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哲均 ⊙ 64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석사. ⊙ 제9회 외무고시. 주 중국 공사·외교부 공보관·주 라오스 대사·주 스위스 대사. ⊙ 現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저서: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서애 유성룡.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15만 군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의 침략 명분은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 달라(征明假道)”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참전한 명과 강화회담을 하였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다시 군대를 보냈다. 이를 정유재란(丁酉再亂) 이라고 한다.
우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칭하여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이라고 부른다. 이 왜란을 일본에서는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の役)’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萬曆之役)’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은 왜구가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된 일본이 조선을 정조준해서 침략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명의 참전으로 국제전이 된 ‘동아시아 7년 전쟁’이었다. 따라서 이 전쟁을 단순히 임진왜란이라고 명기하는 것은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왜란 진행 과정에서 조선은 소외된 채 명과 일본이 조선의 분할을 논의하는가 하면, 명은 조선을 직할통치(直轄統治)하려고 했다. 왜란은 열전 못지않게 치열한 외교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7년의 전쟁기간 중 4년이 휴전상태였음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임진왜란을 동북아의 국제정치적 차원에서 조명해 볼 필요가 있고, 역사적 교훈도 얻을 수 있다.
유성룡은 영의정으로 왜란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순신(李舜臣)을 발탁하고 선조를 설득하면서 국난을 극복한 명재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성룡이 특히 명과 일본의 조선분할 논의를 감지하여 이를 저지시킨 뛰어난 외교적 감각과 명의 조선 직할통치를 저지시킨 탁월한 ‘외교 재상’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성룡은 누구인가?
《조선왕조실록》 졸기에 의하면 유성룡(1542~1607)은 학문은 뛰어났으며, 재물에 욕심이 없는 청빈한 생활로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성균관에 입교 후 1566년 문과에 급제하고 1590년 우의정을 시작으로 좌의정, 영의정을 거쳐 삼정승 관직을 모두 거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권율(權慄)과 이순신을 의주목사와 전라좌수사에 배치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군무를 총괄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이어 영의정에 임명되어 민정·군정의 최고관직에서 전시 조정을 이끌었으며, 위기에 빠진 조선왕조를 재정비·강화하기 위한 응급책으로서 각종 시무책을 제기했다.
평안도 도체찰사에 부임하여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되찾고,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한 뒤 일본군과 화의를 모색하자 이에 반대, 화기제조·성곽수축 등 군비확충과 군사양성을 주장했다. 그는 정병을 양성하는 한편 병농일치의 원칙 아래 거주지 촌락단위로 지방군인 속오군을 편성하는 등의 군사기구 개편을 주장했다.
1597년 이순신이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할 때 이순신을 천거했다 하여 여러 차례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이듬해에는 조선과 일본이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에 대해 명나라에 가서 해명하지 않는다 하여 북인들의 탄핵을 받고 관작을 삭탈당했다. 1600년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저술활동을 하면서 은거했다.
유성룡의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1557년 과거에 급제했고 1562년 당대 최고의 스승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로 들어가 도산서원에서 수학했다.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스승의 학문을 전수하기 위한 서당을 지으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해 그 마음을 담아 서애를 자신의 호로 정했다고 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나라에 충성한 문신으로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는 뜻이다.
이율곡 십만양병설의 진실공방
임진왜란의 원인과 결과 규명에 있어 늘 등장하는 문제는 조선의 대비부족과 이율곡의 십만양병설이다. 십만양병설은 《선조수정실록》을 비롯해 이이의 전집인 《율곡전서(全書)》 등 몇몇 사료에 기인하는데, 율곡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전쟁을 예견해 십만양병을 주장했으나 유성룡이 반대하여 무산되었으며, 이 때문에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전란을 초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국사학계가 인용했고 한국사에도 이 내용이 실린 후 통설이 되어 왔다.
