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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劉綎)이 군사를 철수하라는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고 길을 출발하기로 하였다.
7월 13일 두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이때에 동궁이 공주(公州)에 있으면서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를 남원에 보내어 독부(督府)에게 더 머물러 주기를 청하게 하였다. 22일 윤두수는 임실로부터 남원에 도착하고 권율이 또한 산음으로부터 와서 독부를 모시고 연회를 베풀고 더 머물러서 백성을 살려주기를 청하고, 지방의 인민들이 또한 뜰에 들어가 울며, “천병이 한번 돌아가면 적이 반드시 충돌할 것이니, 원컨대 조금 더 군사를 머물러 두어 인명을 구해 살리시오.” 하니, 유정이 조서를 내어 보이며 머물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27일 윤두수는 공주로 돌아가고 다음날 권율은 산음으로 돌아갔다. 순변사 이일(李鎰)이 순천으로부터 남원을 지나 영남으로 향하였다.
○ 유 독부 유진 대방비(劉督府留鎭帶防碑)를 다음과 같이 세웠다.
만력 임진(萬曆壬辰)에 왜놈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므로 황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치게 하였다. 대군이 이르자 평양에서 위엄을 보이고는 드디어 군사의 경계를 늦추고 타일러서 스스로 퇴각하게 하여 삼도(三都)가 차례로 수복되었다. 적이 이미 퇴각하여서는 해안에 머물러 둔치고 여러 번 화친하기를 청하므로, 이에 조정에서 의론하여 여기에 와 머몰러서 진정시키고 복종시킬 만한 한 사람을 선택하여 일을 완성하게 하였는데, 독부 유공이 실로 이 소임을 맡아서 오랫동안 영남에 있어 적이 두려워하고 복종하는 바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여기에 진(陣)을 옮겼는데 한군(漢軍)을 단속하여 도로에서 약탈하지 말며, 또 백성들이 사는 곳을 침노하지 못하게 하고, 또 굶은 백성을 구휼하기 위하여 군량을 절약하고 금을 덜어내어 황제의 덕택을 만리 밖에 퍼지게 하니, 어진 사람이 이익을 줌이 넓도다. 황명(皇明)의 위엄과 덕이 사해(四海)에 끼쳐져 장수된 이가 싸움 잘하는 것만으로 공(功)을 삼지 않으니, 이것이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고 우리 동방을 안정시켜 준 것이 천지의 조화가 자취가 없는 것과 같았으니, 누가 능히 형용하여 표시하리요. 지방 사람들이 서로 모여 태수(太守)에게 고하기를, “우리들이 난리를 모르고 두려울 것이 없어 편안히 살아 생업을 즐긴 것이 그 누구의 힘입니까? 청컨대 돌에다 새겨 일이분(一二分)의 공적이라도 기록하도록 하소서.” 하므로, 태수가 허락하고 그 비용을 주었다. 드디어 그 대략을 추려서 글을 짓노라. 왜적이 우리를 침노하매, 황제가 명하여 토벌하셨네. 실로 깊이 생각해 주심이니, 신과 보[申甫]가 여기 오셨네. 적을 바닷가로 몰아내니, 감히 어기지 못하였네. 끝내 무력을 쓸 것이 아니므로 이에 군사 돌릴 것을 명령하셨네. 여기 남아 머무는 범 같은 신하는 산에 있는 위엄이로다. 용맹하고 지혜로우며 인애(仁愛)를 지니었네. 온화한 안색으로 안과 밖을 일체로 보셨네. 거하는 자는 가정에서 편안하고 떠돌아 다니는 자는 죽음을 늦추었네. 이렇게 장수 노릇하면 어디로 간들 성공하지 못하랴. 적이 간 것은 누구의 힘이며 적이 오면 누구를 믿을까? 천자께서 밝고 성스러워 우리에게 높은 성(聖)을 빌려 주셨네. 공(公)이여! 돌아가심을 빨리 하지 말고 은혜를 끝까지 베푸소서. 통정대부 전 목사 정염(丁焰) 지음. 글 가운데 처음에는 낙상지(駱尙之)ㆍ송대빈(宋大贇) 두 장수가 대방(帶方)에 주둔하였다는 말이 있었으나, 송대빈은 남원에 있으면서 군사를 단속하지 아니하여 관아(官衙)를 침노하여 소요가 일게 하였으므로 고(故) 부사(府使) 조의(趙誼)가 두 장수의 공을 기록하지 말게 하였다. 송대빈은 비록 그러하였으나 낙상지는 원통한 것이다.
○ 남원 동촌의 적은 병정을 나누어 사방으로 나가 양남(兩南) 산군(山郡)을 약탈했다.
8월 2일 도독 유정이 군사를 거느리고 경성으로 향하였는데 접반사 김찬(金瓚)이 따랐다. 중군(中軍)이 다만 1천여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부에 머물렀다. 처음에 명 나라 병사가 각기 우리 여자들에게 장가들어 호남ㆍ영남에서 살림을 차리고 살다가 이번에 철수할 때 모두 따라갔는데 산해관(山海關)에 가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므로 방자(房子)들과 짝을 맞추어 살았다. 전후에 이와 같은 것이 거의 수만에 이르렀다. 그 뒤 만력 36년 기해(己亥)에 모두 찾아왔다. 독부(督府)가 본시 아들이 없었는데 대구에 주둔할 때에 선산 사노(私奴)를 얻어 살았다. 이번 돌아갈 때에 데리고 갔는데 유상공(劉相公)을 핑계하고 기찰(譏察)에서 벗어났다. 사천(泗川)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는데 정실(正室)이 받아 길렀다. 뒤에 무술년 봄에 동정(東征)할 때에 그 여인을 데리고 왔는데 은 수백 냥을 본주인에게 속납(贖納)하였다.
○ 조의(趙誼)가 파면되고 충청 조방장(助防將) 이복남(李福男)으로 남원 부사 겸 본도 조방장으로 삼았다.
12일 독부중군이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향하였다가 모두 명 나라로 돌아가고, 다만 파발(擺撥) 말을 달려 소식을 통하는 군사의 명칭이다. 만 설치하였는데 30리마다 5명을 두어 북경에서 부산진까지 통하는데 길은 호남을 경유하였다. 본국에서도 역시 이와 같이 파발을 설치하였다.
13일 감사 홍세공(洪世恭)이 전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여 근읍(近邑)에 비밀 공문을 띄워 군대를 보내어 내적(內賊)을 잡게 하였다.
18일 홍세공(洪世恭)이 순시하여 운봉(雲峯)에 이르렀다가 20일에 구례로 향하였다.
○ 천조(天朝) 절강 영파부(浙江寧波府) 파총(把摠) 장(張) 이름은 잊었다. 이 수병(水兵)의 길을 탐색하여 살피는데 파총이 서해로부터 전라 좌수영에 대어 남원에 와서 머물다가 경성을 경유하여 명 나라로 돌아갔다.
○ 독포대장(督捕大將) 정기룡(鄭起龍)이 이복(李福)을 잡아 죽이니, 남은 도당이 김희(金希)에게 합쳤다.
9월 학가(鶴駕)가 서울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체찰사 윤두수(尹斗壽)를 보내어 김덕령(金德齡)에게 적을 치기를 독촉하였다. 윤두수가 경성으로부터 남원에 와서 머물면서, 부하 도별장(都別將) 선거이(宣居怡)와 종사관 두 사람을 시켜 수행하는 군사와 내지(內地)의 유방군(留防軍) 수천 명을 거느리고 구례로부터 고성으로 들어가고, 또 도원수ㆍ통제사ㆍ충용장에게 명령을 전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고성에 모여서 거제의 적을 치게 하니, 권율이 산음으로부터 사천에 와서 여러 장수를 독촉하여 들여보내는데, 이순신(李舜臣)이 전선 50여 채를 거느리고 한산도로부터 나와서 영접하였다. 바다에 내려올 때에 곽재우(郭再祐)가 김덕령에게 말하기를, “지금 들으니, 이번 걸음을 장군이 원수에게 자청하여 된 것이라 하니 그런 일이 있었소?” 하니, 김덕령은, “아니요.” 하였다. 곽재우가, “장군이 바다를 건너 적을 멸할 자신이 있소?” 하니, 김덕령이, “아니요.” 하였다. 곽재우가, “국가에서 믿고 일을 시작하는 것도 장군을 믿는 것이요, 군사들이 믿고 적에게로 달려가는 것도 장군을 믿는 것인데, 지금 장군의 말이 이와 같으니, 국가에서 누구를 믿고 일을 하며 군사들이 누구를 믿고 적에게로 달려가리요.
