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를 위한 변명 / 이상국
먼 길을 다니다보면 자동차의 발이 천형 같다 말은 안하지만 그들도 몸을 버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쓰레기 봉지를 찢고 나온 닭발이나 바지 밖에서 잠든 노숙자의 다리나 다리는 쉬고 싶다
저 가느다란 것들에게 세상이 얹혀 다니다니
외다리 집게는 몸이 다리이고 시장바닥을 배밀이 수레로 밀고가는 사람은 찬송가가 다리이다 한 번도 집밖에 나간 적이 없는데 몸통을 잃은 나무를 보거나 아프리카는 짐승들이 사납고 먹을 것도 별로 없다는데 지뢰 때문에 다리가 날아가버린 우간다 아이들이 웃고 있는 사진을 보면 내 무릎 밑이 다 서늘해진다
다리는 먹이를 위하여 걷거나 뛰거나 하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감자떡 / 이상국
하지가 지나면 성한 감자는 장에 나가고 다치고 못난 것들은 독에 들어가 가을까지 몸을 썩혔다 헌 옷 벗듯 껍질을 벗고 물에 수십번 육신을 씻고 나서야 그들은 분보다 더 고운 가루가 되는데
이를테면 그것은 흙의 영혼 같은 것인데
강선리 늙은 형수님은 아직도 시어머니 제삿날 그걸로 떡을 쳐서 우리를 먹이신다 있는 힘을 다해 / 이상국
해가 지는데 왜가리 한마리 물속을 들여다 보고 있다
저녁 자시러 나온 것 같은데
그 우아한 목을 길게 빼고 아주 오래 숨을 죽였다가 가끔 있는 힘을 다해 물속에 머릴 처박는 걸 보면
사는 게 다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성묘 / 이상국
- 야덜아 내 죽거든 태워서 물치 바다에나 뿌려다오
어머니는 살아생전 늘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선산이 수만평이나 있고 아들자식들이 모두 이름 석자는 쓰고 사는 집에서 될 법이나 한 일이냐고 감동골 솔밭 속의 아버지와 합장을 해드렸습니다
30촉짜리 전등이라도 하나 넣어드릴 걸
아침 시장 / 이상국
화장을 곱게 한 닭집 여자가 닭들을 좌판 위에 진열하고 있다. 발가벗은 것들을 벌렁 잦혀놓아도 그들은 별로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 않다. 그 옆 반찬가게집 주인은 두 무릎을 공손히 꿇고 앉아 김을 접는다. 꼭 예배당에 온 사람 같다. 어느 촌에서 조반이나 자시고 나왔는지 장바닥 목 좋은 곳 깔고 앉으려고 일찍도 나온 할머니가 나생이와 쪽파 뿌리를 손주 머리 빗겨주듯 빗어 단을 묶는다. 각을 뜬지 얼마 안돼 아직 근육이 퍼들쩍거리는 돼지고기를 가득 싣고 가는 리어커를 피하며 출근길의 아가씨가 기겁을 하자 무슨 씹이 어떻다고 씨부렁거리는 리어커꾼의 털모자에서 무럭무럭 김이 솟는다. 아직 봄이 이른데 딸기 빛깔이 꼭 칠한 것처럼 곱다. 순대국밥집 앞의 시멘트바닥에 잘생긴 소머리 하나가 새벽잠을 자다가 끌려나왔는지 꿈꾸는 표정으로 면도를 하고 있다. 갑자기 골목 안이 화안해지며 차 배달 갔다오는 미로다방 아가씨가 어묵가게 아저씨를 향하여 엉덩이를 힘차게 흔들며 지나간다.
