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한자리에 지긋이 있기도 힘겨운 이세상에 노래인생 40년이 어디쉬운 일이랴
불꽃같은 청춘이 한창반란을 일으켰을 18세 나이에 통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때
"한오백년"같은 한의 음조 "한강"같은 서사시적 가요 "태양의 눈"같은 팝페라 풍의 웅장한 발라드가
그의 작은 가슴과 입술에서 터져나올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에게 40년은 장르의 진화였고 음조의 심화였으며 가락의 변화였고 정서와 가사의 조화였다
마음 밑바닥에 고이는 악상이 절로 움터 오르는 시간이 석양 어스름이라는 그의 말처럼
조용필은 이제 인생의 석양에 고즈넉이 서서 가장절제된 음성의 철학으로 40년 음악편력을 들려줬다
그가 일군 노래세계의 진정성은 팬들과의 직접대면에서 나온다
그는 전파로 매개된 팬과의 만남을 거부했다
지난5월 잠실 주경기장을 시작으로 대장정에 오른뒤 태평양을 넘어 미국LA와 뉴욕으로 내달렸고
다시 귀환해 전국도시를 일일이 돌아 이제 마지막 항구에 도착했다
6일 어둠이 내린 항도 부산의 벡스코는 남녀노소로 금새 가득찼다
찬 바닷바람도 열기를 어찌하지 못했다
그가 "꿈"으로 공연의 막을 올렸을때 사람들의 표정엔 힘들었던 과거가 스쳤고
"비련"을 불렀을때 가슴속에 내밀하게 치닫는 못다한 청춘을 서러워했다
왜 그의 노래는 묻어둔 추억을 꿈틀거리게 하는가
어렵게 제압한 아픔이 반란하도록 부추키는가
왜 오랫동안 정비한 저항의 전열을 간단하게 무너뜨리고야 마는가
그리하여 왜 그의 노래에 몸과 마음의 계엄령이 해제되는가
그해제는 왜 자기동화의 눈물로 변화고야마는가
그가 외치면 관객은 안으로 젖어들어가고 그의 소리가 잦아들면 관객들은 터진다
남자는 여자가되고 노인은 청년이 되어 "그겨울의 찻집"으로 기어이 달려가고야마는 이동감의 자력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는 겨울의 가수다
그러나 그의 겨울은 쓸쓸한 기억때문에 견딜만하다
그의 노래엔 항상 바람이 일고 구름이 흐른다
그러나 흔들림과 흐름의 자유는 정박과 구체성의 외로움 때문이라고 일러준다
정작 그는 외롭다
시인 황동규가 그랬던가
외로움과 홀로있음이 겹쳐 빚는 황홀한 "홀로움"의 가수
40년의 노래 마디마디엔 정박하지 않는 홀로움이 반짝였다
공연의 표제인 "킬리만 자로의 표범"이 그랬다
육십줄에 다가선 적지않은 나이로 불러제친 열창에 넋이나간 관객들을 그는 다시 중얼거리듯 흐느끼듯
그들이 걸어온길로 불러세웠다
빛나는 불꽃이고 싶었던 사랑도 이상도 모든것을 요구하는 것임을 그러나 모든것을 건다는것은
외로운 거라고 항도의 공연을 마감했을때 관객들과 가수의 심장박동은 일치했다
그찰나의 전율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짧은 숨결의 합일은 얼마나 우리를 숨죽이게 하는가
평균적 삶의 스텝과 박동을 그렇게 담아내려고 가수 조용필은 1968년봄 "돌아오지않는 강"을 시작으로
40년후 "도시의 오페라"로 숨차게 진화했음을 그진화의 궤적에 한국인들의 애환이 실리고
가락의 지평이 역사와 맞닿아 있음을 관객들은 어렴풋이 나마 느꼈을 것이다
2011년 07월 6일 여름의 부산항은 이진화 과정에 맺힌 구구절절한 스토리를 알것도 같다는 듯이 밤고동을 울려댔다
관객들은 스스로 진동하는 동화의 전율을 잡아 가두려는듯
옷깃을 꼭꼭 여민채 천천히 박길을 돌렸다
첫댓글 이글은 08년 12월 조용필 공연을 끝내고 부산동창회에 올린글 입니다
8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지난해 가을 잠실보조구장에서의 공연후기를 올리겠습니다
어떤 유명한 음악평론가가 쓴 글인 줄 알았네요. 절제되고 전문적이고 글 잘 쓰십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울 회장님이시네여. 평생을 쓰고 더듬고 하다보니 생각이 그냥 글로 이어지는듯 .그래두 저글을쓸 시절에는 생각이 발갔는데 .지네들은 소등떼기고기 머그면서 내보고는 돼지국밥 머그라 하고 .틈만나면 야양촌놈 해싸코 .어릴때 우리집 소세끼 만나씁니다 황소를 한마리 끌구가서 들이 바더 삐릴까 생각중입니다
32기 사설논설위원으로 활동하심이 마땅한줄 아뢰오
잘 읽어 보았구요. 역시 우리 32기 동기님들은 대단혀~ 시인, 소설가, 수필가, 논설위원 등 등... 없는게 음싸 ㅎㅎㅎ
다들 감사합니다 하찮은 글몇쭐 다음언제 부터는 사모님들 앞세우고 조용필 공연 함가보셨으면 합니다
사설논설 위원은 하시라도 할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