우리들은 모두 오늘날 쓸 만한 재주가 못 되고, 오늘의 일은 일개 장군의 명령을 따른 연후에라야 거의 희망이 있는 것이니, 원컨대 장군은 한 마디 말로 결단하여 여러 사람의 의심을 풀어 주시오.” 하였다.
김덕령은, “나도 역시 이번 일의 자초지종을 알지 못하오. 굴에 들어 있는 적을 어찌 치겠소?” 하였다. 곽재우는 길이 한숨을 쉬며 “아! 일을 알겠소. 오늘의 일은 장군의 용맹을 시험하자는 것이요. 장군의 이름이 왜적에게 크게 알려져 있기 때문에 기운 빠진 적들이 해안으로 퇴각하고 겁내어 움츠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인데 혹시 지금 가벼이 전진했다가 약함을 보인다면 뒷날을 도모하는 계책이 아니오.” 하고, 곧 급히 원수에게 보고하기를, “왜적이 험한 데 웅거하여 도저히 어찌할 방책이 없는데 가벼이 나아갔다가는 또 장군의 위엄을 손상할 것이니, 오늘의 일은 실로 낭패입니다. 물러나 몸을 보전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며 하루에 세 번 소식을 알렸으나, 원수가 듣지 않으므로 모든 장수들이 부득이하여 배에 올라 왜영으로 향해 전진하니, 적의 대진(大陣)에서 깃발을 두르며 성에 올라 기다렸다. 선거이가 김덕령에게 이르기를, “장군의 용맹을 이날에 보일 만하오.” 하였다. 김덕령이 두 손으로 충용익호장군의 기를 뱃머리에 세우고 음악을 베풀고 북을 치고 소리지르며 전진하였다. 배가 서로 가까워지자 철환이 비오듯 쏟아져서 겹쳐서 뚫지 않음이 없게 되자, 김덕령이 어찌할 도리가 없어 배를 끌어 퇴각하고 여러 장수들이 모두 본영으로 돌아왔다. 이러므로 장군이 더욱 여러 사람의 기대를 잃었고, 더욱 좌상(左相)에게 잘못 보여 마침내 목숨을 잃기에 이르렀다.
○ 곽재우로 진주 목사를 삼았다.
10월 내적(內賊) 김희(金希)가 진안ㆍ전주의 지경에 주둔하였는데 전주 판관이 군사를 내어 토벌하다가 군사가 무너져 돌아왔다.
9일 윤두수가 남원에 머무는데 권율이 영남으로부터 와서 보았다.
11일 홍세공이 남원에 도착하였다.
13일 좌상이 경성으로 돌아가고, 권율은 영남으로 돌아가고, 홍세공은 곡성으로 향하였다.
○ 권율이 전라병사 이시언(李時言)을 본도에 보내어 내적을 잡게 하니 23일 이시언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왔다가 곧 전주로 향하였다.
○ 내적 고파(高波)가 그 도당 8명을 거느리고 몰래 남원 남산 밖 이교점(梨橋店)에 이르렀으므로 점인(店人) 본부에 와서 고하였다. 판관 김유(金騮)가 군사 4백여 명을 내어 길을 나누어 전진하여 새벽에 몰래 포위하니, 적병이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밥을 지어 먹고는 활에다 화살을 매겨 돌출하여 관병(官兵)을 쏘아대니 관병이 무너져 도망하고 적은 산위로 도망하였다. 판관은 군사를 거두어 퇴각해 돌아오는데 고파는 숙성령(宿星嶺)에 달려 이르러 길목에 매복하였다가 김유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일시에 돌발하매 우리 군사는 맞아 싸울 생각도 못하고 앞으로 달아나고 뒤로 퇴각하였다. 고파는 승세를 타서 추격하여 원주원(原州院) 밑에 이르러 김유의 말 안장을 쏘아 맞히니, 김유는 겨우 몸만 빠져나와 달아나 성중에 들어왔는데, 말 10여 필을 잃고 상한 군졸도 역시 많았다.
○ 이해에 목화(木花)가 흉년이 들어 거의 절종이 되었다.
○ 권율이 김덕령으로 제관(祭官)을 삼아 진주 전망(戰亡) 장사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아! 슬프도다. 하늘을 보니 아득하고 땅을 굽어보매 답답하구나. 한 조각 땅의 전장은 만고에 의로운 구역이로다. 눈물을 닦으며 잔을 올리고 성의를 다해 진술하네. 전쟁의 변이 어느 시대인들 없으리요마는, 슬프다! 우리 동방에 어찌 이런 날이 있는고. 흉한 칼날 이르는 곳에 전부가 건국(巾幗)이었네. 금성탕지(金城湯池)가 견고하지 못하여 함곡관(函谷關)이 닫히지 못했네. 하물며 이 진주에 적병 백만이 합세하였음에랴. 칼을 던지며 갑옷을 끌고 지킬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우리 장사들은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생각하여 소리를 같이 하고 기운을 같이 한 이가 5백 명뿐이 아니었네. 죽기로 결단하고 날로 많은 적과 싸웠네. 사람은 순원(巡遠)이요, 성은 수양(睢陽)이었네. 산천이 기색이 동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네. 아! 슬프도다. 용과 봉이 힘이 다 되었으니 이 적들을 어찌하랴. 밖에 개미 새끼 만한 구원병도 끊어졌으니 사방으로 돌아보매 하란(賀蘭)이로다. 양번(襄樊)을 구원할 이 없으며 누가 한단(邯鄲)의 포위를 풀어주랴. 독한 불길이 문득 솟구치매 밝은 날이 이미 어두웠네. 다시 무슨 말 하랴. 옥과 돌이 함께 탔네. 저 긴 강을 보니 노중련(魯仲連)의 동해로다. 신하되고 자식되었다가 무슨 죄 무슨 액운인고.
아! 슬프도다. 옛적에 신안(新安)이 있고 또 장평(長平)이 있었네, 백기(白起)는 속여서 섬멸했고 항우(項羽)는 포학하게 무찔렀네. 비록 애통하고 불쌍하다 하나 다 같은 언덕의 흙이라도 어찌 충의가 모인 이 성과 같으랴. 산처럼 높이 쌓인 전골(戰骨)이 모두 순국(殉國)함이로세. 비참하게 바람 서리 맞았고, 처량하게 별과 달이 비추네. 살아서 이미 열렬(烈烈)하였거니, 죽어서 어찌 귀신이 되랴. 만약 돌아와 묻힌다면 어느 곳이 선영인고. 아! 슬프도다. 여러 날을 싸우니, 북소리 쇠하고 기운 다 되었네. 성은 비록 함락되었으나 적도 역시 넋이 빠졌네. 길이 몰던 기세 꺾이어 국토에 결함 없었네. 수양(睢陽)과 더불어 앞뒤에 공이 한가지로다. 조정에서 제사를 내리니, 죽음을 위로할 뿐이 아니로다. 종정(鍾鼎)과 죽백(竹帛)에 공훈(功勳)이 부끄럼 없으리. 김덕령은 재주는 국사(國士)가 아닌데 외람되이 장수의 직책 맡았네. 군사를 모아 감격하여 이 한 굽이에 주둔했네. 분하여 일어나 앉아 칼로 땅을 찍고 길이 탄식하네. 오히려 충혼(忠魂)들을 저버렸으니 장부되기 부끄럽네. 박한 제수를 갖추어 감히 임하시길 바라오. 속절없이 영웅으로 하여금 원통한 눈물 흐르게 하도다. 아! 슬프도다. 백골을 만들었을지라도 그 영(靈)을 없애지 못하였으리. 응당 여귀(厲鬼)가 되고, 혹은 음병(陰兵 귀병(鬼兵))이 되고, 혹은 아래로 쇠나 돌이 되고, 혹은 위로 뇌성 벼락이 되어 능히 가만히 도와서 더러운 소굴을 소탕하고서야 혼령이 돌아와서 비로소 그 눈을 감으리. 아! 슬프도다. 진산(晉山)은 높고 높으며, 남강수는 출렁이네. 길고 긴 이 원한은 산이 높고 물이 길도다. 엎드려 바라건대, 흠향(歆饗)하옵소서. 안희(安喜) 지음
○ 왜놈 통역 요시라(要時羅)는 행장의 부하인데 경상 우병사의 진(鎭)에 나들면서 성의를 바치며 우리나라 사람 되기를 원하므로 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특별히 후대하고 원수에게 보고하여 포상(褒賞)을 후히 주었다. 이러므로 무상(無常)으로 왕래하는데 저쪽에 돌아갈 적에는 아롱진 옷을 입고 여기 올 적에는 우리 의관을 착용하며 왜중(倭中)의 소식을 일일이 전해 주었다.
