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댓글조선이 가장 잘나갈때....그후론 점점 하양세... 저는 크게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정주민족이 아니라 유목민들이었기 때문에 개척이라는 용어를 써도 될거 같더군요. 물론 따지고 들자면야 여러가지 문제가 있겟지만 "우리 조선은 남 공격한적 없음"이라고 주장하려면...
세종 이후로 조선이 하향세?! 세종의 업적이 물론 뛰어난 것은 맞지만, 오히려 이후로 조선의 '국력'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이미 인구부터가 이 시기에 많아야 600만 수준인데, 중종 이후에 1000만에 달했고, 개간의 진척으로 토지 결수도 엄청나게 늘었고요. 꼭 바깥으로 때려야 잘나갔다는 식의 논리는 참... 세종 이후로 ㅈㅁ 운운하는 논리는...ㅎㅎ;;
참고로 세종이 몰아낸 여진족은 [수렵민족]이지 유목민족 아닙니다! 얘들은 농사도 지었어요...ㅋ
..뭐 명분론적 이야기니 특별히 문제가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고구려와는 사회구조도 다르고 시간차도 크고 왕가도 다르고 구성원이나 지리적 위치도 같진 않았으니까요. 하긴 이런거 따질 거 없이 그 시대에 주권은 존중해야 된다는 개념이 있었지도 않긴 하겠지만요 (…)
'개척'이라는 말 제체가 "새로운 영역을 확보하고, 이 동네를 살만한 땅으로 만든다"는 얘깁니다. 4군6진 지역이 비문명의 상태였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 직전까지 원나라 통치의 영향이 남아있었어요. 하지만 일반적인 정주국가의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한국사]의 입장에서는 '개척'이라는 말이 그닥 이상할 건 없습니다. 수많은 민호를 이주시키고 행정체제를 이식시키는데 엄청난 공을 들였고, 이런 오랜 작업 끝에 이 동네가 그나마 사람 살만한 땅이 되었으니...
사실 당시의 여진족은 그야말로 '사분오열'의 상태였습니다. 나중에 누르하치 나오기 전까지... 친조선 성향, 친명 성향, 양속하여 실리를 챙기는 부족 등 여러 이해가 엇갈려서 지들끼리도 박터지게 싸우고요. 한 1500년대 후반은 되어야 니탕개 같은 애들이 세를 불려 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나지만, 이때도 역시 하나의 통합된 체계를 이루지 못했어요...^^; 참고로 무려 인조시절에도 조선에서는 여진을 일컬어 "발톱의 때, 무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죠...ㅋ
청나라는 지들 힘으로 중원으로 들어간게 아닙니다! 걔들은 이미 명나라가 이자성의 난으로 망한 상황에서 들어간 거에요. 즉 이자성의 난이라는 '잭팟'이 없었다면 거의 불가능했다는 겁니다. 애시당초 체급이 너무 차이가 날 뿐더러, 당시 청군의 작전지역은 드넓은 명나라 동북쪽 귀퉁이였을 뿐입니다...ㄷㄷ
일단 명나라가 망한 상황에다 지긋지긋한 무질서 및 청군의 잔혹함에 질린 화북의 민심이 청쪽으로 기울었고, 청나라는 의도적으로 먼저 청에 귀순한 한족 신사층을 점령지 지방관으로 파견하여 현지 향신들을 회유하죠. 더불어 남명정권의 병크까지 더해져서 '반청활동'이 지지부진해집니다.
