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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강해 제 1장 사무엘의 출생
본장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신정 왕국을 건설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사무엘의 출생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는 사사 시대의 말기로 이스라엘은 정치, 경제적으로 쇠퇴하였고 영적으로는 혼돈의 시기였다. 즉 백성들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타락의 외적 요인은 지도자의 부재였으며 이는 왕의 부재로 이어졌다.
1. 사무엘이 태어날 가정 (1;1-8절)
사무엘이 태어날 가정을 언급함으로써 그가 역사적 인물임을 암시하며 그가 레위 지파의 후예임을 언급하여 당시 실추되었던 제사 제도의 권위를 다시 회복시키는 일을 담당할 수 있는 혈통적 자격자임을 보여 준다. 그의 가정의 경건성을 언급하여 사무엘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경건하게 양육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무자하여 하나님께 크게 부르짖었고 또한 태어날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약속한 원인이 되었다.
에브라임 산지는 팔레스틴 중앙부에 위치하며 유대 산지보다 훨씬 비옥하였고 가나안 땅 정복 전쟁 때 제일 먼저 점령된 땅이었다. 이 지역에 위치한 실로는 가나안 최초의 성지이며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장소가 되어 정치 종교 사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에브라임 산지는 에브라임 지파가 거주했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으나 남쪽은 베냐민 자파의 기업이 되었다.
‘라마다임소빔’은 ‘숩 족속들이 사는 고지들’이라는 뜻으로 사무엘 가문의 조상이었던 소배 사람들이 그곳에 정착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베냐민 거주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단순히 ‘고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라마’와 동일한 지역이다.
‘라마’는 사무엘이 태어난 고향이며 그가 활동한 사역의 중심지이며 후일 사무엘이 죽어 장사된 곳이다. 이 지역은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부자 요셉의 고향과 동일한 ‘아리마대’라고 불렀다.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는 본문의 족보와 역대기의 족보에 의하면 분명히 레위 지파가 분명한데 그를 에브라임 사람이라고 한 것은 에브라임 지파가 아니라 그곳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라마는 여호수아에 의해 정식으로 지정된 레위 지파의 성읍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의 조상 숩 사람들이 자신에게 할당된 곳을 떠나 이곳으로 이주해 왔던 것이다.
엘가나-여로함-엘리후-도후-숩이라고 기록된 계보는 역대기에는 다르게 나타난다. 대상6:26-27절에는 여로함-엘리압-나핫-소배로 되어 있고, 역대상6:34-35절에는 여로함-엘리엘-도아-숩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족보는 사무엘의 역사성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경건했던 엘가나까지 중혼의 관습에 물들었다는 것은 사사시대의 영적 도덕적 타락상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브닌나’라는 이름의 뜻은 ‘진주’ ‘보석’ 이며 이처럼 히브리 연인의 이름은 보석이나 꽃이 많이 등장한다. ‘한나’는 ‘사랑스러움’ ‘은혜스러움’이라는 뜻으로 그녀는 자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고 후일 하나님의 은혜까지 입었다.
경건한 사람 엘가나는 히브리 모든 남자는 매년 정한 기간에 중앙 성소로 올라가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율법 규정에 따라 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였다. 율법에는 매년 세 차례씩 올라가야 한다고 되어 있으나 극히 타락했던 당시의 정황에 비추어 이 정도나마 신앙의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은 ‘여호와 체바오트’인데 이 명칭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축약어로서 여기서 최초로 나오는 신명이다. 초기에는 이스라엘 군대를 지휘하시는 하나님으로, 후에는 하늘의 천군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으로 사용되었다.
엘가나는 실로 성소에 올라가서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이 말은 제물과 감사의 헌물, 그리고 기도가 포함된 광의적 의미의 제사이며 그가 제사를 드린 후 가족에게 그 제물을 나누어 주어 먹게 한 것을 보면 이 제사는 화목제였을 것이다. 당시 대재사장은 ‘엘리’였는데 이 사람은 제사장 가문 중에 유력한 비느하스 가문이 아니고 이다말의 후손이었다.
