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4)
묵시록 3장 1~3절까지는 사르디스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책임과 권면의 내용인 반면에 3장 4절은
사르디스 교회 일부 신자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격려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2절에서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가는 것들'이란 언급을 통해 사르디스
교회의 영적 빈사 상태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remanant)가 있음을 표명했는데, 여기서 그들이
다시 거론되는 것이다.
1절에서도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사실 묵시록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 중에서 오직 라오디케이아와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에서만 예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이 배제된다.
여기서 '죽은 것이다'라고 번역된 '카이 네크로스 에이'(kai nekros ei; but you are dead)에서
'에이'(ei)는 본래 '이다', '있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에이미'(eimi)의 현재형으로서 이미 죽어버린
시체가 아니라 '현재 급속하게 죽어가고 있는 상태'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살아 있다'고 되어 있다. 원문은 '오노마 에케이스 호티 제스'<onoma echeis
hoti zes; you have a name(reputation)of being alive>로서 직역하면 '너는 살아 있다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라는 말이다.
여기서 '가지고 있다'로 번역된 '에케이스'(echeis) 역시 '소유하다'라는 뜻을 가진 '에코'(echo)의
현재형으로서 한편으로는 급속하게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역설적
뉘앙스를 전달한다.
특히 '이름'으로 번역된 '오노마'(onoma)는 통상 '명성'이나 '평판'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므로
본문은 사르디스 교회가 살아 있다는 세간의 명성은 있지만, 실상은 영적으로 죽어가는 상태에 빠져
있음을 시사한다.
전체적으로 사르디스 교회는 이단이나 황제 숭배, 우상 숭배에 대한 언질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이
교회의 문제는 무사안일주의, 즉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교회였다(1티모3,5).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몇'으로 번역된 '올리가 오노마타'(oliga onomata)는 직역하면, '소수의 이름들'(a few names)이다.
여기서 '이름'이란 표현이 사용된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히브리 사상에는 '이름'이 '사람의 존재
전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희랍어에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옷'으로 번역된 '히마티아'(himatia)는 사람들이 몸에 걸치는 의복을 뜻하지만, 그 옷을 입은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더럽히지'로 번역된 '에몰뤼난'(emollynan)은 '오염시키다'라는 뜻을 지닌 '몰뤼노'(mollyno)
의 부정 과거형으로서 여기서는 동사를 부정하는 부정어 '우크'(uk)와 더불어 사르디스 교회의 남은
자들이 소극적으로는 도시 자체가 제공하는 물질적 풍요, 무사 안일, 도덕적 부패와 야합하지 않았음을,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최초에 복음을 전해 받았을 때의 열정적이고 순수한 신앙을 신실하게 고수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덧입은 자신들의 고귀한 신분을 이교적 상황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잘 지켰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여기서 '흰옷'으로 번역된 '류코이스'(lyukois)는 묵시록 3장 5절, 3장 18절, 4장 4절, 6장 11절, 7장
9절, 7장13절 등에도 나온다. 한마디로 이 흰옷은 땅에 기원을 둔 옷이 아니라 하늘에 기원을 둔
옷으로서 깨끗함, 순결함, 거룩함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따라서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입는 것', '구원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여기서 '다닐 것이다'로 번역된 '페리파테수신'(peripatesusin)은 '거닐다', '행동하다' 라는
뜻을 지닌 원형 '페리파테오'(peripateo)의 미래형으로서 묵시록에서는 일관되게 천상의 존재를
묘사하는데 사용되는데(묵시2,1; 3,4; 16,15; 21,20), 사르디스 교회에 남은 자, 즉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체적인 종말론적 축복의 약속이란 점을 환기시킨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15~16)
묵시록 3장 15절부터 19절까지는 라오디케이아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책임과 권면이 나와 있다.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사르디스 교회와 함께 주님의 칭찬을 받지 못한 채 책망만 받고 있다.
여기서 '차지도'로 번역된 '프쉬크로스'(psychros; cold)는 본래 '차게 되다'라는 뜻을 지닌 '프쉬코'
(psycho)에서 파생한 형용사로서 신약성경에서는 본절과 마태오 복음 10장 42절(시원한 물)에서만
사용되었다.
또한 '뜨겁지도'로 번역된 '제스토스'(zestos; hot)는 '끓어 오르다'라는 뜻을 지닌 '제오'(zeo)에서
파생한 형용사로서 '끓어오르는 뜨거움'을 나타내며, 신약 성경에서는 본절에만 나온다.