○ 이순신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한산도에서 과거를 보여서 무신(武臣) 1백 명을 뽑아서 주사급제(舟師及第)라 칭하였다. 전주 급제ㆍ합천 급제ㆍ영유(永柔) 급제 등의 칭호와 같은 것이다.
○ 김덕령이 연달아 범 두 마리를 때려 잡아서 왜놈의 병영에 자랑하여 팔았다.
○ 순창(淳昌)ㆍ태인(泰仁)의 회문산(回文山) 안에 있는 도적이 그 수가 몹시 많아서 남원 동촌의 도적과 더불어 왕래하여 서로 연락하면서 대낮에 횡행하고 나들며 도적질을 하는데 근지의 관군(官軍)이 여러 번 패하였다.
11월 왜장 평행장(平行長)ㆍ의지(義智) 등이 요시라를 경상 우병사의 진으로 보내어 기일을 정하여 함안(咸安)에서 서로 만나 화친을 의론하자 하므로 김응서(金應瑞)가 원수에게 보고하자 권율이 조정에 급히 아뢰어 김응서로 하여금 가서 왜적의 실정을 탐지하게 하였다.
21일 김응서가 정예한 군사 1백여 명을 뽑아서 거느리고 먼저 함안 지곡현(地谷峴)에 이르니, 행장이 사람을 시켜 문안하더니 조금 있다가 현소(玄蘇)ㆍ죽계(竹溪)ㆍ조신(調信) 등이 군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와서 먼 곳에서 말을 내려 걸어서 정청(正廳)에 들어와 서로 읍(揖)하고 초상(超床)에 앉았다. 현소 등이 먼저 말하기를, “성화(聲華)를 오랫동안 사모하여 매양 한 번 뵈옵고자 하였는데 오늘 외람되이 뵈옵게 되니, 지극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하였다. 병사가 답하기를, “대인(大人)들이 전일에 우리나라에 내조(來朝)하였을 때에는 나는 마침 북도의 임지(任地)에 있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지금 다행히 서로 만나니 매우 감사합니다.” 하였다. 현소 등이 답하기를, “오늘날 여기 온 것은 대명(大明)이 우리의 조공(朝貢)하기를 허락한 일을 의론하고자 한 것이니 사또께서는 성사할 도리를 가르쳐 주시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병사가 답하기를, “대명에서 조공을 허락하는 일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행장ㆍ의지가 와서 참석한 뒤에 일을 의론함이 가합니다.” 하니, 그들은 “말씀이 옳습니다.” 하고, 침묵하고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병사는, “당신들이 모두가 당관(唐冠)을 썼으니 마음도 당체(唐體)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어찌 마음에 없이 당례(唐禮)를 본받겠습니까? 사또 앞에 와 뵈오려고 이렇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진시(辰時)에 행장ㆍ의지가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앞에서 인도하는 창검이나 조총을 든 사람, 짐꾼이 거의 3백여 명이 길에 가득하게 이르러 장막 50보 밖에서 말에서 내려 대포를 세 번 쏜 뒤에 행장ㆍ의지가 일시에 칼을 풀고 걸어서 정청에 들어와서 서로 읍하고 초상(超床)에 앉았다. 3천 왜병이 일제히 연포(連炮)를 쏘고 일시에 고함을 치니 뭇 왜인들은 숨어 엎드려 고요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사또께서 추위를 무릅쓰고 먼저 이르렀으니 황송하옵고 황송합니다.” 하였다. 병사는 답하기를, “이름을 들은 지 이미 오래인데 지금 다행히 서로 보게 되니, 실로 우연함이 아닙니다.” 하니, 손을 모아 답례하고 말하기를, “오늘 아침은 매우 추워 상(床)에 앉기가 좋지 않으니 평좌(平坐)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병사가 그 말을 따라서 평좌하니, 현소ㆍ죽계ㆍ조신은 꿇어앉고 행장은 간혹 위좌(危坐)하고 의지는 옴[疥瘡]이 올랐으므로 앉기가 불편하여 다리를 세우고 기우뚱하게 앉았다.
여러 왜추(倭酋)는 모두 두려운 마음이 있어 말도 잘 하지 못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오늘 어려운 위험을 헤아리지 않고 와서 사또를 뵈옵는 것은 우리의 소회를 진술하고자 함이니 터놓고 말씀해 주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병사가 답하기를, “나는 별로 털어놓고 말할 일이 없고 다만 대인의 말을 들어 그 가하고 불가함을 채택하여 원수부(元帥府)에 보고할 뿐입니다.” 하니, 행장ㆍ의지ㆍ현소ㆍ죽계ㆍ조신과 왜통역 요시라 외에는 좌우의 사람을 물리치고 병사의 앞에 머리를 모으고 말하기를, “일본이 천조(天朝)에 대하여 조공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한 지 3년이 되도록 결정을 얻지 못하여 멀리 타국에 와서 장수와 군사가 모두 고국을 그리워하여 하루를 보내기가 삼추(三秋)와 같습니다. 전일에 심유경(沈惟敬)이 천조에 왕래하여 이미 조공과 봉왕(封王)할 것을 허락하여 천사(天使)가 장차 나올 즈음에 조선과 유 총병(劉總兵)이 아뢰어 중지시켰다니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였다. 병사는 답하기를, “나는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말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대명 석노야(石老爺) 이름은 성(星)인데 이때에 병부 상서(兵部尙書)로 있었다. 가 요동에 있는 대인과 편지로 소식을 통하기 때문에 알았습니다.
