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84
8월16일[연중 제19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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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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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w7HCl7ekIIc (임지용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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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주님의 감추어진 현존을 발견하는 장소, 우리 공동체!>
은혜롭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각자에게 개별적으로 다가오셔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우리 안에 머무시며, 우리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무리, 다시 말해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도 접촉하시고, 대화를 나누시며,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공동체가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또 효력이 있는지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따지고 보니 공동체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이 통교를 나누고 친교를 나누는 사다리요, 매개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항상 현존하시며, 말씀을 건네시고, 당신 사랑을 건네시는 거룩한 처소입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우리 공동체를 가감 없이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살아있는 감실이요, 새 시대 성궤여야 할 공동체가 너무 실망스러워 나를 좌절하게 만듭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나의 이 큰 부족함 앞에 좌절합니다. 함께 몸 붙여 살아가는 동료 이웃들을 바라보며 실망합니다. 하느님을 대신해서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들의 위선과 이중성에 상처를 받습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철저한 이기주의와 세속성, 지나친 게으름과 나태함에 절망합니다. 따지고 보니 거룩하고 성숙해야 할 공동체이건만, 내게 주는 것은 실망이요 상처뿐입니다.
그러다보니 공동체에 큰 염증을 느끼고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차라리 공동체와 별개로 나 혼자 뭐든 해보려는 유혹이 점점 커집니다. 말만 공동체지 뭐 하나 제대로 된게 하나도 없는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공동체는 주님의 감추어진 현존을 체험하는 장소입니다.
주님께서 확연히 머무시는 지성소요, 부족해 보이고 결핍 투성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구원으로 안전하게 인도하는 방주가 곧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사랑을 배우는 학교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인 우리 공동체를 더 아끼고 사랑해야겠습니다. 공동체가 미우면 미울수록 더 많이 공동체를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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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얼마나 소중한 인연인데...>
때로 공동생활을 하면서, 때로 한 단체를 동반하면서, 그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꾸려가면서 정말이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측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실 이 땅에 두발을 딛고 서 있는 그 누구든 인간적 약점과 나약함, 실수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들 불완전하고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보완해주면서 완전함의 ‘끝’이신 하느님께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 무한한 인내도 정말 필요합니다. 한없는 기다림도 필요합니다. 그러려니 하는 큰마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난, 솔직한 ‘형제적 교정’입니다.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심각한 약점과 중대한 결핍 앞에서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바로 당사자 그와 일대일로 만나 그의 잘못과 죄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야기해주고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또 때로 엄청난 반발이 예상되는 일이기에, 때로 더 큰 상처와 소란함을 유발하는 일이기에 정말 신중하게 접근해야 되는 일이며 다른 무엇에 앞서 많은 기도가 선행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파악하고 계셨기에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 앞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당사자 ‘단둘’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일, 그가 말을 듣지 않더라도 분노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다음 단계를 밟으라는 것입니다.
그를 진정으로 한 가족, 한 형제로 여기면 절대로 한번 시도해보고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 지혜로운 사람, 너그러운 상담자, 깊이 있는 영적 지도자와 함께 또 다시 그의 회개를 위해 합심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가정 공동체, 교회 공동체, 사회 공동체 안에 아무리 막가는 사람,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는 암적인 존재가 있다손 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한번 권고해서 안 된다고 해서 단칼에 그를 매장시키려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이 방법을 써보고 안되면 또 다른 방법을 써보고, 최선을 다한 후에 안 되면 그때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특히 부족한 이웃들 앞에서, 그들의 교정과 성장을 위한 조언의 과정에서, 인내와 겸손, 신중함과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데, 얼마나 보석 같은 관계인데, 단칼에 끝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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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mTuSww6r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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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공동체 개인 간의 연결이 은총의 흐름에 끼치는 영향>
: 커뮤니티(교회) = 카리스마(성령) + 커넥팅(연결 시스템)
오늘 복음 말씀은 교회의 공동체성과 교회에 맡겨진 권한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먼저 단둘이 만나서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냥 무시해버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곧 당신 자신으로 파견하십니다. 교회를 받아들이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아니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파견하시며 당신의 모든 권한, 곧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결코 한 사람의 힘만으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도 성부와 성자, 그리고 두 분이 당신을 내어주실 때 선물 전달자의 역할을 해주시는 성령, 이렇게 세 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많은 본당이 성사 생활을 하는 신자수가 상당히 줄어들었습니다. 다시 나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의 커넥팅이 잘 된 이들입니다. 어떤 단체에 속해서 활동하던 분들은 대부분 다시 나오지만, 혼자 미사만 다니던 분들은 상당수가 계속 냉담해하고 있습니다. 성사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공동체에 속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한 자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새언니가 마귀에 들렸다는 것입니다. 코로나가 풀리면서 성당에 나가려고 해도 성당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프고 성당 가까이 가면 몸이 굳어 식은땀이 난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성당에 데리고 나왔지만, 새언니는 전혀 더운 날씨가 아니었는데도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고 합니다.
