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12월 21일(목)
* 시작 기도
주님...
어제의 한 날은 저물고 또 새날이 밝았습니다.
나사로의 동생 마르다가 마치 믿음이 있는 것처럼 고백을 하지만 그것은 주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지식의 고백이었을 뿐입니다.
(요 11:23-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는 지금 곧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으나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 때에 살아날 것을 고백합니다.
그것 역시 귀한 고백인 것은 사실이나, 지금 주님이 주시는 다시 살아남의 은혜를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현재로 누리는 영생을 전혀 알지 못하고 죽어서 가는 천국쯤으로 알았던 자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나의 무지와 불의함이 내 안에 여실히 증거되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어 복음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이 하루도 그 생명으로 살게 하옵소서.
반 푼어치도 안 되는 나의 지식이나 생각은 접어두고 주님의 뜻과 복음 안에서 살아내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을 두사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여 주시고 말씀의 빛을 비추어 주소서.
나는 연약하여 잘 넘어지는 자이기에 출입을 할 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나를 드러내는 자기주장의지는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어 이 하루를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잠 28:1-14
제목 :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2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
3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
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5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6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7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
8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늘이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9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10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받느니라.
11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
12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
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14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
* 나의 묵상
(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며 긍휼히 여기신다.
그러나 마음이 살찌고 완악한 자는 주께서 버려두신다.
(마 13:14-15)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여기서 언급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에도 회개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일컫는다.
그들은 얼마나 완악한가?
심지어 혹시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자기도 모르게 돌이켜서 고침을 받을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있을 정도다.
완악함이란 원어적 의미로 ‘살찌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심령이 살찌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지 못하고 둔하여져서 죄짓는 것을 심상히 여기고 숨기려는 것이다.
사무엘상 4장에서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한다.
그 때 이스라엘의 군사 중 죽임 당한 자가 4,000명 정도이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자기들이 패한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가만 보니까 전쟁을 하는데 그들 가운데 언약궤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실로 성소에 있는 언약궤를 가져오도록 하였고, 그 언약궤를 엘리의 두 아들인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블레셋과의 두 번째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아무리 못해도 그 때만큼은 승리할 줄로 확신하였따.
하지만 그들은 완전히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무려 죽은 자가 3만 명이나 되었다.
심지어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기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언약궤와 함께 있던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고 말았다.
하나님이 항상 임재하시는 언약궤가 있는데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왜 참패하고 말았을까?
그것에 대한 답이 시편 78편에 나온다.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를 거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가장 패역한 삶을 살았다.
심지어 레위인과 제사장들까지 타락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고, 우상을 섬기는 산당을 지어놓고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신 것이다.
이런 패역의 중심에 바로 엘리의 두 아들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었다.
그들은 심지어 성소 안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실로의 성소를 떠나고 만 것이다.
(시 78:59-60)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하나님께서 실로의 성막을 떠나셨다는 것은 또한 언약궤도 떠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실로에서 가져온 언약궤는 하나님이 없는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사실 1차 전쟁에서 패했을 때 그들은 언약궤를 가져오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엎드렸어야 했다.
지금까지 지었던 조상들의 죄와 또한 당대에 지은 자신들의 죄, 그리고 무엇보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지은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복하고 회개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회개할 줄 모르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언약궤만 가지고 있으면 이길 것이라는 지극히 율법적이고 구조적인 틀에 매여 있던 자들이었다.
하나님은 이처럼 마음에 살이 쪄서 회개할 줄 모르는 완악한 자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사무엘상 15장에 나오는 사울은 마음에 살이 쪄서 회개할 줄 모르는 완악한 자이다.
하나님의 명을 받고 사무엘은 사울에게 지시한다.
(삼상 15: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다.
아말렉의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왔고, 양과 소의 기름지고 좋은 것은 진멸하지 않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만 죽인 것이다.
그는 전쟁을 마치고 돌아와서 사무엘을 만나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귀에 짐승의 소리가 들리는 것 아닌가?
사무엘이 말하기를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과 소의 소리는 어찌된 것입니까?”
여기서 사울이 변명을 한다.
(15)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이에 사무엘은 사울의 대답에 한 마디 한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습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삼상 15:22-23).
아간은 여리고성 전투에서 하나님의 물건을 훔치는 죄를 지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에서 보기 좋게 패하고 말았다.
여호수아가 그 이유를 확인해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수 7:10-1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이스라엘의 범죄란 곧 아간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라고 했던 여리고성의 전리품 중에서 값나가는 물건들을 감추어 둔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각 지파대로, 각 족속대로, 각 가족대로 나오게 하였다.