학계에서는 양병론이 없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중대한 양병론 발언이 제자들의 기록에만 나오고 율곡 본인의 저서나 선조실록에는 나오지 않으며, 다만 《선조수정실록》에 사관의 논평 형식으로 실려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율곡이 병조판서로 임명된 후 군정개혁을 촉구할 때도 십만양병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선조 때 인구는 230여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거기서 10만 양병은 인구 구성비로 보나, 국가 예산 규모로 보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율곡의 양병론이 실체가 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십만양병론이 처음 등장하는 《율곡행장》이 작성된 1597년에 유성룡이 영의정인 동시에 전국의 장수들을 총괄 지휘하는 도체찰사였는데 유성룡이 10만 양병을 반대했다는 허위 기록을 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록에는 후대의 효종, 숙종, 영조, 정조 등 역대 임금과 대신들이 이율곡의 십만양병론을 거론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율곡의 십만양병설은 왜적이 아니라 여진족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이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 당시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사망하고 히데요시가 아직 정국을 장악하지 못했던 시기였던 반면, 조선의 동북방 지역에서는 여진족 ‘이탕개의 난’이 일어나 큰 위기가 닥쳤던 만큼 십만양병설이 사실이라면 일본용이 아니라 동북방 여진용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율곡이 십만양병론을 제기했을 때 유성룡은 부제학이었다. 당시 그는 ‘변방방위책 5개조’를 올렸으나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십만양병설에 관해서는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유성룡의 징비록에도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십만양병설은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임진왜란 10년 전의 상황으로 미루어 10년 후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십만양병을 주장했다기보다 당시 북노남왜(北虜南倭)의 안보적 위협을 감지한 이이가 조선의 안위를 위해 10만 양병을 제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사료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 조선을 침공했는가?
일본을 통일한 후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의 원인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1.도요토미의 심리적 공명심과 영웅심 등 개인의 입장을 근간으로 하는 설, 2.조선이나 명에 대한 일본의 무역과 결부된 경제적인 면을 중시하는 설, 3.일본 국내의 번주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해외원정설 등이 있다.
히데요시는 장기간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통일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무장들이 양산되었으며 이 훈련된 무장들을 조선과 명 정벌에 동원하면 일석이조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연구서들이 밝히고 있다. 영토를 넓혀 부하들에게 영지를 나누어 줄 수 있고, 국내에 두면 골칫거리인 무장들을 해외의 전쟁에서 소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은 일본을 왜구와 동일시하여 무시했지만 일본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15세기 후반부터 규슈 지방에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등을 통해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전투력과 병법이 대거 축적되었고 특히 유럽에서 수입한 조총을 자체 생산하면서 일본의 군사력은 한층 증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여 일본을 통일하고 그 군사력을 해외로 분출한 것이 임진왜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이 일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것과 같이 히데요시도 조선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조선 왕국이 일본에 굴복할 것으로 생각하고 대마 도주에게 조선 정벌의 뜻을 밝히면서 조선 국왕으로 하여금 일본에 사신을 보내 일본에 복속토록 해 보라고 했다. 조선 국왕을 일본의 지역 영주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양국의 사정에 정통한 도주는 그러한 내용을 그대로 조선에 전할 수 없다고 보고 일본에서 새 장군이 탄생했으니 축하를 위한 통신사를 파견해 달라는 내용으로 고쳐서 조선에 전달했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일단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하도록 설득했다.
對일본 조선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
우여곡절 끝에 1590년 선조는 서인 황윤길을 통신사로, 동인 김성일을 부사로 하여 일본에 보냈다. ‘일본과 교린관계를 희망한다’는 선조의 국서를 지참했는데 이 문서가 대마 도주에 의해 교린관계가 아니라 ‘공물을 바치기 위한 사절’이라고 고쳐졌다. 도주는 히데요시의 의도를 다르게 조선에 전달했고 조선의 국서도 위조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황윤길 일행을 ‘입공사(入貢使)’로 간주했다. 그리고 회답하는 국서에서 자기가 ‘태양의 아들’이라면서, ‘명나라를 정벌코자 하니 조선이 길을 안내해 달라’고 했다. 문서를 고치는 데 익숙해진 대마 도주는 일본의 국서를 ‘명에 조공하러 가려 하니 조선이 길을 빌려 달라(假道入明)’고 다시 고쳤다.
귀국 후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침략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히데요시는 눈이 예리하게 빛나고 담력과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보여, 생각건대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으로 우려된다”고 했다. 부사 김성일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조짐이 없었다고 했다. “히데요시는 눈이 쥐와 같아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된다”고도 했다.