어찌어찌 고해성사를 보게 하고 성체를 영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앞으로 나아갈 때도 성당 모든 신자가 알아볼 정도로 몸이 마구 흔들렸습니다. 성체 한 번 영하게 하는데 그런 고생을 하면서 시누이도 진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이때 성모님께서 깨달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자기 혼자 새언니를 도우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혼자 안되면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레지오 하시는 분들에게 말해서 언니를 레지오에 입단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몇 주 사이에 악령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혼자 안 되면 공동체의 도움을 청하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의 출신 본당의 본당신부님께서도 이와 같은 일을 겪으셨었습니다. 미국에서 교포 사목하실 때인데 어떤 분이 악령에 시달린다고 신자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신부님은 겁이 났습니다. 자신은 마귀를 쫓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끌려가다시피 해서 도착해보니 마귀는 당당히 신부님을 노려보며 신부님의 죄를 상세하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창피해서 더 듣고 있을 수 없었지만, 또 오기가 생겨서 싸워보기로 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힘이 아닌 공동체의 힘을 빌려보기로 한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빙 둘러앉게 만들어 묵주기도를 함께 바쳤습니다. 처음엔 비웃었지만, 한 단씩 늘어나며 악령도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였습니다. 식은땀을 흘리고 소리를 지르다가 5단에 다다르자 마귀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그 사람을 놓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을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 능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힘이 필요합니다. 공동체는 마치 그물과 같습니다. 공동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만큼 많은 물고기를 놓칩니다. 지금 소공동체 시스템 안에서는 소외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포처럼 어디엔가 다 속해 있게 만들어야 교회의 힘이 강해집니다.
우리 각자는 세포와 같고 그 세포들이 다 몸에 연결되어 있을 때 그 몸이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소공동체 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연결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역량으로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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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15-20: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15절)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그래서 고통스러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힘으로써 자기 자신도 심한 상처를 입게 된다. 이제 우리의 상처보다도 형제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한다. 그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가 비난받는다고 느끼면 잘못해서 싸움이 될 수도 있다. 충고한다면서 몰아붙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충고할 때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 된다. 그러나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불러 타일러야 한다. 공동체가 한 사람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가 해결하도록 하라고 하신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절)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이교인처럼 행동하는 사람들과 속세의 이윤을 추구하며 사기와 거짓 맹세로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처럼 대하라는 말씀이다. 그래도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절)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이 단죄를 받으면, 이것은 하늘에 계신 어떤 분이 무효로 해 주시지 않는 한, 그는 매인 채로 있다. 훈계를 받아들이고 공동체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면 그때는 풀리는 것이다. 매이는 사람은 충고를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9) 하나가 되는 것은 생각과 의지의 일치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무엇을 청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참으로 일치하지 못했거나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탓이다. 하느님께서는 형제들의 평화와 일치와 화합보다 기뻐하시는 것은 없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그것들은 주님과 사람 앞에서 아름답다. 형제들끼리 일치하고 이웃과 우정을 나누며 남편과 아내가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이다.”(집회 25,1) 그러니 주님께서 둘이나 셋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기도를 이루는 것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의 신심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크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기꺼워하시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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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산보 중에 강의를 듣는 것은 기쁨입니다. 얼마 전에 ‘트리구조와 네트워크구조’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인류는 문명과 문화가 발전하면서 지식을 트리구조로 발전시켰습니다. 인류의 발달은 수렵, 유목, 농경, 도시의 순서로 발전하였습니다. 진화의 사슬도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의 순서로 이해하였습니다. 생명은 바이러스, 세포, 단세포, 다세포, 초식동물, 육식동물의 순서로 이해하였습니다. 최근까지는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천민, 양민, 중인, 양반, 왕족의 순서로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성서도 믿음의 조상을 족보를 통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아담에서 예수님까지, 아브라함에서 예수님까지의 족보를 소개하였습니다. 대학도 단과대학, 종합대학의 순서로 이해합니다. 대학 안에는 전공과목이 있고, 전공과목도 세분화 시킵니다. 신학교에서도 철학, 신학, 성서학, 교회법, 교리교수법과 같은 순서로 나누어서 공부하였습니다. ‘트리구조’는 인류의 발전상황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트리구조는 인류가 지식을 쌓으면서 만들어온 훌륭한 도구입니다.