그렇다면 아간은 이런 과정이 진행될 때라도 내가 그랬노라고 자백하면서 나아가 엎드렸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그가 제비 뽑힐 때까지 나가지 않고 숨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 긍휼을 얻지 못하였다.
골짜기에서 모든 백성들이 그를 향하여 돌을 던져 죽이게 하셨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아골골짜기, 즉 괴로움의 골짜기라 불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간이 돌에 맞아 죽은 그 자리를 자신의 죄를 묻은 무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표상하셨다.
그래서 그 아골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으신 것이다.
(호 2: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사실 누구나 죄에 넘어질 수 있다.
순간순간 올라오는 욕심에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지은 죄에 대한 각성이다.
죄를 깨달으면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엎드려야 한다.
그런데 사울은 그렇지 못했다.
그저 변명으로 일관하고, 자기가 해놓고서도 백성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등 아주 비열하고 치졸한 방법으로 그 순간만 모면하려고 한 것이다.
사무엘이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내가 잘못했노라고 하면서 엎드려 회개하고 자복하고 용서를 구했으면 하나님께서 벌은 하시겠지만 버림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완악하고 살이 쪄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것이다.
완악한 것의 반대는 마음이 가난한 것이다.
마음이 살쪄서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엎드리지도 않으며 더욱이 회개하거나 참회하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은 돌보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시거나 심판하신다.
그러나 자신의 죄에 대하여 통회 자복하는 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로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신다.
이런 자를 일컬어서 상한 심령이라고 한다.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하여 범죄하고 난 후에 나단 선지자가 와서 그의 죄를 고발할 때에 변명하지 않고 그 자리에 엎드렸다.
다윗은 그 자리에서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심판이 옳습니다’라고 인정하고 자복하였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범죄하였을 때 그의 마음은 여름 가뭄에 마름 같고, 하루 종일 신음하므로 뼈가 녹는 것 같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따랐다.
그런 고통 가운데 지내던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죄의 고발을 통해서 하나님께 엎드려 죄를 토설하였더니 그 순간 자신의 죄가 가벼워짐을 느끼게 되었다.
(시 32:3-5)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잘못을 토설하고 자복하는 상한 심령이다.
그런 자를 주님은 긍휼히 여기시며 주님의 품에 안아주신다.
그래서 경건한 자는 죄를 짓지 않는 자가 아니라, 죄를 짓고 깨달았을 때 즉시로 하나님께 엎드려 회개하는 자를 말한다.
(시 32:6)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를 만날 기회란 죄를 깨달을 때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다.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다.
그런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용납하시고 받아 주시며, 용서하여 주셨는데 주님께 자복하고 토설하는 것이 뭐가 어렵겠는가?
진짜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와 제물이 이제는 무엇인지 알고 있지 않은가?
범죄하지 않는 영혼이 없으므로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지만,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자복하는 상한 심령,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는 그리 많지 않다.
나 역시 사울이나 블레셋과의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는 패역한 자이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얼마나 많이 내 죄를 숨기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나는 형통을 지극히 땅의 것으로 알고 내가 형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한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의 죄를 숨기므로 인하여 내가 형통하지 못한 것은 돈과 물질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면서 나의 죄와 함께 무지함에 대하여 회개하며 동시에 토설한다.
바라기는 나를 비롯하여 우리 성도들이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빠른 반응을 보여 주님 앞에서 항상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한다.
죄는 모양이라도 버리고 말씀 앞에서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영생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한 심령을 내어드리는 나와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죄는 얼마나 끈질긴지 항상 내 주위에 몰려 있습니다.
그는 자꾸만 나하고 친구하자고 달려옵니다.
머리로는 그와 친구를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의 미혹에 넘어가 그 손을 잡고 맙니다.
물론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내가 온전히 주님 품에 거하지 않고 죄를 즐기고자 하는 내면의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단지 돈과 재물의 형통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주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는 벌이오니, 다른 것은 다 앗아갈지라도 주님만은 떠나시면 안 됩니다.
주여, 내 안에 있는 온갖 죄성들을 이제는 다 버리고 오직 주님과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형통을 허락하소서.
우리 성도들도 돈과 재물보다 임마누엘의 형통의 복을 가장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자 되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마음이 가난하여 오직 천국의 복을 사모하고 주님의 품에 안겨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고 사귀는 그 자리에 주의 영광이 임하나이다.
오늘도 그 영광을 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