선조에 대한 보고에서 김성일은 “윤길은 공연히 민심을 동요시키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조정은 의견이 갈라졌다. 이때 유성룡은 동인이었지만 그는 전쟁이 날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우인 김성일에게 책망하듯 물었다. “그대 의견이 정사와 다르니, 장차 전쟁이 터지면 어찌 하려오?” 김성일은 “나 역시 왜국이 끝내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게 아니오. 윤길의 말이 하도 지나쳐서 안팎으로 민심이 혼란스러울까 진정시키려 그런 것이오”라 했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조정의 논의가 이러한 만큼 왜란에 대한 조선의 대비가 소홀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선조대의 국내정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조 시대에 조선은 명종 때의 외척정치가 청산되고 사림정치가 시작됐는데 이황과 조식을 필두로 한 동인과 이이와 성혼 등을 필두로 한 서인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임진왜란에 즈음해서는 파당 간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양극화된 조선 조정은 변화하고 있는 주변국가 정세에 어두웠다. 특히 일본의 국내정세 변화에 대하여 무심하였고 막연한 평화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 바다에 강하고 육지에 능하지 못하다는 관념에서 왜군이 상륙한 후에 격멸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선조의 요동 內附를 저지한 유성룡
명나라에 원병을 청원한 이덕형.
일본군이 거침없이 북상하자 선조는 서울을 사수한다던 약속을 저버리고 개성으로 피란을 갔다. 개성에 이르러 이항복(李恒福)은 명에 원병을 청하고자 하였으나 윤두수(尹斗壽)는 “명군이 한번 우리 경내에 들어오면 그 후의 난처한 우려는 이에 배할 것이다”라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자력으로 방어하기에는 불가능한 시점에 와 있었다. 임진강 전투의 패보가 들리자 비로소 이덕형(李德馨)을 청원사로 삼아 명에 원병을 청하기로 결정하였다.
서울 파천시 계획은 개성을 거쳐 평양까지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선발대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빠른 속도로 북상해 평양을 함락시켰다. 어디로 갈 것인가? 선조는 압록강을 넘어 요동으로 가서 명에 내부(內附)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이항복이 동조했다. 유성룡은 압록강을 넘는 데 반대했다. “임금이 한 발짝이라도 우리 땅을 떠나면 조선은 더 이상 조선이 아닙니다(朝鮮非俄有也).” 또한, “왕이 없으면 구심점이 없어져 백성들이 돌아설 것이고, 명나라가 도우려야 도울 수 없게 된다”고 했다.
패전하는 조선군을 믿을 수 없었던 선조는 어떻게 해서든지 명에 의존하고자 했다. 유성룡은 “동북의 여러 고을이 아직 건재하고, 충의에 찬 의병이 며칠 안에 들고일어날 것”이라고 하면서 선조를 계속 설득해 요동 내부를 막았다.
윤두수는 함경도로 가야 한다고 했다. 유성룡은 함경도로 가는 것도 반대했다. “지금 북도로 깊이 들어가면 왜적에게 차단되어 명군이 와도 소식이 두절됩니다. 또 왜군이 북도까지 쳐들어와 사세가 궁해지면 오랑캐의 땅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이는 온당치 않습니다. 마땅히 서쪽으로 옮겨 명군을 맞아 중흥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함경도로 갔다가 길이 막히면 명군과의 연락이 끊기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사로잡히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다. 이때 함경도가 가토에게 점령되어 두 왕자가 포로가 되었다. 유성룡의 판단이 적중했다. 함경도로 갔으면 왕이 생포되었을 것이다.
유성룡은 명의 파병을 독촉하자고 했다. 빨리 파병하지 않으면 조선군이 일본군이 되어 요동으로 쳐들어갈 수도 있다고 압박할 것을 주장했다. 명도 영변의 난을 맞아 몽고, 여진족과 싸우느라 지쳐 있지만 일본이 요동으로 쳐들어오면 안 된다는 것을 명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유성룡은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明의 참전과 脣亡齒寒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명은 국세가 기울면서 영변의 난이 진행되고 요동의 북방에서는 여진의 동요가 확대되고 있었다. 1430년대 이후 내륙 아시아 변방에서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몽고의 알탄 칸(Altan Khan)과 만리장성 안과 밖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따라서 명이 조선에 출병하는 것은 군사적으로나 재정적으로 큰 부담이었다.
왜군이 서울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접한 명은 결국 참전했다. 요동의 조승훈(祖承訓) 등이 5000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의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자 이에 놀란 명은 송응창(宋應昌)을 총지휘관 경략(經略)으로 삼고 도독에 이여송을 임명하여 4만5000의 군대로 다시 평양성을 공격해 탈환하였다.
