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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中 上古史의 眞實
1. 桓因天國
바이칼 호수지방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3301년 동안 7대에 걸쳐 환인천제께서 다스렸던 나라의 이름이 桓國(환국)이다.
인류의 始原文明國家인 이 환국은 약 5900여년전, 기후변화로 인해 나라를 이루고 있던 9부족들의 일부가 이동을 하는데, 이 때 환국의 마지막 환인(七代天皇)이신 知爲利(지위리)로부터 정통성의 상징인 天符印(천부인) 3개를 받은 환웅께서 문명 개척단 3000명을 거느리고 太白山(백두산)의 神檀樹 아래 도읍을 정하고 神市를 열게 되었으니 이것이 神始配達이다.
이때 환웅천황은 하늘에 천제를 드리며 나라를 개국하는데, 이 날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음력 10월 3일 개천절이다. 신시배달은 환국의 광명사상을 그대로 계승하여 弘益人間, 在世理化, 光明開天의 3대 정신으로 백성들을 교화하며 1565년간 지속되었는데, 이 배달국을 우리는 진정한 韓民族史의 기원으로 보아야 한다.
고려 말 高僧 一然이 1281년 지은 삼국유사가 너무 낡아 1512년 慶州府 李繼福이 重刊한 正德本의 古朝鮮記에는 “환국”이라는 기록이 있었고 세조가 팔도관찰사에게 수거 명을 내려 수집한 도서목록 중에 고려 초기 元董仲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삼성기 하편에는 환국은 천산산맥, 파미를 고원과 바이칼 호수를 포함한 시베리아 전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이 5만리, 동서로 2만리의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이 환국의 지도자가 환인이다.
상해임시정부에서도 이날을 국경일로 정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정부가 계승하여 음력 10월 3일에 지내던 행사를 양력 10월 3일로 바꾸었다.
따라서 개천절이 檀君聖朝께서 나라를 열기 훨씬 이전부터 있어 왔음을 아는 사람은 적다. 자세히 말하자면 檀君王儉께서 조선을 개국하기 이전부터 東夷族의 역사는 존재했었는데, 桓國(3301년간), 配達國(1565년간), 檀君朝鮮(2096년간)으로 이어진 이른바 三聖朝 시대다.
2.중국의 東北工程에 대하여
우리의 땅 요동지역과 만주지역을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포함시키기 위하여 殷나라의 왕족인 箕子가 조선의 왕으로 책봉되어 건국한 나라로서, 건국 후에는 周 왕실의 제후국이 되었고, 전국시대의 제후국 중 하나인 燕(연)나라에서 衛滿(위만)이라는 사람이 조선으로 도망하여 衛滿朝鮮(위만조선)을 세웠다는 것이 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내용의 핵심이였다. 그 근거로 箕子朝鮮(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이 尙書大傳에 나오고, 요녕성 서부의 넓은 지역을 흐르는 大凌河(대릉하) 일대에서 발견된 箕候名(기후라는 이름이 새겨진) 청동기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尙書大傳은 한 나라 때에 편찬된 것으로 그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국내외 학자들이 많다. 또한 ‘기후’라는 이름의 문안이 새겨진 청동기는 기자조선 영토를 넘어 중국 전역에서 출토되었고, 위만의 경우도 진시황에 의해 멸망한 연나라 사람일 가능성은 적으며 오히려 고조선이 연나라와의 전투에서 잃어버린 고조선의 옛 영토에 거주해 있던 토착 엘리트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고조선에 대한 중국학계의 주장은 말 그대로 ‘역사왜곡’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고려 때부터 원나라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여 李氏朝鮮의 사대주의 사상이 國魂마져 버리고 우리의 고대역사를 소흘이 취급한 것이 그 원인 중 하나로 보이고, 고려를 멸망시키고 중국 사대주의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에게 이 책을 禁書로 지정된 것이 동북공정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또 일제 강점기는 광개토대왕의 비를 “한민족이 일본의 지배를 당했다는 任那日本說을 사실화하기 위하여” 조작했고, 특히 식민사학자 “이마니 시류”가 환국의 “國”을 “因”자로 조작하여 환국이 실존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화의 인물로 변조시켰으며 또 배달국의 환웅과, 고조선의 단군까지도 신화적 인물로 왜곡시켜 한민족의 뿌리를 송두리째 없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 의한 세계질서가 국제연합을 중심으로 안정되어 독립국가의 권익이 보장되자 중국은 남북통일에 대비하여 국경을 이루는 태백산(백두산)과 만주지역의 우리 영토를 역사적으로 복속시키기 위해 필요한 공정작업이다.
3. 중국의 上古史
중국 역사에는 옛날 三皇·五帝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에 속하는 것이고 實證을 할 수는 없다. 오제 중에서 특히 書經이라는 역사책에 보면 堯(요)·舜(순)임금 두 임금에 관한 이야기가 보이고, 그 다음에 禹(우)임금이 왕위를 이어 받아서 夏(하)의 시조가 되었다. 夏 다음에 나온 왕조가 商(상)나라인데 중간에 殷(은)이란 곳으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국호를 '은'이라고 고쳐 불렀다. 상나라 때의 유물은 지금도 갑골문자 등에 나타난다.
