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가을 패션의 무게 중심은 말 그대로 벨트 아래에 있다. 작년만 해도 여자들은 어깨에 무엇을 더 올려놓을까, 어떻게 더 부풀릴까 고민했다. 어깨선은 갈수록 뾰족하게 치솟았고, 어깨 패드도 점점 더 두터워졌다. 남자보다 강한 여자, 목소리 큰 여자가 옷으로 강조되던 시기다.
하지만 올해는 얘기가 달라졌다. 어깨는 깃털처럼 가볍다. 무거워진 건 치맛자락과 바짓단. 치렁치렁하면서도 풍성하고 대담하다. 한마디로 극적(劇的)이다. 구두·양말도 한층 다채롭다. 여성의 곡선과 관능을 옷으로 극대화한 셈이다. 왜 갑자기 디자이너들은 허리 아래를 주목할까.
◆ 불황을 벗어나면, 여성은 우아해진다
'불황엔 치마 길이가 짧아진다'는 공식은 어느덧 상식으로 통한다. 극적인 패션이 불황의 우울함을 떨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어깨 솟은 옷'이 작년을 주름잡았던 것도 같은 이유다.
실제로 작년 봄부터 디자이너들은 세계 곳곳에 뻗친 불황의 그림자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옷으로 표현했다. 한섬 브랜드 마케터 이서현범씨는 "작년 뉴욕 컬렉션장 분위기는 암울 그 자체였다"며 "디자이너들은 뉴욕발 금융 쇼크로 인한 경기 침체를 잊고 싶어한 나머지, 경제가 한참 부흥하던 1980년대 실루엣을 끌어와 런웨이를 채웠다"고 말했다.

프랑스 브랜드 발맹(Balmain)이 내놓은 '파워 숄더(power shoulder·어깨가 각지거나 뾰족하게 솟은 옷)'는 1980년대 군복 패션(military look)을 그대로 끌어와 일하는 여성, 당당한 여성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징(stud) 장식·높은 옷깃·어깨 술이 유행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이처럼 풍성한 어깨 장식이 변혁을 위한 부적처럼 쓰인 건 르네상스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패션 칼럼니스트 김홍기씨는 "14~16세기 르네상스 시대 복식을 살펴보면 어깨가 유난히 풍성하고 장식이 많다"며 "인간이 변화와 혁신을 추구할수록 옷에선 유난히 하체보다 상체가 강조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기 회복세로 돌아선 올해 패션은 작년과 정반대 방향을 향해 달려간다. 디자이너들은 다시금 여성 본연의 모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입술은 빨갛게 칠하고, 허리는 잘록하게 묶는다. 그리고 풍성한 치마나 바짓단으로 여성의 곡선을 강조하는 데 역량을 집중한다. 소위 '레이디라이크 룩(Lad y-like look)'이다. 김홍기씨는 "1950~ 60년대 유행했던 스타일로, 사람들이 안정적인 상황을 누릴 때 태동한 복식"이라고 말했다.
◆ 여유로운 여성을 향한 갈증을 보여주는 것
단순히 경기가 회복세로 들어섰기 때문이라는 풀이를 넘어 "여유로운 여성을 향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옷"이라는 해석도 있다. 최근 여성 디자이너들이 스스로 '강한 여성'에서 '여유로운 여성'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브랜드 '셀린느(Celine)'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비 파일로(Philo)가 대표적이다. '끌로에'를 명품 브랜드로 끌어올렸던 그녀는 2006년 "아이와 가정에 집중하고 싶다"며 패션계를 떠났다가 올봄 복귀했다. 일과 가정 사이에 균형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파일로가 선보인 건 끝자락이 넓은 바지와 무릎을 덮는 긴 치마다. 여유롭고 넉넉한 여성을 꿈꾸는 열망이 그렇게 올해 가을 허리띠 아래 풍성한 매혹을 낳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