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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게시판 한국 4군 6진
멍태 추천 0 조회 801 11.10.14 18:36 댓글 2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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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10.14 18:56

    첫댓글 조선이 가장 잘나갈때....그후론 점점 하양세...
    저는 크게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정주민족이 아니라 유목민들이었기 때문에 개척이라는 용어를 써도 될거 같더군요.
    물론 따지고 들자면야 여러가지 문제가 있겟지만 "우리 조선은 남 공격한적 없음"이라고 주장하려면...

  • 11.10.15 07:17

    세종 이후로 조선이 하향세?! 세종의 업적이 물론 뛰어난 것은 맞지만, 오히려 이후로 조선의 '국력'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이미 인구부터가 이 시기에 많아야 600만 수준인데, 중종 이후에 1000만에 달했고, 개간의 진척으로 토지 결수도 엄청나게 늘었고요. 꼭 바깥으로 때려야 잘나갔다는 식의 논리는 참... 세종 이후로 ㅈㅁ 운운하는 논리는...ㅎㅎ;;

    참고로 세종이 몰아낸 여진족은 [수렵민족]이지 유목민족 아닙니다! 얘들은 농사도 지었어요...ㅋ

  • 11.10.15 12:47

    어떤 점에서 하향세인 걸까요. 개인적으로 '잘나갈때' 와 '하향세' 를 구별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 보니다만.

  • 11.10.16 16:06

    ㄷㄷ

  • 11.10.16 18:51

    타국을 정복해야지만 국가가 유지될정도로 위태로운 경우도 있지 않나요? 그런경우에 그걸 상향세라고 부를수 있나?
    조선의 경우에는 타국을 정복할 힘 못지않게 (아 중궈...)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확장하지 않은거라고 볼수 있지 않을까요? 그걸 하향세라고 보기는 좀,,,

  • 11.10.17 16:19

    조선 인구가 중중대 벌써 1000만인데 1836년에 시작하는 빅2에서 조선 인구가 겨우 900만으로 나오는 걸 볼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ㅅ;

  • 11.10.14 20:28

    이 외에도 공민왕의 영토 '수복' (…) 이라던가.. 백제의 요서 '진출'이라던가..

  • 11.10.17 16:21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그닥 문제없지 않나요? 고구려를 직계 계승했다고 주장한 나라였으니...

  • 11.10.18 07:06

    ..뭐 명분론적 이야기니 특별히 문제가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고구려와는 사회구조도 다르고 시간차도 크고 왕가도 다르고 구성원이나 지리적 위치도 같진 않았으니까요. 하긴 이런거 따질 거 없이 그 시대에 주권은 존중해야 된다는 개념이 있었지도 않긴 하겠지만요 (…)

  • 11.10.14 20:37

    원래 PC하지 않죠 뭐. 대마도 '정벌' 부터 해서...

  • 11.10.15 07:22

    '개척'이라는 말 제체가 "새로운 영역을 확보하고, 이 동네를 살만한 땅으로 만든다"는 얘깁니다. 4군6진 지역이 비문명의 상태였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 직전까지 원나라 통치의 영향이 남아있었어요. 하지만 일반적인 정주국가의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한국사]의 입장에서는 '개척'이라는 말이 그닥 이상할 건 없습니다. 수많은 민호를 이주시키고 행정체제를 이식시키는데 엄청난 공을 들였고, 이런 오랜 작업 끝에 이 동네가 그나마 사람 살만한 땅이 되었으니...

  • 11.10.15 09:40

    일정한 세력으로 여진족이 (조선에서) 인정 받지 못했다는 반증 아닐까요?

    정복이라는 단어를 쓰면 그 지역의 세력을 제압했다는 뜻이 되는데...
    개척이라는 단어를 쓰면 무주공산에 깃발꽂았다는 의미 잖아요?

    그만큼 여진을 낮게 봤고 인정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 11.10.15 11:10

    사실 당시의 여진족은 그야말로 '사분오열'의 상태였습니다. 나중에 누르하치 나오기 전까지... 친조선 성향, 친명 성향, 양속하여 실리를 챙기는 부족 등 여러 이해가 엇갈려서 지들끼리도 박터지게 싸우고요. 한 1500년대 후반은 되어야 니탕개 같은 애들이 세를 불려 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나지만, 이때도 역시 하나의 통합된 체계를 이루지 못했어요...^^; 참고로 무려 인조시절에도 조선에서는 여진을 일컬어 "발톱의 때, 무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죠...ㅋ

  • 11.10.15 11:42

    그 개무시당하던 여진이 대청제국을 세우고 현재의 그 광활한 중국영토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면ㄷㄷ
    근데 정말 궁금한게 명말시기 그 막장인 명나라를 '조선'이 쳐들어갔으면 여진의 청대신 우리가
    중원을 지배할수있었을까요?

  • 작성자 11.10.15 13:27

    명말시기 조선도 막장인지라 전쟁할 여유가 없었죠. 게다가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상국을 지키자하며 오히려 도와줄듯.

