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차엔
꿈과 낭만이 앞장선다.
두려움과 설움도
덩달아 온다.
내가 처음 타본 열차는 호남선이다.
두계역(현재의 계룡역)에서 영등포역까지 탔던
아련한 기억은
형용키 어려운 떨림을
우르르 동반한다.
그 밤차를 타기 위해
산마루격인 우리 동네에서
십오 리 길을 걸어 나와야 했다.
어둡기 전에 도착한 외당숙 댁에서
야심한 시각이 오길
심심하게 기다렸다.
낯선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멀거니 시간을 축내다가
전라도 쪽에서 올라오는
밤 11시 열차를 타는 것이다.
그러니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타인들 속의 내밀한 나를 단속하느라
신경줄이 곤두섰다.
안온한 둥지 안에서
밖을 향한 이동은
그렇게 웃음기 없이 시작되었다.
새벽 네 시쯤 내린
영등포역에서는
전철 운행 시각까지
또 기다림이 수반되었다.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고
동생들의 앞길을 닦아주겠다는 포부와는 달리,
앞으로 닥칠 일을 예상할 수 없어
두려움이 지배적이었다.
이제부턴
부모님의 그늘 아래의 둥지가 아니라는 점이
적잖이 불안하게 했다.
그럭저럭 스무 살 무렵인가,
서대전역인지 대전역인지
승객들이 내려서 가락국수를 먹고
출발하는 밤 기차가 있었다.
그날은 나도
허둥지둥 서서 그 대열에 끼였다.
구수하고 꿀맛이었다.
가까스로 허기를 면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침목 건너 어둠 속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난데없는 광채에 가슴이 벌렁거렸다.
우아하기 이를 데 없는
분홍 꽃송이!
나는 절로 "히야~"하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누군가가 '연꽃'이라 했다.
그것이 연꽃과의 첫 해후였다.
이후로 이상세계와 내리눌리는
현실적 무게 속에서
가끔씩 그 연꽃이 떠오르곤 했다.
앞길에 대해 막막할 때에 마주한
어떤 안내자의 손짓과도 같이
그 메시지는 분명 환희였다.
애써 눌러둔 내면의 감성을
거침없이 깨워댔다.
'피어봐.
반드시 필 거야.'
속살거리며
무한한 응원을 보내왔다.
그 뒷배를 믿은 나는
채 만져지지도 않던 촉을
더듬더듬 찾아내어 어루만졌다.
칙칙해 안을 가늠할 수 없는
연못일지언정
진흙을 고르고 가다듬으며
정성을 다했다.
그러다보니 이즈음
그날 밤의 꽃봉오리가
몽글몽글 대궁을 밀어 올리는가 싶다.
지금도 기차역에 서면,
철길 가를 서성이는 소녀가 보인다.
돈 벌어 동생들 학비를 대며,
책갈피에 코피를 쏟던
암팡진 아이도 일어나
둥싯거린다.
헌대 세월은 흘렀어도
어려운 입장에 처한
오늘날의 청춘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전해 줘야 할거나.
아예 내가
그 밤 역사 주변의
연꽃이 되어,
곤곤한 가슴자리에 닿을
박수를 보낸다.
ㅡ 수필세계 2023. 겨울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