현대에 이르면서 ‘트리구조’의 대안으로 ‘네트워크구조’가 떠오른다고 합니다. 전기와 컴퓨터 그리고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네트워크 구조에 대한 인식이 생겼다고 합니다. 트리구조는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이 힘들고 긴 단점이 있습니다. 조직이 커지면서 명령을 내리고, 수행하는 단계가 복잡하고 길어질 수 있습니다. 새로운 변화와 상황에 대처하는 순발력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네트워크구조는 빛의 속도로 연결되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인공지능, 챗 GPT, 메타버스, 가상현실, 자율운전과 같은 개념은 네트워크구조의 발달에 따라서 이루진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학습하고 연구해서 얻어지는 지식과 논문이 불과 10분도 안 되어서 눈앞의 현실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인류의 소중한 유산인 ‘트리구조’도 앞으로 더 발전하겠지만 새로이 등장한 ‘네트워크구조’에 대한 이해를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컴퓨터의 등장과 비데를 사용하면서 종이의 수요는 줄어들지만 종이는 더 고급한 방향으로 만들어 질 것입니다. 저도 아직은 트리구조에 익숙해있습니다. 교구, 본당, 본당 신부, 보좌신부, 수도자, 평신도라는 구조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구조에 익숙했을까요 예수님은 어떤 구조의 삶을 선호하셨을까요 예수님은 트리구조보다는 네트워크구조의 삶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율법과 계명이라는 트리구조를 초월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신분과 계급이라는 트리구조를 초월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가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선생과 제자라는 트리구조를 초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벗이라고 하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세상의 셈법은 법과 원칙에 따라서 이루어지지만 하느님의 셈법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해서 정해진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던 죄인은 모든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과 우리를 하나로 연결하는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의 기쁜소식은 ‘트리구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의 기쁜소식은 ‘네트워크구조’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런 나라를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그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네트워크구조에 접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와 회개입니다. 용서와 회개의 삶을 사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의 네트워크구조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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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형제, 형제애>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여기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네 형제가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을 네가 알게 되었거든”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두 사람 사이의 사적인 다툼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하느님께’ 죄를 짓는 상황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단둘이 만나” 라는 말씀은, 회개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곧바로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단죄하는 상황을 만들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타일러라.”라는 말씀은, 좋은 말로 타이르는 것과 꾸짖고 야단치는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은 “그가 회개하면”입니다. 여기서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되찾으신 것이다.”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일은, 아버지 입장에서는 잃었던 아들을 되찾은 일이었고, 큰아들 입장에서는 잃었던 동생을 되찾은 일이었습니다.(루카 15,32)>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1-5)
죄를 짓는 형제를 타이르겠다고 나섰다가 그를 함부로 심판하는 죄를 짓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의 죄를 지적하고 타이르기 전에 먼저 할 일은 나 자신을 반성하고 살펴보는 일입니다. 형제를 회개시키기 전에 먼저 나 자신부터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죄 속에 있으면서, 또 자기는 회개하지 않으면서, 형제에게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교만이고, 위선이고,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죄를 짓는 형제를 타이르는 입장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또는 죄를 짓고 있는 죄인의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형제를 타이르는 상황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형제가 와서 나를 타이르는 상황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죄인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은, “네 형제가 와서 죄를 짓고 있는 너를 타이르거든 그의 말을 들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자격을 회복할 것이다.”가 됩니다. <왜 항상 형제를 죄인 쪽에만 두고, 자기 자신은 의인 쪽에만 두는가? 정말 그렇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고 있는가?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은 처지의 죄인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죄를 지은 형제를 타이르는 것은, 그는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 회개하여라.”가 아니라, “우리, 함께 회개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6-20)
잃은 형제를 되찾는 일은, 또는 내가 형제 자격을 잃었다가 그것을 회복하는 일은, 개인의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12,12-31)
그런데 회개하라고 타일러도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형제애를 거부하는 것이고, 공동체에 속해 있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라는 말씀은, 그를 ‘파문’하라는 뜻인데, 실제 상황을 보면 교회가 파문하지 않아도, 또는 파문하기도 전에, 그 사람들이 스스로 교회를 떠납니다.