  • 11.10.15 19:57

    청나라는 지들 힘으로 중원으로 들어간게 아닙니다! 걔들은 이미 명나라가 이자성의 난으로 망한 상황에서 들어간 거에요. 즉 이자성의 난이라는 '잭팟'이 없었다면 거의 불가능했다는 겁니다. 애시당초 체급이 너무 차이가 날 뿐더러, 당시 청군의 작전지역은 드넓은 명나라 동북쪽 귀퉁이였을 뿐입니다...ㄷㄷ

    일단 명나라가 망한 상황에다 지긋지긋한 무질서 및 청군의 잔혹함에 질린 화북의 민심이 청쪽으로 기울었고, 청나라는 의도적으로 먼저 청에 귀순한 한족 신사층을 점령지 지방관으로 파견하여 현지 향신들을 회유하죠. 더불어 남명정권의 병크까지 더해져서 '반청활동'이 지지부진해집니다.

  • 11.10.15 20:03

    만약 명이 아직 망하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청도 그렇게 신속하게 중원으로 들어오지 못했을 겁니다. 일례로 청군의 위력을 잘몰랐던데다 남명정권의 영향력이 강했던 강남지방에서는 대부분의 지역이 청군에 '결사항전'하면서 청군이 대량살육을 할 수 밖에 없었거든요...-_-; 게다가 남방으로 진출 할 당시, 숫자가 많지 않았던 청군은 거의 전병력을 차출하여 신속히 작전을 치르는데,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위에 말한 [화북 안정책] 덕입니다. 북직례-산동지역은 일찍부터 청의 점령행정이 먹혀들어갔고, 현지 향신층의 회유도 성과를 보이고 있었죠. 일부 토적들이 '복명'을 기치로 설쳐댔지만,

  • 11.10.15 20:06

    ㅂㅅ같은 남명정권이 알아서 망해주면서 불씨는 꺼져갔고요...ㅎㅎ;; 사실 화북민중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청의 '통제력 회복'이 더 반가웠을 겁니다. 북직례와 산동은 왜란을 지원하면서 거덜이 났고, 요동과 가까워 이후로도 계속 뜯겼거든요. 이렇다보니 못살겠다며 여기저기서 [토적]이 횡횡했고, 천계년간이 되면 지방관이 토적에게 살해되거나 토적이 두려워 부임을 꺼리면서 산동의 경우는 지방관의 2/3이 결원이 될 정돕니다. 게다가 이 토적들을 토벌하러 온 관군의 횡포가 극심하여 심지어는 현지 향신과 백성들이 관군을 성에 들이지 않으려고 아군과 수성전을 벌이는 환장할 상황이 벌어지죠...ㄷㄷ 물론 성은 끝내 관군에 함락되고~

  • 11.10.15 20:44

    과연 그렇군요. 여진족도 명과 전면적으로 맞서고 싶진않았을거라 추정됩니다.
    그 대치상황이 명이 내부분열로 붕괴직전으로 가자 급격히 '천운'이 여진의 후금쪽으로 갔던것이군요.
    하기사 조선은 후금보다 힘도 약하고 명을 칠 생각조차 감히 못했으니...어림도 없었다는게 정답인거같고,
    하여튼 중화의 스케일이란 ㅎㄷㄷ

  • 11.10.15 20:47

    삼한갑부님께서 설명해주신 상황대로라면, 후금이 없었어도 명이 몰락하면 같은 한족끼리
    피터지게 싸워대는 제 2의 삼국지나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졌을지도 모르는...ㄷㄷ
    중국은 '일개 성'이 하나의 국가나 마찬가지였으니...ㄷㄷ 그건뭐 지금도 그렇지만ㅋ

  • 11.10.16 16:09

    ㄷㄷㄷ

  • 11.10.17 08:47

    껌좀십은호날두// 정확히는 북경을 장악하고 천하를 차지하기 위한 큰 행보를 내딛은 [대순정권]이 병신이라 그렇게 된 것이죠...-_-; 대순정권이 '오삼계 문제'만 제대로 처리했어도 청나라는 입관이 힘듭니다. 대순정권의 북경약탈은 유명하고, 청이 입관하자 지방민들이 알아서 대순정권이 파견한 지방관을 살해하거나 묶어 보내요...헐~

  • 11.10.17 20:43

    대순정권의 이자성이 제대로된 위인이였다면. 아마 만주족은 변두리에서 짜그러져 있었을것입니다.
    이자성은 스스로의 삽질과 구체적 플랜이 없었고 단순히 황제노릇하다가 망했기에 ㅡㅡ;
    사실 이자성이나 명태조는 출자도 거기서 거기지만. 명태조는 천하를 통일하고 원을 북으로 밀어냈지만. 이자성은 거기에 비하면 능력. 안목. 등이 후잡수준이라서 입안으로 들어온 떡도 못먹은거지요.

  • 11.10.15 13:18

    첨언하자면, 4군 6진중에 4군은 세종대에 '개척' 또는 '정복' 되지 못했다고 보는게 옳습니다. 단종3년에 3군이, 세조 5년에 폐사군이 되었고, 후에 조선에 의해 재 개척되게 됩니다.

  • 작성자 11.10.15 13:27

    6진은 성공했다더군요.

  • 11.10.15 16:28

    네 6진은 성공적으로 잘 개척되었죠. 4군이 문제였지..

  • 11.10.15 16:35

    보낼 사람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긴 4군을 폐사군시킨 거죠.
    나중에도 간간히 '이거 복구 콜?' 하긴 하는데 역시 민심 문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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