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즉문즉설, 빠따짜라(Patacara) 수행녀 이야기
불자들의 고민상담
불자들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할까. 아마도 스님과 상담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특히 감내하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인데, 이는 스님들의 법문에서 알 수 있다.
스님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신도이야기를 많이 한다. 신도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이다. 이는 신도들이 스님과 상담한 이야기 들이다. 이처럼 불자들은 자신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 스님과 상담하는데, 다른 종교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개신교의 경우 목사가 상담하고, 천주교의 경우 신부가 말을 들어 주는데, 이는 종교인이 일종의 스승 내지 상담사, 인생해결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종교인들이 신도들의 고민을 들어 주고 해결책 까지 제시해 주고 있는데 신도들은 만족할까. 예를 들어 부부싸움을 자주 하여 극에 달했을 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신도들의 말을 들어 보고서 “갈라 서십시요.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다음 포털 사이트에서 ‘미즈넷’ 토크방에서 보는 네티즌들의 댓글 수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흔히 성공한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들어 보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선배나 스승의 한 마디에 감동 받아 인생의 전환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법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법문, 극적인 반전을 꾀하는 법문이 훌륭한 법문일 것이다. 그런 예를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서 본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법륜스님은 즉문즉설로 유명하다. 인터넷시대을 맞이하여 2000대 초반부터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 크게 인기를 끌었는데, 요즘은 불교TV에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스님의 즉문즉설이 불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아서일까 전국을 무대로 강연도 열리고 있다. 강연이 열리는 도시에서는 청중이 구름처럼 몰린다. 이런 현상을 인터넷 뉴스로 올리면 많은 사람들이 조회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스님의 법문이 공감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즉문즉설에서 법륜스님은 어떤 해법을 제시하고 있을까.
즉문즉설은 갖가지 사연에 대한 것이다. 흔히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고 실제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개인적인 사소한 고민에서부터 목숨을 걸 정도로 매우 심각한 고민까지 매우 다양하지만, 대부분 질문자의 고민은 가족간의 갈등에 대한 것이다.
부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부모 자식간의 갈등 등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즉문즉설의 주요 소재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갈등에 대하여 법륜스님은 불교적 해법을 제시한다. 부부가 싸웠을 때 갈라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적 인연관계와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식이다.
부처님의 즉문즉설
사람들은 삶의 과정에서 수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 간다. 어떤 문제는 쉽게 해결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해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에게 의존한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신에게 모두 떠 넘겨 버린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부처님은 근본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면 기쁨과 환희심을 내게 되고 곧바로 인격적인 변화를 수반하게 된다. 그런 이야기들이 초기경전 도처에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부처님은 어떤 해법을 주셨을까.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즉문즉설’이 있다.
영화 보다 슬픈 이야기
초기경전에 마치 영화 같은 이야기가 있다. 법구경 인연담에 있는 ‘빠따짜라(Patacara)’이야기이다. ‘법구경-담마빠다’에 실려 있는 ‘빠따짜라 수행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옮겼다.
빠따짜라(Patacara) 수행녀 이야기
DhpA.II.260-268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숲에 계실 때, 장로니 빠따짜라와 관련된 이야기(Patacarattherivatthu)이다.
빠따짜라(Patacara)는 싸밧티 시의 한 부유한 상인의 딸 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16살의 청춘이었다. 부모는 칠층의 저택의 가장 높은 층에 방을 마련하고 하인들이 감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녀는 하인과 정을 통하고 말았다. 그런데 부모는 사회적으로 동등한 지위의 젊은이와 결혼을 시키려고 약속한 상태이고 그 날이 가까웠다.
그녀는 어느 날 하인을 성문 밖에서 만나 도망치기로 약속하고 자신은 집을 빠져나와 하인을 만나 멀리 도망가서 어떤 마을에 정착하여 부부로서 살았다. 남편은 땅을 일구고 아내는 물을 깃고 요리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임신하게 되었다.
출산일이 가까워오자 두려운 그녀는 남편에게 친정으로 가게해달라고 졸랐지만 남편은 그녀의 부모에게 맞아 죽을까보아 거절했다. 거듭 거절하자 그녀는 남편이 외출한 사이에 친정으로 출발했다. 남편이 뒤늦게 달려 왔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도중에 산통이 와서 길가의 덤불에서 아이를 낳고 말았다. 친정에 갈 필요가 없어진 아내는 남편과 함께 돌아왔다.