“...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교회와 사도들의 파문 권한을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인은 하늘에(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나 자신’에게 하시는 경고 말씀으로도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에 네가 형제의 말도 듣지 않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러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죄 속에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너는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형제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회개하는 것, 나 자신이 구원의 길을 잘 걸어가는 것입니다. 회개와 구원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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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누군가 죄를 지으면 하느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하실까요? 벌을 내리실까요? 아니면 이미 죄지은 고통에 신음하는 그에게 더 큰 형벌을 내리시어 더욱 불행하게 하실까요? 오늘 복음을 읽어 보면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에게 다가가시어 그가 죄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을 걷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첫째, 당신의 말씀과 영으로 그를 찾아가시고 죄인의 상처를 보듬어 낫게 하십니다. 둘째, 죄인에게 용서와 화해, 치유와 구원의 중재자들을 보내십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입니다.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 열쇠는 복음 바로 앞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바로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 곧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18,14)라는 말씀입니다. ‘이 작은 이들’이란 잘못을 저지른 이들, 그래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찾아가는 목자의 여정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그 여정 가운데 다칠 수도 있고, 깊은 구덩이에 스스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신자는 형제의 목자가 되어 주도록 부름받은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어 방황하는 이들을 가리켜 “네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두고 우리는 하느님께 어떻게 말씀드릴까요? “제가 그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내가 그의 후견인입니까? 그 사람의 문제는 그의 문제일 뿐입니다.”라며 카인처럼 말하면 될까요?(창세 4,9 참조) 우리는 모두 언젠가 하느님 앞으로 갑니다.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과 맺은 관계로 그분께 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형제들을 하느님께 되돌아오게 하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용기 내어 우리 형제들에게 다가갑시다. 사랑으로 다가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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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어 구원을 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평생을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중개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보이는 느보산 피스가 꼭대기에 섭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온 땅을 보여주시지요.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충실했던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 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신명기 34장 4절)
이미 광야 ‘시험’이라는 의미의 므리바, ‘다툼’이라는 의미의 마싸의 땅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한 사실을 들어 모세와 함께 그 세대의 사람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을 알려주십니다.
민수기 저자는 불평사실과 연결해서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민수기 20장 12절)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거닐 때, 르피딤에서 진을 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마실 물이 없다고 모세와 다투고 하느님을 시험한 적이 있습니다.
탈출기 저자는 그 장소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비하였다 해서, 그리고 그들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고 해서, 그곳의 이름을 마싸와 므리바라 하였다.”(탈출기 17장 7절)
시편저자도 므리바의 일을 회상하며 교훈으로 삼고 있습니다.(시편 81,8 / 106,32)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모세의 마지막 삶의 이야기를 신명기 저자는 비교적 상세하게 적고 있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삼아 안수를 합니다. 그리고 모세의 나이 백스무 살이 되었을 때 모압 땅에서 죽습니다.
그런데 모압 땅 벳프오르 맞은 쪽 골짜기에 묻히게 되었는데, 누구도 그 자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모세에 대해서 최대의 찬사와 함께 이렇게 적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주님께서 그를 보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와 온 나라에 일으키게 하신 그 모든 표징과 기적을 보아서도 그러하고, 모세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이룬 그 모든 위업과 그 모든 놀라운 대업을 보아서도 그러하다.”(신명기 34장 10절-12절)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공동체에 관련되면서도 서로 독립된 세 가지 말씀들을 제자들에게 해주십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단둘이 따로 만나 충고와 함께 타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두 세 사람의 증인을 세워 더 이야기해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마저 안 되면 교회 공동체에 알리고 그것도 또 안 되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권한에 대해서 말씀하시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오 복음 18장 18절)
그리고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18장 19절-20절)
거룩한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죄인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의견도 제각각일 수 있고 또 잘못을 하는 형제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가끔씩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망스런 일들도 벌어질 수 있고 또 시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또 세상은 기회는 왔다고 신랄하게 교회가 이러서야 되겠느냐?며 시퍼런 칼을 대고 색깔이 없는 군중은 여기에 가담해서 한 마디씩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는 말들은 많은데 쓸데 있는 것이 많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므리바와 마싸에서 저지른 잘못은 불평하며 하느님께서 세우신 모세의 권위를 무너트리려 했던 것입니다.
성서 기자들은 이 사건을 그대로 묵과하지 않고 두고두고 곱씹어 보며 교훈을 갖게 합니다. 많은 불평은 다 이유가 있고 그 나름대로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라는 높은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악성 댓글은 자신들이 옳다고 하면서 이웃이 부서지는 것에는 무관심하거나 극단 이기주의로 흘러 갈 수 있습니다.
권리가 있으면 의무가 따라야 하고 정의와 사랑이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보와 자기희생도 감안해야 성장과 성숙한 공동체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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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 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사베리오 신부님]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 18장 19절-20절)
신앙생활을 개인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하느님과 나의 관계에 충실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교회 공동체의 움직임에는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인다.
하느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에 무게를 두는 것은 분명 더할 나위 없는 옳은 태도이다. 하지만 잘못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고통 받는 이웃과 나누라 하신다.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어 나아가는데 힘을 모으라 하신다.
신앙은 분명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시작되고 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 즉 기도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다. 하지만,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함께 성장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기적이고 교만한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기도라면 나를 잊은 타인을 지향하는 기도가 주를 이루기 마련이다. 그리고 기도로 얻어진 답을 구체적인 삶으로 실천해야만 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두 사람이라도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곳에는 주님께서 계시다 말씀하신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다.
