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펼쳐진 눈밭이다 바람이 마른 모래처럼 일어난 눈가루를 휘몰아간다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斷指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무제無題라고 할 너의 순일한 마음에 대해 쓸까 영어囹圄에 갇힌 너의 죄 없는 욕망에 대해 쓸까 새하얀 너를 앞에 두고 토해냈던 내 먹물 같은 설움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깨어나지 못한 너의 침묵에 대해 쓸까 이 쇠잔한 생에 표착한 너의 불운에 대해 쓸까 외로워, 외로워 말하는 가오나시顔無し 같이 끼니마다 밥을 보채는 너의 허기진 영혼에 대해 쓸까 정해진 과오를 범하고 정해진 책망을 듣는 너의 차갑 게 굳어진 습習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하지만 내 가난한 가슴과 옹색한 문장으로는 너를 쓸 수 없다 너라는 이름의 눈밭은 오늘도 그만큼의 햇빛, 그만큼의 별빛을 받아 홀로 아득하다 너의 눈밭에 그물 같은 붉은 칸을 내려 한 미욱한 나를 연해 뉘우친다 아무도 미워해 본 적 없는 아무도 시기해 본 적 없는 너라는 이름의 눈밭 저 깊고 아득한 너의 설원
출처 : 2021년 《강원일보》신촌문예 당선작 ☆★☆★☆★☆★☆★☆★☆★☆★☆★☆★☆★☆★ 《3》 최초의 충돌
김민식
나는 화면 너머의 테니스 경기를 본다 테니스 라켓이 공을 치는 순간 무수한 공중이 한꺼번에 태어난다 고래의 힘줄 산양의 창자 얇게 저며진 살점으로 직공은 라켓을 짠다 종선과 횡선이 지나간 사이에 태어나는 눈 공중에 이름을 붙이는 최초의 노동이었다
천사를 체로 걸러낼 수 있다고 믿은 프랑스인이 있었다 축과 축의 직교 속에서 성령은 좌표를 얻었다
의심 속에서 의심도 없이
체의 촘촘한 눈을 세는 귀신의 눈은 비어 있다
눈알만 파먹힌 생선들이 부둣가에 쌓여 있다
백경白鯨의 투명한 수정체 멸종된 거대 수각류의 담석 전체를 상상하면 그것들은 차라리 허공이었다
한국의 산에는 호랑이 모양 구멍이 반드시 하나씩 있으며
돌탑 위에 둥근 돌을 하나 올려도 산이 무거워지는 것은 아니었고
무수한 왕의 안구가 뽑혀나가도 지구가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믿음 속에서 믿음도 없이
삶의 질량을 변화시킬 혁명이 필요했다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믿는 사람이 없었고 하늘에 빛나는 돌이 불과 물과 함께 떨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생겼다
외계에서 날아온 돌은 지구를 확실히 무겁게 만든다 그것은 종종 과학의 영역이었다
“마음 속에 천 개의 방이 있고, 그 안에서 천 개의 멜로디가 흘러나옵니다. 나는 어떤 계열의 천사인 것만 같습니다”
처음으로 운석을 발견한 아이가 남긴 말이었다 그가 발견한 검은 돌은 검은 신전의 기둥이 되었다
운석이 떨어진 자리엔, 빛과 유리와 불과 물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는데요
정말 그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자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다만 우주의 조각을 만져보고자 하는 순례자들의
계획 속에서 계획도 없이
푸른 언덕에 모여 유성우를 구경하는 사람들 얼굴들이 깊게 파인 구멍 같다 나뭇가지에 걸린 셔틀콕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표정만 같다