*민4:28 게르손 자손의 종족들이 회막에서 할 일은 이러하며 그들의 직무는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이 감독할지니라.
아론의 아들 이다말의 후손이 대제사장이 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며 그가 혼란한 사사 시대말기에 대제사장직과 사사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유능하면서도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자녀 교육의 실패로 불운한 말년을 맞이하게 된다. 엘가나가 제사를 드릴 당시 엘리 제사장은 노쇠한 관계로 제사장 직무를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맡겼는데 이들은 불량자들로서 부적격자이었고 결국 엘리 제사장 시대의 종말을 재촉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남자는 일 년에 3차씩 중앙 성소에 올라가야 하는데 엘가나가 올라간 절기는 유월절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절기가 가장 큰 절기였고, 전 가족이 함께 가야 하는 절기이기 때문이다. 엘가나는 제사장 몫을 제외하고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제물의 분깃을 나눌 때 브닌나와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몫을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었다. ‘갑절’이라는 말 ‘마나 아하트아파임’이라는 말은 ‘두 사람의 몫’이라는 말이며,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하였고 그에게 하나님의 분깃을 두 배로 주어 자신의 호의를 표현했던 것이다.
한나가 성태하지 못한 것은 ‘사라, 리브가, 라헬, 마노아의 아내’처럼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여인의 태를 여시기도 하고, 닫으시기도 한다. 한나의 불임 역시 꺼져가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회복시킬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을 탄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오묘한 뜻과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로 성태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라는 이 말을 직역하면 ‘그녀의 태를 닫으셨다.’라는 말이다. 이 일로 인하여 그의 대적 브닌나가 한나를 심히 격분시키고 괴롭게 하였다. ‘격분하다’라는 말 ‘카이스’는 ‘괴롭히다.’ ‘충동질하다’ 라는 의미이며 ‘괴롭게 하다’라는 말 ‘라암’역시 ‘자극하여 분노하게 하다.’라는 말로 이 둘을 합치면 브닌나가 무자한 한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여자로 보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엄청나게 괴롭혔다는 것이다.
엘가나는 매년 성소에 올라갈 때마다 그 화목제의 희생양을 한나에게 갑절로 주었는데 이는 한나를 향한 엘가나의 호의가 단순한 동정이 아닌 순수한 사랑에 근거했음을 말해 준다. 이 일로 인하여 브닌나는 시기심이 발동했고 한나를 더욱 격동시켰던 것이다. 엘가나는 울고 있는 한나의 고통을 헤아리고 그녀의 슬픔에 동참하면서 진정으로 위로의 말을 하였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고 했던 것이다. 기쁨의 가족 잔치가 되어야 할 화목제사의 시간이 두 아내로 인하여 격동과 슬픔의 시간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창조의 원리인 일부일처의 제도가 일부다처가 되었을 때 기쁨보다는 슬픔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2. 한나의 기도 (1:9-18절)
무자함으로 인하여 심한 괴롭힘을 당한 한나는 실로의 여호와의 성소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통곡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어 아들을 주시면 그를 일평생 여호와께 바치겠노라고 서원한다. 한나는 자신의 고통을 인하여 기도하지만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아들을 구했던 것이다.
공동식사의 의식이 끝나자 한나는 기도하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앉았다’라는 말 ‘야솨브’는 단순한 휴식을 위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당시는 성전이 건축되지 않았고 성막에서 제사를 드렸지만 ‘여호와의 전’이라는 용어 ‘헤칼’을 사용한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는 그곳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계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시5: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아마도 성막이 약 300년 이상 실로에 있었기 때문에 성막 입구에 문기둥이 세워진 것 같으며 그 곁에 업무를 보기 위한 제사장의 고정된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며 통곡했는데 진정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인간적 슬픔과 고통을 숨김없이 다 내어놓고 애절한 심정으로 간구했던 것이다.