周나라는 殷나라의 서쪽 산시성에서 은에 조공을 바치는 주종관계를 지내다가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渭河(위하,웨이허강) 분지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주나라는 800여년을 계속하는 동안 鎬京(西安부근)에 도읍하고 있던 때를 '西周' 뒤에 洛陽에 도읍한 때를 '東周'라 칭하는데, 동주에도 前期를 '春秋時代' 後期를 '戰國時代'라고 한다. 이 周나라를 멸한 것이 '秦'나라다. 위의 夏·殷·周를 합하여 '三代'라고 부르기도 한다.
洛陽을 중심으로 한 하남성은 황화문명의 발상지로 중국 8대古都중 4개 즉, 安陽, 洛陽, 鄭州, 開封이 속해있고, 정주시는 북으로 황하에 임하고 서쪽으로 嵩山(숭산)에 의지하면서 五帝 및 夏, 商, 周의 자취가 깃든 곳이다.
3.1)三皇에 대한 전설
중국 상고사는 戰國時代 말기에 그 기록이 나타나는데 司馬遷(사마천)의 <史記>와 <尙書大傳>에는 太昊伏羲(태호 복희), 炎帝神農, 隧人氏(수인씨)를, 南宋 말기에 편찬한 曾先之(증선지)가 宋나라 말기에 編輯한 역사서 <十八史略>에는 太昊伏羲(태호 복희), 炎帝神農(염제신농), 黃帝軒轅(황제헌원)을, 伏羲氏(복희씨) 때에 黃河에서 龍馬가 지고 나왔다는 쉰다섯 점으로 된 그림<河圖>는 天皇·地皇·人皇을, 東漢의 班固 등이 편찬한 <白虎通>은 伏羲·神農·祝融(복희,신농,축융)을 그리고 <春秋運科樞>는 伏羲·神農·女媧를 三皇이라 지적하는 등의 說이 있는데 三人의 황제가 동시대 인물도 아니고, 세습된 것도 아니어서 기록에 따라 사람이 엇갈리고 삼황의 전설도 믿을 수 없어 사마천도 사기에는 五帝부터 기술하였다.
3.1.1)太昊伏羲(태호 복희)
복희씨는 BC2800년경에 150년간 재위하였다. “성씨가 風이고 뱀몸에 사람 머리를 하고 있으며 사람에게 처음으로 사냥법을 가르치고 불을 발명하였다” 뱀의 몸은 뱀 토템을 가진 부족이 신으로 미화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3.1.2)炎帝神農(염재 신농)
신농씨는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가졌다. 쟁기와 괭이를 발명하여 농경을 처음으로 가르친 농업신이고, 상업도 가르쳤다. 또 붉은 채찍으로 초목을 쳐서 그 수액성분을 직접 혀로 확인 해 가며 의약품을 발견 했다고도 한다. 황제와 맞먹는 큰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황제와의 무력충돌로 阪泉에서 전쟁이 일어났으며 결국 황제가 승리하여 흡수통일이 이루어졌다. 120살에 죽었는데, 사후에는 그 자손들이 8대에 걸쳐 530년간 黃帝가 나타날 때까지 집권하였다.
3.1.3)燧人氏(수인씨)
수인씨는 중국 고대신화에서 불을 발견하고, 음식조리법을 전했다고 한다. 3개의 눈을 가진 것으로 되어있다. 일부에서는 燧人과 祝融(축융)을 동일인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3.1.4)祝融(축융)
축융씨는 하늘과 땅을 분리하고 세계질서를 세우는 것을 도운 신 중 하나다.
3.1.5) 黃帝
黃帝는 5000년 전軒轅(헌원)의 언덕에서 태어나 헌원황제라 부르기도 한다.
그는 사나운 짐승을 훈련시켜 炎帝(엽제)와 阪泉(판천)에서 승리하였다.
또 동이족인 蚩尤(치우)가, 風伯, 雨師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모아 涿鹿(탁록)전투에서 마침내 치우를 잡아 죽였다. 그 후 탁록 아래의 평원에 도읍을 정하고 산을 개간하고 길을 통하게 하였다. 그리고 문자, 음악 曆數,舟車,衣裳,指南車 등을 발명하였다고 전해진다. 안정이 되자 태산에 행차하여 천하의 모든 부락을 모아놓고 성대한 封禪儀式9봉선의식)을 거행하고 하늘과 땅에 제사지냈는데 그때 돌연 천상에서 황룡이 나타나자 그 사람들은 그가 덕으로 제왕이 되었다고 칭송하였고 스스로 黃帝라 칭하였다고 한다.
황제는 도교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으며 중국 中醫學과 풍수의 시조로도 여겨지고 있다. 그가 백살되던 해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그가 하늘로 돌아가기를 간청했다. 많은 사람이 황제의 치세가 계속되기를 기원했지만 황제는 중신들과 함께 용을 타고 승천하였다고 한다.
