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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7. 묵상글 (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 사랑은 결과적으로 상대적이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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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7.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은 결과적으로 상대적이다.
어제 스테파노 축일에 이어 오늘 사도 요한의 축일도
주님을 바라봄 곧 관상에 관한 말씀을 듣습니다.
어제 스테파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성탄으로 주님께서 나타나심으로 볼 수 있게 되었기에
성탄 축일 다음에 두 성인의 축일을 이어 지내고 있고
주님을 바라봄, 관상과 관련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상은 두 성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결코 시력의 문제가 아니고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신학 공부를 아무리 많이 했어도
관상에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한은 진정 사랑꾼이고 관상가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자신에 대해 아무 주저함 없이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은 사랑하지 않고,
요한만 사랑했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께서 타볼산에 오르실 때나 죽은 소녀를 살리실 때나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실 때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요한만 데리고 가신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사랑을 요한이 사랑했다는 뜻일 것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제자들보다 요한 자기가 더 사랑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적입니다.
적절한 예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어미 새가 먹이를 가지고 올 때 입을 더 크게 벌린 새끼에게 먹이를 주지요.
그래서 새들은 어미가 왔을 때 더 크게 입을 벌리고 더 크게 소리를 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무시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마다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에 투정을 부리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조금만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스펀지 빨아들이듯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사람에 따라 사랑에 달리 대응하기에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 결과적으로 사랑받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다 받아들이기에 결과적으로 흠뻑 사랑받고,
더 받아들이기에 안 받아들인 사람에 비해 더 많이 받은 셈이 되지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모두가 성령 충만하기 전에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는,
요한만 성모님과 여인들과 함께 십자가 밑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더 사랑했다는 표시가 아닐까요?
주님 사랑을 더 사랑했기에 더 주님 사랑을 많이 받은 요한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지금보다는
더 많이 사랑하여 주님을 사랑을 더 많이 받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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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7.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보고 믿었다.”(요한 20,8)
우리는 성탄 8부 안에서, 요한 사도의 축일을 맞았습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 때 그리스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어 식사를 하였고, 성모님과 함께 십자가 아래에 있었고,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그분의 아들이 된 제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구약성경의 ‘새로운 벤야민’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곧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벤야민은 주님의 “사랑은 받는 이”(신명 33,12)였듯이, 열두 제자 가운데 요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요한 13,23;19,26;21,7;21,20)라 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베드로보다 빨리 무덤이 도착하였지만, 먼저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베드로보다 더 젊은 요한이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는 동시에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먼저 도착한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또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깊이 깨닫는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기만 하지만, 요한은 들어가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실, ‘빈 무덤’과 ‘구유’는 예수님께서 몸을 눕혔던 같은 한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작’과 ‘마침’, 곧 오실 때와 가실 때에 머무른 땅의 자리입니다. 그분은 ‘구유’로 우리의 출생을 성화시키시고, ‘빈 무덤’으로 우리의 죽음을 성화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탄생이 당신 어머니의 동정성이라는 봉인을 뜯지 않으셨듯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실 때도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막은 돌을 통과해서 지나가신 것과 같습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주간 첫날 아침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 예수님의 무덤은 봉인된 상태였습니다. 그 때문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마태 28,2)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또한, 아기의 몸을 감싸고 있던 ‘포대기’가 구세주 탄생의 표시가 되듯이,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아마포 수의’와 머리를 쌌던 ‘수건’은 부활의 표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마포’는 놓여있었고, ‘수건’은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이 두 개의 수동태는 하느님의 개입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렇게 잘 단정된 ‘수의’와 ‘수건’은 제자들이 밤중에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한 경비병들의 거짓 증언에 대한 반대 물증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세주의 ‘강생의 표시’와 ‘부활의 표시’를 동시에 봅니다.
