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팔루션
라파의 혁명이라는 뜻으로, 라파 베니테즈가 리버풀 감독으로 부임해 지금까지 진행 중인 개혁을 말한다. 라파 베니테즈는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나 큰 빛을 보지 못하고 하부리그팀에서 커리어를 보내다 부상으로 27세에 은퇴한다.
선수 은퇴 후 다시 레알 마드리드로 돌아가 유소년 팀을 맡으며 당시 레알 마드리드 감독이던 델 보스케의 코치로 활약한다. 그 후 바야돌리드, 엑스트라마두라, 테네리페의 감독을 맡으며 가능성을 보였고 잉글랜드와 이탈리아에서 코치 수업을 받기도 한다. 이때 전설적인 전술가 아리고 사키와 인연을 쌓기도 한다.
2001년 헥토르 쿠페의 뒤를 이어 발렌시아의 감독으로 깜짝 임명된다. 많은 이가 의문을 제기한 임명이었으나 베니테즈는 31년 만에 발렌시아의 몫이 된 라리가 트로피로 사람들의 의문에 답한다. 두 번의 리그 우승과 한 번의 유에파컵 우승으로 좋은 모습을 보인 베니테즈는 2004년 6월 발렌시아를 떠나 리버풀에 합류한다.
리버풀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힘쓰고 있었고 컵트레블과 같은 주목할만한 결과를 내놓기도 했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스날의 양강 구도를 넘어설만한 힘을 보여주지 못했고 러시아 석유재벌의 막강한 자금을 등에 업은 첼시도 전력이 급상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재임 첫 시즌인 0405시즌, 리버풀에게 다섯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 빅이어를 안기며 팬들의 기대에 응한 베니테즈는 리버풀을 빠르게 자신의 팀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는 리버풀의 사령탑인 사비 알론소가 있다. 팀의 간판 공격수였던 마이클 오웬이 우승할 수 있는 팀으로 가고 싶다며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고 리버풀은 스티븐 제라드 중심의 팀으로 탈바꿈한다. 수비와 공격 양면에 모두 놀라운 재능을 보인 제라드는 완성형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였고 보통 그런 그의 파트너는 수비를 단단히 할 수 있는 수비형 미드필더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베니테즈는 과감히 제2의 과르디올라라고 불리던 알론소를 데려와 리버풀의 축구에 스페인의 색을 입히기 시작한다.
알론소는 체력이 중시되는 프리미어 리그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빠르게 적응하며 이전에 리그에서 볼 수 없었던 '딥 라잉 플레이메이커'로 대활약한다.
촘촘함과 압박, 하나의 공격 패턴 보다는 경기 전체를 장악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베니테즈의 축구 철학은 카이트에게도 수비를 요구하며 마스체라노에게도 플레이메이킹을 원한다. 공수 능력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 알론소와 제라드는 그런 베니테즈에게 핵심선수일 수 밖에 없으며 이 두 선수가 허리를 단단히 받치는 아래 차근차근 다른 포지션의 보강이 이어졌다.
이제 스쿼드의 대부분은 라파가 직접 영입한 선수들로 이루어졌다. 베니테즈 부임 전부터 활약하고 있는 선수는 제라드, 캐러거, 히피아, 키웰, 리세, 피넌, 6명이 전부다.
종종 실패한 영입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영입 선수들은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으며 리버풀은 베니테즈가 원하는 축구를 확실히 구사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심지어 팬들조차 우리 팀의 베스트11은 누구인가하는 의문을 가지거나 수비를 잘하는 건 인정하겠는데 공격은 어쩌겠다는거냐는 투정을 부리기도 했지만, 0708시즌 시즌의 1/3을 지나며 궤도에 오른 리버풀은 상대의 약점을 공략하는 맞춤형 축구와 어떤 상대를 만나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축구를 동시에 보여주며 불만을 가졌던 팬들이나 라이벌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있다.
라팔루션, 라파의 개혁은 이제 완성 단계이다.
로테이션
라파 베니테즈와 리버풀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는 로테이션이다. 리버풀의 성적이 안 좋으면 거의 모든 언론과 팬들은 로테이션 이야기를 꺼낸다. 로테이션이 경기력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드러내는 근거는 없다. 로테이션이 경기력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이것 역시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상식적으로 로테이션에 대한 입장은 두 가지 이다. 자주 손발을 맞추면 조직력은 당연히 좋아진다 vs 리그는 장기 레이스이기 때문에 체력이 중요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첼시를 비롯한 대부분의 강팀들은 이 두 가지 대립되는 의견 사이에서 접점을 찾아냈다. 막강한 자금 혹은 효율적인 영입이나 강력한 유스시스템으로 더블 스쿼드를 구성하는 것이 그것이다. 확실한 베스트11을 만들어 대부분의 경기에 기용하고 베스트11과 비슷한 성향의 선수들로 2진을 구성한다. 상대에 따라, 선수들의 피로도에 따라 1진과 2진의 선수들을 적절히 섞어서 기용하는 것이다.