한나의 서원은 아들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는 맹세가 수반된 점에 대하여 ‘나실인의 서원’과 맥을 같이 한다. 나실인의 서원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자기 자식이 소명되었음을 인식한 어머니가 태어날 자식의 평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겠다는 신앙적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삼손의 어머니의 서원은 전쟁과 관계되어 있으나 사무엘의 경우는 성전 봉사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나실인이 머리를 기르는 이유는 머리털을 보존함으로써 자신 위에 자신을 주장하시는 이가 있음을 나타내며,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고전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한나는 ‘만군의 여호와’를 불렀는데 하늘과 땅의 만유를 주장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뢰하면서 무자한 자신의 수치를 거두어 가실 것을 확실히 믿고 소망 중에 호소한 것이다. ‘만일’이라는 말 ‘임 라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의심이 아니라 성취를 확신하는 간절한 믿음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한나는 삼중적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전적인 자비와 긍휼과 은총을 간구했는데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라고 하였다.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돌보시고, 기억하시고, 잊지 말라.’고 다짐하고 다짐했던 것이다.
나실인으로서 자신을 구별시켜 드리고자 할 때에는 그 기간에 따라 서원자는 ‘일평생’ 혹은 ‘일정 기간’을 작정할 수 있었다. 한나는 아들을 일평생 동안 하나님의 성소에서 나실인으로 드릴 것을 서원한 것이다. 레인인은 성소에서 봉사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30세부터 50세까지야 하며 정해진 반차를 좇아 행해졌기 때문에 한나의 서원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서원은 그대로 지켜졌으며 하나님은 사무엘을 선지자로 소명하심으로써 더욱 고상한 형태로 그 서원을 승화시켜 주셨다.
당시의 기도 형태는 큰 소리를 내며 부르짖는 것이 당연시 되었지만 한나는 입술만 움직이며 속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엘리 제사장에게 오해를 받았다. 왜냐하면 화목제를 드리고 난 후 다양한 종교 행사에 포도주를 마셨고 사람들이 술에 취하여 성소를 소란스럽게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포도주를 먹고 취한 줄로 생각하여 슬픔이 많은 여인의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한나의 기도는 자신의 기도에 스스로 몰입하여 하나님 앞에 온 심령을 토로하는 깊고 은밀한 내적 기도였다. 이런 기도는 신앙심이 깊지 않고는 하기 힘든 차원이 높은 고상한 기도인 것이다. 엘리 제사장의 오해는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요 제사장으로서 쇠퇴한 영향력을 반영하는 것이다. 엘리가 평소에 한나와 같은 영적이고도 내적인 기도를 많이 했더라면 그가 한나의 모습을 보고 충분히 그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말년에 영력이 흐려져 성령의 취한 모습을 술에 취한 주정으로 보고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호통을 쳤던 것이다.
한나의 얼굴이 붉게 물든 것은 포도주나 독주 때문이 아니라 무자함으로 겪는 여인의 고통과 수모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흘린 눈물 때문이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에게 답변하기를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라.’고 하였다. 문자적으로는 ‘여호와 앞에 내가 나의 심령을 쏟아 놓았다.’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악한 여자’라는 말은 ‘바트 벨리야알’인데 ‘벨리알의 딸’이라는 의미이다. 벨리알은 ‘혼돈의 세력’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사악하고 무익한 여자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즉 술에 취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를 어지럽히는 사탄의 무리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한나의 겸손한 해명을 듣고 난 엘리 제사장은 자신의 섣부른 꾸중이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오히려 한나에게 제사장적 축복을 빌어 주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한나는 여인으로서 대제사장의 축복 기도를 받는 은총을 입었다. 한나는 엘리 제사장이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고 대신 복을 빌어 주는 호의에 대하여 감사하며 앞으로도 이와 같은 호의가 계속적으로 베풀어지기를 바란다는 말로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답례하였으며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얼굴에 근심의 빛이 없었다. 자신의 내적 깊은 기도를 통하여, 제사장의 축복을 통하여, 모든 근심과 슬픔이 해소 되었던 것이다.