원컨대, 조선에서 천조에 아뢰어 힘을 도와주면 세 나라가 화평해져 남은 백성이 편안히 살고 우리들도 귀국할 것이니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병사가 답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지금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조선과 일본은 한 하늘 밑에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인데, 더구나 천조에서 일본에 조공을 허락하는 일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일본이 군사를 일으켜 나온 것은 본시 조선을 공격하려는 뜻이 아니라 대명에 대하여 조공을 트고 화친을 청하려 하는 뜻인데, 조선의 장수들이 군사로 대항하므로 부득이 서로 싸워서 해를 끼친 것입니다. 이러한 곡절은 평화롭던 전일에 현소ㆍ조신ㆍ의지 등이 예조 판서 및 선위사(宣慰使)이던 이덕형(李德馨)ㆍ오억령(吳億齡)ㆍ심희수(沈喜壽)와 부산 첨사(僉使) 이의(李艤)ㆍ통신사(通信使) 여러분 앞에 이 뜻을 극력 진술하였는데도 귀국의 장수나 정승들이 다 신청(信聽)하지 아니하고 병기도 갖추지 않아 이렇게 패하였으니, 우리들도 역시 탄식하고 한하는 바입니다. 일본이 장차 조선에 의탁하여 대명에 아뢸 일로 군사가 건너오는 날에 문서를 부산 남문 밖에 걸었는데, 부산 첨사가 보지 않고 응전하여 우리 일본 군사를 죽이므로 부득이하여 그 성을 함락시켰고, 동래에 이르러 또 문서를 보여도 또한 답하지 아니하고 한갓 무기만 허비하여 일본 군사를 마구 쏘므로 또한 부득이하여 성을 함락시켰더니, 동래 부사가 갑옷 위에다 홍단령(紅團領)에 사모(紗帽)를 쓰고 손을 모아 교의(交椅)에 앉아 일본 군사가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여도 조금도 요동함이 없이 목을 베려 하는데도 조금도 안색을 바꾸지 않고 한 번도 눈을 들지 아니하고 입을 다물고 말이 없으므로 무지한 왜병이 머리를 베어 나에게 바쳤습니다. 나는 동래 태수에게 전부터 은혜를 입었으므로 곧 염습(歛襲)하여 동문 밖에 묻고 기둥을 세웠으니, 이것은 요시라가 자세히 압니다. 만약 유족이 있어 해골을 찾는다면 가리켜 드릴 생각입니다.
그의 첩은 여종 네 사람ㆍ남종 두 사람을 거느렸는데 더러운 욕을 보이지 않고 대마도로 들여보내었더니 관백(關白)께서 말씀하시기를, ‘재상의 첩을 데려오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도로 동래로 보내어 조선에 넘겨주려 하였으나 그때에는 조선 사람이 하나도 출입하지 않으므로 통지할 수가 없어 그대로 부산에 두었다가 금년 3월에 관백이 도로 데려 왔습니다. 이 여인은 나이 30여 세인데 아들이 있다 합니다.”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관계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재상의 고물(故物)이라 하여 더럽혀 욕보이지 아니하고 그 노비(奴婢)를 시켜 보호하고 있으면서 다행히 만약 화친이 되면 내보낼 생각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동래성이 함락할 때에 울산 군수로 이름은 모르나 수염 많은 자가 일본 군사에게 잡혀서 항복을 빌며 살려 달라 하므로 내가 일본이 요구하는 일과 조선의 화복(禍福)을 말한 서한(書翰)을 주어 내보냈는데, 그 사람도 역시 조정에 전하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 후회 막급입니다. 그 사람이 살았는지요? 이것은 우리가 조선을 괜히 해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3국이 화친할 일을 지시함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일본이 천조로 향하려고 길을 빌려 달라 하였는데 우리나라는 대명 섬기기를 자식이 아버지 섬기듯 하므로 일이 되지 않은 것이니, 강화(講和)가 더딘 것도 우리나라의 허물은 아닙니다. 조선과 일본이 전처럼 좋게 사귀는 것도 오히려 어렵거늘 하물며 천조에서 조공을 허락하는 일이겠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대명이 왕을 봉하는 것과 조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도 다 일본의 허물입니다. 심유경이 두 번째 강화를 약속하자 일본 군사가 해안으로 물러왔으니 이것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대국을 섬기는 뜻이요, 또 전날 이웃 나라 사귀던 의리를 잊지 않은 것이니, 두 대인이 사리를 살펴 잘 처치하는 것에 깊이 감복합니다.
이미 천조와 더불어 동래에서 강화를 약속한 뒤에 우리 진주를 함락시키고 우리 농민의 벼를 짓밟고 우리 남녀를 죽였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나라가 두 대인의 강화하자는 말을 믿지 아니하여 비록 군사가 피곤하고 양식이 다 되어 스스로 세력이 약한 줄 알면서도 조정에 있는 신하들과 들에 있는 백성들이 다 죽은 뒤에야 말려고 합니다. 내가 전일에 좌도(左道)에 있을 때에 동래 사람에게서 세 대인이 우리나라에 성의를 표시한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특별히 이홍발(李弘發)을 보내어 뜻을 알아보았습니다. 예로부터 전쟁하는 데는 사자(使者)가 그 중간에 왕래한다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천병이 역시 두 대인과 청정에 서로 연락한 것이며, 지금 우리나라 조관(朝官)도 역시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좌도에 있는 이는 혹 청정과 서한(書翰)으로 연락을 통하고 우도에 있는 이는 혹 두 대인과 통하는 것입니다. 나도 두 대인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적지 않으므로 좌도에 있을 때에 웅천(熊川)으로 사자를 보내었고, 지금 또 편의를 취하여 우도로 자리를 옮겼으니, 두 대인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일에 유 독부(劉督府)와 더불어 함께 팔거(八莒)에 있을 때에 청정에게 여러 번 서한을 보내고 청정의 사자를 통하여 들으니,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모두 두 대인 때문이요, 또 왕자를 돌려보내는 것은 모두 청정의 공이라 하므로 우리 나라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다 청정을 고맙게 생각하여 말을 통하려 합니다. 대인들이 우리나라에 대명을 통하는 길이 있는 줄을 알았고, 또 관백이 우리나라를 칠 수 있는 줄 아는 것도 대인 등이 말한 것으로 관백이 군사를 발동시켰다 하는데, 이것도 또한 청정의 말입니다. 청정이 또 유 독부에게 말하기를, “행장은 관백을 속이고 심유경은 황제를 속였는데 행장이 관백에게,‘천자가 마땅히 공주(公主)를 관백의 아들에게 시집보낼 것이다.’ 하고, 심유경은 황제를 속이기를, ‘행장이 이미 모두 철병하고 다만 1ㆍ2진(陣)만이 부산에 머물면서 명 나라에서 왕으로 봉해 주고 조공을 허락하는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였는데 지금까지 웅거하여 물러가지 않고 있으니, 대인이 만일 바다를 건너 가지 않으면 천자도 또한 왕으로 봉해주고 조공을 허락할 리가 만무합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다만 화친만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두 대인이 반드시 관백에게 죄를 얻을 것입니다.” 하니, 청정의 이 말이 어떠합니까? 우리가 종묘 사직의 원수를 잊고 두 나라 백성을 생각하여 이와 같이 목숨을 내놓고 왔습니다.