베니테즈의 로테이션이 위의 두 팀과 달리 자주 거론되는 것은 그의 로테이션은 성격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베니테즈는 체력 안배를 위한 적절한 로테이션 덕에 모든 경기에 베스트11이 나올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매경기 강력한 베스트11을 내보낼 수 없다면 베스트11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각각의 다른 개성을 지닌 다양한 선수를 보유하고 상대의 약점에 맞춰 매경기 새로운 조합을 들고 경기에 나서는 것이다. 베니테즈는 한 시즌에 20골 이상을 넣을 수 있는 한 명의 공격수보다 10~15골을 넣을 수 있는 서로 다른 장점을 지닌 공격수 두 명을 보유하는 것을 선호한다. 공격이 한 명에게 집중된다면 상대는 수비하기가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는 위에서 나온 조직력에 대한 비판을 낳을 수 있는 부분이지만, 베니테즈는 자신의 전술로 이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 리버풀은 잦은 로테이션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가장 조직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팀 중 한 팀이다.
다만 공격시 부분전술에 대한 의문은 팬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제기되던 궁금증이었다. 그러나 라팔루션의 완성단계에 들어오면서 팀의 공격력은 폭발하고 있다. 소위 '클래스'가 부족해보였던 공격진, 답답했던 부분전술, 아쉬웠던 셋피스 득점 등이 한순간에 해소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로테이션 때문이다, 아니다를 논하는 것은 실상 의미가 없다.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줄 것이며, 그때까지 로테이션은 베니테즈가 100경기 만에 처음으로 같은 선발라인업을 들고 나온 것이 화제가 되게 하는 등 이야기 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제라드
리버풀의 주장 스티븐 제라드는 많은 팬들에게 리버풀과 이음동의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한국 감독 후보로 거론되는 제라르 울리에가 리버풀의 감독이던 9899시즌 제이미 레드납이 부상으로 고생하기 시작하면서 유스팀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제라드는 1군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주로 교체출장으로 13경기를 소화한 제라드는 다음 시즌 선발로 출장하기 시작하며 31경기를 소화하기에 이른다. 0001시즌에 제라드는 팀의 베스트11으로 맹활약, 팀의 컵트레블(리그컵, FA컵, 유에파컵)을 이끌며 PFA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한다. 리버풀은 0001시즌 3위를 차지하며 17년 만에 챔피언스 리그에 복귀한다.
잉글랜드에서는 U18팀 주장을 맡기도 했고 99년에 U21팀에 데뷔, 00년에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2002 월드컵 예선에서 팀의 본선 직행에 큰 공을 세웠지만 고질적인 사타구니 부상으로 월드컵의 꿈은 미루게 된다.
수술과 자세 교정으로 부상을 말끔히 치료한 제라드는 계속 좋은 활약을 보여준다. 어려운 팀을 훌륭히 재건한 울리에는 당시 오웬과 헤스키를 활용한 롱볼 축구에 대한 비판을 받았으며, 야심차게 영입한 선수들의 실패등이 겹쳐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제라드는 그동안에도 꾸준한 모습을 보여줬다.
04년 울리에는 제라드를 주장으로 임명, 제라드는 주장으로 첫 출전한 경기에서 골을 터트리며 울리에에게 달려가 포옹하며 기쁨을 나눴다. 하지만 울리에는 더 이상 팀에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고 결국 베니테즈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은사의 사임과 불안정한 리버풀의 상황, 첼시의 유혹 등으로 한동안 이적설에 휘말리며 본인도 이적을 생각하는 상황까지 갔지만 결국 제라드는 팀에 대한 애정을 이유로 잔류를 결정했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 중 발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두 달간 결장하게 된다. 제라드 외에도 많은 선수들이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리버풀은 리그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복귀한 제라드는 아스날전 승리, 챔피언스 리그 본선 진출을 결정짓는 올림피아코스전 승리를 이끌며 다시 맹활약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2월, 리그컵 결승전에서 첼시를 만나 앞서고 있던 상황에 자책골을 기록하며 무링요에게 프리미어 리그 첫번째 트로피를 안기기도 했다.
FA컵 탈락, 리그컵 준우승, 부진한 리그를 뒤로 하고 리버풀은 챔피언스 리그에 매진했고 첼시를 다시 만나 꺾고 결승에 올랐다. 이스탄불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리버풀은 이미 널리 알려진대로 환상적인 경기를 펼치며 다섯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의 기쁨을 만끽한다. 제라드는 밀란에 3-0으로 뒤지며 시작한 후반전에 빠른 추격골을 터트리며 선수들과 팬들에게 다시 일어나라는 손짓으로 사기를 북돋았다.
