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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8. 묵상글 (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 이해는 하나 받아들이기 힘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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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이해는 하나 받아들이기 힘든
“헤로데는 예루살렘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오늘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받아들이기는 더 힘든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죄도 없는 아기들이 살해된
이 참혹한 사건을 순교라고 찬미하는 축일을 지내니 말입니다.
이것을 순교라고 하는 것은 너무도 터무니없고 어처구니없는 포장이 아닙니까?
예수님 때문에 죽은 것을 예수님을 위해 죽은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참사라고 해야지 순교라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의문과 반박에 대해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안 죽는 것이 선이고 구원이라면 아기들의 죽음은 악이고 비 구원입니다.
죽더라도 오래 살다가 늙어 죽는 것이 선이고 구원이라면
두 살도 안 돼서 죽는 것은 참사일 뿐이고 비 구원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주님을 따라가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사는 것이라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곧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기 위해서 내려오신 것,
당신을 따라 우리가 하늘로 가도록 내려오신 것이 성탄입니다.
이것을 오늘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찬미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순교한 어린이들 기억하면서 찬미의 노래불러 공경하오니
세상은 그들잃고 통곡했으나 하늘은 기쁨으로 영접했도다
포악한 헤로데가 살해했으나 그들을 하느님이 맞이하시어
당신과 함께있게 불러주시고 영원한 천국복락 허락하셨네
깨끗한 아기들의 죄없는죽음 찬란히 주님앞에 빛을발하니
천사들 두살아래 어린이들을 하늘로 옹위하여 데려갔도다
얼마나 축복받은 마을이던가 구세주 거기에서 탄생하시고
순교한 아기들이 첫제물되어 탄생한 주님앞에 바쳐졌으니
그리고 독서에서 성 쿠옷불트데우스 주교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 위대한 은총의 선물이여!
아기들이 누구의 공로로 그와 같은 승리를 거두었습니까?”
무릇 모든 죽음은 개죽음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윤창호법이 제정되지 않았으면 윤창호의 죽음은 개죽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기를 그의 부모가 원했고,
다시 말해서 그의 죽음 덕분에 음주 운전이 사라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부모가 바랐고 우리 사회가 부모의 바람을 받아들여 법을 제정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의미 있고 숭고한 죽음이 되게 하였는데 이것도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죽은 아이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죽은 것 곧 순교로
의미 제고함으로써 죄 없이 일찍 죽는 것이 악이요 참사가 아니라
더 선이고 구원임을 받아들이게 교회는 우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를 알더라도 가자 지구에서 아이들이 죽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힘들고 그들의 부모는 더 힘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아이까지 학살하는 폭군들의 죄악까지
우리가 괜찮다거나 미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오늘 이 축일은 아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이런 짓을 저지르는 인간의 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 사이에서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도록 일깨우게 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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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기념하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은 무죄한 이들의 고통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이 ‘죄 없는 아기들이 학살당한 일’은 겉으로는 헤로데의 잔인한 학살을 드러내지만, 실상은 메시아가 태어났음을 알려줍니다. 곧 그들의 죽음은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가 메시아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메시아가 나타나심에 대한 지상의 왕의 두려움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헤로데의 죄 없는 아기 학살을 두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레미아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마에서 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이는 예레미야가 아들을 잃은 야곱의 아내 라헬의 통곡을 들어 예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마리아를 신약의 ‘새로운 라헬’이라 칭합니다. 곧 라헬이 일생동안 고통을 겪고 죽음의 고통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면, 마리아 역시 “영혼이 칼에 꿰질리는”(루카 2,35) 십자가의 고통을 겪음으셨던 ‘고통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또 라헬이 <예레미아서>에서 ‘이스라엘의 어머니’(예레 31,15)라 칭해지듯이, 마리아는 <요한묵시록>에서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을 가리켜 메시아 어머니의 “후손들”(묵시 12,17;12,1-6 참조)이라 칭하기에 전체 ‘교회의 어머니’라 칭해집니다. 그리고 라헬이 하느님 앞에서 지상의 자녀들을 위해 슬퍼하며 울음으로 전구했듯이, 마리아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장 유력한 ‘기도의 전구자’가 되십니다.