3. 사무엘의 출생 (1:19-28절)
사무엘의 기적적 출생과 그가 하나님께 바쳐지기까지의 전 과정을 언급하고 있다. 한나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실로 성소에서 여호와 경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후에 남편과 동침하고 잉태하고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다. ‘사무엘’이란 ‘여호와께서 들으시다.’라는 뜻으로 사무엘이 기도의 응답에 의하여 태어난 아들이며 하나님께 평생토록 바쳐질 아들이라는 뜻이다.
자식을 낳는 문제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라고 표현했는데 야곱의 아내 라헬의 경우에도 적용되었다. 성경에는 사라, 마노아 부인, 엘리사벳 등 많은 여인들이 아들을 낳기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했는데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기도의 응답으로 출생된 아들들은 모두 그 부모에게 선물로 인정되었다는 것.
둘째, 그 자식들은 모두 하나님께 특별히 헌신된 신앙의 인물들이 되었다는 점이다.
‘생각하다’라는 말 ‘자카르’는 ‘기억하다’라는 말로 한나가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한 기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한나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한나는 사무엘의 출생이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아이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이는 한나가 여호와께 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들으실 일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말이다.
그 다음 해에 엘가나는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실로에 올라갔는데 매년제는 해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지킨 희생 제사의 일종으로 가족 전부가 참여하는 제사였고, 이때는 각종 화목 제물과 한 해의 소산물 중 가장 좋은 것들, 십일조 등을 가지고 성소에 올라갔다. 서원제는 하나님 앞에 올린 서원이 효력이 있도록 확증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모세의 율법에는 아내가 여호와께 서원했다 할지라도 남편은 그 서원을 무효화시킬 수도 있었지만 엘가나는 한나의 서원을 인정했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서원제를 드리기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나는 서원을 지키기 위해 남편에게 ‘아이를 젖을 뗀 후에 데리고 올라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유아의 이유 시기는 약 3년으로 잡았다. 이 기간이 지나면 아이가 자라서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에게 맡겨져 양육될 수 있었고 제사장에 의해 영적 훈련도 받을 수 있었다. 한나의 제안에 대해 엘리 제사장이 한나에게 한 말처럼 그의 남편 엘가나도 한나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축복 기도했다.
아이가 젖을 뗀 후에 한나는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성소에 올라갔는데 수소 세 마리 중 한 마리는 아이를 주께 바쳐 평생을 봉사하게 하는 의식과 관계되는 특별 번제용이며, 또 한 마리는 매년제의 제물이고, 나머지 한 마리는 서원을 이행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감사의 제물이다. 제물을 드리고 난 후 한나는 자신의 말이 진실했다는 것과 그 말이 그대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를 소원하면서 맹세의 기도를 드렸다.
한나는 사무엘의 출생이 전적으로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요 또한 은총의 선물임을 고백하고 그 아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면서 서원을 지켜 아들을 여호와께 드린다고 했다. 이러한 한나의 신앙을 귀하게 보신 여호와께서 그 정성을 기억하시고 그에게 사무엘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허락하셨다.
한나의 신앙의 특징은 두 가지이다.
첫째,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다는 의식이었다. 사실 오래 동안 무자함으로 인해 온갖 수모를 당하고 고통을 겪었던 일을 생각할 때 어렵게 얻은 자식을 여호와의 전에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나는 그 아들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했던 것이다.
둘째, 그는 하나님께 대한 서원의 존엄성을 깨닫고 있었으므로 모성애를 초월한 헌신적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15: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한나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요구를 듣고 아이를 주셨으므로 자신도 여호와의 요구에 따라 아이를 바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독자 사무엘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호와께 진심으로 경배를 드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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