3.2)五帝에 대한 전설
삼황의 뒤를 이은 五帝에 대하여 史記에는 黃帝의 뒤를 이은 다섯 자손을 말하며 少昊金天(소호금천), 顓頊 高揚(전욱 고양), 帝嚳高辛(제곡고신), 伊耆 帝堯(이기 제요), 帝舜有虞(제순 유우)를 말한다. 중국은 신화 상의 인물을 2006년경 대규모로 복구하여 중화민족의 구심점으로 삼고 있는데 三皇五帝로부터 시작한다. 五帝는 특별히 누구라고 지칭하기가 어렵다. 중요한 건 요순시대를 거쳐 夏, 殷, 周왕조를 거치면서 나타난 걸출한 인물들을 이야기한다. 堯와 舜은 백성들을 추앙으로 통치를 하였지만 왕위를 세습하지 않았다. 단지 요순을 거쳐 禹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夏王朝가 세워졌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이 걸왕이다. 그는 왕자 때부터 비범했지만 그는 포악한 임금이 되어 백성들을 괴롭히는 왕이 되었다. 결국 탕에 의하여 걸왕은 폐위되고 殷王朝가 세워졌는데 은왕조의 주왕 역시 비범한 인물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비범함 역시 백성을 위하기보다는 자신의 영달에만 쓰였다. 결국 그는 무왕에 의하여 폐위되고 주왕조가 세워졌는데 이 두 포악한 폭군을 일컬어 "하걸은주" 라 부른다.
3.2.1)少昊金天
황제의 아들로 성은 己, 이름은 摯(지) 또는 質이고, 窮桑(현재의 산동성 취푸시)에서 태어났고 靑陽氏, 金天氏, 窮桑氏, 雲陽氏, 朱宣으로도 불린다.
3..2.2)顓頊 高揚
少昊 金天의 뒤를 이은 顓頊 高揚(전욱 고양)은 黃帝의 손자이고 少昊의 형의 아들이었다.
10살때 少昊를 보좌했고 20살에 고양에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고양씨“라고도 하며 78년
동안 재위했다고 한다. 顓頊은 엄격한 법을 세워 하늘과 땅의 구별을 확실히 하고 인간세상에서도 주종관계, 남녀관계를 확실히 세웠다고 한다.
3..2.3)帝嚳
顓頊(전욱)의 뒤를 帝嚳(제곡)이 잇는다. 帝嚳은 황제의 증손이다. 첫째 아내 羲和에게 남자자식인 해가 10개가 있고, 둘째 嫦羲(일명 姮娥항아)에게 여자 자식인 달이 12개가 있다. 셋째 陣鋒(진봉)씨에게 아들 放勛(방훈), 넷째 娵紫氏(추자씨)에게 아들 帝摯(제지)가 있다. 첫째 부인과 둘째부인의 자식인 해와 달은 禮記에서는 다른 전설인데 조작하여 여기에 활용한 것이다.
史記에는 帝嚳이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 있는 명석한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는 상나라 시조 탕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음악의 신으로 각종 악기와 음악을 만들어 백성을 즐겁게 하였다. 또 백성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조치를 하니 해와 달이 비추는 곳, 비와 바람이 이르는 곳이면 복종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3.2.4)帝嚳陶唐(제곡도당)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요임금이다. 기원전 2,357년 第四帝인 帝堯帝(요임금)은 山東의 南陶丘 伊耆山에서 태어났으므로 伊耆 帝堯(이기제요)라고도 부른다. 13세에 아버지 帝嚳高辛으로부터 南陶丘의 方伯(지방의 제후)으로 封함을 받아 관리가 되었고, 15세에는 제곡고신으로부터 河北의 唐縣지방의 방백이 되었지만, 16세가 되는 해에 과감하게 8개 부락을 이끌고 大江(양자강)을 건너 平陽의 江南(南京)에 陶唐(도당)이라는 나라를 建業하였다. 帝嚳高辛은 帝王의 地位를 물려받지 않고 荒凉(황량)한 江南에다 自活獨立을 試圖한 帝堯를 탓하지 않았다.
사마천이 편찬한 중국 최고의 역사서 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요임금은 20살에 왕위에 올라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렸다. 요의 치세에는 가족들이 화합하고 百官의 직분이 공명정대하여 모든 제후국들이 화목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요임금이 민정을 살피러 나갔는데 왕의 행렬에는 아랑곳없이 뽕잎 따기에만 열중하는 한 처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여 친히 다가가니 그 처녀의 얼굴에 커다란 혹이 하나 달려있었다. 요임금은 순간 실망하였으나,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녀의 현명함에 끌려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왕비가 궐에 당도하자마자 왕비는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수라간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흔히 남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 중에 堯鼓舜木(요고순목)이란 말이 있다. 요임금의 북과 순임금의 나무’라는 뜻이다. 요임금은 자신이 독단적인 정치를 할 것을 염려하여 조정에다 敢諫鼓감간고라는 북을 걸어두고 어느 누구든지 간언할 수 있게 하여 늘 스스로를 경계하였고, 순임금은 마루를 세워서 여기에 경계하는 말을 쓰게 하였다. 요고순목은 聖天子가 착한 말을 잘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요순시대란 말이 오늘날에도 태평성대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될 정도로, 요임금과 순임금은 백성들의 고충에 귀를 기울였고 선정을 베풀었다. 號를 陶唐이라 불렀으며 唐堯 또는 唐高(요임금)이라 일컬었다. 훗날, 中原을 네 번째로 천하통일 한 唐나라의 조상이 된다.
