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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여러분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입니다.—야고보 4:14. 성경에는 부활되어 다시 땅에서 살게 된 여덟 사람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각각의 기록을 주의 깊이 연구해 보십시오. 연구를 하면서, 그 기록에서 배울 점을 찾아 보십시오. 또한 각 기록이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려는 열망과 능력이 있으시다는 점을 어떻게 보여 주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부활인 예수의 부활에 대해 묵상해 보십시오. 수백 명이 부활되신 예수를 목격했다는 점과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믿음의 확고한 기초가 된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고린도 전서 15:3-6, 20-22) 우리는 부활을 약속하신 여호와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약속을 지키려는 열망과 능력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소중한 희망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계속 강화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 희망을 주신 하느님과 더욱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요한 11:23. 「파23.04」 8면 2항; 12면 17항; 13면 20항 |
하지만 여러분은 자기 생명이 내일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입니다. Whereas ye know not what shall be on the morrow. For what is your life? It is even a vapour, that appeareth for a little time, and then vanisheth away. —야고보 4:14. Barnes' Notes on the Bible Whereas, ye know not what shall be on the morrow - They formed their plans as if they knew; the apostle says it could not be known. They had no means of ascertaining what would occur; whether they would live or die; whether they would be prospered, or would be overwhelmed with adversity. Of the truth of the remark made by the apostle here, no one can doubt; but it is amazing how men act as if it were false. We have no power of penetrating the future so as to be able to determine what will occur in a single day or a single hour, and yet we are almost habitually forming our plans as if we saw with certainty all that is to happen. The classic writings abound with beautiful expressions respecting the uncertainty of the future, and the folly of forming our plans as if it were known to us. Many of those passages, some of them almost precisely in the words of James, may be seen in Grotius and Pricaeus, in loc. Such passages occur in Anacreon, Euripides, Menander, Seneca, Horace, and others, suggesting an obvious but much-neglected thought, that the future is to is all unknown. Man cannot penetrate it; and his plans of life should be formed in view of the possibility that his life may be cut off and all his plans fail, and consequently in constant preparation for a higher world. For what is your life? - All your plans must depend of course on the continuance of your life; but what a frail and uncertain thing is that! How transitory and evanescent as a basis on which to build any plans for the future! Who can calculate on the permanence of a vapor? Who can build any solid hopes on a mist? It is even a vapour - Margin, "For it is." The margin is the more correct rendering. The previous question had turned the attention to life as something peculiarly frail, and as of such a nature that no calculation could be based on its permanence. This expression gives a reason for that, to wit, that it is a mere vapor. The word "vapor" (ἀτμὶς atmis,) means a mist, an exhalation, a smoke; such a vapor as we see ascending from a stream, or as lies on the mountain side on the morning, or as floats for a little time in the air, but which is dissipated by the rising sun, leaving not a trace behind. The comparison of life with a vapor is common, and is as beautiful as it is just. Job says, O remember that my life is Wind; Mine eyes shall no more see good. 반스의 성경 주석 반면에 너희는 내일에 무엇이 될지 알지 못하나니 - 그들은 마치 아는 것처럼 계획을 세웠지만 사도는 그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들이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 번영할 것인지 역경에 압도당할 것인지 알 수 있는 수단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사도가 한 말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할 수 없지만, 사람들이 마치 그것이 거짓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놀랍습니다. 우리는 하루 또는 한 시간 안에 일어날 일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일어날 모든 일을 확실하게 본 것처럼 거의 습관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고전에는 미래의 불확실성과 우리가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계획을 세우는 어리석음에 대한 아름다운 표현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구절 중 상당수는 야고보서의 말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는 구절로, 그로티우스와 프라이세우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나크레온, 에우리피데스, 메난데르, 세네카, 호레이스 등에서도 이러한 구절이 등장하며, 미래는 모두 알 수 없다는 명백하지만 많이 무시되는 생각을 암시합니다. 인간은 그것을 관통할 수 없으며, 자신의 삶이 단절되고 모든 계획이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더 높은 세계를 위해 끊임없이 준비하면서 인생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당신의 인생은 무엇입니까? - 당신의 모든 계획은 당연히 당신의 삶의 지속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연약하고 불확실한 것입니까! 얼마나 덧없고 덧없는 기초가 되는가! 반면에 너희는 내일에 무엇이 될지 알지 못하나니 - 그들은 마치 아는 것처럼 계획을 세웠지만 사도는 그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들이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 여부를 확인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연약하고 불확실한 일입니까!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근거로서 얼마나 덧없고 사라지는 것입니까! 