만일 일본 군사가 바다를 건너가지 아니하여 천자께서 왕을 봉해주고 조공 허락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는 마땅히 대명의 명령을 따라야 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난 7월에 천자께서 일본 군사가 바다를 건너가지 않는다 하여 절강 영파부(浙江寧波府) 장파총(張把摠)으로 하여금 배를 타고 수전(水戰)할 길을 살펴 보았으며 명년 4월에는 민(閩)ㆍ광(廣)ㆍ호(湖)ㆍ절(浙)ㆍ천진(天津) 등지의 수군을 거느리고 올 것인데, 다만 우리나라가 양식이 다 되었고 천조에서 배로 운반하는 남경(南京) 곡식이 아마도 4월 전에는 미처 오지 못할 것이니, 다행히 그때가 되기 전에 혹 담(潭) 나는 의심컨대 지금 왜영에 가 있는 담 도사(潭都司)인 듯 하다 으로 하여금 손노야(孫老爺)이름은 헌(憲)인데 지금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동정군무(東征軍務)를 경략(經略)하는 분이다. 의 군문(軍門)에 글을 보내어 다시 화친을 청함이 어떠하겠습니까? 대마(對馬)ㆍ일기(一岐) 등 섬은 우리나라와 서로 가까우므로 풍속과 언어가 아주 다르지 않습니다. 듣자하니 전쟁이 났을 때에 우리나라의 난을 피한 사람들이 대마도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살고 다른 섬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죽었다 하며, 우리나라 사람도 역시 그리하여 비록 한창 싸울 때에 있어서도 대마도 사람인 줄 알면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비록 천백 년 뒤에라도 일본 사람들은 두 대인이 군사를 철수하여 사람들을 살렸다고 할 것이며, 조선서도 역시 우리들이 교섭하여 나라를 편안케 하였다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일찍이 두 대인이 우리나라에 성심을 다한 일을 우리 전하(殿下)께 아뢰었으니, 이 뒤에는 비록 비밀리 말할 일이 있더라도 다만 나에게만 통하고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가합니다. 세 대인은 모름지기 마음으로 깊이 알아 두시오.” 하였다. 행장이 답하기를, “진주를 함락시킨 일은 관백의 명령인데 전진만 있고 퇴각은 없다 하므로 사세가 부득이하여 나아가 공격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을 비워서 백성을 살리라고 내가 심 유격(沈遊擊)을 통하여 미리 알렸는데도 조선이 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것은 내가 공순하지 못한 죄가 아니요, 조선을 정벌하는 일도 역시 내가 주장한 일이 아닙니다. 일본 여러 장수들이 관백 앞에서 의론하여 정한 일인데 청정이 나를 헐뜯어서 무함하여 말했으니 극히 통분합니다. 또 황녀(皇女)에게 구혼(求婚)한 일도 역시 나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대명은 천하의 대국이요 일본은 바다 귀퉁이의 작은 나라인데 어찌 감히 천조에 대하여 혼인하는 일을 구하겠습니까? 관백이 비록 허무하여 설사 이런 마음이 있어 대명에게 말을 전하더라도 대명에서 딸이 없다고 답하면 어찌하겠습니까? 중간에서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의 지어낸 말인 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청정이 본시 나와는 매우 좋지 않은 사이이니, 반드시 이 사람의 말일 것입니다. 듣자하니 전일에 조선 승장(僧將 유정(惟政))이 청정의 진중에 갔을 때에 청정이 혼인을 요구하고 땅을 베어 달라는 말로 명 나라를 공갈하였다 하니, 그 문서가 있습니까? 비록 서명한 문서는 없더라도 예조(禮曹)에서 이 일을 가지고 문서를 만들어 나에게 보내주면 곧 관백에게 보낼 터이니 청정으로 하여금 죄를 받게 하고 군사를 철수하여 돌아가도록 할 것입니다. 대[竹]를 베고 뽕나무를 베어 경계를 나누고 공갈하였다는 문서를 찾아 보내시오. 두 왕자를 호송한 공으로 청정이 스스로 생색을 낸다 하니 그렇습니까? 청정이 장차 죽이려고 하는 것을 내가 극력으로 관백에게 여쭙기를, 왕자의 있고 없는 것이 승패(勝敗)에 관계가 없는 것이니 속히 조선 전하에게 돌려 보내는 것이 옳다 하였더니 관백(關白)이 그렇게 여기었으며, 명나라 사신 이 명 나라 사신이 누군지는 자세히 모르겠다. 은 한 때에 내가 해상에서 친히 모시고 김해에 이르러 호송하였으니, 나의 공 있고 없는 것은 모두 두 왕자와 황 승지(黃承旨)황혁(黃赫) ㆍ이 병사(李兵使)이영(李榮)이다. 이들은 계사년에 살아서 돌아왔다. 의 심중에 있습니다.
조선의 종묘 사직을 헐고 부순 것은 우리들도 역시 부끄러워합니다. 그때에 서울을 지키던 왜장이 군사를 단속하지 아니하여 무덤을 팠다는 말을 듣게 되었으니, 더욱 황송하고 부끄럽습니다. 명 나라가 수군을 발동하여 일본 군사를 소탕하겠다 하니 이것은 잘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비록 다 죽더라도 관백이 반드시 분노하여 대군을 발동하여 해마다 조선을 공격하면 조선은 두 나라 사이에 있어 절로 다 될 형세가 있을 것이니 큰 걱정이 아닙니까? 조선이 힘써서 봉공(封貢 조공을 허락하고 왕을 봉하는 것)의 일을 아뢰어 군사를 풀어 환국하게 한다면 일본은 조선의 은덕을 알 것이요, 조선은 일본이 분노를 풀었다 할 것이니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병사가 답하기를, “조선에서 들은 말로는 일본이 강화(講和)한 뒤에 거년 11월에 경주 땅에서 왜적이 충돌하여 천병을 많이 죽였는데도 심 유격이 황제를 속이기를, ‘일본 군사가 다 철수하고 다만 행장ㆍ의지만이 부산에 남아 있어서 봉공을 허락할 시기만을 기다린다.’ 하여, 황제는 일본이 공순한 것을 기뻐하여 곧 봉공을 허락하였다가 천사(天使)가 장차 나올 즈음에, 또 일본 군사가 한 진(陣)도 바다를 건너간 것이 없고 조선의 지경에 머물러 있으면서 40여 진이 주둔하여 천병을 많이 죽이기까지 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황제께서 크게 노하시어 곧 봉공의 명령을 회수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행장은 말하기를, “어찌하면 성사가 되겠습니까?” 하자, 병사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일도 오히려 상세히 알지 못하는데 천조의 큰 일을 어찌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서는 세 대인이 의론해서 모든 진의 군사가 다 건너가고 다만 1ㆍ2진만 남아 항복하겠다고 청하는 글을 올린다면 성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 군사로 매우 악한 자는 청정의 임랑(林浪)ㆍ두모포(豆毛浦)ㆍ양산(梁山)ㆍ구법곡(九法谷)ㆍ거제(巨濟)의 진이니, 이 진의 사람들은 악한 자끼리 서로 어울려 자주 백성을 노략질합니다. 이러므로 조선의 장수들이 통분하여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성사하는 도리는 여러 장수가 마음을 맞추고 힘을 같이한 연후에야 일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내가 듣기로 청정과 대인 두 사이에 어긋나는 일이 많이 있다 하니 청정이 있고는 대인의 바라는 일이 마침내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청정과 모든 진을 다 들여보내고 대인들만 남아 있어 도모한다면 거의 성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내가 청정을 극히 나쁘게 생각하여 죄주려 하나 죽일 만한 일이 없으니, 분(憤)대로 할 수 없어 극히 절통(切痛)합니다. 조선 전하께서 청정의 죄를 가지고 나에게 글을 내려주시면 어느 진이나 들여보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대인의 말이 이와 같으니, 연유를 갖추어 원수부에 급히 보고하여 원수가 전하께 아뢰면 전하께서 힘껏 하실 것입니다.” 