그러다가 그녀는 두 번째 아이를 갖게 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막무가내로 친정집을 향했고 남편은 말리며 따라왔다. 그러다가 폭풍우가 일어나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우는데, 그녀에게 산통이 찾아왔다.
남편은 출산할 곳을 만들 재료를 찾아 헤매다가 개미집위에 자라난 덤불을 보고 그것을 자르려고 하다가 개미집에서 나온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다가 둘째 아이를 혼자 출산했다.
그녀는 피를 많이 흘려 노란 낙엽처럼 되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두 아이가 몰아치는 바람을 견디다 못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두 아이를 데리고 길을 가다가 개미집 근처에서 뱀에 물려 자주빛으로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통곡하며 밤새도록 비로 물이 불어난 아찌라바띠(Aciravati)강을 건너야 했다.
그녀는 먼저 간난아이를 안고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강물을 건넜다. 그리고 간난아이를 언덕 위에 놓고 큰 아이를 데리러 다시 강물에 들어갔다. 그녀가 강 중간에 이르자, 공중에 매가 나타나 간난아이를 낚아채가려 하자, 그녀는 훠이훠이 하면서 두 손을 들어 매를 쫓는 시늉을 했지만, 매는 간난아이를 낚아채갔다. 건너편에서 기다리던 큰아이는 어머니가 흔드는 두 손을 보고 ‘나를 부른다’고 생각하고 강물에 들어섰다가 거센물결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남편과 두 아들 모두를 잃어버렸다. 그녀는 통곡하며 길을 걸었다. 도중에 싸밧티 시에서 오는 한 나그네를 만나 어렵사리 집안의 내력을 물었다. 그는 ‘여인이여, 간밤에 그 집에 폭우가 몰아쳐 상인과 그의 처자가 죽어서 이웃과 친지들이 오늘 화장을 하였습니다.’라고 했다. 이 소리를 듣고 그녀는 실성하여 벌거벗은 채, 방황하며 통곡하며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미친년’이라고 하며 쓰레기나 흙더미를 던졌다.
마침 부처님께서 제따 숲에서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이 여자의 안식처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달리 없고 나뿐이다.’라고 말하고 그녀를 승원으로 맞이했다. 부처님께서 ‘자매여, 정신을 차려라.’라고 말하자 그녀는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알고 부끄러워 땅에 몸을 움추렸다. 한 남자가 옷을 던져 주자 그 옷을 걸쳤다. 그녀는 부처님께 오체투지를 하고 자초지종을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빠따짜라여, 걱정하지 말라. 그대가 그대의 안식처이고 그대의 피난처이고 그대의 귀의처이다.’라고 말하고 ‘사람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는 동안 아들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라고 위로하자 그녀는 고통을 덜 수 있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미 저 세상으로 가버린 아들이나 친지들이 안식처나 피난처가 되지 못한다. 현명한 자는 계행을 청정히 하게 하고 열반에 이르는 길을 깨끗이 한다.’라고 위로하자 그녀는 고통을 덜 수 있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시로써 Dhp.288과 Dhp289를 읊었다. 그녀는 이 가르침을 듣고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했다. 그리고 수행녀가 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발을 씻으면서 단지에서 물을 땅에 부었는데, 처음에는 물이 땅에 흡수되어 조금 가다가 사라지고 다음에는 좀 더 멀리 흘러가고 세 번째는 좀 더 멀리 가는 것을 보고 그것을 명상주제로 삼아 뭇삶들이 단명하고 장수하는 수명도 그와 같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처님께서는 향실에 앉아서 이 사실을 알고는 그녀 앞에 몸을 나투어
‘한순간이라도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낫다.’
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시로써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못보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빠따짜라는 네 가지 분석적인 앎과 더불어 거룩한 경지를 성취했다.