또한, 우리는 ‘무죄한 어린이의 희생’을 들으면서 앞서 있었던 모세가 히브인들을 억압하면서 저질렀던 어린 사내아기들을 살해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사실, 파라오와 헤로데, 그들은 모두 자신을 지키고자 빛을 두려워한 이들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러한 완고함과 자기중심적인 폭력과 독선과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지 않는지 잘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의 왕국의 지키기 위해 사랑의 왕국을 저버리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이유를 확고하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2,14)
이는 하느님께서 베푸는 구원의 역사는 그 어떤 어둠에도 방해에도 아랑 곳 없이 반드시 이루지리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죄 없는 아기들이 살육당한 소식을 들었을 때,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 마음은 어떠했을까? 살인자 아닌 살인자가 되어버린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분명, 죽어가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보다 어머니들의 “애끊는 통곡소리”가 훨씬 더 컷을 것입니다. 아기들의 슬픔은 한 순간이었고 그들의 죽음은 슬픔의 끝이었겠지만, 아기를 잃은 어머니들의 슬픔은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고 그 죽은 아기 어머니들의 아픔을 마리아는 통째로 짊어지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아기가 희생되어 다른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그녀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에 모든 책임을 떠맡아 고통을 받아야 했던 마리아는 또다시 아무런 죄도 없는 당신 아드님 예수님의 죽음을 떠맡아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죄 없으면서도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써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가 봅니다. 아기 예수님도 훗날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혹 ‘무죄하면서도 억울함을 당할 때’가 있다면, 바로 그 일을 순교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그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주님!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아기들이 살육당할 때,
어머니 마음은 미어지셨을 것입니다.
이토록,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을 짊어지는 일인가 봅니다.
그러니 저희도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어머니 마리아처럼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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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
성 예로니모는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과 증거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들의 모범을 따라 주 하느님께로 나갑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며 주님의 품을 찾은 스테파노, 오늘 기억하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열정을 일깨워 주고, 또한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 가르쳐 줍니다.
“친 사람은 다리를 오그리고 자고, 맞은 사람은 다리를 펴고 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친 사람은 뒷일이 걱정되어 늘 불안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헤로데는 두 살 이내의 죄 없는 어린아이들을 모조리 살해했습니다(마태2,16). 그는 권력에 집착하여 간교하고 잔인하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자기의 권력을 넘보는 싹이라고 단정하고 잘라 버리고자 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이스라엘이 한창 피어날 때 이집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탈출1,22).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 하려는 욕심과 불안함이 잔인한 죄를 저지르고 무거운 짐에 눌려 지내야 하는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습니다.
이런 어둠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소리 없이 낙태로 희생되는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보호받아야 할 태아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무죄한 생명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린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곡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죄와 탐욕에 눌려 사는 것보다 손해 보고 버리며 사는 것이 훨씬 자유롭고 평화롭습니다. 요즘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맞바꾸려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아도 인간입니다. 그들의 생명은 반드시 보호받아야 합니다.
요셉은 한밤중에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 요셉은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마태2,14). 온갖 어려움을 감수하며 지체 없이 발길을 옮기는 요셉의 태도는 곧 순교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일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몸에 배어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때 부름을 받든지 기꺼이 따라나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순교는 일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손길과 안배는 언제나 함께합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 역경 안에서도 주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분의 손길과 요청에 단호히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소멸 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국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세상의 불의는 의인의 탄생을 싫어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다면 우리 사회 안에 거짓과 불의에 어떻게 다가서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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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학생 때 처음 접한 조정래 선생님의 작품은 ‘태백산맥’입니다. 대하소설이었고, 감동과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 뒤로 조정래 선생님의 장편 ‘한강과 아리랑’을 읽었습니다. 세 작품의 권수는 32권입니다. 시대 순으로 하면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의 흐름이지만 저는 태백산맥, 아리랑 그리고 한강을 읽었습니다. 조정래 선생님의 단편인 ‘정글만리, 천년의 질문’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최근 82세의 조정래 선생님은 신작 ‘황금종이’를 발표하였습니다. 지구에 있는 대부분의 종교와 신은 점차 쇠태의 길을 가고 있는데 여전히 막강한 권능과 힘을 자랑하는 신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돈’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작품에서 ‘돈’ 때문에 망가지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등단 60년이 되는 2030년에 인간의 존재와 영혼을 주제로 ‘신화(神話)’의 세상을 전하며 은퇴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서점에서 황금종이를 사오면서 제게 스스로 ‘성탄선물’을 했다고 여겼습니다. 연말연시입니다. 저무는 한해와 다가오는 한해를 책과 함께 보내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리랑에서는 나라를 빼앗기고 먼 타국에서 살아야 하는 동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살아가는 동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서럽고, 아프고, 고난 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배신과 모함으로 일본 형사에게 잡혀서 고문을 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태백산맥에서는 이념의 갈등으로 갈라서야 했던 형제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념의 이름으로 죄 없는 이들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군인에게 고통을 받고, 밤에는 빨치산 때문에 고통을 받는 서러운 민중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권력에 기대어 죄 없는 이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는 가난 때문에, 연좌제의 그물에 갇혀 꼼짝 못하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져야 했던 슬픈 청년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실력과 능력이 있어도 꿈을 펼칠 수 없는 젊은이의 고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은 우리 민족의 슬픔과 고난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한과 아픔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바라보며 모든 설움과 아픔을 견디어가는 민중의 힘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죄 없는 어린 아기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두 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어린아이가 메시아가 되어 자신의 권력과 왕위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두려움이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를 만들어냈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삶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삶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탄의 기쁨은 인생이 기쁨과 즐거움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의 기쁨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도 아닙니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축복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참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할 길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무고한 사람, 억울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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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친미 예수님
헤로데 시대에 일어났던 일이 우리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주의로 죄가 없는 아이들이 하느님 품에 안기는 모습도 이태원사건을 통해 보았습니다.