그곳 / 이상국
나무들도 엉덩이가 있다
내 사는 설악산의 엉덩이는 얼마나 깊고 털이 무성한지
모든 것들은 엉덩이가 있고
똬리 다섯 개 / 이상국
배다리 솔밭 살던 장수 아버지 별명이 똬리 다섯 개, 아잇적부터 물건이 하도 커 거짓말 좀 보태면 홍두깨만해서 물동이 이는 똬리 다섯 개를 걸어도 끄떡없었다. 이게 수캐처럼 처녀 과부 안 가리고 밤낮 없이 껄떡거리는 바람에 사람 축에도 못 들고 몰매똥매 숱해 맞았다. 어느 해 봄 이웃집 닭에다 그 짓을 했다고 온 동네가 수군 거리자 장수 할아버지 아예 뒈지라고 뒤란 도라무깡에 엎어놓고 집채 만한 돌로 눌러놓았는데 밤이 되자 땅 파고 기어나와 또 과붓집을 기웃거렸다는 장수 아버지, 올 봄 저 세상 가며 그 좋은 물건도 가지고 갔다.
오길 잘했다 / 이상국
어느 날 저녁 동네 골목길을 지나다가 자즈러질 듯 우는 갓난애의 울음소 리를 들으며 아, 누군가 새로 왔구나 그리고 저것이 이제 나와 같은 별을 탔구나 하는 즐거움 는 이 희떠움
티브이 속에서 줄줄이 끌려가는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을 향해 노골적으로 꼴좋다 꼴좋다 외치는 즐거움
아무 생각없이 생을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쓰다가 남 모르게 우주의 창고를 열어보는 이 든든함
때로 따뜻한 여자 속에서 내 그것이 죽어가는 즐거움
친구를 문상 가서 웃고 떠들다가 언젠가 저것들이 내 주검 앞에서 나를 흉 보며 내 음식을 축내는 즐거움을 미리 보는 즐거움
어쩌다 공돈이 생긴 날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집에 가는데 나무 이파리들이 멋도 모르고 바람에 뒤집어지는 걸 바라보며 아무래도 세상에 오길 잘했다는 이 즐거움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이상국
흐르는 물이 무얼 알랴 어성천이 큰 산 그림자 싣고 제 목소리 따라 양양 가는 길 부소치 다리 건너 함석집 기둥에 흰 문패 하나 눈물처럼 매달렸다
나무 이파리 같은 그리움을 덮고 입동 하늘의 별이 묵어갔을까 방구들마다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어둠을 입은 사람들 어른거리고 이 집 어른 세상 출입하던 것이 비료포대 속에 들어 바람벽 높이 걸렸다
저 만리 물길 따라 해마다 물에 혼은 실어보내고 몸만 남아 사진액자 속 일가붙이들 데리고 아직 따뜻한 집
어느 시절엔들 슬픔이 없으랴만 늙은 가을볕 아래 오래 된 삶도 짚가리처럼 무너졌다 그래도 집은 문을 닫지 못하고 다리 건너오는 어둠을 바라본다
여름 / 이상국
산을 내려온 바람이 멧돼지처럼 옥수수밭을 뒤지고 다니는 저녁이다
하루살이들 이악스럽게 달려드는 멍석마당에서 하늘의 별들이 가끔 더 먼 곳으로 날아가는 걸 바라보며 어머니는 감자를 깎으시고 오뉴월 하루 볕이 다른데 어디 보자며 불쑥 사타구니에 손을 넣어 감자톨 같은 내 불알을 만져보시던
아버지야 아버지야
겨울 선운사에서 / 이상국
누가 같이 자자 그랬는지
물 속의 집 / 이상국
그 해 겨울 영랑호 속으로
* 모래기는 영랑호 주변에 있는 마을 이름.