3.2.5)帝舜有虞(제순유우)
요임금은 왕위에 오른 지 70년 가까이 지난 후 신하들에게 후계자를 찾아 추천할 것을 명하였다. 신하들은 오제 중의 하나인 전욱 고양의 후손이자, 효성이 지극한 舜을 추천하였다.
요임금 시절, 백성들은 배부르고 잘 살고 있었지만 해마다 범람하는 황하의 홍수를 해결할 수 없었다. 해서 요임금은 온 산천을 뒤져서라도 평소 덕망 많기로 유명한 전설속의 은사 허유를 찾아 그를 천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허유는 그 말을 듣고는 기산으로 몸을 감추었다.
결국 요임금은 평소 효성이 지극하기로 유명했던 순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어 그의 사람됨과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이윽고 3년 후 순을 등용하여 천자의 자리를 禪讓(세습이 아닌 덕있는 사람에게 물려줌)하였다.
임금이 된 순은 백성들과 함께 더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하게 생활해서 칭송을 받았다. 수십 년 뒤 요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순은 임금 자리를 요의 아들인 단주에게 넘겨주려고 하였으나 주변사람들이 모두 반대했다. 그제야 순은 정식으로 임금이 되었다.
부족국가로 구성된 시기에 중국은 태평성세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 시기가 바로 ‘요순시대’이다. 요순시대는 중국에서 이상적인 정치가 베풀어져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았던 시대로, 오늘날 중국인들은 덕으로 치세하던 요임금과 순임금을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숭배하고 있다.
3.3)共工氏와 女媧
3.3.1)共工氏
전욱과 동시대에 도하나의 유명한 부족의 수령 共工씨였다. 공공은 복희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머리에 뱀의 몸을 한 龍族인데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두마리 용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공공은 성이 姜이였다고 하니 곧 염제의 후손이다. 공공부족은 지금의 하남성 북부를 근거로 살며 농경을 중시하여 저수지를 만들고 관개를 하는 등 수리에 능한 까닭에 후대에 水神으로 존중되었다.
공공의 아들이 后土인데 신농과 비슷할 정도로 농업기술을 진보시켰다. 共工父子가 살던 지역엔 높은 지역의 가뭄과 낮은 지역의 수해를 방지하기 위해 높은 구릉을 깎아서 낮은 습지를 메워 농업생산이 증대하자 顓頊(전욱)이 시비를 걸어왔다. 공공은 9개의 머리와 뱀의 몸을 가진 相有와 함께 천하의 패권을 노리다가 黃帝 손자인 전욱과 전쟁(일부 기록은 祝融씨와 전쟁)에서 패했고 이에 격분하여 하늘을 받치는 기둥인 不周山을 치받아 하늘은 북서쪽으로, 땅은 남동쪽으로 기울어 졌다고 한다.
3.3.2)女媧(여와)
여와는 상반신은 우아한 미녀지만, 하반신은 복희씨와 같은 뱀이다. 땅에 내려와 인간을 만든 주신이며 자애로운 신으로 共工이 不周山(파미르 고원)을 치받아 무너진 기둥을 큰 거북의 다리를 잘라 무너진 기둥을 대신하고 상황을 완화시키는 데 사용하였으나, 기울어진 하늘을 완전히 복구시킬 수는 없었다고... 소수민족의 신화에서는 복희와 여와는 남매사이 이지만 대 홍수 이후 둘만 살아남아서 부부의 연을 맺고 인류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뱀 모양의 하반신을 서로 휘감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묘사된다.
3.4)중국민족의 始祖 黃帝
黃帝는 성은 公孫, 이름이 軒轅(헌원)으로 중국민족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황제의 故鄕은 정주시 남쪽의 新鄭에 위치하고 있다. 베이징올림픽 때 이곳에서 채화한
성화는 지금까지 꺼지지 않고 그대로 타고 있다. 이곳에는 명나라 때 지은 軒轅橋(헌원교)
가 있고 흰색으로 된 거대한 황제의 상과 옆에는 황색으로 된 용의 상이 있는데 용은 황제의
상징이자 중화민족의 상징이다. 황제의 사당 앞에는 炎黃子孫 不忘始祖 文明始祖 人文始祖
등의 현판이 걸려있고, 사당에는 황제의 일생을 벽화로 그려 놓았는데 黃帝誕生-創造舟車-黃炎結盟-征伐蚩尤 등 이 걸려있는데 중국인은 자신들을 炎黃의 자손이라 한다.