국내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도 명이 파병한 것은 조선이 명의 ‘동방 울타리’라는 인식으로 한반도가 중국에 갖는 지정학적·전략적 가치를 단순명료하게 일러주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론에 근거하고 있다.
명으로서는 조선이 일본에 떨어지면 육로로는 요동과, 해로로는 산동과 연결되는 조선을 일본이 차지하여 그를 전진기지로 삼아 중원을 노리는 상황을 가장 우려하였다. 명의 외교관인 설번(薛藩)이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에 “신이 깊이 걱정하는 바는 조선이 아니라 명의 국경입니다. 무릇 요동은 북경의 팔과 같은 곳이고, 조선은 요동의 울타리와 같은 곳입니다. 영평은 국토를 보호하는 중요한 땅이고, 천진은 또 북경의 문입니다. 200년 동안 남쪽의 복건성과 절강성이 끊이지 않고 왜의 화를 입어 왔으나, 오직 요양과 천진에 왜구가 없었던 것은 조선이 울타리가 되어 막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왜로 하여금 조선을 한번 점거하게 한다면 영평과 천진이 먼저 그 화를 입고, 이에 북경이 놀라 진동할 것입니다”고 출병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순망치한의 논리는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고 있다. 1950년 마오쩌둥은 한국전쟁 참전 여부를 놓고 당 지도부에서는 파병반대 주장이 많았으나 파병을 결정했다. 그때 마오는 보차상의 순망치한(輔車相依 脣亡齒寒)과 호파당위(戶破堂危) 즉, ‘대문이 무너지면 집 본채가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오늘날 중국의 북한 감싸기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明·日 강화회담과 소외된 조선
유성룡과 그의 아들 유진을 모신 병산서원.
1593년 평양전투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승전한 이여송은 황제에게 승전보를 올렸다. 그리고 서울 바로 북쪽인 벽제관에서 일본군에 패하고는 개성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평양으로 후퇴해 버렸다. 일본도 벽제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도 서울에 그대로 머물지 않고 남쪽 해안으로 철수했다.
1592년 4월 13일에 시작된 임진왜란은 이듬해 6월 29일 진주성 함락 이후 1597년 2월 21일 정유재란이 일어나기까지 4년 동안 전투가 없는 소강상태에 이른다. 이 4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명은 처음부터 막대한 희생을 내면서 일본군과의 격전을 피하고 일본과 강화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실제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뒤 경략 송응창은 좌승지(左承旨) 홍진(洪進)을 만난 자리에서 “조선이 원병을 요청한 이후 명 조정의 의견이 처음에는 압록강만을 지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다가, 평양까지 내려오자 평양만을 지키려 했고, 개성까지 내려오자 개성만을 지키려 했다”고 말했다.
일본군의 선봉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진 공격 직전에 조선과는 전쟁의 뜻이 없으니 길을 트라 하였고, 임진강을 끼고 대치하고 있으면서 강화를 청했고, 그 후에도 강화회담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유키나가가 강화회담을 제의한 이유는 조선 사정에 정통한 대마도주가 그의 사위라는 점도 관련이 있을 것이나 사실은 무혈점령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명군의 총책인 병부상서 석성(石星)을 비롯한 병부는 “우리가 왜와 원수질 까닭이 없다. 속국이 넘어지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특별히 군사를 일으켜서 서울과 평양을 수복시켜 주었다. 조선도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더 이상 고된 싸움을 벌여서 이미 왜와 강화하기로 한 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올바른 계책이 못된다”고 황제에게 건의했다.
명은 1592년 9월 심유경(沈惟敬)을 평양으로 보내 고시니 유키나가와 회담하고 그 결과를 당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에게 알려 왔다. “왜와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50일 기한으로 왜병은 평양 서북쪽 10리 밖으로 나가서 약탈하지 말 것이고, 조선군사도 10리 안으로 들어가서 왜와 싸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명-일 양국이 휴전에 합의한 것이다.
明·日 휴전을 감지한 유성룡의 君命不受論
이러한 명-일 회담에서 조선은 완전히 소외되어 어떤 내용이 오고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러한 회담의 동향을 눈치 챈 사람이 유성룡이었다. 1592년 11월 유성룡이 선조에게 올린 서장에서 “명군의 행동이 오로지 강화계책뿐인데 이것은 반드시 명 조정의 계책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명은 왜적을 두려워하여, 전쟁을 그치려고만 합니다. 우리 측에선 만약 이 강화가 이루어지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치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더더욱 수습하기 어렵고, 만 가지나 될 낭패스러운 일이 앞으로 닥쳐 오게 될 것입니다. 아주 상세하고 치밀하게 대책을 강구해서 일이 발생하기 전에 잘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건의했다.