0506시즌 다시 첼시 이적설이 거론되며 제라드는 구단과의 오해로 인해 이적을 선언하기에 이르지만 결국 다시 리버풀로 돌아왔다. 그는 구단과 선수들, 팬들에게 사과하는 의미로 주장 완장을 반납하고자 했지만 감독과 선수들의 반대로 계속 주장 완장을 차게 되었다.
맹활약으로 사람들에게 보답한 제라드는 FA컵 결승에서 다시 한 번 놀라운 활약을 보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P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리버풀은 승점 82점으로 3위에 머물렀지만 82점의 승점은 리버풀의 프리미어 리그 최다 승점이었고 팀의 미래는 밝았다.
우리에겐 '람파드 v 제라드'와 같은 쓸데없는 논쟁의 주인공으로 소모되기도 한다.
캐러거
리버풀의 부주장 제이미 캐러거는 울리에 시절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베니테즈 부임 이후 센터백으로 자리를 굳히면서 세계 최고의 중앙 수비수 반열에 오른다. 유스와 리저브를 거쳐 97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인팀에서 활약하기 시작해 포백라인 어디든 자기 맡은 바를 해냈지만 풀백으로서는 공격력이 아쉬웠고 중앙 수비수로는 크게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베니테즈 부임 이후 중앙 수비수로 자리를 굳히기 시작하면서 눈부신 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제라드 보다도 리버풀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캐러거는 리버풀의 자긍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오웬, 제라드와 함께 리버풀 아카데미의 자랑인 캐러거는 오웬과 제라드가 일찌감치 자신의 천재성을 보이는 동시에 자신의 야망과 팀을 위한 희생 사이에서 흔들리거나 이적을 결심했을 때도 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이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걸쭉한 사투리와 매경기 상기된 붉은 얼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솔직한 인터뷰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게리 네빌의 부상으로 02년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되었지만 본인도 부상을 만나며 물러났다. 지금은 대표팀에서 은퇴해 구단에 전념하고 있다.
토레스
0708시즌을 앞두고 리버풀은 월드클래스로 이뤄진 척추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 골문의 레이나, 수비의 캐러거, 미들의 제라드로 이어지는 강한 허리는 어느 팀에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었으나 다소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공격진에는 소위 말하는 '월드클래스'라는 평가를 받을만한 선수는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공격진에 그런 '존재감'을 가져다 줄 선수로 주목받은 것이 바로 07년 여름 리버풀에 합류한 페르난도 토레스다.
토레스는 11세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입단해 17세에 팀의 최연소 출장 기록을 갈아치웠고 19세에 팀의 주장이 되었으며 20세부터 국가대표팀에 승선했으며 23세인 지금 리버풀에 합류했으며 스페인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뛰고 있다.
이적 후에 어린 나이에 너무 큰 기대를 받았던 부담감을 호소하기도 했으나 많은 다른 선수들과 달리 그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떠나 더 큰 무대에 도전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 무대를 제공하는 것이 리버풀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리버풀의 팬이었고 KOP의 뜨거운 응원 열기, 현재 감독인 베니테즈와 스페인 선수들인 알론소, 레이나 등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큰 구단의 계속된 구애에도 아틀레티코를 떠날 생각이 없었던 토레스는 리버풀이 자신의 영입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구단에 그 제의를 긍정적으로 고려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토레스는 머지사이드에 와서 리버풀의 전설적인 골잡이들인 이안 러쉬와 로비 파울러의 등번호를 이어받았다. 이는 리버풀 팬들에게 굉장히 의미있는 일이었다. 오웬 이후 골게터의 부재에 시달려왔던 리버풀에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났고 그는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물론 가능성이 큰 것과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토레스는 데뷔전인 첼시와의 경기에서 바로 골을 터트리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신입생답지 않은 활약을 이어왔다. 사람들은 그가 체력적인 프리미어 리그 수비수들을 상대로 버텨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못미더운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오히려 프리미어 리그 수비수들이 자신의 스피드에 적응해야 하도록 만들었고 뿐만 아니라 리그 정상급의 수비수와의 싸움에도 두려움 없이 부딪히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제 토레스가 세계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면 리버풀의 월드클래스로 이뤄진 척추가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토레스는 그것이 머지않은 일임을 만천하에 알리고 있다.
we've won it five times!
이 글은 현재의 리버풀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리버풀의 전통과 역사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챔피언스 리그 5회 우승팀에게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인 빅이어를 영구 보존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즉 구단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 중 '진짜'는 다섯 번 이상 우승한 구단의 박물관에 있는 것들 뿐, 나머지는 모조품이라는 것이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다섯 번 이상 우승한 구단은 레알 마드리드, AC밀란, 리버풀 세 구단 뿐이다.