누가 수증기의 영속성을 계산할 수 있을까요? 안개 위에 누가 확고한 희망을 세울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말하자면 수증기입니다 - 여백, “그것은 그렇기 때문입니다.” 여백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앞의 질문은 생명에 대한 관심을 유난히 연약한 것으로, 그 영속성을 계산할 수 없는 본질로 돌려놓았습니다. 이 표현은 그 이유, 즉 그것이 단순한 수증기라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증기'(ἀτμὶς atmis,)라는 단어는 안개, 날숨, 연기를 의미하는데, 우리가 개울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거나 아침에 산허리에 누워 있거나 공기 중에 잠시 떠 있다가 떠오르는 태양에 의해 소멸되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그런 증기를 의미합니다. 인생을 수증기에 비유하는 것은 흔한 일이며, 그만큼 아름답기도 합니다. 욥은 말합니다, 내 인생은 바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내 눈이 더 이상 선한 것을 보지 못하리이다. |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어떻게 가능한가? 존재는 존재를 유지하려고 하며 더 세밀해지고 구체화 되려는 속성에 의해서 작용한다. 이 작용에 의해서 나타난 결과가 자연 현상이다. 현상은 직접 이루어진 양상과 이미 이루어진 현상들이 서로 작용하여 이루어지는 간접 양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직접 양상이란 존재 속성 그 자체가 지닌 성질들의 직접적인 작용이며 운동과 정지가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운동에 의하여 기본 입자들은 이합집산과 결합과 분리를 통하여 새로운 물질들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간접현상인 것이다. 즉 직접 현상으로 이루어진 물질들은 각각 고유한 성질을 가지게 되고 그 성질들에 의해서 다시 새로운 물질, 즉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간접 현상들은 무한히 이어지는데, 모든 현상들은 각각의 고유한 성질들을 지닌 채 다시 상호 작용한다. 인간의 경우 인간의 작용에 의해서 인간의 상호 관계로 이루어진 사회가 이루어지고 인간의 지능이 작용한 결과 자동차, 컴퓨터, 인공 지능이 등장하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근원적 존재의 속성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창조'라는 간단한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창조라는 것이 내용 면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 창조의 메카니즘은 오히려 진화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일 것이다. 수명이 매우 긴 생명체(https://blog.naver.com/pokertopia/221059820326 참조)는 자체 속성에 의해서 발생할 수도 있고 간접적으로 사물의 고유 성질이 작용한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이 두 현상은 말하자면 모두 하느님의 창조에 의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음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따라서 이러한 장수의 생명체들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 지성과 같은 지성의 설계물이 아니라, 존재 속성에 의한 결과물들이다. 존재하는 것들이 더욱 정교해지고 세분화되는 것은 그 자체의 필요성 때문이고 그 필요성이 존재의 속성, 곧 자연의 질서에 적합할 때, 선택을 받아 더욱 정교해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바탕에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작용됨은 이전 글에서 잠시 언급했다. 각 사물들이 자체의 성질에 의해 작용하면서도 존재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자체가 지니고 있지 않은 어떤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이 필요성이 실제로 구현되기 까지는 많은 에너지의 조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전망은 이미 영원히 살고 있는 생명체들에 의해 확정적으로 추론된다. 하느님, 즉 '존재'는 인간과 같은 지성에 의해서 무언가를 보고 사물을 가공하는 것이 아니지만, 인간은 기존하는 사물의 원리를 터득하여 그와 비슷한 또는 더욱 뛰어난 사물을 만들 수 있는 작용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기존하는 모든 것들을 가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작용력이 실제로 구현되어 새로운 현상을 나타내게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소모된다. 시간은 곧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용력은 반드시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자연의 질서에 적합할 때, 자연으로부터 선택받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 즉 하느님의 창조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존재의 작용력은 모든 사물의 작용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그 필요성을 계속 제기해야 하며 인간의 생명을 지속시키는 것이 기존하는 자연의 질서에 적합할 때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영원히 살게 됨으로써 일어나는 부작용이 자연의 질서에 적합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면 자연은 그것을 거절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 따르는 윤리와 도덕이 먼저 확고히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이미 세포의 노화를 일으키는 원인을 발견하는 초기 단계에 이르렀다. 이 단계에서 인간이 영원히 살더라도 기존하는 자연의 질서에 충돌하지 않고 유익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 선행적으로, 거기에 따르는 도덕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연은 그것을 거부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과학적 탐구와 그에 앞서는 윤리와 도덕에 따른 삶이 요구되며 부단한 과학 탐구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영원한 생명의 필요성을 계속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될 때 모든 자연물들은 자기가 유익을 얻을 수 있는지 검토하게 되는 데 시간이 필요하고 자기에게도 유리하다고 판단될 때 자기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자연물들은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협조하여 인간이 영원히 살려는 욕망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이 진행하는 방향이며 존재의 작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영원히 살려면 먼저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망을 계속 제기해야 하고, 그에 따르는 윤리와 도덕을 확립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유익한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살아가야 하며, 끊임 없는 과학적 탐구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는 시점에 이르러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이라는 초인격이 정해진 시간에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수로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물들의 성질과 필요성이 결합하여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존재의 작용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하느님의 창조와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질문:
1. 영원한 생명은 초월자가 인간에게 지급하는 보수인가?
2.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어떤 방식으로 올 수 있는가?
첫댓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횡설수설한 면이 있습니다. 생각을 가다듬어 좀 더 나은 논리로 접근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