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1ㆍ2진만 남아서는 외롭고 약할 듯합니다. 타국에 군사가 나왔는데 어찌 뜻밖의 염려가 없으리요. 좌우도에 별처럼 벌여 결진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일본 군사의 양식을 싣고 나올 때에 바람이 순하지 못하면 배 닿을 곳을 정할 수 없으므로 거제 서생포(西生浦)로 한계를 삼고 있습니다.”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약속을 정한 뒤에 일본 배가 비록 표류되어 전라도에 도착하더라도 잡아 죽이지 아니하고 대인의 진으로 반드시 보내줄 것이니, 의심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여러 진을 들여보내면 명 나라에서 일본의 뜻을 알고 허락하는 명령이 곧 내릴 것입니다.” 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장차 생각하여 급히 관백에 아뢰려고 하니, 조선이 일본 봉공의 일을 명 나라에 아뢰어 주면 그 은덕은 천추(千秋)에 어찌 잊으리요. 성사한 뒤에는 나를 신하로 삼더라도 나는 싫어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원수를 봉공하여 주라고 아뢰는 것은 결코 시행할 수 없는 일이나 대인들이 전일의 잘못을 진술하여 항서(降書)를 만들어 나에게 와 원수부에 보내주면 그대로 급히 전하께 아뢰어 대명에 아뢰게 하면 혹시 될 수도 있을 것이오. 이 밖에는 별로 다른 묘한 계책이 없으니 대인들이 상의하여 급속히 선처하시오.” 하였다. 행장이 답하기를, “우리들의 항서(降書)를 명 나라에 바치는 것은 비록 죽을지라도 그대로 좇겠으니 항복하는 조건을 사또께서 초고를 만들어 주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당신의 항복하는 글을 어찌 내가 초고를 만들겠습니까? 당신들이 상의하여 편의하도록 함이 옳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말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만일 왕으로 봉한다면 명나라의 정삭(正朔)을 쓰겠습니까? 일본의 정삭을 그대로 쓰겠습니까?” 하니, 행장은, “어찌 명 나라에게 봉함을 받고서 명 나라의 정삭을 쓰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해가 저물어 일일이 말하지 못하고 병사가 원수부의 공문과 타이르는 조목과 재상(宰相)의 자제로 포로가 된 사람의 성명과 어느 날 어느 날에 적병이 나와서 분탕질했는지의 기록을 내보였더니 현소(玄蘇)가 혼잣말 하기를, “재상의 자제로서 포로가 되어 여기에 있는 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서 내보내겠으며, 일본에 들어가 있는 자도 역시 찾아 보내겠으나 죽은 자는 할 수 없고, 일본 사람이 몰래 산막(山幕)에 출입하여 해를 끼치는 것은 우리들이 몰랐던 일로 통분하기 막심하니, 이로부터는 엄하게 단속하여 그 폐단을 막아서 귀국의 남은 백성으로 하여금 옛터로 돌아와 안정을 찾아 농사에 힘쓰도록 하겠습니다. 항복하는 일은 우리들이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비록 천조에 항복한다 하더라도 조선은 어찌하려는 것입니까? 일본 관백이 더욱 분노하여 대병을 들어서 해마다 침범하면 그 걱정을 어찌 감당하렵니까? 이와 같이 도리에 당치 않은 일로 권유하는 것은 미안한 것 같습니다. 원수가 항복하기를 권유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3국이 강화하여 각기 그 나라를 지켜서 국가를 억만 년 동안 편안케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 중간에는 빠진 말이 많다. 병사는 진으로 돌아오고 여러 왜추들은 소굴로 돌아가는데 읍하고 작별할 때에 세 왜졸이 대포 세 발의 소리를 따라서 일제히 연포(連炮)를 놓고 일시에 고함치며 엎드렸다. 여러 왜추가 걸어 나가서 처음 내렸던 곳에서 말에 오르니 뭇 왜인들이 높은 소리로 서로 응하고 일시에 일어서서 앞에서 인도하고 뒤에서 옹위하여 차례로 갔다. 그 뒤 만력(萬曆) 39년 신해(辛亥 1611, 광해군 3)에 김응서(金應瑞)는 세 소인에 들게 되어 전라 병사로서 파면을 당하였다가 43년 을묘(乙卯 1615, 광해군 7)에 용서하는 은혜를 받아 함경도 북병사에 임명되었다. 세 소인은 심유경ㆍ김응서ㆍ요시라이다.
○ 명 나라에서 낙타 10여 마리로 물건을 실어 내보냈는데 높이는 한 길이 넘고 길이는 3ㆍ4파(把)요, 모양은 염소와 같은데 뿔은 없고, 발은 소와 같은데 털이 많고, 등의 살안장[肉鞍] 앞뒤에 혹이 났고, 한 번에 소금 세 말을 먹는데 혹의 강하고 약한 것은 염분의 많고 적음과 관련이 있다. 짐을 실을 때에는 엎드려서 기다리고, 다닐 때에는 말을 달려야 따라갈 수 있고, 쌀 여섯 섬의 무게를 싣고 영남ㆍ호남으로 내왕한다. 또 삼생(三牲) 소(牛)ㆍ양(羊)ㆍ돼지 1만여 마리를 보내어 우리나라의 가축의 종자로 삼도록 하였는데 몸뚱이는 우리 나라의 것과 같고 성질이 자못 순하고 느리어 사람이 시키는 대로 잘 따랐다.
12월 권율(權慄)이 성주(星州)로부터 순찰하여 충청도에 이르렀다가 전라도로 내려와서 전주를 경유하여 남원에 이르러 비밀리 근처의 고을로 하여금 내적(內賊)을 잡게 하였다.
5일 남원 판관 김유(金騮)가 원수의 명령을 받아 운봉 현감 남간(南侃)과 더불어 경계에 모여 추동(楸洞)의 적을 잡기를 의논하였는데 해가 오정이 되도록 두 관원은 헤어지지 않았다. 김희(金希)ㆍ강대수(姜大水) 등이 고파(高波)와 더불어 합세하여 도당 1백 50여 명을 거느리고 번암(番嵒) 남원부 동서쪽 10리에 있다. 으로부터 갑자기 무산(毋山) 서하도(西下道) 마연촌(磨硯村)현(縣) 북쪽 5리에 있다. 에 이르러 도적질을 하여 소ㆍ말ㆍ재물을 모두 찾아서 약탈하고 나이 젊은 부녀를 잡아 묶어서 앞세워 몰고 갔는데, 봉사(奉事) 허여형(許汝衡)의 아내도 역시 잡혀간 가운데 들었다. 남간이 듣고 본현으로 달려 돌아와서 비밀리 독포장(督捕將) 정기룡(鄭起龍)에게 통지하였다. 정기룡이 방금 함양에 있다가 곧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달려서 정동치(井東峙)운봉현 동북쪽 40리 함양 지경에 있다. 에 이르러 남간과 상의하여 가만히 정탐하여 보니, 적당(賊黨)이 방금 율곡(栗谷) 운봉 북쪽 50리에 있다. 에 모여서 술자리를 크게 벌여서 연일 마시고 놀았다. 부근의 관원과 본 고을 경내의 사람과 남간이 거느린 군사 수백 명도 반은 김희의 앞잡이들이라 말을 믿을 수 없고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아니하였다. 오직 허씨ㆍ장씨 집의 아내를 구출하는 것이 급하므로 적의 뒤를 밟아 알아내어 달려와 보고하였다. 정기룡ㆍ남간이 밤에 포위하니, 적들이 알고도 더욱 노래하고 춤을 추며 출전할 뜻이 없는 것같이 하다가 날이 밝을 때에 일시에 고함을 지르며 요란히 쏘며 포위를 뚫어 관군(官軍)이 무너져 퇴각하자, 적들이 천천히 나가서 안음(安陰) 길로 향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고파가 장성(長城)에서 패하여 죽고 장녀(張女) 등이 돌아왔다. 임걸년(林傑年)이 지리산의 여러 절을 다 무찌르니 중들과 인민이 피해를 입음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향로봉(香爐峯)에 주둔했다가 운봉 군사에게 밤에 습격을 당하여 패하여 달아났다.
12일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 명 나라 유격장군(遊擊將軍) 진운홍(陳雲鴻)이 효유(曉諭)하는 조칙(詔勅)을 받들고 경성에 이르렀고 인하여 충청도ㆍ전라도로 내려갔다.
○ 교사(敎士)를 각 도의 감사에게 나누어 보내 조련군(操鍊軍) 세 패를 교습(敎習)시키게 하였다.
○ 전라 감사 홍세공이 변사정(邊士貞)을 곤장을 때려 파면시키고 본부[南原府] 판관 김유(金騮)에게 교룡산성(蛟龍山城)을 지키는 일을 겸해 맡게 하였다.
○ 순안어사(巡按御使)를 여러 도에 파견하여 기병(騎兵), 보병(步兵), 내시(內寺), 노비(奴婢)의 신역(身役)으로 작미(作米)하는 법을 설정하여 무과 출신(武科出身)은 쌀 한 섬을 납입하여 신역(身役)을 면하게 하였다.
