 정순덕이 체포 될 때까지 3인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정순덕과 이홍희의 자수 의지를 꺾어 놓는데 큰 역할을 한 자는 조장이자 골수 공산주의자인 이응조로 생각된다. (인터넷을 보니 그의 이름이 이운조(李雲祖) 또는 이은조(銀操)라고도 하며, 여성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정순덕은 이러한 이응조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함경북도 웅기 출신이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청진 부두 노동자로 지내다가 해방 후에 열혈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덕분에 모스크바 유학까지 다녀왔고 6.25전 발발후 노동당 조직 강화를 위해서 남으로 파견되었다. 이응조는 남쪽 의령군 인민 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하동군 위원장을 지내다가 북으로 후퇴하지 못한채 지리산으로 들어온 자였다. -------------------------------------------------------------- 이들은 본래 이영회 부대 소속이었는데 다 죽거나 투항해 나가고 세 명만 남아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1954년 12월부터였다. 이응조는 공산주의 이론까지 통달한 골수분자로서 두 사람을 끌고 다니면서 공산주의 교육을 쉬지 않았고, 정신 무장의 세뇌 교육을 놓지 않았다. 남편 성석조에게 최후를 안긴 남한 정부에 대한 분노와 이응조의 세뇌 교육은 무지했었던 정순덕을 절대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는 열혈 공산 분자로 만들어 버렸다. 경찰은 5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산에 남아있는 망실공비들의 신원을 완전히 파악하고 그들의 가족들을 심하게 압박해갔다. 공비 가족들이 당하는 고통은 극심했었다. 주변 동네 사람들의 멸시도 무척 심했다. 그런데도 정 순덕은 하산/자수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3인조 중에 이응조는 61년 12월 경찰에게 사살되고 정순덕과 이홍희 두 사람만 남아 산속을 헤매며 당국의 포위망을 피했다. 경찰은 정순덕이 체포 될 때까지 이응조가 죽은 사실을 몰랐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48세였고 북에 부인과 두 명의 자녀가 있었다. 정순덕이 인정한 최초의 공인 가족 몰살 살인 사건은 이응조가 살아있던 1957년 7월 이었다. 3인조의 유랑 공비는 세포조직과 같은 협조자 확보 활동을 펼쳤는데 이는 사용할 일용품의 확보와 함께 경찰 정보를 얻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이 제일 컸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서 살기 위해 쫓겨다니면서도 이응조는 골수 공산당원답게 정치적으로 지방 세포 조직 확산의 꿈을 놓지 않았다. 이들은 1957년도 7월에 하동군 쌍계사 뒤쪽에 있는 화전민 독립가옥을 주목했다. 그 집에는 화전민 조만제(당시 40세), 이판순(38세)이라는 부부가 조복남(9세)이라는 딸을 데리고 열심히 살고 있었다. 1957년 7월 한밤에 불시로 찾아간 이응조와 이홍희는 열심히 이들 부부를 세뇌시켜 향후 협조하겠다는 억지 반승낙을 받아냈다. 하지만 3인조는 부부의 떨떠름한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삼인조는 산으로 돌아가는 척 하면서 다음날 집이 잘 보이는 곳에 잠복하여 집을 감시했다. 아침이 되자 부부는 지게에 세간을 지고 딸까지 데리고 집에서 나왔다. 배신당한 것을 안 3인조 공비는 가느다란 군용 전화선으로 어린이가 포함된 일가족 세 명의 모두 목을 졸라 몰살시켜버렸다. 두 번째 집단 살인은 세월이 한참 흘러 이응조가 죽고 두 사람만 도망다닐 때 발생했다. 정순덕의 고향인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 부락에 그들에게 협조하는 정위주라는 세포가 있었다. 여자 정순덕과 이홍희와는 빨치산 생활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고 그가 대체로 협조적이어서 2인조는 일 년에 대 여섯 번씩 찾아가 식량 조달등의 도움을 받았다. 이 마을에는 정위주의 동생 정정수가 살고 있었다. 2인조와 정정수도 어렸을 때부터 안면이 있었다. 2인조는 그를 포섭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의용 경찰 출신으로서 형과는 달랐다. 더구나 두 남녀 공비들에게 100만의 현상금이 붙어 있었다. (짜장면이 25원 할 때의 금액이니 지금의 일억원은 확실하게 넘는 액수다.) 사람이라면 욕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정수는 포섭당해서 협조하는체 하면서 이들을 살폈다. 1962년 10월 8일 밤 이홍희는 불시에 방문한 이들을 이전과 같이 반기며 맞았다. 그는 한참을 이야기 하다가 이홍희에게 그가 가진 칼빈총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칼빈 총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했는데, 네 총 한 번 구경 좀 하자." 이홍희는 아무런 의심없이 자신의 총을 내주었다. 정정수는 총을 만져 보는 척하다가 총구를 이홍희에게 겨누고 발사했다. 그러나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총알은 그만 이홍희의 볼을 스쳐지나가 가벼운 화상만 입혔을 뿐이었다. 3 편 보기 -> click! |
최후의 여자공비 정순덕의 살인행각
-3-
순간 이홍희는 총구를 낚아챘고 두 사람은 서로 뒤엉켜 몸싸움을 하였다. 틈을 노리던 정순덕은 칼빈 사격으로 정정수를 쏴 죽이고 이어서 부엌에서 고함을 지르고 밖으로 뛰어 나가는 정정수 아내의 등을 겨냥해 그녀의 숨을 끊어 놓았다. (재판에서 정순덕은 정정수 부부를 죽인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자기는 이홍희와 싸우는 정정수의 다리만 쏘았다는 변명을 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정정수의 배신에 분노로 눈이 먼 이들은 정정수의 이웃에 사는 형 정위주의 집을 찾아갔다. 두사람은 마침 산기가 있어 해산의 진통을 앓고 있던 정위주의 처를 무자비하게 사살했다. 아기가 막 태어나고 있던 순간이었다. 잔인함이 극에 달한 이들은 옆 집의 헛간에서 정위주를 찾아내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광기 서린 협박 연설을 하고 정위주를 공개 사살했다.