또한 세상 이곳과 저곳에서 일어난 전쟁 때문에 그 피해를 온몸으로 받아낸 아이들이 모습을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해 마주했습니다.
이념과 사상과 집단 이익 때문에 벌어진 참상 속에서 천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세상 어디에서건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명분이 어떻든 간에 그러한 희생과 죽음은 절대로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아이들은 나약합니다. 나약하다고 말한 뜻이 비하하거나 모자란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나약하다는 말은 그래서 보호가 필요하고 그래서 그들은 절대적인 믿음을 보인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보입니다. 설령 부모가 아이를 학대한다고 하더라도 아이는 부모를 절대적으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우리에게도 원하십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께서 ‘아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라고 말씀하신 뜻을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
헤로데 시대부터 있었던 무고한 희생, 특히 아기천사들의 희생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탐욕 때문에 우리들의 부주의 때문에 아이들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올 한 해를 마무리하며 기도합니다. 희생된 작은 꽃들을 위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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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한 인생이다.
어디선가 들었던 말입니다.
‘오늘이 한 인생이다.’
잠시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해 봤습니다.
오늘이 한 인생이다.
‘오늘은 처음이자 마지막 날처럼 살아라.’라는 말도 될 수 있고
‘오늘 안에 인생의 모든 희로애락 들어있다.’라는 말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이 한 인생입니다.
그 의미가 처음 것이든 두 번째 것이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오늘도 역시 숨 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누군가와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이 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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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무엇인가를 적절한 대가나 노력 없이 거저 얻으려는 사람을 향해 우리는 ‘도둑놈 심보’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시험공부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우수한 성적 맞기를 바라는 것은 어떨까요? 근면 절약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벼락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또 어떨까요? 그렇다면 100의 노력을 했는데, 결과는 20밖에 나오지 않는다면 당연히 불평불만을 가져야 할까요?
이곳저곳에서 강의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 있는 본당에서는 매주 금요일마다 성경 특강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준비한 만큼의 결과를 얻을까요? 아닙니다. 한 번의 강의를 위해 10시간 이상의 시간을 소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치고 나면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으면서, 더 좋은 강의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매번 깨닫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결과만 나오길 바라는 모든 것이 ‘도둑놈 심보’입니다. 주님께 최선을 다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한한 존재 앞에서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완벽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좋은 결과만을 바라는 ‘도둑놈 심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노력만으로는 그 어떤 결과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고 또 함께하시기에 그래도 이만큼의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도둑놈 심보에서 벗어나 겸손함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지내는 오늘입니다. 헤로데는 동방박사의 방문을 받은 뒤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께서 장차 유다의 왕이 되시리라는 예언을 듣고는 없애려고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찾지 못하자 급기야 갓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자기 왕위를 지키기 위해 이런 엄청난 짓을 한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의 아픔은 상관없다는 생각이 역사에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왕으로 기록되게 했습니다. 특히 자기는 중요하고 어린아이의 생명은 별것 없다고 생각하는 헤로데 왕의 모습이 ‘도둑놈 심보’를 가진 못된 사람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왕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려야 하는 의무는 잊어버리고, 자기가 누릴 것만 찾고 있음은 그가 진짜 ‘도둑놈 심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남의 아픔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저 자기만 편하고 많은 것을 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헤로데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잘 살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살라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며, 사랑을 서로 나누며 사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이제 시간이 정말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느끼고 나서야 사람들은 뒤늦게 시간을 아끼려고 하지(에라스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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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역사는 반복되는가
-날마다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삽시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데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 님한테서.”(시편121,1-2)
답답할 때 저절로 나오는 시편 성구입니다. 요즘 자주 “길은 어디에? 빛은 어디에? 과연 인류에게 희망은 있는가? 역사는 반복되는가? 악순환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가?” 묻게 됩니다. 오늘 복음중 이집트로 피신하는 요셉의 가정을 통해서, 또 헤로데의 무죄한 아기들의 학살을 통해서도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계속 뇌리에 남아있는 두가지 내용들입니다.