만약 명이 아직 망하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청도 그렇게 신속하게 중원으로 들어오지 못했을 겁니다. 일례로 청군의 위력을 잘몰랐던데다 남명정권의 영향력이 강했던 강남지방에서는 대부분의 지역이 청군에 '결사항전'하면서 청군이 대량살육을 할 수 밖에 없었거든요...-_-; 게다가 남방으로 진출 할 당시, 숫자가 많지 않았던 청군은 거의 전병력을 차출하여 신속히 작전을 치르는데,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위에 말한 [화북 안정책] 덕입니다. 북직례-산동지역은 일찍부터 청의 점령행정이 먹혀들어갔고, 현지 향신층의 회유도 성과를 보이고 있었죠. 일부 토적들이 '복명'을 기치로 설쳐댔지만,
ㅂㅅ같은 남명정권이 알아서 망해주면서 불씨는 꺼져갔고요...ㅎㅎ;; 사실 화북민중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청의 '통제력 회복'이 더 반가웠을 겁니다. 북직례와 산동은 왜란을 지원하면서 거덜이 났고, 요동과 가까워 이후로도 계속 뜯겼거든요. 이렇다보니 못살겠다며 여기저기서 [토적]이 횡횡했고, 천계년간이 되면 지방관이 토적에게 살해되거나 토적이 두려워 부임을 꺼리면서 산동의 경우는 지방관의 2/3이 결원이 될 정돕니다. 게다가 이 토적들을 토벌하러 온 관군의 횡포가 극심하여 심지어는 현지 향신과 백성들이 관군을 성에 들이지 않으려고 아군과 수성전을 벌이는 환장할 상황이 벌어지죠...ㄷㄷ 물론 성은 끝내 관군에 함락되고~
과연 그렇군요. 여진족도 명과 전면적으로 맞서고 싶진않았을거라 추정됩니다. 그 대치상황이 명이 내부분열로 붕괴직전으로 가자 급격히 '천운'이 여진의 후금쪽으로 갔던것이군요. 하기사 조선은 후금보다 힘도 약하고 명을 칠 생각조차 감히 못했으니...어림도 없었다는게 정답인거같고, 하여튼 중화의 스케일이란 ㅎㄷㄷ
대순정권의 이자성이 제대로된 위인이였다면. 아마 만주족은 변두리에서 짜그러져 있었을것입니다. 이자성은 스스로의 삽질과 구체적 플랜이 없었고 단순히 황제노릇하다가 망했기에 ㅡㅡ; 사실 이자성이나 명태조는 출자도 거기서 거기지만. 명태조는 천하를 통일하고 원을 북으로 밀어냈지만. 이자성은 거기에 비하면 능력. 안목. 등이 후잡수준이라서 입안으로 들어온 떡도 못먹은거지요.
첫댓글 조선이 가장 잘나갈때....그후론 점점 하양세...
저는 크게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정주민족이 아니라 유목민들이었기 때문에 개척이라는 용어를 써도 될거 같더군요.
물론 따지고 들자면야 여러가지 문제가 있겟지만 "우리 조선은 남 공격한적 없음"이라고 주장하려면...
세종 이후로 조선이 하향세?! 세종의 업적이 물론 뛰어난 것은 맞지만, 오히려 이후로 조선의 '국력'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이미 인구부터가 이 시기에 많아야 600만 수준인데, 중종 이후에 1000만에 달했고, 개간의 진척으로 토지 결수도 엄청나게 늘었고요. 꼭 바깥으로 때려야 잘나갔다는 식의 논리는 참... 세종 이후로 ㅈㅁ 운운하는 논리는...ㅎㅎ;;
참고로 세종이 몰아낸 여진족은 [수렵민족]이지 유목민족 아닙니다! 얘들은 농사도 지었어요...ㅋ
어떤 점에서 하향세인 걸까요. 개인적으로 '잘나갈때' 와 '하향세' 를 구별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 보니다만.
ㄷㄷ
타국을 정복해야지만 국가가 유지될정도로 위태로운 경우도 있지 않나요? 그런경우에 그걸 상향세라고 부를수 있나?
조선의 경우에는 타국을 정복할 힘 못지않게 (아 중궈...)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확장하지 않은거라고 볼수 있지 않을까요? 그걸 하향세라고 보기는 좀,,,
조선 인구가 중중대 벌써 1000만인데 1836년에 시작하는 빅2에서 조선 인구가 겨우 900만으로 나오는 걸 볼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ㅅ;
이 외에도 공민왕의 영토 '수복' (…) 이라던가.. 백제의 요서 '진출'이라던가..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그닥 문제없지 않나요? 고구려를 직계 계승했다고 주장한 나라였으니...
