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봉은 우리 카페 <중국여행동호회>에 가입하여 활동한 이래 2010년 봄에 처음
으로 동호회에서 주관하는 정기여행을 다녀왔다. 정규호선생이 직접 인솔하는 운
남성(云南省← 雲南省/Yúnnánshěng) 동북부지역인 려강(丽江← 麗江/Lìjiāng)을
중심한 호도협(虎跳峽)、옥룡설산(玉龙雪山)과 루구호(泸沽湖) 등을 거쳐서 돌아
본 유람으로 너무 감동적인 여행이었다. 그래서 그 내역을 “여강지역을 다녀오다”
라는 제목으로 우리 카페에 여행기를 써보았다.
두류봉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되던 해인 1945년 음력 12월에 지리산 자
락의 산골짜기에서 태어나 겨우 동네를 마음대로 뛰놀고 뒷산을 거닐던 4~5살 되
는 어린 시절부터 소먹이면서 한자를 배우던 사람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이전
에 천자문(千字文)、동몽선습(童蒙先習)、명심보감(明心寶鑑)、소학(小學)을 공부
하여 맞춤법에 맞는 완전한 한글보다 기초한문을 먼저 깨우친 사람이다. 한창 멋모
르고 커가는 과정인 1950년에 시작된 6․25 라는 몹쓸 민족의 대비극이 진행되고 있
는 와중이던 그 이듬해 추석을 앞두고 그 유명한 지리산 빨치산사건 이후 부모님을
모두 잃게 되는 불행한 어린이였다.
초등학교는 면소재지에만 있어서 학교를 가려면 20리길을 걸어서 산을 넘고 개울
을 몇 개나 건너야 하기 때문에 형이 없는 아이들은 열 살이 넘어야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두류봉은 위로 형들이 몇 명이나 학교에 다니고 있어 7살에 강제로
형한테 이끌려 학교에 입학했다. 몸은 약하고 제대로 자라지도 않은 아이가 학교에
입학은 하였으나, 그 멀고 험한 길을 다니는 것이 너무 힘들어 결석도 많이 하였다.
그 당시는 지리산의 빨치산이라고 부르는 공산당무리들이 집단으로 날뛰던 시절이
라 학교에서 공부하다가도 지리산빨갱이가 내려온다는 소문에 수시로 학교에서 중
간에 수업을 중단하고 집에 보내주기도 하고, 학교를 폐쇄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3학년에 올라가면서 동네에서 비교적 가까운 3km정도 되는 곳에 작은 초등
학교가 생겨서, 그리로 옮겨서 6학년까지 다니게 되어 학교를 무난히 마쳤다. 면소
재지학교는 두류봉이 속한 같은 학년이 3학급이나 되었지만, 새로 생긴 가까운 학
교는 한 학년 학생이 스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 당시는 중학교는 도시지역에만
있던 시절이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에 진학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군다
나 소위 좋은 학교라고 하는 전국의 명문중학은 부산이나 진주, 대구에만있어 그런
도회지의 명문학교로 가려면, 머리도 좋아 공부도 뛰어나야 하고, 월사금도 비싼데
다 도회에서 하숙비도 감당해야 하던 시절이라 시골 출신은 더욱 많은 돈이 필요하
였다.
그렇게 시골골짜기에서 태어나서 자란 두류봉의 시골생활은 13년이었으니까 도회
로 나와 서울생활을 한 지 60년이 다 되어간다. 2008년 63살에 공식적인 약장사를
접고 30년이 넘는 직장을 퇴직한 이래로 이곳 저곳을 방랑하면서 여행을 즐긴다.
미국, 캐나다를 비롯한 미주와 독일 등 유럽 여러 나라는 물론이고, 아프리카나 호
주 및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지역도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그리고 일년에 한번씩
은 배낭을 짊어진 자유여행으로 해외로 나가본다. 2014년3월부터 9개월에 걸친 아
구대륙(亞歐大陸)여행은 두류봉의 생애에 가장 값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련운항(连云港/Liányúngǎng)으로 가서 서주(徐州/ Xúzhōu)를
거쳐서 북경(北京)으로 갔다. 북경(北京)에서 또다시 타보게 되는 청장열차(靑藏列
車)는 라싸(拉萨)를 종점으로 하여 더 이상 가지 않는다. 버스여행으로 티베트를 돌
아보고, 국경도시 장무(樟木)에서 네팔의 코다리(Kodari)로 갔다. 네팔-카트만두 -
포카라-안나푸르나와 푼힐트레킹-포카라-룸비니동산-북인도-델리-암리차르-파키
스탄-라호르-훈자-中巴國境(쿤제랍고개)-카슈가르-中吉國境(토루가트고개)- 중앙
아시아5국-코카사스3국-터키-발칸반도-헝가리-오스트리아-독일-북유럽11개국-
폴란드-발트3국-러시아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시베리아철도-블라디보스토크
에서 배를 타고 동해를 지나 강원도 동해시로 귀국하였다.