미사나 예배가 아름다운 이유들 중 하나는 함께 마음을 모아 청한다는 데 있다.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더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하여 보다 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우리이기를 바란다. 신앙은 함께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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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형제애를 촉구>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오 복음 18장 15절) 예수님께서 형제와 이웃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갈등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먼저 단둘이 만나 타이르고, 혹 화해에 이르지 못하면 증인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이야기하며, 그래도 안될 경우 교회의 공적인 중재를 요청하라고 하십니다.
자칫 이 절차는 둘 사이에 해결하고 끝낼 일을 괜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알려 일을 크게 만들고, 교회 공동체까지 개입시켜 더 골이 깊어지는 게 아닐까 오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과정을 제시하시는 건, 둘 사이에서 어떤 내외적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감정에 휩싸여 충동적으로 행동하기보다, 차근히 객관적 시선 앞에 스스로를 놓고 최선을 다해 화해의 노력을 다하라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오 복음 18장 18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 같아도, 우리가 땅에서 풀어 주고 탕감해 주는 마음 씀씀이가 하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니 대단하지요.
그래서 더욱 힘을 다해 자신과 형제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풀어 주는 만큼 우리 자신이 먼저 자유와 평화를 얻는다는 점이 이 방식의 신비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18장 20절)
우리가 저마다 서로 다르고, 각자 불완전한 만큼 상대에게 오해받을 소지도 많은 죄인들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 그분께서 현존하십니다. 다수의 공동체여도, 두어 명의 소수여도 마찬가지이고, 친교 상태는 물론 갈등 상황이어도 다르지 않습니다.
제1독서는 모세의 죽음과, 그에 대한 성경 저자의 평가를 전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신명기 34장 10절)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온 힘을 다해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모세는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지상의 삶을 마칩니다.
성경은 모세가 므리바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그 탓을 모세에게 돌리지만(민수기 20장 2절-13절 참조), 이 안타까운 결함도 모세와 주님 사이의 사랑이나 모세의 존재적 가치를 희석시킬 수 없지요.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신명기 34장 10절) 창조주와 피조물이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귄다는 건 참 놀랍고도 매혹적이지요. 하느님은 모세뿐 아니라, 피조물 중에서도 특별히 당신의 모상을 나눠주신 모든 인간과도 실상 이런 관계를 맺고 싶어하십니다.
주님과 모세가 나누었던 특별한 사랑은 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열린 가능성인 셈이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 얼굴을 보여 주고 싶어하시고, 당신 마음을 내어주고 싶어 우리 주변을 서성이십니다. 당신께 관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응답하는 영혼을 찾고 계시지요. 그분은 우리(나)의 얼굴을 마주 보며 사귀고 싶어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성녀 클라라는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축복문을 남겼지요. "주께서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에게 드러내 보이시고 자비를 베푸소서. 주께서 당신의 얼굴을 돌리시어 평화를 주소서..."
거기에 더해서 주님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서로 이러한 친밀한 유대가 이루어지길 바라십니다. 저마다 부족함을 안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늘 말도 많고 탈도 많기 마련이지만 원래 사람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 용서와 화해, 사랑과 일치를 이루라고 불리웠지요.
크고 작은 갈등과 부딪힘 속에서 답이 없는 듯 막막할 때가 더 많지만, 그건 아직 우리가 과정 중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지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하느님이 ...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복음 환호송) 예수님께서 형제를 위해 조금만 더 애써 보라고 우리를 다독이시는 듯합니다. 정성을 다해 조심스럽게 형제에게 다가가 경청하고 용서하여 그를 얻는 것은, 우리는 물론 주님께도 참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바로 그 자리에 당신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니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마음에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를 주님께 봉헌하고 용기를 내어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은총의 시간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으니 그 자리에 계시는 예수님과 함께 반드시 화해가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사랑으로 용기를 내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성녀 클라라가 그 축복에 함께 하실 겁니다. 성녀 클라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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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목소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 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성무일도)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 빛을 그리워 하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 그것을 일깨워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바른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충고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칭찬은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변의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쓰지만 약이 되는 바른 충고를 해줄 수 있고 또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소중합니다. 더더욱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고 하셨으니
한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있는 형제가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형제가 되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두를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성녀 안젤라 메리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고를 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따라서 남을 충고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마음의 조언에 주의를 기울여라. 너에게 그보다 더 믿을 만한 자는 없다.”(집회37,13)
먼저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고 백옥같이 희게 만드시길 기도하면 주님은 그 마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쓴소리를 하느님의 소리로 듣기를 희망합니다. “잘못을 지적받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깊은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마주 오는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반가운 것 역시 사람이랍니다. 사람이 제일 좋기도 하면서 제일 힘든 존재이기도 합니다.
좋을 때는 더없이 편하지만 틀어지면 그것만큼 불편한 것이 없습니다. 가장 친했던 사람이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내 기대와 상대의 바람, 그리고 허물조차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이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을 주고받기까지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기다림도 필요합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입니다.”(잠언12,15)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슬픔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구원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고통 안에서 기뻐하고 슬픔 안에서도 희망합니다.