물과 관계되는 비유는 라오디케이아 북쪽 약 11km 지점에 위치한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의
뜨거운 온천수와 리오디케이아 동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한 콜로새(Colosse)의 차가운 우물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히에라폴리스에서 솟아난 온천수는 처음에는 매우 뜨겁지만, 흐르는 동안 미지근해진다.
물이 부족해 히에라폴리스로부터 온천수를, 콜로새로부터 냉수를 파이프 관을 통해 공급받는
라오디케이아 사람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런 현상을 염두에 두고, 사도 요한은 본절에서
라오디케이아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신앙의 태도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그들이 누리고 있는 풍부한 물질로 인해서 태만하기 그지없는 신앙생활을 한 것
같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태도가 완전하게 세속적인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는 이러한 어정쩡한 태도가 더 문제이다. 신앙에 있어서 중간 지대를 선택한
라오디케이아 교회가 믿음에 있어서는 회색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이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미지근하여'로 번역된 '클리아로스'(chlliaros)는 '용해하다', '녹이다'라는 뜻을 지닌 '클리오'(chllio)
에서 파생한 형용사로서 '열성이 없는'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신앙에 있어서는 결코 회색 지대나 중간 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마태6,24; 루카16,13). 이것이냐
저것이냐 중에서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신앙의 회색 지대에 머물러 있었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겨움을
자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는 표현은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격앙된
감정을 나타낸다.
여기서 '~하겠다'는 뜻으로 번역된 '멜로'(mello)는 '내가 ~하려고 한다'는 의미로서, 말하는 사람의
최종적인 의향을 나타내는 동시에 강력한 경고의 뉘앙스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준엄한 뉘앙스의 책망은 오로지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회개를 유도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이다(묵시3,19).
또한 '입에서 뱉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에메사이'(emesai)는 '구토하다'는 뜻과 더불어 '혐오하다'
라는 뜻도 지닌 '에메오'(emeo)의 부정 과거형으로서 신약성경에서 여기만 나온다.
이것은 신앙의 특성이 뜨거움에 있기 때문에, 마치 뜨거워야 하는 음식이 미지근한 상태에 있을 경우,
비위를 상하게 하여 역겨움을 자아내는 것과 같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따라서 라오디케이아 교회를 향해 주님게서는 '열심을 내라','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이다
(묵시3,19).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내가 너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17~18)
여기서 '부자'로 번역한 '플루시오스'(plusios)는 '부요함', '풍부함'이라는 뜻을 지닌 '플루토스'(plutos)
에서 파생한 표현으로서 '풍족하여'로 번역된 '페플루테카'(pepllukeka)와 함께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자기 인식의 수준을 가늠케 한다.
'페플루테카'(peplluteka)는 '부해지다','치부하다'라는 뜻을 지닌 '플루테오'(plluteo)의
완료형으로서 그들이 자신들은 이미 부자이고 부유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였음을 잘 드러낸다. 확실히
라오디케이아 도시는 다른 소아시아 도시들에 비해 부유했다.
따라서 그 안에 속해 있는 라오디케이아 교회 신자들 역시 물질적으로 풍족했을 것이다.
A.D. 60년에 발생한 대규모 지진 때에 다른 소아시아 지역의 도시들은 로마 황제의 원조를 받아
도시를 복구했지만, 그들은 그런 도움을 거절하고 자력으로 도시를 재건할 정도로 부유했고, 부족함이
없었다.
라오디케이아 교인들 각자는 아마도 물질적으로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자신이 소유한 재물의 일부를 흔쾌히 교회에 헌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이러한 행동을 온전한 신앙 생활로 치부하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막대한 재산을 교회에 바치는 것만으로 신앙 생활의 의무를 완수했다고 이해하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신앙에 있어서도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라고 자랑할 만큼
매우 교만한 자들이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자신이 가진 물질을 영적 부요를 가늠하는 척도로 오해하고
착각했던 것이다.
물질적 풍요와 영적 풍요는 결코 상호 교환되거나 혼동될 수 없는 사항의 것이다.
역설적으로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는 심각한 궁핍함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이 교회의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영적인 가난함에 대한 무감각이었던 것이다.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원문은 '쉬 에이'(sy ei; you are; 너는 ~이다)로 시작되는데, 주격으로 2인칭 대명사가 사용되었다.
희랍어 어법상 주격 인칭 대명사는 강조 요법 이외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외적으로 드러나는 '물질적 풍요'이면에 숨겨진 그들의 '내면적 영적 현실'을
육체적 상황에 빗대어 묘사하고 있다.
<피앗사랑 rigel 글 참조>
첫댓글 🍁🙂↕️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