발광을 한 그들은 막 태어날 아기를 포함한 두 형제의 다섯 식구의 목숨을 앗아 버리고도 부족했는지 두 형제의 집에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생죽임을 당한 정위주 부인이 낳던 아기는 아들이었다. 두 부부사이에는 두 딸밖에 없어서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바로 아들이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이들의 난동은 끝이나고 두 사람은 산으로 도주했다. 경찰이 즉각 출동하여 뒤쫓았으나 두 사람은 이미 깊은 산골로 종적을 감췄다.
병마에 시달리던 말년의 정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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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의 살인 광란은 동네 사람들이 다 보았기 때문에 나중에 경찰에 체포되어 철저히 부인과 거짓말, 오리발로 일관하던 정순덕도 이 범행에서는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정순덕은 체포 된 뒤에도 13년간 산에서 버틴 여자답게 그 들짐승과 같은 사나운 야성을 내보이며 경찰들을 애먹였다.
그녀는 체포 때 다리 하나를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게되는 중상을 입었는데도 발악을 해댔고 산청 경찰서에 구속되어서도 그 발악을 계속했다. 다리 절단 수술을 받은 그녀는 두 번이나 붕대를 모아 자살을 시도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재판에서 자신에게 사형을 구형한 검사에게
“ 야 ! 이 개새끼야! 감형(減刑)만 시켜봐라. 이 개놈아!”
라고 욕을 해댔는가 하면 변론을 하는 국선 변호인에게는 “집어 치워라! 이 개새끼들아!”라고 타고난 사나움을 마구 들어내기도 하였다. 그녀의 왈가닥 같은 성격이 험한 빨치산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13년이나 계속되면서 더욱 거칠어져 살인마저도 서슴치 않게 했었던 것이다.
공비들이 다 소탕당했을 무렵 쌍계사 뒷산의 살해 사건이 언론에 크게 나오자 북한은 이들을 주목했다. 김일성은 남조선에서 유격 활동을 할 곳은 지리산 밖에 없다고 했었는데 그의 말을 3인조가 충실히 이행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의 특명으로 1960년대 초 북한에서 정순덕을 판타지 수준으로 극화한 ‘지리산 여장군’이라는 영화가 제작되었었다.
황당한 사실은 정순덕을 지리산 여장군으로 떠받는 말들이 현재도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내가 정순덕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참전경우회 사무총장 김을로 선생으로부터 그녀의 집안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다. 김 총장은 정순덕과 같은 고향이었다. 더구나 김 총장의 처가댁은 안내원 동네에 살던 정순덕 가족이 소개령에 의해서 황점으로 일시 피난 나왔을 때 바로 이웃에 살았었다.
출동하는 전투 경찰
김 총장은 정순덕의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그녀가 어렸을 때 남의 집 식모살이를 했다고 했다. 그녀를 우악스럽게 만든 운명이 어렸을 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겠다.
공비들이 준동하던 시절의 지서는 요새화 되어 있었다.