너, 라고 부르면 뒤돌아보는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아무도 귀엽거나 밉지 않았고
아나운서의 어깨 너머로 카메라가 풍경을 화소로 만들기 직전
나는 주머니에서 빛나는 하얀 공을 꺼냈다 아직 세상에 없는 구기 종목의 공인구였다
출처 : 202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4》 변성기
김수원
접시는 바꿔요 어제 같은 식탁은 맞지 않아요 초승달을 키우느라 뒷면이었죠 숨기고 싶은 오늘의 숲이 자라요 깊어지는 동굴이 있죠 전신거울 앞에서 말을 터요 알몸과 알몸이 서로에게 내 몸에서 나를 꺼내면 서로 모르는 사람 우리는 우리로부터 낯설어지기 위해 자라나요 엄마는 앞치마를 풀지 않죠 지난 앨범 속에서 웃어야지 하나, 둘, 셋, 셔터만 누르고 있죠 식탁을 벗어나요 눈 덮인 국경을 넘어 광장에서의 악수와 뒤집힌 스노우볼의 노래, 흔들리는 횡단열차와 끝없이 이어지는 눈사람 이야기, 말을 건너오는 눈빛들과 기울어지는 종탑과 나무에서 나무와 나무까지 밝아지는 모르는 색으로 달을 채워요 접시에 한가득 마트료시카는 처음 맛본 나의 목소리 달 아래, 내가 나를 낳고 나는 다시 나를 낳고 나를 낳고 내가 누구인지 누구도 모르게
출처 : 202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5》 길 찾기
김진환
차창 너머 낯선 가게들 잠시 눈감은 사이에 내릴 정류장을 지나쳤나 인터넷 지도로 확인한다 버스의 노선과 파란 점의 위치를
나는 길 잃지 않았다 인터넷 지도에 따르면 이 길은 내가 아는 길 매일같이 지나는 왕복4차로
거기서 나는 흰색과 붉은색 보도블록의 배열을 배웠고 넘어져 뒹굴며 무릎으로 손바닥으로 아스팔트를 읽었는데
보도블록의 배열이 다르다 아스팔트의 굴곡이 다르다
인터넷 지도를 확인한다 버스가 정거장 몇 개를 지나는 사이 파란 점은 아직도 아까 그 길에 있다
멀리 손 뻗어 손바닥의 살점 패인 자리를 보면 핏기와 죽은 피부의 흰빛이 구분되지 않는데
하차 벨 소리가 울린다 흰 버튼 위로 붉은 등이 들어와 있다 뒷좌석 사람이 내 뻗은 팔을 보고 대신 눌러 주었다며 손짓한다
버스에서 내려 아스팔트를 만져본다 인터넷 지도를 확인하지 않아도 이 길은 내가 아는 길이거나 거기로 이어지는 길 걷다 보면 낯익은 가게들도 보일 것이다
청계천 골목 어디쯤 모천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양양의 남대천이 아닌 뜨끈한 국수를 파는 국수 집 근처 어디라고 국수 발 같은 약도 적힌 메모를 들고 찾아간 미물도 명물로 만든다는 그 만물상 주물 틀에서 갓 나온 물고기 몇 마리 사왔지 수백 마리 수천 마리 붕어빵 구워낼 빵틀 파릇한 불꽃 위를 뒤집다 보면 세상의 모천을 찾아오는 물고기들 다 중불로 찍어낸 붕어빵 같지 한겨울 골목 경제지표가 되기도 하는 천원에 세 마리, 구수한 해류를 타고 이 골목 입구까지 헤엄쳐 왔을 따뜻한 물고기들 길목 어딘가에 차려놓으면 오고 가는 발길 멈칫거리는 여울이 되는 것이지 파닥파닥 바삭바삭 물고기 뛰는 모천의 목전쯤 되는 영하의 파라솔 아래 엄마가 하루 종일 서 있던 그곳
출처 :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 당선작 ☆★☆★☆★☆★☆★☆★☆★☆★☆★☆★☆★☆★ 《7》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
남수우
한 사람에게 가장 먼 곳은 자신의 뒷모습이었네
그는 그 먼 곳을 안으러 간다고 했다
절뚝이며 그가 사라진 거울 속에서 내가 방을 돌보는 동안 거실의 소란이 문틈을 흔든다