이제 우리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무덤’으로 ‘들어가서’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주님이 계신 ‘마구간’으로 ‘들어가서’ 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세를 낮추어 더러운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 ‘들어가’야 합니다. 무덤의 돌문을 열 듯 우리 마음의 빗장을 열고서, 울고 있고 지친 이들이 있는 곳, 춥고 베고픈 이들이 있는 곳, ‘세상 속의 마구간’과 자신의 ‘마음 속 마구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 사도의 축일을 기념하면서, 생명을 가져다 준 ‘구유’의 아기 예수님과 ‘빈 무덤’의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시에 만납니다. 이토록, 우리는 더없는 사랑으로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신 분을 기립니다.
주님!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듯, 목동들이 구유로 달려가듯,
고귀한 경쟁에서 질세라 빨리 달리게 하소서!
무덤을 들여다보지만 말고, 안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비어져 나오게 하소서. 비어진 눈으로 보게 하시고, 본 바를 믿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주님!
제 안에 드소서.
아버지께서 제 안에 마련해 두신 텅 빈 자리에 드소서.
제 안에 숨겨진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오늘, 죽음의 무덤을 비우시고
당신 사랑이 드러나는 생명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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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7.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하는 제자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또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어디선가 그 속내를 드러내게 됩니다. 사랑을 받는 것도 행복이지만 사랑할 수 있다면 더 큰 행복입니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갔습니다.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릅니다”(요한20,2)하고 말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왜 무덤에 갔을까요?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말이죠. 예수님께 대한 깊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보고 싶어서입니다. 이른 새벽 두려움을 마다하고 무덤에 갔는데 무덤이 비어 있었습니다. 너무 놀라 제자들에게 달려왔습니다. 빈 무덤에 관한 얘기를 들은 베드로와 제자는 무덤을 향해 함께 달렸습니다. 듣자마자, 그것도 달려갔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 줍니다.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 있습니다. 역시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아닌 다른 제자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습니다. 젊어서이든 주님을 더 사랑해서 빨리 달렸든 이유는 모르겠으나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덤을 들여다 볼 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들어가서 본 후에야 들어가서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이지만 그를 받아들이고 베드로를 여전히 으뜸제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지만 여전히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이고, 죄를 범했지만 그는 여전히 제자들의 맏형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그것을 알기에 그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는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기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압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해 주신 것(요한13,23; 19,26; 20,2; 21,7.20)처럼 베드로를 사랑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상대방의 어떤 과거를 알게 되면 그것이 우리를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그는 낙인이 찍히고 미래가 없는 것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나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은 없습니다.”주님의 사랑을 받는 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마음! 심판을 이기는 자비에 귀를 기울이며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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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7.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후배 신부님과 포트워스에 다녀왔습니다. 포트워스에는 서울대교구 신부님이 한국순교자 성당에서 사목하고 있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있으면서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신부님은 음식을 잘하였습니다. 청소도 잘 하였습니다. 덕분에 매일 즐거운 식사를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일주일에 두 번 대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5년 있으면서 일본말을 배웠듯이, 미국에서 5년 있으면서 영어도 배우겠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신부님의 성실함이 부러웠습니다. 신부님은 중남부 한인 성당 사제단의 대표를 맡았습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입니다. 번거롭고, 부담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맡았습니다. 신부님의 집무실에는 본당 관할 지도가 있었습니다. 그 지도 위에 교우들이 살고 있는 ‘집’이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부임하면서 교우들의 집을 방문하여 기도해 주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에게서 최선을 다하려는 열정, 십자가를 지려는 헌신, 교우들을 향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제의 모습이고,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사도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매일 저녁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신학교 때 배웠던 ‘원죄론과 구원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원죄론이 보편적이라면 구원론도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구원은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익명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열려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이비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병들게 하기에 멀리해야 하지만 이단과는 공동선을 위해서 함께 대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이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일치를 향한 결정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단과의 