(법구경 인연담, 빠따짜라(Patacara)비구니 이야기, Dhp.288과 Dhp.289, 전재성님역)
마치 영화와 같은 슬픈 이야기이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하인과 야반도주하여 살림을 차리고 산 빠따짜라는 아이가 생김에 따라 비극이 시작 되었다. 더구나 둘 째 아이를 혼자 출산 하는 과정에서 남편과 두 아이를 잃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부모마저 홍수로 잃었다. 이렇게 모두를 잃게 되자 실성하여 거의 미쳐버리다시피하였다. 그런데 빠따짜라를 구원한 사람은 부처님이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극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의 한마디의 말을 듣고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한마디의 말에 인격적인 변화를 줄 만한 감동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진정한 법문일 것이다. 빠따짜라에게 가르침을 준 부처님의 말씀도 그런 케이스 일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인생에서 거듭되는 불행으로 인하여 거의 미친사람 처럼 죽지 못해 살아 가고 있는 빠따짜라를 변화 시킨 부처님의 말씀은 무엇일까. 인연담에 따르면 두 가지로 요약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자신 뿐
첫번째의 가르침은 자기자신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위기에 빠졌을 때,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한다. 불자라면 스님이고, 유일신교라면 목사나 신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인들은 정확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일까.
종교인들의 해법이 정확하다면 반드시 인격적인 변화가 수반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상담 받기 전이나 마찬가지로 그다지 변화 된 것이 없다면 그다지 훌륭한 가르침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상담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스님이라면 고통받고 있는 불자에게 “3000배를 해 보십시요” 라든가 “염불을 백만번 해 보십시요”라든가 “기도를 열심히 하십시요” 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리고 스님을 믿고 절에 열심히 나와 보시하고 지계하는 생활을 권할 것이다.
하지만 법구경 인연담을 보면 이와 절, 염불 등과 같은 해결책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삼보에 의지하라는 말도 보이지 않는다. 놀라웁게도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신다.
“빠따짜라여, 걱정하지 말라. 그대가 그대의 안식처이고 그대의 피난처이고 그대의 귀의처이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말고 자신을 안식처, 의지처, 귀의처로 삼으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이런 말을 하셨을까.
빠따짜라에게 있어서 이미 죽은 남편이 안식처가 될 수 없고, 또 이미 죽은 아이들이 피난처가 될 수 없고, 이미 죽은 부모가 귀의처가 될 수 없었다. 이는 법구경 게송 Dhp.288과 Dhp28에 잘 표현 되어 있다. 두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Na santi putt? t???ya 나 산띠 뿟따 따나야 na pit? n?pi bandhav? 나 삐따 나비 반다와 antaken?'dhipannassa 안따께나디빤나싸 natthi ??t?su t??at? 낫티 나띠수 따나따.
자식들도 아버지도 친척들도 그대에게 피난처가 아니다. 죽음의 신에게 사로잡힌 자에게 친지도 물론 피난처가 아니다.
Etamatthavasa? ?atv? 에따맛타와상 나뜨와 pa??ito s?lasamvuto 빤디또 실라상우또 nibb?nagamana? magga? 닙바나가마낭 막강 khippameva visodhaye. 킵빠메와 위소다예.
이러한 사실을 알고 현명한 님이라면 계행을 지키고 열반으로 이끄는 길을 서둘러 닦아야만 한다.
(법구경 Dhp288-289, 전재성님역)
죽음의 신에게 사로잡힌 자는 왜 피난처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왜그럴까. 주석에 따르면 ‘음식이나 음료등을 주거나 어떠한 필요한 것으로 도와도, 살아 있을 때나 피난처가 되는 것이지, 죽음에 임박해서는, 죽음이 어떠한 수단으로도 추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피난처가 되어 줄 아무도 없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디에 의지해야 하는가. 게송에 따르면 계행과 열반으로 이끄는 길을 닦아야 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계행은 네 가지 청정으로 이끄는 계행을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1) 계율위 덕목에 따라 제어 하는 것, 2) 여섯감역의 제어, 3) 삶의 위의가 청정한 것, 4) 다르사람이 제공하는 의복, 음식, 처소, 의약품을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열반으로 이끄는 길은 팔정도를 말한다.