또한 유성룡은 “예로부터 남을 구원하는 측과 남에게 구원을 받는 측은 그 뜻하는 바가 서로 같지 않습니다. 중국이 왜적을 토벌하려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입니다. 전쟁을 중지하려는 것도 중국을 위해서 중지하려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중국이 어찌 우리의 절박한 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리고 유성룡은 명군의 후퇴를 막고 왜와 싸우도록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협상 대상은 명 제독 이여송뿐이었다. 그 윗선의 경략 송응창은 거리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전쟁 현장 가까이는 아예 오지도 않았다.
유성룡은 이여송의 진영을 방문해서 퇴병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간곡히 설명했다. 1.남쪽에 남아 있는 백성들은 명군이 갑자기 물러가면, 나라를 지킬 생각이 없어져 적군에게로 귀의하게 될 것이다. 2.우리 땅은 한 치도 적에게 넘겨줄 수 없다. 3.우리 장수와 군사들은 이제 명군이 물러나 버리면 분개해서 모두 흩어져 버릴 것이다. 4.명군이 물러가면 후방은 모두 빈다. 그 빈틈을 적이 쳐들어오면 임진강 이북 지역도 보전하지 못하고 요동은 곧바로 위협받는다는 논리를 세웠다.
이여송은 이 문제가 명 황제와 조정의 결정이니 자신이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유성룡은 군명불수론을 내세워 “장수가 군중에 있을 때는 군주의 명령도 받지 않을 수 있고, 진실로 지금은 이길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이 좋은 기회를 두고 어찌 수천 리 밖에서 적병과 싸우는 일을 임금께 요청해서 합니까”고 설득하면서 싸움을 재촉했다.
유성룡이 계속 남진을 주장하고 휴전회담을 반대한 것은 이대로 있으면 명과 일본에 의해 조선이 분단될 수 있다고 보고 이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강화는 명의 기본 방침이었고, 어떤 일이 있어도 강화해야겠다는 것이 명의 기본 정책이었다. 그것을 방해하면 위아래 가릴 것 없이 처단하겠다는 것이 명의 기본 태도였다. 당시 명의 총병 이영(李寧)과 유격 전세정(錢世禎)은 유성룡에게 명 조정이 보낸 패문을 보여주면서 명 조정의 처분에 따라 행동할 것과 조선군에게 일본군에 보복하지 말라고 강요하였다. 이에 유성룡이 강하게 반발하자 전세정 등은 천자의 명령이니 계속 고집을 피우면 명군을 거두어 철수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오히려 심유경은 조선에 책임을 돌려 조선이 송응창의 금령(禁令)을 어겨, 나무하고 풀 베는 일본군을 습격했기 때문에 일본군이 복수하기 위해 진주성을 공격한다고 공공연히 일본의 입장을 비호하는 형편이었다. 심유경은 당시 동남 연해지역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들에게 이른바 ‘심유경 표첩(沈惟敬 票帖)’이라는 통행증을 발급해 준 뒤, 조선에 대해 이를 소지한 일본군들을 공격하지 말라고 요구하였다.
히데요시의 조선분할 제의와 국서 위조
휴전을 성사시킨 심유경은 북경을 다녀와 1593년 4월 용산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다시 비밀리에 만나 회담했다. 중국 사가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지난해 회담에서 유키나가는 심유경에게 1.화친 2.할지 3.조선4도를 나눠 일본영토에 속하게 하고 대동강을 경계로 삼는다 4.무역은 종전대로 한다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심유경이 일측과 협의한 결과 보고에도 ‘대동강을 경계로 조선을 나눈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유경과 유키나가가 휴전을 합의한 그 시점에 이미 대동강을 경계로 분할을 협의했고 그에 따라 일단 명군은 개경으로, 일군은 남해로 후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명 조정의 지침을 받아 온 심유경은 용산회담에서 명측의 입장을 전달했고 명은 일본의 요청에 따라 6월 두 명의 사절을 일본에 파견했다. 명의 사절은 사용재(謝用梓)와 심유경이었다. 일본에 도착한 명의 사절에게 히데요시는 7개항의 강화조건을 제시했다. 1.황제의 현숙한 여자를 일본의 후비로 삼는다. 2.관선과 상선의 왕래를 허용한다. 3.두 나라의 대신이 서로 서약서를 쓴다. 4.조선의 8도중 4도만 조선국왕에게 주고 4개도는 일본이 갖는다. 5.조선의 왕자와 대신 한두 명을 일본에 보낸다. 6.두 왕자(순화군·의화군)는 돌려보낸다. 7.조선의 대신이 위약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쓴다.