대화를 넘어서 이웃 종교와의 대화도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더 나가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모든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교황님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잘 지키고 보존하자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지구의 환경과 생태계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연대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내년에 있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투명한 정치, 깨끗한 정치, 국민을 위한 정치는 깨어있는 국민들의 현명한 선택에 달려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겨울밤이 깊어가도록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전승은 요한 사도께서는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성모님을 모시고 살았으며, 교회의 귀중한 보물인 요한복음, 요한 서간, 요한 묵시록의 저자라고 합니다. 복음에서 요한은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서 늘 가까이 데리고 다녔던 제자 중에 한 분이셨음을 알려줍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말씀이셨고, 말씀은 하느님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분, 말씀이셨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칫 예수님에 대한 기록으로 머물 뻔했던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영적인 세계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심오한 철학적인 주제들을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8장에서 우리는 지혜로운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과 15장에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를 영적인 세계로 인도해주는 안내서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요한 사도의 겸손함을 보았습니다. 그토록 사랑을 받았던 요한 사도는 베드로 사도보다 앞서서 빈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 사도는 그 중요한 일은 베드로 사도에게 양보하였습니다.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많은 일들이라도 생각만 바꾸면 다른 이들이 해도 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자리를 차지하는 것 때문에 실수하고 잘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자리를 포기하고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더 큰 실수와 잘못을 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준 요한사도의 겸손함을 배운다면 우리는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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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7.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오셨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라고 하면 좀 뭉쳐서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저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러분 각자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지금은 성탄 시기인데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의 내용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사도들이 예수님이 죽고 난 이후에 보고 믿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살아 계실 때 사도들은 조금 더 단단한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믿음이 없었던 사도들이 도망치고 숨어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봤다는 내용을 우리는 성경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교하다가 순교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어제 축일을 지낸 스테파노 성인도 그랬지요. 그럼, 사도들이 바보인가요? 무슨 이유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보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미사 중 우리는 제대 앞에 아기 예수님을 봅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있습니다. 십자가에 걸려있는 주님 봅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가장 비천하게 태어나서 가장 비참하게 돌아가신 분이 바로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꼴을 보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은 그분처럼 살게 해 달라는 기원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바람입니다.
보고 믿음을 갖게 된 사도들이 목숨을 다해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도 보았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보았고 우리는 그분의 파견을 기뻐한다고 서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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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 만들기
얼마 전 한 교우분께서 만두 몇 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사용하지 않은 만두피 몇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곳에 넣어놓고 깜빡하신 모양입니다.
다시 돌려드리기도 뭐해서
이 만두피를 어떻게 할지 고민했습니다.
기름에 튀겨서 라면수프 뿌려 먹을까?
아니면 손바닥 피자를 만들어 볼까?
손바닥 피자로 정했습니다.
만두피에 케첩을 바르고
작게 자른 채소와
올망졸망 햄을 올리고
그 위에 피자치즈 팍팍
크기는 작지만, 맛은 여느 피자와 같은….
손바닥 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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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7.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부자가 지혜롭다며 많은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현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고민을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돈을 안 쓰면 자린고비라고 흉보고, 돈을 좀 쓰면 잘난척한다고 흉을 봅니다. 도대체 어떻게 돈 관리를 해야 할까요?”
현자는 한동안 침묵 속에 있다가 주먹 쥔 손을 보여주며 말합니다.
“제가 만약 주먹을 쥐고 펴지 못하면 이 손은 어찌 될까요?”
그리고 이번에는 손을 쫙 편 뒤에 부자 앞에 내밀면서 또 물었습니다.
“이렇게 편 손을 주먹 쥐지 못한다면 이 손은 뭐가 되는 거요?”
“돈을 쓴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꼭 써야 할 때 손바닥을 쫙 펴서 흔쾌하게 쓰고, 돈을 아껴야 할 때는 주먹을 꽉 쥐어 철저하게 아껴야 불구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분별력이 있어야 사람들도 함부로 입을 가볍게 놀리지 않을 것이고, 더러 입을 놀리는 사람이 있어도 자기 주관만 뚜렷하면 전혀 신경 쓸 것이 없습니다.”