시련이나 위기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우리는 연약함으로 걸려 넘어지기도 하지만 형제적 사랑과 주님의 자비로 죄악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형제적 사랑으로 모두를 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한마음으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잘못을 범한 형제를 위한 노력의 중심에는 늘 교회의 기도가 함께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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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을 좋아하고 또 책을 통해 많은 것을 얻는 저에게 있어 책은 너무나도 고마운 존재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때, 저는 제일 먼저 책을 구매합니다. 얼마 전에는 ‘와인’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주변에 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와인을 말하는데, 제가 아는 와인이라고 하면, 미사주로 사용하는 ‘마주왕’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평소에 하던 대로 제일 먼저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와인에 대한 저의 호감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올라갔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책만 읽었을 뿐, 와인은 전혀 마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책을 통해서, ‘70-20-10’의 법칙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배울 때의 방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가장 많은 70은 70%의 경험을 말하고 있고, 20은 20%의 멘토나 동료로부터의 가르침을, 마지막 10은 10%의 책이나 수업 등 책상에서 배우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따라서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70%의 경험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많이 이용하는 독서나 공부는 겨우 10%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와인에 대해 알고자 했다면 가장 먼저 와인을 마셔봐야 했습니다. 하느님 사랑도 이렇지 않을까요?
하느님 사랑을 알려면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이었습니다. 스스로 기도하고, 스스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단순히 막연히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냥 책만 열심히 읽는다고, 그리고 좋은 지도자를 만난다고 해서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하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주님과 함께해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 공동체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시지요. 또 죄를 지었다고 해서 이웃을 공동체에서 쫓아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잘못된 형제자매를 고쳐 주려고 서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처럼 이론으로만 알고 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주님에 대해서는 이론을 뛰어넘어서 이웃과 함께하는 본인의 사랑 실천을 통해서만,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을 잘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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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 땅 사람>
마태오 18,15-20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하늘 땅 사람>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우리는
땅과 하늘 사이에
있는 사람이니
우리는
땅과 하늘 사이에
있는 사람이어야 해요
우리는
땅을 하늘로
올리는 사람이니
우리는
땅을 하늘로
올리는 사람이어야 해요
우리는
하늘을 땅으로
내리는 사람이니
우리는
하늘을 땅으로
내리는 사람이어야 해요
우리는
땅과 하늘을
잇는 사람이니
우리는
땅과 하늘을
잇는 사람이어야 해요
우리 때문에
하늘과 멀어진 땅이
슬퍼하지 않고
우리가 있어
하늘을 만난 땅이
마냥 기쁠 수 있게
우리 때문에
땅과 멀어진 하늘이
슬퍼하지 않고
우리가 있어
땅을 만난 하늘이
마냥 기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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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게 잘못한 사람에게 어떻게 할까?>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생각에 나를 위한 것과 그를 위한 것이 있을 것인데
먼저 나를 위해서는. 내게 잘못한 그의 잘못 때문에 흥분하거나 성내지 않고, 아무런 일이 없었던 듯 아무 소리 하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하며,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용서해준 다음 내 마음에 그 일과 관련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 무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기가 쉽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이것으로도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여기에 만족하지 말라고, 그를 위한 것도 하라고, 곧 그에 대한 사랑의 차원에서 세 가지를 하라고 하십니다.
첫째 그의 잘못을 교정해주라고 하십니다. 내게 저지른 잘못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픈 것이 아니라 그런 잘못이 그에게 있다는 것이 안타깝고 마음 아프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프란치스코는 권고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박해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따라서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害)로 말미암아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권고한 다음 프란치스코는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줍니다.”라고 하는데 그 행동이 제가 생각하기에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교정 행위입니다. 그에게 그런 잘못이 뿌리 깊게 있는 것이 마음 아파 교정해주는 겁니다.
내 눈에 있는 들보도 문제지만 그의 눈에 티가 있다는 것도 문제이고 마음 아픕니다. 그래서 비록 그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 줄 자격이 없지만 그래도 그의 눈에 티가 있는 것이 마음 아파 빼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혼자 하는 것이 역부족이거나 효력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서라도, 그것도 부족하다면 공동체 전체에 호소해서라도 고쳐주라고 하십니다.