본드로 붙여둔 유리잔 손잡이처럼 들킬까 봐 자꾸만 귀가 자랐다 문밖이 가둔 이불 속에서 나는 한쪽 다리로 풍경을 옮기는 사람을 본다
이곳이 아니길 이곳이 아닌 나머지이길 중얼거릴수록 그가 흐릿해졌다
이마를 기억한 손이 거울 끝까지 굴러가 있었다
거실의 빛이 문틈을 가를 때 그는 이 방을 겨눌 것이다 번쩍이는 총구를 지구 끝까지 늘리며 제 뒤통수를 겨냥한다 해도 누구의 탓은 아니지
거울에 남은 손자국을 따라 짚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게 뒷모습을 안겨주던 날 모서리가 처음 삼킨 태양을 생각했다 흉터를 간직한 햇살이 따갑게 몸 안을 맴돌고 있을 거라고 뒷모습뿐인 액자를 돌려세운다
나는 자궁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태동을 알아채는 침묵 이전의 기억 밑으로 밑으로, 웅크리고 있다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고 재생에 몰두한다 어느 애도가 부재를 지나 탯줄로 돌아올 때까지, 타자의 몸 속을 오가는 이 반복은 고고학에 가깝다 생환의 뒷면은 그저 칠흑 덩어리일까 벽과 벽 사이 미세 한 빗살로 존재할 것 같은 한숨이 어둠 안쪽 냉기를 만진다 사금파리 녹여 옹기 만들 듯 이 슬픔을 별자리로 완성케 하는 일, 아슴푸레 떨어지는 눈물도 통로가 될까 북녘으로 넘어가는 해거름이 창문 안으로 울컥, 쏟아져 내린다 살갗에 도착한 바람은 몇 만 년 전 말라버린 강의 퇴적, 불을 켜지 않아도 여기는 발굴되지 않는 유적이다 잊기 위해 다시, 죽은 자의 생애를 읊조려본다 그래 다시, 귀를 웅크리지 태아처럼, 점점 화석이 되어 가는 기분이야 떠나면서 자꾸 뒤를 돌아본다 방안이 점점 어두워진다
하늘에도 물길이 있어요 비와 바람이 드나드는 길목이죠 낙엽도 허공에서 노를 저어요 겨울나무들은 흔들리지 않기 위해 허공 깊이 닻을 내리는 법을 알죠 좌현 쪽으로 기울던 오동나무 잎이 다급히 우현으로 몸을 틀어요 놀라지 마요 이곳에선 파도치고 배가 드나들 듯 흔한 일이죠
운이 좋으면 좌초된 해초 한 줄기에 당신의 오후가 생포될 수도 있어요 그럴 때는 그를 알아볼 순간이 필요해요 어쩌면 어선 위에서 젊은 어부가 되어 양식한 물김을 뜯고 있거나 또 모르지요 누각에서 홀로 일기를 쓰고 있을지도
해풍이 부는 밤바다에서 어떤 그림자를 보거든 신호를 보내듯 말을 걸어야 해요 이렇게 물어보는 건 어때요? 혹시 12라는 숫자를 좋아하세요? 아니면 푸른 버드나무 냄새가 훅, 스치거나 정강이 어디쯤을 조금씩 절고 있는지 재빨리 살펴요 그가 조금만 망설여도 당신은 바로 돌아서는 것을 잊지 말아요 고독한 수염 과묵한 입술과 눈빛 밤이라면 횃불 하나는 오른 손에 꼭 챙겨요 가끔은 내 안에서도 횃불이 번지긴 해요 나도 내가 누군지 잘 몰라요 우리는 서로를 모르기에 낯익은 사람들 물가에 가면 두정갑옷을 입은 듯 몸이 무거워요 온 몸이 비늘이에요 두드러기처럼 매일 철갑이 돋아나요
발포진에서는 환한 귀가 필요해요 깊은 밤 물가에 서서 눈 감고 하나, 둘, 셋, 세어 봐요 바람 속에서 갑옷의 기척이 먼저 말할 거예요 손 내밀 거예요 발포만호의 손에서 물비린내 날 거예요 손바닥에 짠 내 밴 굳은살이 쓸쓸할 거예요 밤이면, 그 날의 수군(水軍)들이 지금도 송판으로 판옥선을 만들고 돛을 달아요 거북선 위에서 망치질 소리 들려와요
잠깐, 포구 저쪽이 술렁여요 순시를 마치고 돌아온 그가 한쪽 손에 등채*를 들고 나를 향해 걸어와요 그의 한쪽 가슴에 활 맞은 자국이 보여요 설마 그의 눈에 내가 보이는 건 아니겠죠? 아직 나를 들켜선 안 돼요 붉은 두정갑옷이 내 앞에 당도 했어요 해풍의 냄새를 맡은 장군 어깨의 견룡이 구름을 박차고 날아올라요 내 말을 아무도 믿지 않겠죠? 심장이 터질 듯한 밤이에요
