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차꼬
누구나 세상에서 인생의 길을 떠나는 나그네이다. 그 말 ‘나그네’는 본향(고향)이 있다는 말이다. 그 본향을 향해 가는 삶이 인생이다. 그 길에서 돌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악인에게 꼬임을 당하기도 하며 괴질에 걸려 드러눕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뜻하지 않는 도움을 받기도 하고 선한 사람을 만나 지혜를 배우기도 한다.
우리는 가정이나 학교, 사회, 종교, 집회 등에서 바른길로 가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받은 지식이나 재능을 다른 이에게 돌려주는 것이 또한 받은 은혜를 베푸는 지혜이다. 그 지혜를 악하게 쓰는 것이 죄이다. 그래서 공동체는 규칙이나 규범의 틀을 만들어 행하고 있다. 그 틀을 보면 ‘하지 마라’라는 제약으로 규제하고 있다.
사람들은 지혜가 있어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동물들은 생각의 여지가 없이 습관적으로 행동한다. 아무리 길들어진 동물도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면 목줄이라는 차꼬(형틀)를 채워야 한다. 옛날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 목에 칼을 씌우며 발목에 차꼬를 채우는 것이었다.
지혜는 가르침의 잠언이다. 그 가르침은 시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으며 교훈적인 언어로 나타내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구전으로 전승되기도 했으며 문서로 전해지기도 한 ‘지혜문학’이 있었다. 오늘날 정경에 나오는 다윗의 ‘시편’이나 솔로몬의 ‘잠언’이 지혜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인간의 분별력으로 ‘하라’와 ‘하지 마라’의 교훈적인 가르침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계엄이라는 ‘내란’의 차꼬에 갇혀 어수선하다. 헌법재판소의 최종 결정을 앞두고 정의와 공정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솔로몬의 지혜처럼 분별력 있는 재판관의 지혜로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흐린 판단은 역사를 역행하는 크나큰 죄악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재판이 이루어지기를 국민은 바라고 있다.
국민은 재판관의 숭고한 정신세계의 차꼬를 열어 지혜로운 슬기가 쏟아져나와 희망의 깃발을 높이 치켜올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재판관의 지혜로운 결과가 正이든 反이든 양심에서 우러나와 하늘에 맹세코 한 점 부끄러움이 없으면 된다. 이를 국민이 지켜보고 있으며,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일상에서 神이 인간에게 내린 지혜를 정의롭지 않게 사용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한다. 그게 인간의 약한 모습이며 누구나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여 참회하여 돌아선다. 그러면 하늘은 비를 내리는 것처럼 우리에게 지혜의 자비를 베푸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