그런데 황제에 대하여는 중국 상고사의 기록에는 “황제는 110년을 재위했으며 중신들과 용을 타고 승천했다.”라고 기록되었지만 최근에는 황제가 용으로 승천한 것이 아니고 죽은 뒤 橋山에 묻혔다”며 說話를 실존 인물로 變造하였고, 2007년 중국은 이곳에서 拜祖大典을 거행하였는데, 각종 매스컴 및 CCTV에 생중계 되었다고 한다. 구호는 ‘共拜祖先 同築和諧(함께 조상을 경배하고 다같이 화해를 다지자)’
3.4.1)黃帝 祠堂에 언급한 역사문헌
좌구명의 <國語>晉語 : 昔少典取于有蟜氏生黄帝炎帝(옛날 소전이 유교씨 를 취하여
황제와 염제를 낳았다.)
3.4.2)전국시대 <竹書紀年> : 黄帝軒轅氏元年帝即位居有熊初制冕服(황제헌원씨 원년에
즉위하여 유웅에 거쳐했으며 처음으로 고관대작들이 입는 면복을 제정했다)
3.4.3)사마천의 <史記>五帝本紀 : 黃帝者少典之子姓公孫名曰軒轅(황제는 소전의 아들로
성은 공손이고 이름은 헌원이다
3.4.4)皇甫滵의 <帝王世紀> : 黃帝有熊氏 少典之子 姬姓也 … 受國于有熊 居軒轅之丘
故因以爲名 又以爲號 … 有熊 今河南新鄭是也(황제 유웅씨는 소전의 아들로 희씨 성을...
유웅에서 나라를 받고 헌원의 언덕에 거쳐했으므로 이름을 삼고 호를 삼았다.
유웅은 지금 하남 신정이다.)
4.檀君朝鮮 상고사
桓檀古記(한단고기)는 신라 고승 안함로에서 조선조 이맥에 이르기 까지 거
의 천년세월에 걸쳐 아래 다섯 사람이 저술한 사서가 하나로 묶여진 책이다.
三聖記 全 上卷(安含老撰), 三聖記 全 下卷(元董仲 撰), 檀君世紀(紅杏村叟編), 北夫餘紀(伏崖居士 編), 迦葉原夫餘記(伏崖居士 撰), 太白逸史(一十堂主人 撰)
4.1)桓檀古記
桓檀古記(환단고기)의 어원은 桓檀古史(환단고사)이며 고종황제의 대한제국 선포를 기념하여 1897년 海鶴 李沂선생(1848~1909년)이 소장하던 太白逸史와 백묵관이던 이형식 집안 소장한 檀君世記를 合本하여 출간하였고, 1911년 3권의 史書가 더 첨가되어 환단고기가 편찬되면서 “조대기” 원문이 오늘에 전해졌고, 따라서 “환단고기”는 1911년 독립운동가 운초 계연수 선생이 우리의 고유 역사서 다섯 권을 하나로 묶어 펴낸 책으로 “환단고기”는 대한제국의 정체성이 桓檀임을 다시 밝히는 선언문이었던 것이다.
한단고기는 桓因天帝가 지금으로부터 9000여년전에 桓國을 개국하였다고 주석하였다. 환인천제는 風周에서 개국함으로써 風夷의 시조가 되고, 倍谷에서 개국하여 倍達那羅라는 나라 이름이 생기게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 최초의 조상인 마고가<마고지나>라는 나라를 세워 나라 이름을 문명사에 남긴 이래 두 번째로 환인천제가 나라를 세워 <배달나라>라는 나라 이름으로 남긴 것이다.
환단고기를 구성하고 있는 네 편중의 하나인 太白逸史의 桓國本紀에는 朝代記라는 책을 인용하면 환인의 나라 桓國이 있으니 모두 7代의 桓因이 이었으며, 또한 三聖密記를 인용하면 환국은 열두 개의 나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와 동일한 내용이 환단고기의 네 편중 또 다른 하나인 三聖紀全 下篇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神市歷代記에서는 歷代 환웅의 18代까지 이름과 함께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환단고기에 실려 있으며 고려말기의 대학자 행촌(杏村) 이암(李嵓, 1297~1364년)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檀君世紀에는 제1代 단군왕검에서 부터 마지막 47대 단군 古列加까지 총 47代 단군의 치세를 기록하고 있다.
4.2)三國遺事
桓因-桓雄-檀君의 天孫 계보는 고려의 일연(一然, 1206~1289년)이 지은 三國遺事를 통해 알려져 왔다. 삼국유사에는 桓因 이전의 역사는 생략되어 있고 환인 이후의 역사 역시 매우 縮約(축약)되어 있지만, “삼위태백이 홍익인간 할 만한 곳이다.”라고 하여 홍익인간을 처음 언급한 이는 바로 환인이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환인을 하느님이라 하였으니, 홍익인간은 바로 한민족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야 하는 이상으로 ‘한민족 하느님의 계명’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고대 우리 민족이 공동체 및 삶의 모습과 관련하여 생각하고 소망했던 바를 환인 하느님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생각한 가장 바람직한 사회, 국가, 정치, 인생의 모습은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인 것이다. 한단고기는 桓因天帝가 지금으로부터 9000여년전에 桓國을 개국하였다고 주석하였다. 환인천제는 風周에서 개국함으로써 風夷의 시조가 되고, 倍谷에서 개국하여 倍達那羅(배달나라)라는 나라 이름이 생기게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 최초의 조상인 마고가<마고지나>라는 나라를 세워 나라 이름을 문명사에 남긴 이래 두 번째로 환인천제가 나라를 세워 <배달나라>라는 나라 이름으로 남긴 것이다.