..뭐 명분론적 이야기니 특별히 문제가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고구려와는 사회구조도 다르고 시간차도 크고 왕가도 다르고 구성원이나 지리적 위치도 같진 않았으니까요. 하긴 이런거 따질 거 없이 그 시대에 주권은 존중해야 된다는 개념이 있었지도 않긴 하겠지만요 (…)
원래 PC하지 않죠 뭐. 대마도 '정벌' 부터 해서...
'개척'이라는 말 제체가 "새로운 영역을 확보하고, 이 동네를 살만한 땅으로 만든다"는 얘깁니다. 4군6진 지역이 비문명의 상태였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 직전까지 원나라 통치의 영향이 남아있었어요. 하지만 일반적인 정주국가의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한국사]의 입장에서는 '개척'이라는 말이 그닥 이상할 건 없습니다. 수많은 민호를 이주시키고 행정체제를 이식시키는데 엄청난 공을 들였고, 이런 오랜 작업 끝에 이 동네가 그나마 사람 살만한 땅이 되었으니...
일정한 세력으로 여진족이 (조선에서) 인정 받지 못했다는 반증 아닐까요?
정복이라는 단어를 쓰면 그 지역의 세력을 제압했다는 뜻이 되는데...
개척이라는 단어를 쓰면 무주공산에 깃발꽂았다는 의미 잖아요?
그만큼 여진을 낮게 봤고 인정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사실 당시의 여진족은 그야말로 '사분오열'의 상태였습니다. 나중에 누르하치 나오기 전까지... 친조선 성향, 친명 성향, 양속하여 실리를 챙기는 부족 등 여러 이해가 엇갈려서 지들끼리도 박터지게 싸우고요. 한 1500년대 후반은 되어야 니탕개 같은 애들이 세를 불려 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나지만, 이때도 역시 하나의 통합된 체계를 이루지 못했어요...^^; 참고로 무려 인조시절에도 조선에서는 여진을 일컬어 "발톱의 때, 무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죠...ㅋ
그 개무시당하던 여진이 대청제국을 세우고 현재의 그 광활한 중국영토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면ㄷㄷ
근데 정말 궁금한게 명말시기 그 막장인 명나라를 '조선'이 쳐들어갔으면 여진의 청대신 우리가
중원을 지배할수있었을까요?
명말시기 조선도 막장인지라 전쟁할 여유가 없었죠. 게다가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상국을 지키자하며 오히려 도와줄듯.
청나라는 지들 힘으로 중원으로 들어간게 아닙니다! 걔들은 이미 명나라가 이자성의 난으로 망한 상황에서 들어간 거에요. 즉 이자성의 난이라는 '잭팟'이 없었다면 거의 불가능했다는 겁니다. 애시당초 체급이 너무 차이가 날 뿐더러, 당시 청군의 작전지역은 드넓은 명나라 동북쪽 귀퉁이였을 뿐입니다...ㄷㄷ
일단 명나라가 망한 상황에다 지긋지긋한 무질서 및 청군의 잔혹함에 질린 화북의 민심이 청쪽으로 기울었고, 청나라는 의도적으로 먼저 청에 귀순한 한족 신사층을 점령지 지방관으로 파견하여 현지 향신들을 회유하죠. 더불어 남명정권의 병크까지 더해져서 '반청활동'이 지지부진해집니다.
