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비에 새잎나거든
꼿꼿하고 다정한 정철에 어린 기생도 마음을 빼앗기다
처음 정철의 묘가 있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있는 강아 묘.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피니
그 예쁜 얼굴이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마라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네 고움을 사랑하리니’.
송강(松江) 정철(1536~93)이 강아를 위해 지은 한시 ‘영자미화(詠紫薇花)’다.
강아(江娥)는 정철이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좋아했던 남원의 기생 ‘자미(紫薇)’의 다른 이름이다. ‘강아’는 정철이 동기인 자미를 사랑하자 사람들이 ‘송강(松江)’의 ‘강(江)’자를 따서 부르게 된 이름이다. 정철의 또다른 사랑 이야기다. 앞서 소개한 진옥과 강아를 같은 인물로 보기도 한다.
◆ 어린 기생의 마음을 사로잡은 정철
정철 초상. 정철의 사당인 송강사(松江祠)에 봉안돼 있다.
정철의 ‘훈민가’ 시비. 경기도 고양 송강마을에 있다.
정철은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노기(老妓)의 소개로 당시 동기(童妓)였던 강아를 처음 보게 되었다. 정철은 강아를 만나 머리를 얹어주고 하룻밤을 같이했으나, 사랑스러운 딸같이 대했을 뿐이었다. 정철은 어리지만 영리한 강아를 매우 귀여워했다. 한가할 때면 강아를 앉혀 놓고 틈틈이 자신이 지은 ‘사미인곡’을 들려주고 ‘장진주’ 가사를 가르쳐 주며 정을 나누었다. 강아는 기백이 넘치고 꼿꼿한 정철의 다정한 사랑을 받으면서 그를 마음 깊이 사모하기 시작했다.
‘義妓’ 강아
정철과 이별후 10년 절개 지켜
임란땐 왜장 유혹해 첩보 빼내
정철 사후엔 시묘 살다 생 마감
‘송강’ 정철
안식처 담양의 강 이름을 號로
관찰사 재직때 ‘관동별곡’ 지어
사직 후 수많은 가사·단가 남겨
그러다가 정철이 도승지로 임명받아 10개월 만에 다시 한양으로 떠나게 되었다. 정철이 한양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강아는 그를 붙잡을 수도, 쫓아갈 수도 없는 자신의 신분과 처지에 낙담한 채 체념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러한 강아의 마음을 눈치챈 정철은 한양으로 떠나면서 작별의 시 ‘영자미화(詠紫薇花)’를 지어 주며 그녀의 마음을 위로했다.
강아는 이후 정철을 향한 그리움으로 긴 세월을 보내게 된다. 철부지 어린 나이에 정철을 만나 머리를 얹은 이후로 단 한순간도 그를 잊지 못했던 강아는 관기 노릇을 하면서도, 언제든 다시 정철을 만나겠다는 열망으로 십년고절(十年苦節)의 세월을 버텨낸다.
10년 후 들려온 소식은 정철이 북녘 끝 강계로 귀양을 갔다는 기막힌 소식이었다. 정철의 귀양소식을 들은 강아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야 정철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귀양살이를 하는 정철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서둘러 행장을 꾸리고 길을 나섰다.
머나먼 길을 걸어 강계까지 갔으나 정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귀양에서 풀려나 전라도와 충청도 도체찰사로 임명돼 전쟁터로 떠나고 없었다. 강아는 다시 정철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다 왜적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그러자 강아는 적장을 유혹해 아군에게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고 평양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후 더 이상 정철을 섬길 수 없다고 생각한 강아는 머리를 깎고 출가해 여승이 되었다.