三國遺事 卷一의 "고조선(古朝鮮)"조(條)를 신화와 역사기록 두 부분으로 나누어, 먼저 단군신화(檀君神話) 속의 환웅(桓雄)과 중국이 믿고 있는 염제신농(炎帝神農)의 신격(神格)을 비교 고찰하였는데, 그들은 매우 유사한 신격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인류의 생활과 농업에 필수적인 태양신(太陽神), 농경을 가르친 농업신(農業神), 그리고 약초(藥草)의 성질을 밝혀내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했던 의약신(醫藥神) 신격과, 문물을 발명하고 문화를 창시했던 문화영웅(文化英雄)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신화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발전해 가는 단계상에서 신(神)들이 담담했던 역할은 창세(創世)-교화(敎化)-통치(統治) 과정으로 변천해 가는데, 환웅과 염제신농은 모두 교화(敎化)의 단계에 있었고, 교화의 내용은 모두 그들의 신격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환웅신화와 염제신농신화는 고대 한국과 중국의 정신문화 발전과 물질문명 발달과정 중 같은 단계에서 발생한 신화인 것을 알 수 있다.
4.3)魏書
晋나라 陳壽가 기록한 史書로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라는 기록한 위서의 저술 時點을 기준으로 위는 衛滿朝鮮을 가리키므로, 위만조선으로부터 2천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본문기록의 "唐堯同時說(중국의 요임금이 唐이라는 곳에서 왕으로 봉함을 받은 데서 유래한 이름)에 아주 근접한다. 그러므로 "위서"는 중국의 史書가 아니라 위만조선의 역사서일 가능성이이 크다.
본문의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와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단군 건국년대를 밝히는 중요한 기록이다.
箕子東來說은 殷周交替 때인 기원전 1122년은 단군이 이때까지 1500년 간 나라를 통치하였으므로 고조선 건국년대는 기원전 2600년대이다.
이는 堯임금보다 훨씬 이전인 黃帝(기원전 2698~2358년) 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단군의 父神인 환웅의 시대는 아무리 늦어도 기원전 3000년 전후일 것인 바, 이는 염제신농(기원전 3218~2699년) 시대에 해당되므로 환웅과 염제신농이 교화활동을 한 것도 동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 고조선"편은 우리민족의 상고시대(上古時代) 역사를 규명해주는 기록이 위서를 통해 고증되므로 역사학적으로 의의가 깊은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때 한반도에서는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한다. 黃帝 설명시 거론한 황제에게 敗하여 죽은 蚩尤(치우), 風伯(풍백), 尤師(우사)의 얘기가 단군조선에 등장하는 것은 우연일까?
한단고기는 桓因天帝(환인천제)가 지금으로부터 9000여년전에 桓國을 개국하였다고 주석하였다. 환인천제는 風周에서 개국함으로써 風夷의 시조가 되고, 倍谷에서 개국하여 倍達那羅(배달나라)라는 나라 이름이 생기게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 최초의 조상인 마고가<마고지나>라는 나라를 세워 나라 이름을 문명사에 남긴 이래 두 번째로 환인천제가 나라를 세워 <배달나라>라는 나라 이름으로 남긴 것이다.
4.4)符都誌
부도지는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이 저술했다는 史書인 澄心錄 上敎 第1誌는 환인, 환웅, 단군역사와 신라초기 역사를 기록한 가장 오래된 사서인데, 우리의 上古史를 기술한 사서 중에 가장 오래 전의 역사를 비교적 자세히 기술한 문헌으로 서기 1953년 후손 박금 선생의 謄寫本(등사본)으로 세상에 알려진 책으로 황궁→수인→환인→환웅→왕검으로 이어지는 宗統계승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出城하면서 황궁씨가 마고 앞에서 한 複本의 사명을 전하는 것이며,
둘째는 復本의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하늘과 땅의 이치를 깨닫고 증거하는 수행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은, 天符經(단군교의 경전)과 함께 韓民族의 3대 경전이며 환웅이 사람들을 교화(敎化)한 경전으로 알려진 三一神誥를 통해, 느낌을 멈추는 止感과 숨을 고르게 쉬는 調息 그리고 부딧침을 금하는 禁觸이라하는 구체적인 수련법으로 전해진다.
셋째는 천부삼인의 전수이며,
넷째는 天祭儀式의 원형으로 보이는 禊祓儀式(계불의식: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일종의 미래부처)을 傳受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네 가지들은 바로 天孫文化의 핵심이 된다.
5.5)최무장의 <중국고고학>
우리 민족 또한 洪積世(일명 빙하시대, 만년~250만년전) 말기에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부근에 살던 세석기 문화인들의 한줄기는 송화강 유역에 정착하여 숙신과 말갈(부여, 숙신, 실위, 말갈 등 고구려 북변지방 민족)이 되었다고 한다. 실지로 길림성 장춘 일대의 西團山에서는 많은 세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 중 한줄기 사람들은 지금의 만주 요녕성의 동북평원에 정착하였으며 그 중의 일부는 황하 유역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고학의 내용에 의하면 환웅과 염제 신농씨가 바이칼 호수 일대에서 홍적세 말기에 만주 요녕성 일대에 내려 왔다가 황하 일대의 태백산과 寶鷄(陝西省의 보계市)라는 이웃한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환웅과 염제신농은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일까?
