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에게 보내는 편지(123)
서산을 넘으면서 언덕배기 산등성이를 환히 비추이는 저녁햇살을 바라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혹시라도 저녁햇살이 넌지시 속삭이는 소리를 들어보셨는지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라며 자신의 몸을 풀어 하늘 가득히 노을 빛으로 물들인 저녁햇살의 속삭임 말이예요. 더도 덜도 말고 저녁햇살 닮기를 바래 봅니다. 어둠을 떨쳐내고 우뚝 솟아오르는 아침햇살과 조용히 자기의 하루를 정리하며 물러나는 저녁햇살 중 선생님들은 어느 쪽을 더 좋아하십니까?
아침햇살이 찬란함과 하루의 활기찬 시작을 의미한다면, 하루의 수고로움을 살며시 쓰다듬어 주는 저녁햇살에는 어머니의 포근함과 따사로움이 담겨있습니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구할 때 다른 것 보다 부엌에서 보이는 황혼의 아름다움 때문에 선택했습니다. 1-2년 사이 아파트들이 들어서는 바람에 이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지만, 한때는 부엌에서 밥을 짓고 설거지하는 일보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저의 인생의 황혼도 아름답게 장식하게 될 것을 꿈꾸며 또한 어머니를 그리워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커튼을 열면서 기대하는 것은 어느 날은 여명이 주는 은은함이고, 또 어느 날은 낮은 소리로 내려주는 빗줄기이고, 황혼이 아름다운 요즘은 꽃잎처럼 날리는 함박눈을 기대합니다.
김장 담글 때 어릴 적 뒤뜰에 묻어두고 겨우 내내 김치 먹던 기억이 그립습니다. 살짝 얼은 동치미 국물은 얼마나 맛있는지. 겨울밤엔 꼭 누군가가 올 것 같은 기다림이 있습니다. 아마도 깊은 어둠이 빛을 잉태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항상 기다리면서 살아가나 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세뱃돈과 설빔을 입기 위해서, 햇곡식을 만든 송편 한 조각을 먹고 싶어서 그렇게도 설과 추석을 기다렸습니다. 학생들은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기다리면서 삽니다. 군대간 사람들은 제대할 날을 기다리면서 달력에서 하루 하루를 지워 나갑니다. 이산가족들은 당연히 통일을 기다립니다. 또, 세상 사람들은 로또복권이나 주식을 사놓고 애간장을 태우면서 대박을 꿈꿉니다. 인생은 어찌 보면 기다림의 연속 같습니다. 기다림이 없으면 인생도 즐겁지 못할 것이며, 기다림이 없다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대강절 첫 주일을 보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12월을 맞았습니다. 이 겨울이 너무나도 길고 추운 사람들, 삶이 너무나도 힘이 들고 상처받아 실의에 빠진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따스한 봄을 몰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기에 오늘이 이렇게도 행복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반 이상의 삶입니다. 즉 인생 중에 반 이상의 삶을 사는 곳이 교회이고, 반 이상의 영향을 받는 곳이 교회이고, 반 이상의 마음을 두는 곳이 교회이고, 반 이상의 기쁨을 찾는 곳이 교회이며, 반 이상의 사람을 아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만큼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아주 큰 곳이고, 실생활은 그보다 훨씬 많은 영향을 받고 살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렵고 힘들 때면 은혜는 고사하고 모든 생활이 팍팍하고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우리 생활의 일부인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는지 정말 아끼고 사랑했었는지 교회를 위한 간절한 마음이 있었는지 뒤돌아보면 부끄러운 마음만 남게 됩니다. 반 이상의 삶이 담겨져 있는 곳. 교회가 남의 교회가 아닌 나의 교회 우리 교회. 그 마음을 간절히 품는 사람이길 바랍니다.
금년도 이제 한달도 체 남지 않았습니다. 관계 속에 겪어야 했던 아픔도, 하나님 앞에 겪어야 했던 결정들도, 하루하루가 다르다는 어른들의 말처럼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아 속상해야만 했던 제 몸도 버거웠던 한해였던 것 같습니다만, 돌아보면 이 시간들을 통해 홀로 서서 겪으며 누렸던 아버지 하나님의 깊이와 체온이, 복음송가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실수하지 않음에 관한 체득이, 내일의 저를 만들어 가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닮아가고 성장시켜 나가는 듯 해서 감사하며 한해를 마무리하려고 노력하며, 또 한해가 가 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 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알고보면 저에게 짐을 얹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자신인걸 깨닫게 됩니다. 이제 달력 한 장 넘기듯 마음만 한 장 넘기면 모든 것이 깨끗해 질 것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금년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남은 시간이라도 남을 배려하며 겨울의 집을 짓고 싶습니다.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간디가 올라탔습니다. 그 순간 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플랫홈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습니다. 함께 동행하던 사람들은 간디의 그런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유를 묻는 한 승객의 질문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 짝마저 갖게되지 않았습니까?" 이웃사랑은 지어먹은 마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패턴입니다.
전봇대 위에서 까치가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까치가 집을 짓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나뭇가지를 물어다 얼기설기 깔아놓은 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닐텐데 그 위에 진흙을 깝니다. 그런데 더 희한한 것은 소등에 있는 털을 뽑아다가 알 낳는 보금자리에다 털을 깐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소는 뽑아가거나 말거나 가만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요샌 털이 빠지는 때라 털이 빠지기 쉽고 아프거나 귀챦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자연은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마침 털갈이 철, 곧 새로운 털이 날 것이니 묵은 털쯤이야 얼마든지 까치에게 가져가라 하는 소의 마음이 따뜻하고도 우직하게 여겨집니다.
까치집과 간디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면서도 끝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인간의 욕심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굶어죽건 말건 다른 한 편에서는 토하도록 먹고 썩도록 쌓아놓고 사는 것이 인간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육체를 따라 심으면 썩어질 것을 거두고, 영을 좇아 심으면 거룩을 거두게 될터인데 말입니다. 깨진 컵에 물을 채울 수 있는 높이는 컵의 높이가 아니라 깨진 부분까지입니다. 아무리 물을 부어도 깨진 높이 이상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큰그릇이라 할지라도 어느 한 구석이 깨져 있으면 그것이 그의 한계가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높이 자라 성공한다 할지라도 어느 한 구석 우리의 인격이나 신앙이 깨져 있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의 한계가 되는 것이지요. 남이 알지 못하는 내 마음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혹 깨진 부분은 없는지, 있다면 깨진 곳부터 메우고 시작하는 성실함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겨울은 학생들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기 좋은 계절입니다. 그 기억은 선생님을 잊지 않게 할 것이며, 그들이 어른되는 성장 비타민이 될 것입니다. 이럴 때 전화 한통 넣으셔서 격려해주거나 문자를 남기시면 뜨끈한 호빵보다도 따뜻한 선생님의 사랑이 전달되리라 확신합니다. 오늘처럼 추운 날, 어머닌 김장을 하셨지요. 어렸을 적 어머니 옆에 서 있으면 어머닌 배추 뿌리 하나를 깎아서 단가 매운가 먼저 잡숴보고 추운데 방에 들어가라며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오늘은 별안간 그 배추 뿌리가 먹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