그런데 심유경 등이 명에 돌아가 회담 결과를 보고할 때는 히데요시가 제시한 7개항은 온데 간데 없고, 국서를 완전히 변조하여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내용만 포함되어 있었다.
이어 1596년 9월 일본에 파견된 명의 사절은 봉왕(封王)의 금인(金印)과 함께 명 황제의 칙서를 히데요시에게 전달했다. 그 칙서에는 ‘귀하를 특별히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고만 적혀 있었다. 히데요시가 기다리고 있던 강화 7개항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욱 믿기 어려운 일은 북경으로 돌아온 명 사절이 진상을 그대로 보고하지 않고 표문을 위조해서 완전히 거짓 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수길(秀吉)이 책봉을 받고 사은(謝恩)하였다’고 상신하고, 심지어는 ‘일본 국왕 풍신수길이 공물을 바쳤다’고 했다.
양국의 국서가 위조되는 상황에서 화의가 성사될 리 없었다. 히데요시는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고 지지부진 끌던 4년여의 화의는 끝내 결렬되었다. 히데요시는 1597년 2월 14만5000의 병력으로 조선을 재침했다. 정유재란이다.
明의 分割易置를 수용한 선조와 유성룡의 저지 노력
명은 일본과 강화하면서 군사적·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방안을 찾고 있었다. 그 방안으로 명이 직접 관원을 파견하여 조선을 통치하는 직할통치론(直轄統治論)이 대두되었다. “조선이 왜적을 막지 못해서 벌써부터 명에 근심을 끼치고 있습니다. 조선을 나누어서 2, 3개 지역으로 만들고, 왜적을 능히 막아낼 수 있는 사람에게 이를 맡겨(分割易置), 조선을 명의 울타리가 되게 해야 합니다.” 명의 급사중 위학증(魏學曾)이 황제에게 건의한 것이다.
1593년 11월 명은 사신을 조선에 보내 먼저 분할역치를 실현하려 했다. 더 이상 조선을 구해 줄 수 없으니 우선 왕을 교체하고, 명이 파견한 사신 사헌(司憲)의 관찰과 판단에 따라 조치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사헌은 선조를 만날 때 스스로 남면(南面)하고 선조는 북면(北面)하게 했다(당시의 예법은 윗사람이 북에 앉고 아랫 사람이 남에 앉는다). 거부하면 조선왕을 만날 필요도 없이 칙서만 던져 놓고 돌아가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선조는 남면하고, 사헌은 마치 임금이 신하를 접견하듯 했다.
선조는 유성룡에게 “내일 나는 곧바로 사신 앞에 왕위를 내놓는다. 오직 그만이 내가 할 일이다”고 했다. 유성룡은 고려 때 다루가치(達魯花赤)의 극심했던 폐해를 상기시키면서 왕위를 내놓아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나 선조는 오히려 명의 관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힘이 약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유성룡이 “명군을 계속 청원하면 지금 우리 힘으로는 군량 등 전쟁 물품을 조달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 군대를 기르고 조련하는 것만이 오직 가할 따름입니다”고 하자, 선조는 “명군이 있어야만 민심이 의지할 수 있고, 명군이 있어야만 불측한 자들이 못된 죄를 꾸미고 간사한 음모를 꾀해도, 필시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 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전라일도의 민심이 극히 나쁜 상태에 있다”고 했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결국 선조는 자신이 직접 사표를 썼다. 유성룡은 “사신 앞에서 절대로 양위한다는 말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신이 감히 죽기를 각오하고 청하옵니다”고 선조를 설득하는 한편, 평소 잘 아는 유격장군 척금(戚今)에게 양위가 불가함을 설득해 동의를 구했다.