귀국하여 집에 돌아와서 강한 몸살이 나더니 2014년12월8일 다리가 아파오면서 몸
에 이상이 생겨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다리가 부러질 듯 아프고 계속해서 6주일간
앉은뱅이로 일어나지를 못했다. 6주일만에 퇴원하였으나, 2015년1월25일 칠순잔치
(七十大寿/ 七秩紀念)를 병중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섯 달 동안이나 치료
를 계속하다가 이번 중국여행에 처음으로 동참하였다. 상당한 어려움과 고통이 심
하였으나 피곤과 아픔을 참고 대원을 따라 다녔는데, 역시 다녀온 후에도 후유증이
계속되고 있다. 카페회원 모두에게 감사드리면서, 칠십이 넘은 노인으로 우리 카페
회원들과 정서적 교감이 맞지 않을지 몰라도 그냥 여행기를 써 보려한다. 다녀오신
회원들이 여러 여행후기를 올렸지만,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고, 어떤것은 사진만 실
려 있기도 하고, 용어선택도 다양하다.
중국의 인명과 지명은 현지음으로 하기로 되어있지만, 우리 정서에 맞지 않고 중국
이나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에 대하여 “서울”이라는 지명이외는 자기들 발음대로 쓰
고 있으므로, 필자도 중국의 한족(漢族)지역은 두음법칙을 배제한 우리발음으로 하
고, 소수민족지역은 그 지역발음으로 한다. 두류봉은 한자나 한문은 잘 하는 사람이
지만, 중국어는 잘 말하지 못한다. 회원 누구나 어떤 것이라도 비평해 주시고, 잘못
된 부분이나 오류도 지적하여서 알려주시기 바란다.
첫댓글 대단하십니다. 건투를 빕니다.
그냥 추스려지지 않은 글을 올려서 부끄럽습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전하는 사람이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어르신이 이미 충분히 청년이십니다
대단하십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너무 과분의 말씀을 하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부부가 어르신과 한 테이블에서 식사하며 여행 경험담 등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인사 드립니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습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생생한 여행후기 기대하겠습니다.
여행 중에 항상 같은 테이블에서 챙겨주시고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사려 깊은 마음과 세상을 보는 눈이 현실 긍정적이고 내일을 향한
밝은 생각을 가지셔서 너무 고마웠습니다. 또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두류봉 선생님 혹시 고향이 마천이신지요? 예감이 드러서 감히 여쭙니다
아닙니다. 함양에 집안은 많으나, 산청쪽입니다.
많은 지식 얻었읍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고향이 마천이신지요?
제 고향은 함양군 마천면입니다
골롬보님, Loveletter님 모두 반갑습니다. 모두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나신 분들이네요.
고향이 마천 어느동네 신지요 ? 고향 마천에서 공직생활 10 여년 까지 했답니다
위의 답글에서 고향이 마천이 아니고, 산청쪽의 지리산 자락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마천에 대해서는 잘 알고, 함양에서 마천을 가려면 인월을 거쳐야 하는 시대였죠.
군자 뒷동네 도마가 제 고향입니다
다랭이 논으로 달력에 많이 나오는 동네
재경 향우회에도 다녀보구요
감사합니다.
도마 같으면 한씨 집안 이신가요? 너무 좋은 동네인데 마을앞에 실개선 흐르는 ! 작년부터 정기버스도 운행 합니다 고향에 자주오십시요
정기버스가 들어간다니 반갑군요
어르신들만 지키고 계실것인데 교통편이 없었는데..
반갑습니다
이곳에서 고향분을 만나고 고향 소식을 들으니 더 반갑네요
늘 건강하세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