우리는 한껏 미세해진 우리를 내려다보며 기내식을 먹었다 책을 뒤적거렸다 구식 (舊式) 동물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그것은 동물들이 있다, 로 시작된다
유기인지 실종인지 자연발생인지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구식의 동물들이 발견되었고 그들은 제각기 살고 있다
매일 똑같은 구절을 읽어줘도 너는 언제나 놀라워한다 연하게 와서 끊임없이 훼손되는 마음으로 침목(枕木)을 고른 적이 있다 비를 맞고 볕을 쪼이길 반복한 나무토막들 위로 뜨거운 기차가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달렸다 모든 것이 멈추면 아웃렛에 가서 새 셔츠를 사고 카페에 앉아 아주 뜨겁고 단맛이 나는 차를 마셔야지 하다가 자신이 데려올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영영 잊어버린 사례도 있었다 이것이 소음으로 소음을 지워내는 방식입니다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각자 잊어버린 것을 접어 올리고 등받이를 세우고 얌전히 차례를 기다렸다 가팔라지는 날개 여러 개의 의자에 앉아야만 생각나는 것이 있다 이국의 빛과 온도 잎사귀와 해변의 선량한 사람들 규칙적인 것은 예상 가능해서 지울 수 있다 다만 어떤 통화 소리 바빠, 계속 바빠서 그래 배회하듯 하는 사과 그것은 틈입이다 나 좀 안아 줘, 같은 말은 꼭 돌아누우면서 하는 어떤 나쁨은 너무 구체적이어서 꼭 대낮 같다 물결이 물결로 공들여 썩는 냄새를 맡았다 그 것을 생각할 때 깨끗한 공기 속으로 무언가 빠르게 나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눈앞에서 파도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저마다의 계단처럼
출처 :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20》 여름의 돌
이근석
나는 토끼처럼 웅크리고 앉아 형의 작은 입을 바라보았다. 그 입에선 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형한테선 지난여름 바닷가 냄새가 나, 이름을 모르는 물고기들 몇 마리 그 입 속에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무너지는 파도를 보러 가자, 타러 가자, 말하는 형은 여기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미래를 이야기했다. 미래가 아직 닿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형을 들뜨게 했다. 미래는 돌 속에 있어,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이야기가 번져있어, 우리가 미래로 가져가자, 그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그동안 우리는 몇 번 죽은 것 같아. 여름, 여름 계속 쌓아 올린 돌 속으로 우리가 자꾸만 죽었던 것 같아. 여기가 우리가 가장 멀리까지 온 미래였는데 보지 못하고 우리가 가져온 돌 속으론 지금 눈이 내리는데
내리는 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내리는 눈 속으로 계속 내리는 눈 이야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우리가 우리들 속으로 파묻혀 가는 이야기들을 우리가 했다.
