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신부님은 결혼했어도 잘 살았을 것 같아요.”
어느 자매님의 말씀에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행복해 보이고, 실제로 잘 살고 계시잖아요. 사람 사는 것이 모두 똑같거든요. 신부님이 지금 잘 살고 있으니까, 결혼했어도 잘 살았을 거예요.”라고 답해주십니다. ‘정말로 그럴까?’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럴 수 있겠다’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선택 자체가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문제는 최선을 다하지도 않으면서 선택 탓만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남의 선택만을 부러워하면서 자기 불행의 이유만을 찾고 있다는 점도 있습니다.
선택 자체를 바라보지 말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언제든 최선을 다할 것이기에 늘 행복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산다면 어떨까요? 자기 선택에 커다란 만족을 갖게 될 것이며, 동시에 행복한 지금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잘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사는 데 최선을 다해야 잘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루카 13,23). 당시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오직 경건한 사람들만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라고 답변하시지요. 누가 구원받을 것인지를 또 몇 명이 구원받는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너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님을 상징하는 ‘좁은 문’임을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치열한 노력과 결단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힘써라.”라고 하십니다. 구원에 대한 안일한 태도를 버리라는 요구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불의를 일삼는’ 삶을 버리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당연히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의 뜻을 열심히 잘 따르면서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도 잘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일한 마음으로 지금 삶 자체가 엉망이라면, 하느님 나라에서도 엉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의 명언: 무엇이든 그 값어치는 우리가 그것을 위해 내놓으려고 하는 인생의 분량과 같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첫댓글 빠다킹(조명연 마태오)신부님 강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