1958년 이 보계의 북수령이란 곳에서 약 5000년~7000년 전의 신석기 시대 유물과 함께 30여구의 유골들이 옹관 속에 單獨葬 혹은 合葬으로 출토되었다. 또 사방으로 반듯한 집터가 있으며 화덕 터와 항아리 ,농사용 석기, 어구 ,도자기들이 함께 발견된다.
이 보계에서 서쪽으로 가면 天水(甘肅省의 텐수이市)라는 곳에 이르는데 중국 사람들이 인류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태호 복희씨의 고향이다. 천수시 한복판에 명나라 홍치 3년에 세워진 복희 묘가 있다.
5.三省朝
5.1)桓因天帝
天符三印은 상고시대 가장 강력한 통치자이며 제사장의 상징물로 사용했던 거울과 검과 북이라는 說이 있고, 天地人을 나타낸다는 圓,方,角이라는 설과 우주를 나타내는 기본도형을 나타내는 圓,方,角이라는 설 등이 있다.
黃穹氏로부터 천부삼인을 이어 받은 수인씨는 사람들에게 불을 사용하여 밥을 짓는 火食法을 가르치고 천년을 지내고 아들 桓因에게 천부를 전하고 산으로 들어가 禊祓(계불: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미래의 부처)의식을 전하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환인은 천부삼인을 이어받아 인간세상의 이치를 증거하는 일을 크게 밝히니, 이에 햇빛이 고르게 비추고 기후가 순조로워 뭇 생명들은 편한 함을 얻게 되었으며, 사람들의 괴이한 모습이 점점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는 황궁ㆍ수인ㆍ환인 3세가 3천년 동안 하늘의 도를 닦아 실천하는 수증을 했기 때문이었다.
5.2)桓雄天皇
환인으로부터 천부삼인을 계승한 桓雄은 “계불의식”과 “하늘의 도(天雄之道:환웅천왕이 만든 국가철학)“를 완성하였고 단군왕검은 한웅천왕이 만든 국가철학을 실천할 수 있도록 국가의식을 만들었다.
환웅은 바다에 배를 타고 四海를 순방하고, 천부를 밝혀 修身하며, 모든 종족의 소식을 소통하여 근본을 잊지 말라고 호소하고, 집을 짓고 배와 차를 만들고 火食法을 가르쳤다. 순방 후 여덟 나라의 말과 두 가지 문자를 익히고 曆法을 정하고 의술과 천문, 지리를 가르치니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였다.
5.3)檀君王儉
시간이 흘러 사해의 여러 종족들은 천부의 이치를 익히지 아니하고 스스로 미혹함에 빠지니 세상은 고통스러웠다. 이때 왕검은 천웅의 도를 닦아 계불의식을 행하여 환웅으로부터 천부삼인을 이어받았다. 사람들에게 밭을 갈고, 작물을 심고, 누에 치고, 칡을 캐고, 그릇을 굽는 법을 가르치고, 교역하고 결혼하고 족보를 만드는 제도를 공포하였다. 또한 사해를 두루 돌아다니며 여러 종족들을 차례로 방문하고, 천부를 밝히고 수신하고 미혹함을 풀고 근본으로 되돌아 갈 것을 맹세하며 태백산 밝은 땅 정상에 天符壇을 짓고 단군조선을 건국하였다.
5.4)神農
神農은 東夷의 조상으로 태어나서 중국의 조상으로 숭배 받는다.
後代에 神市배달나라를 세운 桓雄天皇의 후예인 복희 또한 풍이출신이므로 결국 환웅천왕과 복희는 환인천제의 후예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웅천황시대에 농관을 지낸 高矢가 있었다. 고시라는 이름이 단군시대에 와서도 “高矢禮” 그대로 지금까지 쓰여지고 있다. 고시 다음으로 농사와 관련된 분은 다의발 환웅인 복희다. 복희 후대에 農事神으로 불리는 神農이 태어났다. 고시, 복희, 신농이 모두 농사와 관련하여 가업을 세습하였다면 같은 집안 출신이라 추측할 수 있다.
寶鷄에 있는 炎帝神農 사당 또한 이들이 赤帝라는 神名으로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도 같은 집안 출신임을 알 수 있다. 환인천제는 풍이출신으로서 赤帝復解(扶蘇普書에서 인용)로 불렀다.
복희 또한 부해로 불려지고 신농을 염제라 불렀다는 점에서 이들이 한집안에서 대대로 불을 관장 해 왔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그를 축융(祝融)이라고 하였으니, 축융은 '불을 다스리는 신'을 일컬음이라, 인류 최초로 불을 쓰기 시작한 燧人氏(수인)의 대를 잇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6.東北工程은 진행 중이다.