주먹을 쥐고만 있어도 또 손을 펴고만 있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삶도 아껴야 할 것은 아끼고 나눠야 할 때는 나눌 수 있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돈만이 아닙니다. 나의 마음도 그렇고, 나의 능력과 재능도 그렇고, 그 밖의 여러 부분에 있어서 이런 분별력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주먹 쥔 삶만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나누지 않고 혼자만 간직하는 마음은 큰 잘못입니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되는 요한 사도 축일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주요 사건에 늘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성모님을 맡길 정도로 믿고 사랑했던 제자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가 이렇게 예수님께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멈출 때와 앞으로 가야 할 때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늘 살피셨고, 또 곧바로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무덤이 비었다는 말을 듣고서 베드로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아무래도 더 젊은 요한이 더 일찍 도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덤 안으로 먼저 들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또 자신도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무덤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몫을 베드로에게 넘깁니다. 주님께 수위권을 받은 베드로를 배려한 것입니다.
이렇게 멈출 때와 앞으로 갈 때를 분별력있게 구별하셨던 요한 사도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그 분별력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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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포기하면 그 순간 경기는 끝나는 겁니다(이노우에 타케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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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7.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을 사랑하는 참맛
-우리 모두가 주님의 애제자(愛弟子)이다-
“수사님, 여기 수도원에서 평생 무슨 맛으로 살아갑니까?”
간혹 들었던 질문입니다. 아마도 죽는 그날까지 여기 수도원에서 정주하다 때가 되면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歸家)할 것입니다. 살아온 날보다 점차 짧아지는 살 날입니다. 누가 다시 이렇게 묻는다면 저는 지체없이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참맛에 삽니다!”
이번 성탄을 지내면서 저를 사로잡은 고백은 둘입니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싶은 희망 때문에 오래 살고 싶다.”
“마지막 임종시 단 하나의 아쉬움이 있다면 더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음일 것 같다는 예감이다.”
하루하루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을 살고 싶음은 참으로 믿는 이들의 궁극의 갈망일 것입니다. 이미 예전에 써놓고 애송했던 자작시 두편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 집니다. 바로 주님과 사랑의 일치에 대한 갈망을 노래한 시입니다. 무려 26년전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을 바라보며 주님과 저의 사랑의 일치를 소망하며 고백한 “하늘과 산”이란 시입니다.
“하늘있어 산이 좋고
산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상호보완의 사랑의 일치 관계를 노래한 시입니다. 아마 불암산 기슭 요셉수도원에 35년동안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바라본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본 하늘과 산이요 그때마다 자주 외웠던 자작 애송시입니다.
“밖으로는 山,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정주의 山
안으로는 江,
천년만년 임향해 맑게 흐르는 강
山속의 江”-1998.1.27.
일편단심 산처럼, 강처럼, 산속의 강처럼, 주님 향한 사랑을 고백한 “산과 강”이라는 참 짧은 자작 애송시이자 베네딕도회 수도영성을 상징하는 시이기도 합니다. 두편 모두가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일치를 소망하며 읽는 시입니다.
이런 사랑의 대가(大家)이자 사랑의 달인(達人)들이 우리 가톨릭교회의 성인들입니다. 주님께 대한 열렬하고 한결같은 사랑이야말로 성덕(聖德)의 잣대가 됩니다. 엊그제 주님 성탄 대축일 바로 다음날 어제는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의 천상탄일이었고, 오늘은 사랑의 사도, 주님의 애제자라 일컫는 성 요한 사도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애제자라 지칭하는 요한은 우리 모두의 소망을 반영하는 사도이기에 우리 역시 하나하나 모두가 주님의 애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애제자 답게 살아갑시다.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후 열두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요한은 6년경 태어나 100년경 선종했다하니 무려 94년동안 장수를 누렸던, 사도들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은 성인입니다.