딸부잣집 낙수 소리 / 이상국
내 말이 그 말이어유 글쎄
나도 보험에 들었다 / 이상국
좌회전 금지구역에서
싸움 / 이상국
산방일기(山房日記) / 이상국
새벽 한기에 깨어 마당에 내려서면 녹슨 철사처럼 거친 햇살 아래 늦매미 수십 마리 떨어져 버둥거리고는 했다. 뭘 하다 늦었는지 새벽 찬서리에 생을 다친 그것들을, 사람이나 미물이나 시절을 잘 타고나야 한다며 민박집 늙은 주인은 아무렇게나 비질을 했다. 주인은 산일 가고 물소리와 함께 집을 보며 나는 뒤란 독 속의 뱀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서럽도록 붉은 마가목 열매를 깨물어보기도 했다. 갈숭어가 배밀이를 하다가 하늘이 보고 싶었던지, 어디서 철버덩 소리가 나 내다보면 소리는 갈앉고 파문만 보이고는 했다 마당 가득한 메밀이며 도토리 멍석에 다람쥐 청설모가 연신 드나든다. 저희 것을 저희가 가져가는데 마치 도둑질하듯 살금살금, 청설모는 덥석덥석 볼따구니가 터져라 물고 간다 어느덧 저녁이 와 어느 후미진 골짜기에 몸을 숨겼던 밤이 산적처럼 느닷없이 달려들어 멀쩡한 집과 나무와 길을 어둠속에 처박는 산골, 외롭다고 풀벌레들이 목쉰 소리를 하면 나는 또 산 너머 세상의 의붓자식 같은 내 인생을 생각하며 밤을 새고는 했다
봄을 기다리며 / 이상국
겨울산에 가면
돌배나무와 면장 / 이상국
강선리 사람치고
봉희네 / 이상국
그해
폭설 / 이상국
곡(哭)을 하다 배고프면 국수를 먹었다
꼬질대가 휘도록 눈은 퍼붓고 문상객들은 눈을 털며 들어와 눈은 잠처럼 쏟아지고
소나무 숲에는 /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봄날 옛집에 가서 / 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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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시인
시집 <동해별곡(東海別曲)>, <내일로 가는 소>
만해 평화의종...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사 만해마을
내설악 백담계곡에서 달려 나온 물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에서 만난다. 그들이 부둥켜안고 북한강으로 떠나는 북면 소나무숲속에 만해마을이 있다. 만해마을이 있는 곳은 백담사로 가는 길목이다. 백담사는 만해가 출가해서 님의 침묵을 집필한 곳이다. 아르코 예술정보관 「문학, 작가의 목소리로 남다」의 프로그램은 지난 10월19일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이상국시인과 홍용희 문학평론가의 대담으로 진행됐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일찍 서초동 예술의전당 앞에서 인제군 백담사 만해마을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있는 백담사 만해마을
만해마을에 들어서면 먼저 310편의 시를 동판에 담은 평화의 시벽이 눈에 들어온다
평화의 시벽
봄비 / 황동규
홍용희 문학평론가(왼쪽)와 이상국 시인
백담사 만해마을을 운영하고 있는 이상국 시인의 자작시 낭독
기러기 가족 / 이상국
이상국시인은 ″농촌에서 쓰는 농촌의 시는 시속에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 일상이 녹아있으며 토속적이고 보다 절제된 것이 도시에서 쓰는 농촌의 시와 다른 점 이다″라고 한다. ″이상국시인의 <기러기 가족>은 동화책을 읽는 느낌이며, 목가적인 동심의 세계가 느껴진다″는 홍용희 문학평론가의 설명이다.
만해 평화의종
만해 문학박물관
만해 문학박물관
만해 문학박물관... 심우장
아버지의 집으로 가고 싶다 / 이상국
벌써 오래 되었다 부엌 옆에 마구간 달린 아버지의 집을 떠나 마당도 굴뚝도 없는 아파트에 와 살며 나는 그게 자랑인줄 알았다 이제는 그 부드러운 풀이름도 거반 잊었지만 봄 둑길에 새 풀이 무성할 때면 우리 소 생각난다 어떤 날 저녁에는 꼴짐 지고 돌아오는 아버지 늦는다고 동네가 떠나갈듯 우는 울음소리도 들었다 이제는 그 소도 아버지도 다 졸업했다고 이 도시의 시민이 되어 산지 오래인데도 우리 소 잘 먹던 풀밭 만나면 한 짐 베어지고 그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상국의 시에는 어머니 보다 아버지가 많이 등장한다. <기러기 가족>, <달이 자꾸 따라와요>,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등 에서 도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 이유를 시인은 ″어머니는 다른 분들의 시에 많이 나오잖아요... 어릴 때 많이 고단했던 어머니가 도망갈까 봐 치마끈 을 손에 감고 잠이 들곤 했는데... 이 때의 아버지에 대한 이해부족이 철이든 후 그리움과 연민으로 다가 왔습니다.″
만해 문학박물관 |
출처: 詩의 향기 / poem & photo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