문제는 사헌이었다. 왕을 기어이 바꾸겠다는 역치(易置)의 열쇠는 사헌이 쥐고 있었다. 유성룡은 조정의 신료들을 모두 인솔하고 사헌 앞에 서서 “조선의 불행은 명을 치려는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다가 당한 것”이라고 설파했다. 결국 사헌이 납득했다. 선조의 유임도 인정했다.
사헌은 조선을 떠나면서 선조에게 “유성룡의 남다른 굳은 충성심과 독실한 인의는 중국의 문무백관과 장수들이 모두 기뻐해서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왕은 참으로 현명한 재상을 얻었습니다”고 했다. 그리고 유성룡에게는 “조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왜적이 해를 끼친 것은 얼레빗과 같고, 명의 군사가 해를 끼친 것은 참빗과 같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입니까”라는 말을 남겼다. 일본군보다 명군의 착취가 더 심하다는 조선 백성들의 원성을 전한 데 대한 사헌의 반응으로 보인다.
백성에 대한 선조의 공포증과 일종의 적대의식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 선조는 “어디 선량한 백성이 있느냐”, “왜적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변이 더 우려된다”고 하면서 이미 전쟁이 끝났음에도 명군이 더 머물러 있을 것을 요청했다.
明의 직할통치론과 조선의 병권 상실
충무공 이순신.
분할역치가 수그러들자 곧 직할통치론이 대두했다. 명이 막대한 전비를 보전해 주지 못한 왕에게 그 책임을 전가했다. 직할통치론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요동 총독 손광(孫鑛)이었다. 그는 과거 원나라의 예에 따라 조선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여 명에서 순무(巡撫)를 파견하고 그로 하여금 조선 신료들을 전부 행성에 소속시켜 관리하고 조세징수권 등을 갖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명의 책략에 유성룡 등은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오히려 선조가 이를 받아들이려 했다. 선조는 우리의 힘이 약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제 이유는 명군이 있어야 불측한 자들의 준동을 막을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실록에는 선조가 ‘한 나라의 힘을 모두 기울여 명군의 장수들을 섬기고, 심지어는 그 휘하의 편비장까지 온몸을 굽혀 정성을 다했다’고 전하고 있다.
직할통치론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이후 더욱 자주 거론되었다. 명의 안위를 생각하면 조선을 포기할 수 없었고, 갈수록 증가하는 전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유성룡 등의 반대로 직할통치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명은 조선의 내정간섭을 강화했다. 왜란 초기에는 명군 지휘의 총책임을 경략(經略)에게 맡겼으나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은 형개(邢价)를 총독으로, 양호(楊鎬)를 경리로 파견했다. 급수가 시랑(侍郞)급에서 상서(尙書)급으로 오른 것이다.
양호는 부임하자마자 경리아문을 설치하고 조선의 병권을 장악했다. 선조와 대등한 위치에서 신료를 접견했다. 양호의 권한은 국정 전반에 미쳤다. 이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원세개(袁世凱)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것과 유사하다. 명군 지휘부는 조선 병사들까지 직접 지휘하려 하고 조선군이 세운 공은 가로채고, 허물은 조선군에게 전가하는 횡포를 부렸다.
특히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경우, 명의 수군 제독 진린(陳璘)의 견제와 횡포 때문에 일본군을 공격하고 싶어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누차 상소하여 호소하기도 하였다. 병권을 쥔 양호가 수군 지휘권을 그들 제독에게로 넘기면서 진린이 조선 수군 위에 군림하고 이순신마저도 그의 통제와 견제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세자 광해군(光海君)도 양호의 명령에 따르고, 그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임진왜란은 결국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끝나게 된다. 7년의 전쟁에서 승자는 없고 모두가 패자였다. 특히 조선으로서는 그 와중에 분단의 비극을 맞을 수도 있었던 국난이었던 것이다.
유성룡은 모든 公人의 귀감
유성룡은 영의정으로 이 모든 왜란의 과정을 지휘하고 도체찰사로 직접 명군과 함께하면서 조선의 국권을 수호하며 분할을 저지했다. 심지어 선조의 믿기 어려운 대명 의존과 조선 불신까지 감내하면서 왜란을 극복해야 했다. 그는 동인이었으나 정파에 기울어지지 않았다, 온건한 타협주의자로서 붕당정치 속에서도 화해의 길을 모색하였다. 전시에 군량을 보급할 때도 완력과 폭압을 배제하고 위로하며 타이름으로 계도하니 백성이 즐거이 따랐다. 천성의 온유함과 이러한 유화적인 태도로 인해 “대신으로서 줏대가 약하고 체통이 없다”는 평도 없지 않았다.