정순덕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아버지 정삼수씨와 부인 진도원씨 내외는 법 없이도 살 착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녀의 집이 딸만 세 명을 낳았는데 공교롭게도 정순덕이 입산하고 나서 아들이 한 명 태어났다. 정순덕은 심야에 식구가 다 잠든 집을 몰래 찾아 갔다가 아기를 보고 크게 놀라서 남동생인가하고 고추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아들은 풍랑 거센 집안에서 태어나서 주위의 차별을 이겨내고 잘 자라서 중고 자동차 판매상이 되었다. 김 총장이 산청 군민회에서 정순덕 동생을 만났더니 누나 정순덕이 자기 부모가 사람들에게 외면 받고 힘들어할 때 김 총장 처가댁 어른들이 잘 도와주어서 참 고마웠었다고 전해주더라는 것이었다.
김을로 총장의 부인되시는 분은 정순덕과 국민학교 동창이었다.그분의 말씀에 의하면 정순덕은 달음질을 잘했었고 노래도 잘 불렀었다.
김영국, 박기덕 두 경찰이 2주간이나 잠복하다가 정순덕을 체포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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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덕은 그녀의 일대기에서 수감 후에나 출소 후 어머니만 제외하고 가족들과 담을 쌓고 살았다고 이야기 했지만 형제끼리는 다소의 내왕이 있었던 듯하다. (그녀 때문에 막심한 피해를 입은 그녀 가족들을 의식해서 표면적으로는 숨긴듯하다.)
정순덕은 1985년 출소 후 여러 보호 시설을 전전하거나 공장에서 일하기도 하며 고달픈 인생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2004년 뇌일혈이 도져 저 세상으로 갔다. 그녀를 화장한 유체는 현재 서울시 구기동의 모 사찰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정순덕이 체포 후 다리 절단 수술을 받고 군 보건소에 구금되어 치료를 받고 있을 때 보건소 밖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정순덕을 내놓으라며 마구 성토하는 욕설들을 했었다고 했다.
그들중에 공비들에게 학살당한 유가족들도 많았겠지만 정위주 형제 부부와 해산 중인 아기까지 죽인 정순덕 일당의 천인공노할 범죄에 분노를 품은 시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살인외에도 정순덕 일당은 지리산 지역을 횡행하며 생존을 위해서 수많은 강도와 절도 행각을 저지르고 주민들의 생업에 막심한 피해를 준 이유만으로도 주민들의 큰미움을 받았다.
정순덕이 체포 된 1963년도의 신문 기사를 검색해보니 1963년 8월 남녀 공비팀들이 지리산 노고단을 찾은 40여명의 외국인들에게 나타나 금품을 요구하다가 외국인이 총을 꺼내서 대항하려하자 도피했다는 기사도 있고 지리산에 캠핑 온 전남공고 학생들의 텐트를 털어서 물품을 탈취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산청 경찰서 김영국 경사와 박기수 순경이 M2 카빈으로 퍼부운 실탄 세례를 받고서도 울타리를 기어 넘어가던 이홍희도 죽었다.
그녀의 과거 행적을 알고 다시 한 번 보자. 그녀의 행각을 알게 되면 어떤 시각에서도 정순덕을 잔다르크, 유관순이나 핍박받다가 죽은 엉클 톰으로 절대 미화할 수 없다. 산골에서 태어나 잘 배우지도 못했고 그저 잘못된 인생으로 들어섰지만 자발적인 귀순의 기회가 있었고 당국과 가족의 귀순 호소가 집중적으로 있었음에도 그 잘못된 인생을 13년이나 이어 갔었다.
그녀는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범죄까지 저지르고 주민들과 가족들에게 막심한 피해를 주었으며 대한민국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했었던 인간이다. 정순덕은 한 인간으로 보면 한없이 불쌍한 사람이지만 일부 진보 세력이 잘 알아보지도 않고 그녀의 인생을 판타지화하는 것은 북한의 김일성이 했던 짓과 다를 바가 없었다.
병석의 정순덕
글의 맺음에 한마디 첨부한다. 그녀가 최후의 공비라는 타이틀이 공식처럼 따라다니지만 산청 경찰서의 역사인 ‘지리산의 포성’은 그녀와 이홍희가 최후의 공비가 아니라 정순덕 체포 다음 해인 1964년 6월 산청군 생초면 고읍의 한 수로에서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강우형과 안원도가 최후의 공비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정충제씨가 쓴 실록 정순덕에서 그들이 정순덕이 체포 되기 몇 개월전 1963년 5월 강우형 이모 집에서 얻어온 막걸리 한 단지를 다 마시고 강우형이 안완도를 사살하고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순덕 팀은 지리산을 헤매다가 이들괴 우연히 만나서 같이 생활하기도 해서 두 공비 팀들은 서로를 잘 알았다.
당시 신문을 검색했지만 63년의 정순덕 이야기는 자세히 보도가 되었는데도 63년과 64년 기사를 다 정밀 검색했지만 두 공비들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정순덕의 증언에 더 무게가 있어 이에 밝혀 놓는다
[출처] -3- 최후의 여자공비 정순덕의 살인행각|작성자 울프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