요한의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시다” 이름 뜻대로 참으로 주님과 날로 깊은 사랑을 나누며 은혜로운 삶을 살았던 사도입니다. 예수님곁에서 늘 성모님과 함께 했던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께서 두분께 하신 말씀도 기억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딸)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애제자인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때부터 그 애제자가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 합니다. 주님의 애제자인 우리 역시 주님의 당부에 평생 성모님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자주 “어머니 은혜” 노래를 “성모님 은혜”로 바꿔 부르곤 합니다. 한번 불러보셔요, 자꾸 부르고 싶을만큼 좋습니다.
“높고높은 하늘이라,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높은게 또 하나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성모님 은혜, 푸른하늘 저보다도 높은 것 같애.
넓고넓은 바다라고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넓은게 또 하나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성모님 은혜, 푸른바다 저보다도 넓은 것 같애.”
요한복음, 요한 서신, 요한 계시록을 쓰며 96세까지 장수했던 사도 요한은 너무 노쇠하여 제대로 설교를 할 수 없어 항상 신도들의 부축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한이 매일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십시오.”반복하는 것에 대해 신도들이 불평을 하자 요한은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이것만 지키면 됩니다. 사랑은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 대답하였다 합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사랑의 사도”불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습니다. 살아갈수록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면 오래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살아있는 동안 주님을, 이웃을 더욱 사랑하라 주어지는 하루하루의 날들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인데 미워하고 차별하고 화내고 큰 소리치고 싸우면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함은 너무 어리석고 억울하고 허망한 일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애제자 사도 요한의 뛰어난 사랑의 열정은 수제자 베드로를 능가합니다. 빈무덤을 향해 달릴 때도 베드로보다 앞섰고, 무덤에 도착해서도 겸손한 사랑의 사도 요한은 수제자 베드로 다음에 무덤에 들어섭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고, 이런 장면을 일별하는 순간, 애제자는 전광석화 “보고 믿었다.”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순간 체험한 것입니다.
구유와 십자가, 그리고 이어지는 빈무덤, 잘 개켜져 있는 수건과 아마포, 퍼즐이 순간 완성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직감했음이 분명합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뵙고 나올 때 너무 눈부신 얼굴빛에 너울을 썻듯이 평생 인성(人性)의 너울을 쓰고 지냈을 주님은 이제 너울(수건)을 벗으시고 신성(神性) 그대로 아버지를 뵙게 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에?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로 부활한 것입니다. 그러니 공동체를 이루는 형제들 하나하나의 얼굴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됩니다. 얼마나 심오하고 은혜로운 진리인지요!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 사랑은 구체적입니다. 요한 사도가 구체적 주님 체험을 면면히 계승하고 있는 사도적 교회요, 우리는 평생 미사전례를 통해 사도 요한의 주님 체험에 참여합니다. 오늘 요한1서 말씀은 그대로 사도 요한의 강론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생생한 체험의 내용들입니다. 아마도 96세 노령에도 생생했을 다음 고백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심금을 울리는 강론입니다. 영지주의 이원론자들의 이단들을 침묵케 한 참 장쾌하고 통쾌한 강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가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생명을 증언하고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이를 선포하는 것은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그 아드님이신 예수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과 나누는 친교의 사랑이, 충만한 기쁨이 우리를 더욱 주님의 애제자로 만들고, 주님을 사랑하는 참맛으로, 참기쁨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시편97,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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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7.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는 사랑 받는 사랑>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요한 20,2)
주는 사랑도
사랑이요
받는 사랑도
사랑이지요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이
갈림 없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사랑이지요
주는 사랑이
있으면
받는 사랑은
있을 수 있지요
주는 사랑이
없으면
받는 사랑도
있을 수 없지요
받는 사랑이
있으면
주는 사랑은
있을 수 있지요
받는 사랑이
없으면
주는 사랑도
있을 수 없지요
주는 사랑도
사랑이요
받는 사랑도
사랑이지요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이
갈림 없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사랑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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