소심(素心)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생활을 하던 강아는 정철이 사망하자 정철의 묘소(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를 찾아 묘를 지키며 돌보는 시묘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내다 결국 그 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나중에 정철의 묘는 충북 진천으로 이장되었으나, 강아의 묘는 그대로 정철의 처음 묘가 있던 송강마을에 남아있다. 오늘날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한 송강마을에는 송강 정철을 기리는 송강문학관과 더불어 강아의 무덤이 있어 정철과 강아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강아의 무덤 앞에 묘비(1998년 10월 건립)가 세워져 있다. 전면은 ‘의기강아묘(義妓江娥墓)’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뒷면엔 다음 글(제목 ‘江娥’)이 새겨져 있다.
‘송강(松江) 정철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시 남원의 동기인 자미(紫薇)를 사랑하자 세상 사람들이 송강(松江)의 강자(江字)를 따서 강아(江娥)라 불렀다. 송강은 1582년 9월 도승지에 임명되어 강아에게 석별의 시(詩)를 지어주고 임지인 한양으로 떠났다. <석별의 시 ‘영자미화’는 생략>
그 후 강아는 송강에 대한 연모의 정이 깊어 함경도 강계로 귀양 가 위리안치 중인 송강을 찾았으나, 임진왜란이 나자 선조대왕의 특명으로 송강은 다시 소환되어 1592년 7월 전라·충청도 지방의 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강아는 다시 송강을 만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적진을 뚫고 남하하다가 적병에게 붙잡히자 의병장 이량(李亮)의 권유로 자기 몸을 조국의 제단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적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유혹, 아군에게 첩보를 제공하여 결국 전세를 역전시켜 평양 탈환의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강아는 소심(素心)보살이란 이름으로 입산수도하다가 고양 신원의 송강 묘소를 찾아 한평생을 마감하였다.’
◆ 정철은 가사문학의 대가이자 문인으로 호는 송강(松江)이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1545년 을사사화로 아버지가 유배당할 때 유배지에 따라다녔으며, 1551년 부친이 유배에서 풀려 온 가족이 고향인 창평(昌平)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김윤제(金允悌)의 문하가 되어 성산(星山) 기슭의 송강(松江)가에서 10년 동안 수학할 때 기대승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배웠다. 이이, 성혼 등과도 교유했다.
죽록천이라고도 불린 송강은 정철이 유년 시절을 보냈고, 그가 정치적으로 불우한 일을 당할 때마다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전남 담양군 봉산면에 있는 강이다. 이 강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를 지었다. 이때 석천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하서 김인후와 면앙정 송순에게 수학했다. 이것이 그의 문학에 큰 길잡이가 되었다.
1580년 강원도관찰사로 등용되었고, 이후 전라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시를 많이 남겼다. 이때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었고, 또 시조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널리 낭송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5년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서 4년 동안 작품 생활을 하였다. 이때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1589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 세력을 추방했다.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다. 1591년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 이때 선조는 인빈 김씨에게 빠져 있던 터라 그녀의 소생인 신성군을 책봉하려 했다. 그런 왕의 노여움을 사 정철은 파직되고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명천(明川)과 진주(晉州)로 유배되었다가, 이어 강계(江界)로 이배(移配)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부름을 받아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고, 다음 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얼마 후 동인들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머물면서 만년을 보냈다.
정철은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신흠은 그에 대해 ‘정철은 평소 지닌 품격이 소탈하고 대범하며 타고난 성품이 맑고 밝으며, 집에 있을 때에는 효제(孝悌)하고 조정에 벼슬할 때에는 결백하였으니, 마땅히 옛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했으나 동인의 한 분파인 북인측에서 주도하여 편찬한 ‘선조실록’에는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自招)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묘는 처음에는 부모와 장남이 묻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마을에 있었지만, 1665년에 우암(尤庵) 송시열의 권유로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환희산 기슭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묘소 근처에 있는 사당인 송강사(松江祠)는 충북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글·사진 = 김봉규 기자
첫댓글 관기도 예전엔 지조를지킬수가 있었군요.
정철뿐 아니라 누구라도 예쁘고 어리면 좋아하지 않을까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