귀 하나 떨어진 양은냄비를 안고 골목을 지난다 삼삼오오, 얼룩이를 가리킨다 얼룩이는 번쩍번쩍 얼룩덜룩하다
고흐는 왼쪽 귀를 자르고 왼쪽으로 들었을까 어떻게 오른쪽을 들었을까
당신은 떨어진 귀를 버리지 못한 사람 뚜껑을 마저 잃고 배가 된 사람 이마는 당신이 키우던 물고기 떨어진 귀는 물고기의 어디쯤일까
귀를 기울인다 귀는 기울기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자른다 어디나 그런 귀 하나쯤 있다 절반이 절반에 매달려 가운데를 안고 돌면 떨어진 한쪽을 위해 두 배속 태엽을 감는다 꼬리에 풀리는 물 무늬 아가미로 쏟아지는 물살 삼킨 것들이 중심을 세운다
멱을 잡고 중심을 도는 것은 붙잡지 못한 것들이 많다는 것 밖이 안을 떠받는다 쓸모를 잡는 동안 바닥에는 차고 오르는 온도가 있었다 끓어 넘치던 냄비 뒤집어 보여주지 못한 뚜껑을 버리면 더 가까워서 가볍다 기억을 잃고 바닥을 태우던 사람이 있었다
붕대를 푼다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 은빛 물고기를 그린다 지느러미가 키를 잡는다 풍등이다 붙잡지 못한 것들이 손잡이를 흔든다 떨어진 귀가 어떻게 자신을 부르는지를
2021 《경남신문》신춘문예 당선작 ☆★☆★☆★☆★☆★☆★☆★☆★☆★☆★☆★☆★ 《22》 붕어빵 안에는 배고픈 고래가 산다
조효복
아이의 웃음에선 생 밀가루 냄새가 났다 접시 위에 수북이 담긴 고기를 자랑하는 아이 가쁜 숨을 내쉬며 조그마한 얼굴이 웃는다 콧등을 타고 오른 비음이 아동센터를 울린다 해를 등지고 앉은 언니는 아빠를 닮았다 그늘진 탁자에는 표류 중이던 목조선 냄새가 비릿하게 스친다 구운 생선을 쌓아두고 살을 발라낸다 분리된 가시가 외로움을 부추긴 친구들 같아 목안이 따끔거린다 흰 밥 위에 간장을 붓고 또 붓는다 짜디짠 바람이 입 안에 흥건하다 훔쳐 먹다 만 문어다리가 납작 엎드린 오후 건너편 집 아이가 회초리를 견딘다 튀어나온 등뼈가 쓰리지만 엄마는 버려지지 않는다 매일 다른 가족이 일기 속에 산다 레이스치마를 입은 아이가 돈다 까만 유치幼齒를 드러낸 아이가 수틀을 벗어난 실처럼 돌고 있다 귀퉁이를 벗어난 아이들이 둘레를 갖고 색색으로 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 뱃구레 속에 고래가 산다 골목은 높낮이가 다른 파동들이 그려놓은 바다 놀이터 제자리가 두려워 아래로만 내달리는 모난 고래들 풍덩 골목 아래로 제 몸을 던진다 가라앉은 먼지위로 고래가 헤엄친다 팥물 묻은 고래 비탈을 구른다 천막 아래 등이 굽은 엄마가 붕어빵을 굽는다
나는 웅크리기 좋은 무게로 태어났어요 돌고래의 고도는 새떼의 무게 같아요 새들이 흩어지는 사이로 연필 소리가 들립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나가는 새를 잃어버렸다 말할 수 있을까요 나무에 없는 새들을 세어보는 일은 열 손가락으로 모자라고 두 팔로는 충분한 일입니다
돌고래를 기르기에는 남해에 사는 당신이 좋습니다 눈 내리는 남해로 가는 버스 창밖 길러 본 적도 없는데 둥글게 헤엄치는 돌고래를 바라봅니다 나는 당신의 웃음을 빌려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일기예보에 오늘 아침은 잔기침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안정은 멀리 있습니까 나는 이런 예감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눈 감으면 버스의 흔들림만 남겨집니다
나는 돌고래가 아닙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릴 줄 압니다 잘 가, 돌고래는 휘어지는 몸짓으로 수평선을 밀어내고 있어 끝에서 끝이 부드럽게 멀어져야 좋은 미소 나는 돌고래로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돌고래는 미소를 기르기에 좋습니다 슬픔을 조심합니다 세계는 서로를 미끄럽게 기를 줄 알고 나는 입김에서 햇빛으로 조용하게 옮겨집니다 나는 한 종류의 돌고래가 됩니다
첫댓글 김용호 시인님
신춘문단 당선글
올려주셔서 잘 봤습니다
늘 감사 드립니다
건필 하십시요
신 춘 문단 당선 글 감상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용호 시인님
그래도 며칠전 보다는
한결 포근했던 하루
였습니다
늘 한문협 아끼고
사랑해 주셔서 깊은
감사드립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