다음은 풀어주는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여기서 풀어주는 것은 용서의 의미 곧 내게서 그를 풀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를 죄에서 풀어주는 것 또는 죄의 종살이에서 그를 풀어주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까 충고를 통해서는 죄악에서 그를 풀어주고, 용서를 통해서는 내게서 그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다음은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의 병이 나면 기도해주는데 마음이나 정신의 병으로 인해 잘못하면 기도해주기보다 욕하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험담하고 내게 잘못할 경우엔 저주까지 퍼붓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병이 든 사람보다 더 사랑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사실 육신의 병이 들거나 장애가 있으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나 정신이나 영혼이 병이 들면
아무리 육신이 건강해도 행복할 수 없고 그래서 더 불행하고 더 불쌍하며 그래서 우리의 사랑과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이렇게 얘기하지만 참 이렇게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를 위해서도 기도해야겠지만 이럴 수 있는 내가 되도록 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기도 부탁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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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올바로 ‘보는 눈(觀)’>
- 하느님 중심의 올바른 공동체관(共同體觀) -
무식하고 용감하면 답이 없습니다.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적반하장, 후안무치의 괴물같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요즘 시국을 대하며 문득 떠오른 생각이요 참으로 보는 눈의 중요성을 참 많이 생각했습니다. 요즘 나라 지도자들은 얼마나 공부하는지, 책을 읽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식, 무지가 죄입니다. 정말 자기를 아는 사람이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제일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것이요 제일 어려운 것이 나를 아는 일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정말 자기를 아는 자기인식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겸손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겸손히 독서하는 것입니다. 겸손히 경청하는 것입니다. 무지와 무식의 어둠으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런 부단한 공부와 독서와 경청의 훈련과 습관은 필수입니다. 도대체 그 많은 지식에 비상한 두뇌를 지녔어도 무식하고 무지한, 지혜의 눈을 지니지 못한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올바로 보는 눈을 지니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교육의 궁극 목적도 이런 올바른 눈을 지니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눈없는, 눈먼이들이 대부분같습니다. 우리를 눈멀게 하는 탐욕, 분노, 질투, 완고함등 무지는 얼마나 다양한지요! 그러니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에서 벗어나 혜안慧眼의 맑은 눈으로 본질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는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 셋을 지녀야 합니다. 철학과 실력,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역사의식, 사회의식, 공동체의식, 시대정신, 열린 지평을 지녀야 합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끊임없는 공부입니다. 하느님 공부에 참나를 아는 공부, 그리고 역사 공부, 현실 공부입니다. 칼 바르트 신학자는 성서를 보듯 신문을 보고, 신문을 보듯 성서를 보라 했습니다. 이래서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확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올바로 볼 수 있는 역사관, 종말관, 죽음관, 시국관, 국가관, 인생관, 철학관, 세계관, 종교관, 시간관, 구원관, 정치관, 공동체관, 가치관 정말 끝이 없습니다. 모 정치 지도자의 억강부약(抑强扶弱), 대동세상(大同世上), 기본사회(基本社會)의 복음적 가치관에 공감하고 감탄했습니다. 이래서 올바른, 양심적인, 통찰력을 지닌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말그대로 철학과 실력, 용기를 지닌 전문가입니다.
오늘은 하느님 중심의 올바른 공동체관에 대한 묵상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교회공동체는 크든 작든 살아 계신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무엇보다 공동체의 중심인 지도자는 중심이신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비단 공동체의 책임자인 지도자뿐 아니라 모두가 지도자적인 정신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요셉수도원을 사랑하는 모임인 코이노니아 자매회, 책임자를 돌아가면서 한다는 말에 신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믿는 이들의 작은 공동체라면 공동체 성원에게는 참 좋은 체험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올바른 공동체관을 배우게 됩니다.
요즘 계속됐던 제1독서 신명기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의 참 멋진 지도자입니다. 늘 공동체의 중심인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나눴고 맡은 책임에 얼마나 간고분투의 노력을 다했는지 그 삶자체가 감동이요 감탄이요 감격입니다. 신명기 33장은 세상을 떠나기전 ‘모세의 축복’이요, 마지막 34장은 참으로 장엄하고 감동적인 모세의 죽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참 냉철합니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가지는 못한다.”