“전두광의 ‘절대적 악마화’가 우리를 구원할까. ‘서울의 봄’은 절대적 악마의 현존, 혹은 재림을 경고하고, 그 절멸을 다시 염원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영화 속 이태신이 절대적 선이라고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물을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 이태신에게서 그 어떤 씻김의 느낌도 갖지 못했다. 그 역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키워줬을 뿐이다.”
양극단의 분노와 증오, 대결만 있지 구원의 빛은 없습니다. 이러면 악순환의 반복에서 못 벗어납니다. 저절로 구원은 어디에? 묻게 되는 내용입니다. 어제 “네번째 잔의 비밀”이란 책 마지막 부분도 잊지 못합니다.
“회심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회심은 계속되며 더욱 깊어진다. 베드로 사도도, 바오로 사도도 그러했다. 오직 죽음에 이르러서야 우리의 파스카가 이루어진다. 바로 그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 이루어졌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말마디는 저의 지론이기도 합니다. 답은 단 하나 사랑이자 생명이요 빛이신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며,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는 그날까지 주님의 전사가 되어 회심의 여정에, 파스카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주변에 보면 알 수 없는 원인 불명, 정체 불명의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일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곧장 오늘 지금 여기서 새롭게 시작하는 회심의 여정, 탈출의 여정, 파스카의 여정에 오르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내적혁명, 자아초월(自我超越)의 겸손한 비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오늘 여기이지 내일도 어제도 아닙니다. 이래야 어두운 과거와 결별합니다. 악순환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말그대로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그만의 색깔, 향기, 크기, 모양으로
평생
세상 떠날 그날까지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 사랑의 꽃이다”-2022.6.9.
오늘의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도 각별한 느낌입니다. 폭군 헤로데에 의한 살해된 정말 무죄한 아기들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입니다. 당시 베들레헴의 인구는 1000명 정도에 약 20명의 아기들이 살해됐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헤로데는 말 그대로 악의 화신같은 폭군입니다. 자기 권좌를 지키기 위해 아내와 자식들은 물론 일체의 의심되는 정적들은 가차없이 제거했습니다. 권력욕이 인간을 악마로 만든 것이지요. 그러니 장차 자기의 안위를 위해 의심되는 아기들의 살해는 헤로데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인 주님을 떠날 때, 주님을 잊을 때 누구나 괴물이 악마가 될 수 있습니다. 악의 화신인 헤로데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방심하면, 과거를 잊어버리면 반드시 또 출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의 현실에서도 겪지 않습니까? 모세로 인해 파라오에 의해 살해됐던 탈출기의 상황이 오늘 복음에서 아기 예수님으로 인한 헤로데의 무죄한 아기들의 살해가 반복되며 이는 빌라도에 의한 예수님의 죽음으로 또 반복됩니다. 아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후로도 지금까지 반복되는 폭력과 전쟁의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정말 인류에게 구원은 가능한지, 희망은 있는지 묻게 됩니다.
새삼 인간의 무지의 죄가 악이, 얼마나 고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정말 믿음의 시련이자 위기입니다.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에 대해, 반복되는 악순환에 대한 유일한 해법은 파스카의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아침 성무일도중 1.초대송 후렴이, 2.시편 후렴이, 3.찬미가가 답을 줍니다.
-1.“무죄한 어린 순교자들의 화관이신 그리스도 나셨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
2.“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출되어 하느님과 어린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이며, 아무런 흠없이 하느님의 옥좌 앞에 서 있는도다.”
3..“깨끗한 아기들의 죄없는 죽음, 주님을 위하여서 빛을 발하니
천사는 두 살아래 모든 아기를, 하늘로 옹위하여 데려 갔도다.-
아. 궁극의 희망은, 궁극의 위로와 구원은 하느님과 파스카의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구원의 삶은 은총이자 선택입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 은총의 빛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요셉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흡사 요셉과 헤로데의 싸움같지만 내용을 들여다 보면 하느님과 헤로데의 싸움입니다. 빛이신 주님의 인도따라 빛속의 삶을 살아간 주님의 전사, 빛의 전사 요셉은 성가정을 안전하게 이끕니다. 결코 악의 화신인 헤로데도 요셉을 다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악마의 준동도 멈춥니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유비무환입니다. 처방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지난 과거에 아파하는 것은 하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부터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사랑의 전사, 빛의 전사가 되어 주님과 함께 회심의 여정, 파스카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사는 것입니다. 요한 1서 말씀이 위로와 구원의 답을 줍니다.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악순환의 반복에서의 유일한 구원의 탈출구는 바로 주님의 빛 안에서 날마다 회심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뿐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닮아 새롭게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분투의 노력을 다해 파스카의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늘 새로운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해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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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8.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죽이는 이에게 말하노니>
“그때에 헤로데는 …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오 2,16)
내가 있어
비로소
너 있거늘
내가 없어야
그나마
너 있을 수 있다면
너는
있어도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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