6.1)甲骨文字
사마천의 사기에 殷나라는 동이족이 세운나라라고 적었고, 주나라는 “와족”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동이족에는 여러 계열이 있는데, 그 중 “姜族” 출신이 강태공이다. 하남성의 殷墟유적에서 갑골문자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한자와 유사하여 한자의 기원임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
진정한 중국의 독립국가는 周나라에서 시작하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漢나라여서 그들은 漢族이라고 稱한다. 그렇다면 과연 한자는 우리민족이 만든 글자를 중국이 빌려 쓰고 있는 셈인데 어느 날 한민족의 글자로 탈바꿈하였다.
또한 사대사상에 얽매여 우리역사를 올바르게, 떳떳하게 가르치지 못하여 고귀한 우리조상의 역사가 무시당하고 소멸되는 것이 현실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식민사관으로 동북지역문화재 발굴 폐기, 축소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데다가 국조 단군마저 우상으로 몰아세우며 조상을 부정하고 자신을 비하하는 세력이 있는 현실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6.2)遼寧省박물관의 역사 왜곡현장의 遼河文明論
역사는 종종 지배자에게 야합하는 날조된 기록을 남긴다. 반면 고고학은 단지 있는 그대로의 유물만을 남기고 여기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날조할 수 없는 유물에 대하여 역사를 왜곡한 자들에게는 터져서는 안 될 폭탄인데 요하에서 발굴된 유물에서 이미 터졌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나온 것이 요하문명론이다. 유물유적을 통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아니고, 발굴된 유물유적에 중국의 역사를 가져다 꿰맞추는 작업이다.
요하문명론을 뒷받침한 것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부터 줄기차게 논의되어 왔던 中華統一多民族國家論이다. 이 이론의 핵심은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은 중화민족의 일부분이고, 그 역사는 중화민족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우리 민족의 역사가 모두 중국의 역사가 되는 것이고 우리 조상도 중국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랑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고 장성 넘어 야만시 하던 지역이 중화문명의 첫 번째 발현지라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거란은 중국 고대 북방유목민족으로 북방초원에서 일어나 중국 북방의 소수 민족을 통일한 왕조로 중화의 문화를 대거 받아들인 동시에 고유한 요나라의 문화를 창조했는데 漢化科程을 거쳐 중화민족이 됐다는 뜻이다.
遼寧省박물관 요하문명전시관에는 사마천의 사기의 五帝의 전설시대를 역사와 끼워 맞추기 위해 역사상의 실존 인물로 해석하여 역사를 끌어 올리고 요하와 연결 지으려는 목적으로 집안시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중 금동제 관식, 신발, 말안장이 있다. 부여의 유물도 다수 소개된다. 고구려 유물 전시하는 곳에는 민족융합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민족융합이란 고구려는 중화민족이고 중국의 지방정권임을 강조한다. 요동의 公孫(중국의 시조, 黃帝)씨를 소개하고 중원왕조의 판도가 한강 이북까지 미친다는 지도도 걸려있다.
또 만주족, 청나라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포함하기 위하여 만족굴기. 만주족의 興期를 전시하고 동북에서 일어난 여진의 후예 만주족. 청나라를 세워 중원을 차지한 마지막 왕조를 요하문명에 포함시켰다.
遙河가 商나라, 周나라 때부터 북쪽 영토였다며 그것을 유물로 보여준다지만
당시부터 萬里長城을 넘어 통치를 했다는 말인가.
요하유역에는 청동기 문화가 많이 분포하는데 “西周에서 춘추전국시대에 燕나라의 문화가 확대 발전하여 동북의 여러 민족문화와 교류를 하였고, 中原문화와 빈번한 교류를 통하여 점차 융합하여 華夏民族으로 多元一體의 발전을 이루어 널리 동북아지역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요하지역이 商·周시대부터 동이족의 왕조가 아닌 중원 왕조로 탈바꿈 한 것이다.
“요하유역은 동북지역과 중원의 교류의 중심지로 자고이래로 농경문화와 유목문화를 긴밀히 연계하여 서로 교류하고 융합하는 지역이었다. 진한(秦漢) 통일이후 요하유역 대부분 민족이 중원 왕조의 판도에 들어왔다. 위진(魏晉) 이후 중원왕조가 쇠퇴함에 따라 요하유역은 일시 소수민족이 흥기하게 되었다. 서쪽 선비 모용씨, 북방의 부여, 동쪽의 고구려 등이 이 지역을 지배하고 성쇠가 거듭되었다. 중국역사상 방대한 민족 대융합이 이루어져 오래된 화하문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 후로 중국 봉건사회는 성당(盛唐)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 전시된 고구려 유물로는 집안시에서 출토된 금동제 관식, 신발, 말안장이 있다. 부여의 유물도 다수 소개된다. 고구려 유물 전시하는 곳에는 민족융합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데, 이는 고구려는 이때 중화민족이 되었고 중국의 지방정권임을 강조한다. 요동의 公孫(黃帝의 姓)씨를 소개하고 중원왕조의 판도가 한강 이북까지 미친다는 지도도 걸려있다. 통일다민족국가론을 바탕으로 동북 지역의 모든 소수민족이 중화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