바로 여기까지로 모세의 역할은 끝났다는 것입니다. 떠나야 할 때 잘 떠나는 죽음은 얼마나 중요한지, 참 멋지고 아름다운 지도자 모세입니다. 참 멋진 지도자의 귀감으로 모세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영원히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훌륭한 지도자가 공동체에 미치는 좋은 영향은 참으로 큽니다. 모세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묘사가 깊고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한다. 모세는 죽을 때에 백스무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찼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릴레이 경주에서처럼 평화적이고 자연스런 여호수아에로의 바톤 텃치의 권력 교체요, 모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함은 흔적없이, 자취없이 사라짐으로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추호도 부담을 주지 않게 하려는 하느님의 심모원려임을 알아챌 수 없습니다. 모세는 맑은 눈, 맑은 정신으로 선종했고, 여호수아에게 안수함으로 지혜의 영도 선사했으니 정말 완벽한 떠남입니다. 참으로 좋은 추억을 가득 남기고 떠난 위대한 지도자 모세이기에 오히려 죽어서도 영원히 살아 있는 듯 지금까지 좋은 영향을 미치며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도 신명기의 모세에 이어 주님으로부터 공동체관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을 배웁니다. 공동체내에서 죄를 지은 형제에 대한 섬세한 교정과정을 통해 목적은 벌이 아니라 화해와 치유에 있음을 봅니다. 점차적인 절차를 통해 자연스럽게 공동체에 복귀하도록 최선을 다한 후 비로소 공동체로부터의 축출이라는 것입니다. 예전 교정이 없는 공동체는 약한 공동체라는 장상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 이에 대해서는 분명한 사실(fact)에 근거한 교정이 필요하며 이것이야말로 형제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교정의 목적은 치유와 화해에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땅의 공동체내에서 살아가면서 공동체로부터의 용서가, 공동체와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땅의 공동체의 현실에 따라 하늘도 좌우된다는 엄중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땅에서 매인 것을 푸는 고백성사의 은총입니다. 땅이 하늘입니다. 땅의 공동체내에서 막히면 하늘에서도 막히고, 땅의 공동체내에서 풀려 통하면 하늘에서도 풀려 통한다는 것입니다. ‘아래로부터 위로’이지 이 반대는 절대 없습니다. 물론 아래로부터 푸는 일에도 은총은 절대적입니다. 오래전 이런 진리를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이란 시로 표현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바로 치유와 화해로 땅의 공동체와 하늘이 하나로 통했을 때, ‘땅에서 하늘의 별처럼’ 살아가는 고귀한 품위의 공동체 형제들입니다. 다음은 공동체 일치의 중심인 예수님을 모신 공동체 기도의 위력입니다. 참으로 공동체 형성에, 올바른 공동체관에 마음을 하나로 모은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지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둘의 공동체입니다. 하나와 둘의 차이가 천지 차이입니다. 둘이나 셋이라도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할 때에 땅에서 매인 것이 풀림과 동시에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땅의 공동체와 하늘이 하나로 통하는 하늘 나라 공동체 형성에, 또 올바른 공동체관의 눈을 지니는데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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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18,20)
<성체신심!>
오늘 복음(마태18,15-20)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는 말씀과 '함께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과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보고 사귀던 사람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밝지 못하고, 백스무 살에 모압 땅에서 죽은 소식을 전하는 오늘 독서(신명34,1-12)를 묵상하면서, '성체신심'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개신교 예배의 핵심은 '목사의 설교와 찬양'입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성찬 전례'가 그 중심입니다. 일치와 화해의 공의회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말씀 전례'의 중요성도 강조되었지만, 그래도 전례 중에 전례인 미사의 본질은 빵과 포도주가 사제의 손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뀌는 성(聖)변화에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이 성체를 받아모시기 위해 애쓰고, 그리고 받아모신 성체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성체를 모독한다는 '모령성체'는 성체를 받아모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체를 받아모시는 것입니다. 너를 용서하지도 너와 화해하지도 않은 채 방약무인하게 성체를 받아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체를 받아모시고도 변화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罪)입니다.
'성체신심'이 약하다 보니,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도 약합니다. 성직자를 함부로 대하는 이들에게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성직자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이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에 봉사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기에,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람에게 짓는 죄보다 이분들에게 짓는 죄는 더 큰 것입니다."(권고26, 하느님의 종들은 성직자를 존경할 것)
오늘 복음과 독서가, '공동체 안에 성체신심이 강한 영적 어른이 두 세 사람만 있으면 된다.'는 말씀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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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O1HVX9uh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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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 15)
공동체적 정신과
공동체적 삶이
절실히
필요한
우리시대의
삶입니다.
공동체의 실현은
나눔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나눔의 실현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랑의
진심어린
관계입니다.
믿음과 신뢰를
회복하는
첫 시작은
언제나 우리의
대화에 있습니다.
결과만큼
중요한 것은
공동체와
화해를 위한
우리의 노력이며
그 과정입니다.
모든 건강한
대화의 과정은
걱정과 의심을
없애주는
소통의
결실입니다.
그래서 대화는
독선과 아집을
내려놓고
서로 평등한
입장에서
만나 서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대화가 빠져버린
공동체는 아픈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의 위기는
또한 신앙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공동체의 건설은
꿈이 아니고
실현 가능한
우리의 생활입니다.
이를 뒷바침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공동체로
돌아가서
공동체로
살아가는
기도의 삶이
우리들의 건강한
복음의 삶입니다.
정신적 삶을
이끌어가는 것은
복음의 지혜입니다.
신앙 공동체의
제 자리를 찾는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경청에서
시작됩니다.
말씀과 공동체
기도와 행복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삶입니다.
서로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신앙공동체이길
기도드립니다.
대화와 경청
기도와 생활로
공동체는 활기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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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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