○ 회문산(回文山) 내적(內賊)이 대낮에 임실(任實)에서 약탈하므로 본현의 수령이 군사를 풀어 잡게 하였다. 여러 번 싸워서 모두 패하여 적이 도장(都將) 등을 죽이고 약탈하여 소굴(巢窟)로 돌아가면서 말하기를, “남원 판관도 능히 우리를 당해내지 못하는데 너희 조그마한 고을이 감히 우리를 어쩌려 한단 말이냐?” 하였다. 감사가 듣고 남원ㆍ곡성ㆍ옥과ㆍ순창ㆍ임실ㆍ전주ㆍ금구(金溝)ㆍ태인(泰仁) 등의 수령으로 하여금 협력하여 문산의 도적을 잡게 하였다. 여러 고을 원이 각기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회문산을 수색 토벌하여 산을 불태우고 나무를 베고 사면으로 포위하여 공격하니, 적당들이 버티지 못하고 흩어져 정읍ㆍ장성의 길로 향하였다. 금구ㆍ태인ㆍ순창 세 고을 원이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장성에 이르니, 적이 또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흩어져 옛 소굴로 돌아갔다. 세 고을 군사가 추격을 그치지 않으니 적들이 궁지에 몰려 3일 동안을 물러가 산꼭대기에 있다 보니, 굶주리고 목말라 감히 대항하지 못하였다. 관군(官軍)이 밤에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1백여 명을 베어 죽이니, 회문산 길에 사람의 발자취가 비로소 왕래하였다.
27일 유격장군 진운홍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고 낙수비(駱守陴) 섭참장(葉參將)모두 이름은 잊었다. 이 또한 전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진운홍이 사영루(四泳樓) 동헌(東軒) 위에 있다. 에서 시(詩)를 짓기를,
사명(使命)을 받들고 부산에 가서 왜적에게 타일러 소굴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때가 만력(萬曆) 갑오년(1594, 선조 27) 12월 28일인데 남원 행차를 멈추면서 낮잠을 자다가 꾀꼬리와 까치가 시끄럽게 지저귀는 것을 듣고 대(臺)에 올라서는 눈[雪]을 보았다. 느낌이 있어 적다.
경남(京南)에 해[歲]는 저물었는데 손은 돌아가지 못하니 / 歲暮京南客未回
여기서 대에 오르매 슬픔을 어찌 견디랴 / 那堪惆悵此登臺
온 산에 눈이 쌓였으매 푸른빛 아득한데 / 萬山雪積迷蒼翠
천리의 좋은 경치 쑥대밭에 가리워졌네 / 千里煙嵐蔽草萊
한낮 뜰 앞에는 꾀꼬리가 꿈을 깨우고 / 日午庭前鶯夢擾
겨울 바람 누(樓) 밖에는 까치가 홰나무에서 지저귀네 / 朔風樓外鵲喧槐
천애(天涯)에서 사방으로 돌아보니 끝없는 생각 / 天涯四顧無窮思
나라를 걱정하니 큰 재주 못됨이 부끄럽네 / 憂國空慙廊廟才
하였다. 또,
입춘(立春)날 느낌이 있어 적다. 이날이 입춘이다.
지난해 오늘에 서울 길손 되었는데 / 去年今日客京華
오늘 새봄에 또 집을 떠났네 / 今日新春又離家
반평생에 먼 길을 다녀 파리함만 남았으니 / 嬴得朱顔途路遠
느끼고 상심하여 스스로 슬피 탄식하네 / 令人傷感自嗟呀
하였다. 또,
벼슬길에 돌아다닌 지 30년 / 仕路驅馳三十年
괴로움 겪노라고 편안할 수 없었네 / 歷來勞苦未容安
금년 겨울 또 선유(宣諭)하는 사명 받았으니 / 今冬又奉傳宣命
만리 먼 곳에서 눈[雪]을 베고 자네 / 萬里遐荒枕雪眠
황명(皇明) 신기비병좌영 겸관삼영 유격장군사 도지휘사(神機備兵坐營兼管三營遊擊將軍事都指揮使) 무림(武林 진운홍의 고향) 준루(遵樓 진운홍의 호) 진운홍.
하였다. 이튿날에 광한루에 나가 연회하였다.
[주-D001] 목야(牧野)에서 …… 있으나 :
주(周) 나라가 상(商) 나라를 팔 때에 강태공(姜太公)이 장수가 되어 목야(牧野)의 싸움에서 매처럼 드날렸다. 처음 출병할 때에 백이 숙제가 무왕(武王)의 말[馬]을 잡고 말리기를, “신하로서 임금을 쳐서는 안 된다.” 하였다.
[주-D002] 탕무(湯武)에 …… 되리로다 :
무왕(武王)이 상(商)을 치면서 상 나라 임금 주(紂)의 죄악을 성토하면서, “내가 주(紂)를 쳐서 백성을 건지는 것은 탕(湯)에게 빛이 있으리라.” 하였다.
[주-D003] 적신(賊臣) …… 핑계하였고 :
한(漢) 나라 동탁이 뒤에는 적신이 되었으나 처음에는 한나라 조정을 어지럽게 하는 환관(宦官)을 죽인다는 명분으로 양주(凉州)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왔다.
[주-D004] 난신(亂臣) …… 변명하였으니 :
금(金) 나라가 송(宋) 나라를 쳐서 이긴 뒤에 임금을 잡아가고 송 나라 신하 장방창(張邦昌)으로 임금을 삼았더니 뒤에 장방창이 다시 송 나라로 돌아왔다.
[주-D005] 우리 …… 아들이다 :
우(禹)가 죽으면서 신하인 백익(伯益)에게 위(位)를 전하였으나 백성들은 우(禹)의 아들 계(啓)에게로 따르면서, “우리 임금의 아들이다.” 하였다.
[주-D006] 남궁(南宮)에 …… 안으려는 원[抱薪之願] :
한(漢) 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임금이 되기 전에 왕랑(王郞)에게 패하여 도망하다가 중도에 비를 만나 남궁현(南宮縣)에서 길 옆 빈 집에 들어갔는데 풍이(馮異)가 섶[薪]을 안고 와서 등우(鄧禹)가 불을 피웠다.
[주-D007] 두릉(杜陵)이 …… 흘렸다가 :
당 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리에 두보(杜甫)가 시사를 탄식하여 눈물을 흘리는 시를 지었다. 두릉(杜陵)은 두보가 살던 곳이다.
[주-D008] 장막 …… 놀리는 것 :
한(漢) 나라 장량(張良)이 한 고조(漢高祖)를 보좌하여 장막 속에 숫대를 놀려 천리 밖에 승전할 계책을 결정하였다.
[주-D009] 곤외(閫外)의 절제 :
곤(閫)은 성문인데 옛날에 임금이 장수를 출정하러 보낼 때에, “곤(閫) 안은 내가 다스릴 것이요, 곤 밖은 장군이 절제하라.” 하였다.
[주-D010] 경인(庚寅)에 :
명종(明宗) 경인년에 왜적이 전라도에 침입한 일이 있었다.
[주-D011] 생도살인(生道殺人) :
맹자가, “백성을 살리려는 도리로 백성을 죽이면 비록 죽어도 원망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그것은 예를 들면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에 국가를 수호하고 인민을 건지기 위하여 백성을 목숨 바치는 전장으로 보내면 백성이 원망하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주-D012] 계란 …… 버리는 것 :
위(衛) 나라 장수 구변(苟變)이 백성의 계란 두 개를 먹었다 하여 임금이 그를 파면시켰는데, 자사(子思)가, “계란 두 개 때문에 국가의 간성(干城)이 되는 장수의 재목을 버린다는 것은 이웃 나라에 소문낼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주-D013] 오늘의 …… 뿐이겠습니까? :
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문제(文帝)에게 상소하여, “지금의 사세를 보면 통곡할 만한 것이 한 가지요, 눈물을 흘릴 것이 두 가지요, 긴 한숨 쉴 것이 여섯 가지입니다.” 하였다.
[주-D014] 일족(一族)을 피하여 :
당시의 법령에 병역(兵役)이나 부역이나 납세를 이행하지 못하거나 도피하면 그 일가되는 사람에게 대신 부담시켰다.
[주-D015] 칠실(漆室)의 걱정할 바 :
노(魯) 나라 칠실(漆室)이란 고을에 한 처녀가 걱정하기를, “우리 나라 임금이 늙었고 태자가 어리니 만약 국란이 있으면 임금이나 백성이 모두 욕을 당할 것이니 여자들이 어디로 피할꼬.” 하였다.