만약 명이 아직 망하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청도 그렇게 신속하게 중원으로 들어오지 못했을 겁니다. 일례로 청군의 위력을 잘몰랐던데다 남명정권의 영향력이 강했던 강남지방에서는 대부분의 지역이 청군에 '결사항전'하면서 청군이 대량살육을 할 수 밖에 없었거든요...-_-; 게다가 남방으로 진출 할 당시, 숫자가 많지 않았던 청군은 거의 전병력을 차출하여 신속히 작전을 치르는데,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위에 말한 [화북 안정책] 덕입니다. 북직례-산동지역은 일찍부터 청의 점령행정이 먹혀들어갔고, 현지 향신층의 회유도 성과를 보이고 있었죠. 일부 토적들이 '복명'을 기치로 설쳐댔지만,
ㅂㅅ같은 남명정권이 알아서 망해주면서 불씨는 꺼져갔고요...ㅎㅎ;; 사실 화북민중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청의 '통제력 회복'이 더 반가웠을 겁니다. 북직례와 산동은 왜란을 지원하면서 거덜이 났고, 요동과 가까워 이후로도 계속 뜯겼거든요. 이렇다보니 못살겠다며 여기저기서 [토적]이 횡횡했고, 천계년간이 되면 지방관이 토적에게 살해되거나 토적이 두려워 부임을 꺼리면서 산동의 경우는 지방관의 2/3이 결원이 될 정돕니다. 게다가 이 토적들을 토벌하러 온 관군의 횡포가 극심하여 심지어는 현지 향신과 백성들이 관군을 성에 들이지 않으려고 아군과 수성전을 벌이는 환장할 상황이 벌어지죠...ㄷㄷ 물론 성은 끝내 관군에 함락되고~
과연 그렇군요. 여진족도 명과 전면적으로 맞서고 싶진않았을거라 추정됩니다.
그 대치상황이 명이 내부분열로 붕괴직전으로 가자 급격히 '천운'이 여진의 후금쪽으로 갔던것이군요.
하기사 조선은 후금보다 힘도 약하고 명을 칠 생각조차 감히 못했으니...어림도 없었다는게 정답인거같고,
하여튼 중화의 스케일이란 ㅎㄷㄷ
삼한갑부님께서 설명해주신 상황대로라면, 후금이 없었어도 명이 몰락하면 같은 한족끼리
피터지게 싸워대는 제 2의 삼국지나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졌을지도 모르는...ㄷㄷ
중국은 '일개 성'이 하나의 국가나 마찬가지였으니...ㄷㄷ 그건뭐 지금도 그렇지만ㅋ
ㄷㄷㄷ
껌좀십은호날두// 정확히는 북경을 장악하고 천하를 차지하기 위한 큰 행보를 내딛은 [대순정권]이 병신이라 그렇게 된 것이죠...-_-; 대순정권이 '오삼계 문제'만 제대로 처리했어도 청나라는 입관이 힘듭니다. 대순정권의 북경약탈은 유명하고, 청이 입관하자 지방민들이 알아서 대순정권이 파견한 지방관을 살해하거나 묶어 보내요...헐~
대순정권의 이자성이 제대로된 위인이였다면. 아마 만주족은 변두리에서 짜그러져 있었을것입니다.
이자성은 스스로의 삽질과 구체적 플랜이 없었고 단순히 황제노릇하다가 망했기에 ㅡㅡ;
사실 이자성이나 명태조는 출자도 거기서 거기지만. 명태조는 천하를 통일하고 원을 북으로 밀어냈지만. 이자성은 거기에 비하면 능력. 안목. 등이 후잡수준이라서 입안으로 들어온 떡도 못먹은거지요.
첨언하자면, 4군 6진중에 4군은 세종대에 '개척' 또는 '정복' 되지 못했다고 보는게 옳습니다. 단종3년에 3군이, 세조 5년에 폐사군이 되었고, 후에 조선에 의해 재 개척되게 됩니다.
6진은 성공했다더군요.
네 6진은 성공적으로 잘 개척되었죠. 4군이 문제였지..
보낼 사람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긴 4군을 폐사군시킨 거죠.
나중에도 간간히 '이거 복구 콜?' 하긴 하는데 역시 민심 문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