그는 주어진 길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조정이 안일할 때에도 이순신, 권율 등 인재를 요소에 배치해 전쟁에 대비하고 왜란이 나자 명군의 참전을 유도했다. 선조의 요동 내부를 막고 의병의 궐기를 예견했다. 마치 유성룡은 전쟁의 전말을 예측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탁월한 안목과 행동력을 수반한 준비된 재상이었던 것이다.
유성룡은 신의성실하고 또한 겸손했다. 그래서 명군 지휘부를 감동시켰고, 국란 중의 문란한 정치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조선의 국권을 수호한 것도 모두 유성룡의 치적이지만 그는 이 모든 일들에 스스로를 공치사하지 않았다. ‘신기로운 공을 거두었는데도 조용하기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했다’는 옛말은 유성룡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그는 왜란이 끝나갈 무렵 이이첨 등의 모함으로 탄핵을 받자 “공론(公論)은 국가의 기강(紀綱)입니다. 대신으로서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공론을 받고도 돌아봄이 없이 평일처럼 태연히 앉아 국사를 본다면 조정이 어떻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더 이상 변명도 반론도 하지 않고 사임했다. 선조의 간곡한 유임 권유를 뿌리치고 귀향한 후 다시는 권력의 주변을 맴돌지 않았다.
태종의 종친으로 유성룡과 30년을 함께 일하고 훗날 영의정을 두 번 지낸 이원익(李元翼)은 유성룡이 사직하자 선조에게 “누구를 택해도 유성룡을 대신할 정승은 없습니다. 유성룡이야말로 오로지 청렴, 개결, 근신, 지성으로 나라를 위해 왔습니다. 그가 퇴임한 마당에 신도 이제 물러가겠습니다”고 했다. 임진왜란을 유성룡과 함께 경험한 이항복은 그가 쓴 유성룡 행장(行狀)에서 “어느 한 가지 점을 꼭 집어 이분의 높은 점이라 거명할 수가 없다”고 최대의 찬사를 표명했다. 이항복과 수어지교(水魚之交)로 유성룡의 지척에서 왜란의 현장을 함께했던 이덕형도 “유성룡을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유성룡이 탄핵받고 사임하자 이순신(李舜臣)은 실성해서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다니”라며 대탄식을 했다. 그로부터 한 달도 채 안돼 유성룡이 파직되던 바로 그날 벌어진 노량대전에서 이순신은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유성룡과 이순신의 만남은 숙명적이었던 것 같다.
선조가 자신의 뜻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유성룡을 5년이나 영의정에 붙잡아 둔 것은 유성룡이 권력을 남용하거나 사유화하지 않은 데 있다. 정파에 기울어지지도 않았다. 모든 공인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징비록은 오늘도 말한다
유성룡은 사직한 후 낙향해서 《징비록(懲毖錄)》을 포함해 《진사록(辰巳錄)》 《군문등록(軍門謄錄)》 《근폭집(芹曝集)》 등을 저술했다. 이 많은 저술들의 요지는 한마디로 ‘자강(自彊)과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환란이 닥치기 전에 스스로 힘을 길러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체이다.
특히 징비록은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지닌 불후의 명저이다. 그래서 징비록은 책이지만 국보(제132호)로 지정된 것도 아주 보기 드문 경우이다. 징비란 시경이라는 책의 소비편에 나오는 문장 ‘미리 징계해 우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인데, 즉 우리가 겪은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환란을 기록함으로써 훗날 다시 올지 모르는 우환을 경계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징비록》에서 유성룡은 특히 세 가지를 명심하라고 했다. 첫째, 한 사람의 정세오판으로 천하의 큰일을 그르침을 경계하는 것, 둘째, 지도자가 군사를 다룰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준 것과 같다는 것, 셋째, 유사시 믿을 만한 후원국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성룡은 다시는 이런 환란을 겪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했지만 임진왜란 후 병자호란의 화를 입고, 결국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역사를 반복할 수 있다’고 했다. 신채호(申采浩)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남북분단과 한반도 주변국과의 관계, 그리고 동북아 정세 변화를 생각해 볼 때 《징비록》은 오늘도 우리에게 역사의 교훈으로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