이 다섯 번의 우승 중 한 번은 05년 이스탄불에서 이룬 것이며 07년 아테네에서도 기회가 있었다. 05년에 빅이어를 차지할 당시의 상대였던 밀란을 다시 만나 2-1로 석패하며 물러났지만 3년 간 두 번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행은 간과할 수 없는 성과였다.
이는 대단히 유의미한 일로, 과거의 눈부신 영광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챔피언스 리그 4회 우승만으로 리버풀의 환상적인 역사를 모두 보여줄 수는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리버풀이 유럽 최고의 팀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05년 다시 한 번 왕좌에 오르며 리버풀의 영광은 지나간 역사 속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The Kop
위에서 리버풀의 현재를 다뤘다면 이제 구단의 정체성과 관련된 부분들을 짚어보자. The Kop 또는 Kopites라고 불리는 리버풀의 팬들은 구단과 구장인 앤필드 만큼이나 유명한 존재들이다. Kop은 Spion Kop의 준말로 골대 뒷편의 응원석을 말하는데, 가파른 경사의 응원석에 팬들이 서있는 모습이 보어전쟁 당시 같은 이름의 언덕에서 싸웠던 병사들의 모습과 흡사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실 골대 뒷편의 응원석을 Kop이라고 처음 부른 것은 1904년 울위치 아스날(현 아스날)의 구장이었던 매너 그라운드(1888~1913)에서 였다. 2년 뒤 1906년 리버풀은 구단의 두번째 리그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골대 뒷편의 응원석을 확장했고 그것을 Kop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지역언론인 리버풀 에코의 편집자가 이를 Spion Kop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1928년 응원석에 지붕을 설치하면서 응원석의 공식적인 명칭을 Spion Kop으로 지정했으며 이것이 최초의 공식적인 Kop이다. 현재 많은 잉글랜드의 축구팀과 럭비팀이 구단의 구장에 Kop이라 불리는 응원석을 가지고 있다. 앤필드의 Kop은 전부 입석이었으나 1989년 힐스브로 참사 이후 안전을 고려해 전좌석제로 바뀌었다.
리버풀의 Kop이 유명해진 것은 1960년대다. 62년, 리버풀은 2부 리그에서 1부 리그로 승격했고 잉글랜드는 칠레 월드컵에 참여했다. 잉글랜드의 팬들은 중계를 통해 색다른 문화를 보게 된다. 삼바리듬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며 응원하는 남미의 서포터들을 보게 된 것이다.
1부 리그에서 시작하는 첫경기, 앤필드는 51000여명의 관객을 가득찼고 이 인원의 거의 반이 Kop에 모였다. 누군가 '리버풀'을 외치고 박수를 끊어치기 시작했다. 곧 Kop에 모인 모두가 그것을 따라하기 시작하며 앤필드에 '리버풀 짝짝짝' 소리가 가득 찼다. 그리고 60년대 리버풀에는, 비틀즈가 있었다. Kop들은 경기 시작 전에 비틀즈의 히트곡들을 부르기 시작했고 그 노래의 가사들을 즉흥적으로 리버풀에 맞춰 개사하기 시작했다. '노래하는 서포터, The Kop'이 탄생한 것이다. 노래 가사를 바꿔 부르며 응원하는 것은 그 팀이 어디건 결국 리버풀의 응원문화를 따라하는 것이다.
원정팀마저 리버풀의 팬들을 칭찬할 정도로 Kop의 응원의 열기는 대단한 것이어서 현재 기네스북에 가장 큰 함성을 기록한 서포터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YNWA
Kopites의 노래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YNWA(You will never walk alone)일 것이다. 1945년 발표된 뮤지컬 Carousel의 수록곡이었던 것을 63년 Gerry & The Pacemakers가 리메이크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서포터의 정신을 이야기하는 듯한 가사 덕에 곧바로 Kop에서 불리우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YNWA을 부르는 장면은 BBC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까지 했다. 방송과 함께 노래하는 응원은 영국 전역으로 퍼졌고 YNWA도 많은 경기장에서 불려지게 되었다. 현재는 전세계의 많은 팀이 이 노래를 응원가로 부르고 있다.
YNWA은 현재 앤필드의 입구인 샹클리 게이트에 적혀있기도 하다(사진).
TP의 김연호님의 자료입니다
첫댓글 역시 리버풀은...최고야
복사하게좀풀어주세요;; 엠피에 넣고 읽게
우왕ㅋ굳ㅋ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같은 리버풀 팬으로써 이런글 계속 보고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