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
서문
7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즐거움은 영혼의 자연적 상태가 방해받지 않는 활동으로 분석되고 있다.
다시 10권에서는 줄거움이 어떤 활동을 완성시키는 목적으로 분류된다.
이 ‘즐거움’을 위해 피해야하는 3가지 품성 상태들이 있노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한다.
결함(kakia)과 자제력 없음(akrasia), 그리고 짐승같은 품성상태(theriotes)
이 권의 논의의 초점은 akrasia 즉 자제력없는 성품에 있는데
모든 것들(이것들이 자제력 없음의 사례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을 검토하고 최선의 행동을 선택했지만 실행하지는 못하는 상태를 이름이다.
(감각적 욕구, 비열한 감정들이 올바른 판단을 배반하는 경우)
아리스토텔레스는 akrasia의 두가지 형태인 마음 약함과 성급함을 동일시 여겨 복잡하게 만든다.
1-2장 아크라테스와 엥크라테이아
아리스토텔레스는 엥크라테이아는 칭찬할 만한 상태 그리고 아크라시아는 비난받아야 하는 상태라고 간주했다. 엥크라테스는 행동과 판단의 일치, 욕구에 대한 저항, 절제를 보이고 아크라테스는 감정에 의한 행동, 무절제한 행동을 한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절제하는 사람을 엥크라테스라 볼 때 감각적 즐거움을 무조건 절제하는 것을 우리는 엥크라테스라 볼수 없게 된다. 실천적으로 지혜로운 이가 아크라테스라는 주장 또한 아크라테스가 자신의 지혜에 근거해서 행동할 수 없다는 주장과 갈등한다.
소크라테스는 무지로 인해 사람들이 잘못된 것을 욕구한다고 보았다. 자발적으로 나쁜 것을 택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에도 감정과 무절제에 휘둘리는 아크라시아가 실제한다고 본다.
3장 아크라시아의 가능성
이 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1.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아크라시아의 영향이다.
2. 아크라시아가 보편적 관념을 거슬러 실제하게 되는 경로이다.
어떤 사람이 술 취하는 것은 나쁘다고 진술하면서 술을 더 가져오라고 하는 상황을 들어보자. 술을 마시면 안된다는 지식이 행위를 배반할 때
이지식이 단순히 최상의 행동이라는 ‘확신’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진술에 대한 확신은 다른 사람들의 ‘확신’과 비교할 때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지식의 관념적 유무, 곧 발생적 의미로는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 오히려 여기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작동’의 관점으로
강한 가정에 의해 이 확신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 곧 지식이 무력화되는 상황에서 아크라시아의 지식이 발생하는 상황이 된다.
- 즉 개별적 판단 속에서
보편적 판단들이 서로 욕구에 따라 실천적으로 길항한다고 볼수 있는데
욕구에 따른 보편적 신념이 욕구를 저어하는 보편적 신념보다 우선한다고 볼수 있다.
문제점
1. 즐거움을 주는 아크라테스의 욕구는 어떻게
즐거움을 저어하는 보편적 신념보다 우선하는가?
2. 욕구에 충실한 아크라테스적 지식은 행위속에 작동하기에 일관적이지만
보편적 지식은 욕구에 따라 유동적인 듯 보인다.
4-10장 아크라시아와 이성
일반적으로 어떤 환경과 자신을 평가하며 자신의 공정함과 자존감을 보여주려는 활동은 인간의 일반적인 특성이라 할수있다. 즉 이성적 특징인 것이다.
인간의 영혼 속에 경쟁 요소인 이성과 감성이 서로 대결하여 감성이 이성을 제압할 때 ‘아크라시아’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성의 역할은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는 결함 있는 이를 ‘치유’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여기서 이성은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의 치료 효과를 다루려 한것이 아니라
아크라시아의 행동에 있어 생각이 포함되는 현상을 다룬거라 본다.
11-14장 즐거움의 좋음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에 대한 일단의 부정적인 시각을 반박하고자 한다.
즐거움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정치철학의 고유한 주제이기 때문이며 탁월성에 대해서도 즐거움이란 속성은 피해갈 수 없는 평가기준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조건적인 좋음과 특정한 사람을 위한 좋음으로 좋음을 구분한다.
이는 즐거움이 실천적 추론을 방해하기 위해 절제되거나 회피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불식시킨다. 즐거움은 마땅한 방식 내에서 향유되는 궁극적인 참일수도 있다. 단순히 무엇인가의 경험상태를 보존하려는 노력, 부정적인 노력이 아닌 그 자체가 본성적 상태의 실현이고 활동으로서 방해받지 않는 상태로 그는 규명한다.
그러나 책에서는 이러한 접근을 최고 좋음의 규명을 위해 제기한다기 보다는 단지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비교하여 무엇이 즐거움이 될수있는가(최고가 아닌 참)의 문제를 다루려 한다고 본다.
내 생각
즐거움은 참이 될수 있는가?
즐거움에 대한 태도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불분명하게 느껴진다. 아크리사아/앵크라테스를 구분하는 것은 분명 참된 즐거움을 좇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다. 즉 인간의 본성적 상태가 온전하게 실현되느냐의 문제. 그렇다면 이 즐거움은 감각적 영역을 포함하고 있는 일상적 즐거움으로 봐야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생각하는 고귀한 목적이 실현됨에 있는 어떠한 종류의 목적의식과 ‘보람’에 있다고 봐야하는가? 윤동주의 시 십자가를 보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예수를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이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자신의 져야할 고귀한 책임내지 목적을 짊어진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즐거움’으로 나타난 것인가? 뒤엣장에 나오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모니아적 형상을 고귀한 대상과 접하는 것으로 추가한다. 여기서 감각적인 즐거움의 면모는 많이 배제되는 듯하다. 이 장은 이런 이성적 작용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무질서한 행동에 대한 해설이다. 이성 스스로는 이 감정의 전복을 극복할 능력이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겨진다. 우리는 의무와 의심의 힘을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마더 테레사의 ‘와서 나의 빛이되어라’라는 실제 편지 내용들을 살펴보면, 극한 회의감 중에서도 단지 신념을 통해 묵묵히 삶의 의미와 목적을 구체화시켜가는 한 인간의 초상이 나온다. 이 장은 단지 책임의 문제, 그것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미 탁월한 이들에게 있어 이성의 역할은 논해지되 부정적인 것들을 극복할 가능성은 논의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