결국 자기자신에게 의지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게송이 법구경에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Att? hi attano n?tho 앗따 히 앗따노 나토 ko hi n?tho paro siy?? 꼬히 나토 빠로 시야 Attan? va sudantena 앗따나 와 수단떼나 n?tha? labhati dullabha?. 나탕 라바띠 둘라방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
(법구경 Dhp160,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부처님은 자신이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게송에서 ‘수호자(n?th?)’ 의 의미는 무엇일까. 주석에 따르면 도(magga)와 과(phala)를 성취하는 것이 자기의 수호자라 하였다. 그리고 게송에서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라고 하였는데, 이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는 ‘아라한’을 말한다. 결국 도를 이루어 열매(과)를 맺었을 때 자기자신의 수호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대가 그대의 안식처이고 그대의 피난처이고 그대의 귀의처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최종적으로 의지해야 될 대상은 자기자신 뿐이다. 그런데 자기자신의 수호자가 되려면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에 의지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도와 과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자기자신에게 의지하라고 한 것은 결국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라는 것과 같은 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해 오는 동안
두번째의 가르침은 고통과 재난에 대한 것이다.
이는 윤회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빠따짜라에게 “사람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는 동안 아들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라는 위로의 법문을 하였다. 그런데 이말을 듣자 빠따짜라는 고통이 덜어졌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말에 공감하였다는 말이다. 빠따짜라의 마음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 온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법문은 ‘눈물의 경(S15:3)’에 대한 것이다. 빠알리어로 ‘앗수경(Assusutta)’이라 한다. 빠따짜라의 고통을 덜 수 있었던 앗수경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눈물의 경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에 계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해오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의 양과 사대양에 있는 물의 양과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으로 미루어보건데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해오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세존] "훌륭하다.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설한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해오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형제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형제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자매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자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아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딸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딸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친지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친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재산의 상실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재산의 상실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질병의 비참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질병의 비참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앗수경-Assusutta-눈물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3(S14.1.3), 전재성님역)
눈물의 경이 있는 아나마딱가상윳따(Anamatagga sa?yutta?)는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이라는 뜻이다. 이는 한역 잡아함경에서 볼 수 없고 오로지 빠알리니까야에만 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수 많은 눈물을 흘렸다. 부모와 형제자매, 배우자, 자식의 죽음을 통하여 윤회과정에서 흘린 눈물의 양은 사대양과 비할 바가 아니라 한다.
이렇게 살아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숱하게 죽음을 목격하고 눈물을 흘리고 고통과 재난을 겪어 왔을 터인데, 부처님은 빠따짜라에게 눈물의 의미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아라한이 된 빠따짜라
이와 같은 법구경 인연담은 게송 113번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빠따짜라 수행녀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읊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Yo ca vassasata? j?ve 요 짜 와싸사땅 지웨 apassa? udeyabbaya? 아빠쌍 우데얍바양 ekaha? j?vita? seyyo 에까항 지위땅 세이요 passato udayabbaya? 빠싸또 우데얍바양.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못보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법구경, Dhp113,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못보고 (apassa? udeyabbaya?)’라는 말은 주석에 따르면, 스믈다섯가지 방식으로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오온)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의 다섯가지가 무명, 갈애, 행위, 자양분, 접촉의 다섯가지를 통해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다섯에 다섯을 곱하면 스믈다섯이 된다.
이와 같은 원리를 알게 된 빠따짜라는 ‘거룩한 님’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라한’이 된 것을 말한다.
거울 앞의 누님처럼
빠따짜라는 부처님으로부터 다른 것에 의지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의지처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과 누구나 윤회과정에서 사대양과 비할 바 없는 눈물을 흘렸다는 고통과 재난에 대한 법문을 들었다. 이런 법문을 듣자 빠따짜라에게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커다란 인식의 변화이다. 이제까지 생각과 180도 다른 혁명적인 변화가 자신의 마음에서 발생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게송을 듣고 중생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뀌는 인격적인 변화를 수반하게 된 것이다.
아라한이 된 빠따짜라는 한 송이의 국화꽃과 같다. 마치 ‘거울 앞의 누님’과 같은 이미지이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를 보면 한송이 국화 꽃을 피우기 천둥과 폭우, 무서리 등 온 갖 기후 변화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한 송이 노란 국화꽃을 피워 낸 것을 거울 앞의 누님처럼 묘사하였다. 빠따짜라 역시 감내할 수 없는 고통과 재난을 겪었지만 온갖 풍상을 겪어 내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있는 누님처럼 아라한이 되어 다시는 통곡하거나 눈물 흘릴 일이 없게 된 것이다.
2012-10-16 진흙속의연꽃 |
출처: 진흙속의연꽃 원문보기 글쓴이: 진흙속의연꽃
첫댓글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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