[주-D016] 역량(逆亮)의 …… 꺾었으니 :
금(金) 나라 임금 양(亮)이 대군을 거느리고 송 나라를 치다가 송 나라 군사에게 패하고 중도에 신하에게 시해(弑害)되었다. 양(亮)이 그 임금을 죽인 것 때문에 역량(逆亮)이라 하였다.
[주-D017] 중엄(仲淹)의 상서(上書) :
수(隋) 나라 왕중엄(王仲淹: 왕 통(王通)의 자)이 문제(文帝)에게 태평책(太平策)을 올렸다.
[주-D018] 세 번 패한 것 :
노(魯) 나라 조말(曹沫)이 제(齊) 나라와 싸워서 세 번 패하였다.
[주-D019] 아홉 번 칠 것 :
《주례(周禮)》에 아홉 가지의 정벌(征伐)을 말하였는데 약한 나라를 침략하는 자를 정벌하고 백성을 해치는 자를 정벌하는 등이다.
[주-D020] 말세(末勢) :
옛말에, “강한 쇠뇌[弩]의 말세(末勢)는 노 나라 비단[魯縞: 가장 얇은 비단]을 뚫지 못한다.” 하였다.
[주-D021] 하상(河上)의 변 :
춘추 시대 정(鄭) 나라에서 하상(河上)에 군사를 여러 해 머물게 하였더니 군사들이 원망하였다.
[주-D022] 흙탕물 …… 장난 :
한(漢) 나라 때에 발해군(渤海郡)에서 도적의 떼가 일어났으므로 공수를 태수(太守)로 보내어 진정시키게 하니, 공수는 아뢰기를, “백성들이 곤궁한데 관리가 돌보아 주지 않으므로 적자(赤子)들이 몰래 흙탕물 개울[潢池] 속에서 장난친 것입니다.” 하였다.
[주-D023] 하늘 그물[天網] :
노자(老子)에서 나온 말로, 여기서는 우선 곤경을 벗어나려는 것으로 말하였다.
[주-D024] 장강(張綱) :
한 나라 때에 광릉(廣陵)에 도적이 일어났는데 장강이 태수로 되어 가서 항복을 받았다.
[주-D025] 우허(虞詡) :
한 나라 때에 조가(朝歌)에 도적이 일어나 수천 명이 떼를 지어 관리를 쳐죽여 수년 동안 평정되지 않았는데, 우허가 조가장(朝歌長)이 되어 가서 계책을 써서 평정하였다.
[주-D026] 산하대려(山河帶礪)의 맹세 :
한 고조(漢高祖)가 공신(功臣)들과 맹세하기를, “황하(黃河)가 말라 띠[帶] 만큼 좁아지고, 태산이 닳아 숫돌[礪] 만큼 되도록 길이 자손에게까지 봉국(封國)을 전하자.” 하였다.
[주-D027] 찼던 …… 사고 :
공수(龔遂)가 발해 태수로 도적을 평정할 적에, 큰 칼을 찬 자를 보고는, “너는 그것을 팔아 소를 사라.” 하고, 작은 칼을 찬 자를 보고는, “너는 그것을 팔아 송아지를 사라.” 하였다.
[주-D028] 영천(頴川) …… 하면 :
한(漢) 나라 때에 영천에 도적이 많았는데, 조광한(趙廣漢)이 태수(太守)로 가서 평정하였다.
[주-D029] 천하의 …… 것이다 :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가운데 있는 말이다.
[주-D030] 걸의 …… 짖고[桀犬吠堯] :
걸(桀)은 지극히 악한 자요, 요(堯)는 지극한 성인이다. 그러나 걸의 개가 요를 보고 짖는 것은 제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악한 자를 따라 성인을 몰라보고 함부로 짖는다는 뜻으로 인용하였다.
[주-D031] 대연(戴淵)이 …… 되었고 :
진(晉) 나라 때에 대연(戴淵)은 처음에 도적의 괴수로서 육기의 행장을 약탈하였는데, 육기는 그가 범상한 사람이 아닌 것을 보고 타일러 감화시켰다.
[주-D032] 단거(單車)로 타이름 :
광릉 태수 장강(張綱)이 도적의 괴수 장영(張嬰)의 진중에 군사도 데리지 않고 단거(單車)로 들어가서 타일러서 항복 받았다.
[주-D033] 휘파람 :
도적의 떼가 밤에 몰래 모일 때에 서로 휘파람을 불어 암호로 하여 모여든다.
[주-D034] 애통교서(哀痛敎書) :
국난이 위급할 때를 당하여 임금이 자기의 죄를 뉘우쳐서 애통한 말로 국민에게 호소하는 교서(敎書)이다.
[주-D035] 유 독부 유진 대방비(劉督府留鎭帶方碑) :
남원을 대방이라고도 한다. 도독 유정이 대방에 주둔(駐屯)한 것을 기념하는 비다.
[주-D036] 신과 보[申甫] :
주 선왕(周宣王) 때에 신백(申伯)과 중산보(仲山甫)가 장상(將相)으로서 공이 있었다.
[주-D037] 범 같은 …… 위엄 :
범과 표범이 산에 있으면 그 위엄이 뻗쳐 나물도 캐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주-D038] 안과 …… 보셨네 :
자기 나라 중국과 밖에 있는 조선을 말한 것이다.
[주-D039] 건국(巾幗) :
부인의 의복으로, 사내가 못나서 부인처럼 되었다는 경멸의 말이다. 한(漢) 나라 제갈량이 위(魏)의 장수 사마의(司馬懿)와 대진하였을 때에 제갈량이 싸움을 청하여도 사마의가 나오지 아니하므로 그에게 건국을 보내어 모욕한 일이 있다.
[주-D040] 금성탕지(金城湯池) :
쇠로 성을 만들고 끓는 물로 참호를 만든 것과 같은 견고한 성이란 말이다.
[주-D041] 함곡관(函谷關) :
진(秦) 나라 함곡관이 있는데 관문(關門)이 천연적으로 견고하고 험준하여 함곡관을 닫으면 외적이 침범하지 못한다.
[주-D042] 5백 명 :
제(齊) 나라 전횡(田橫)의 밑에 5백 명이 있었는데 전횡이 자살한 날에 그들은 모두 한꺼번에 자결하였다.
[주-D043] 하란(賀蘭) :
장순ㆍ허원이 수양을 지킬 때에 남제운(南霽雲)을 하란(賀蘭)에게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였으나 하란은 듣지 아니하였다.
[주-D044] 한단(邯鄲)의 포위 :
전국 시대에 진(秦) 나라 군사가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을 오랫동안 포위하였는데 위(魏)의 신릉군(信陵君)이 구원병으로 진 나라 군사를 쫓았다.
[주-D045] 노중련(魯仲連)의 동해로다 :
한단이 포위되었을 때에 위(魏)의 신원연(新垣衍)이 조(趙) 나라와 의론하여 진왕(秦王)을 제(帝)로 추대하여 강화(講和)하자고 하였는데 노중련(魯仲連)이 반대하여 “만일 진 나라를 제(帝)로 추대한다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그 백성이 되지 않겠노라.” 하였다.
[주-D046] 신안(新安) :
항우(項羽)가 신안에서 진 나라의 항복한 군사 20명을 무찔러 죽였다.
[주-D047] 장평(長平) :
진(秦) 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장평에서 조 나라 항복한 군사 40만 명을 무찔러 죽였다.
[주-D048] 종정(鍾鼎)과 죽백(竹帛) :
국가에 큰 공을 이루면 종과 솥에다 새겨서 후세에 전한다. 죽백(竹帛)은 역사책을 말한 것인데 고대에 종이가 생기기 전에 죽간(竹簡)과 비단에 글을 써서 전하였다.
[주-D049] 여귀(厲鬼) :
장순(張巡)이 수양성을 지키다가 함락되어 적에게 죽으면서, “나는 죽어서 여귀가 되어 적을 죽이겠다.” 하였
다.
[주-D050] 만일 …… 쓰겠습니까 :
남의 속국(屬國)이 되면 대국의 역서(曆書)를 받아서 썼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성낙훈 양대연 (공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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