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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6월-0405수)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먹는 Red pill(빨간약)
Red pill(빨간약) :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에게 모피우스가 빨간약과 파란 약에 대한 선택을 권하면서 실제로는 빨간 약을 권하는 - 네오가 먹고 알게 됨 - 그러면서 이 세계가 컴퓨터 가상 세계라고 하는 것과 관련, 이것을 가지고 ‘이성 간의 만남이나 결혼 등 성 전략의 가혹한 진실을 받아들이자는 주장’ 레드필 이론인데, 이번 글에서는 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가르침으로서 사용하였다.
아브라함에서 보는 끌어당김의 법칙
아브람의 출가(出家)
(창 12: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5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길을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6 아브람은 그 땅을 지나서, 세겜 땅 곧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7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아브람은 거기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아브람은 75세에 조카 롯과 같이 하란에서 나왔다. 나올 때 축복의 말씀을 듣고 나왔다. 첫 번째 축복이 (창 12:2,3절)의 말씀이고, 두 번째는 가나안 땅을 지나 세겜에 이르렀을 때이다. (창 12:7절)의 말씀이다. 아브람의 고향은 갈데아 우르다. 지도로 보면 사우디아라비아 동북쪽 이라크 땅인데, 그 아래쪽에 쿠웨이트가 있고, 또 그 밑으로 페르시아만이 있다. 과거 이 지역은 수메르 문명이 있었던 곳이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갈데아 우르를 떠났으나 그곳까지 가지 못하고 하란이라는 도시에 정착했는데, 현재 지도로 보면 그곳은 시리아 북쪽 터키가 있는 곳이다. 아브람은 그곳에 있다가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쪽의 가나안으로 가게 된다. 그 출가(出家)를 서술하고 있는 장이 (창세기 12장)이다.
아브람의 출가는 사실 그의 아버지 데라로부터 비롯되었다. 데라는 갈데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고자 하였다. ‘갈데아 우르’는 영적으로 거짓들이 내재된 외적 예배로서 우상숭배를 가리키고(천계비의 1365, 1368) 가나안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 즉 천국을 상징한다. 그러나 데라는 가나안으로 가지 못하고 하란에서 죽었다(창 11:32). 하란이라는 지역 또한 우상숭배를 뜻한다. 데라의 죽음은 우상숭배의 종말을 뜻하고 아브람을 통한 표징적 교회(교회의 예배, 제사들이 천국적인 것을 상징하는 겉으로 만의 교회)의 시작을 가리킨다(천계비의 1374). 사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와 그의 세 아들 아브람, 나홀, 하란(에게서 롯이 태어남)은 우상숭배자들이었다(임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천계비의 1356-1374). 그렇지만 데라는 그 우상숭배에서 떠나고자 하였다. 그래서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란에서 머물다가 죽었다. 이것이 창세기 11장 말미의 내용이다. 창세기 12장에서는 본격적인 아브람의 천로역정(天路歷程)이 펼쳐진다. 새로운 시작을 가리킨다. 데라의 의지를 아브람이 이어받은 것이다.
십계명의 첫째는 - 너희를 이집트(우르와 하란)에서 끌어낸 -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다(출 20:2). 둘째는 나 여호와 외에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이다(출 20:3-6). 십계명 분류법이 종파마다 다른데 유대교 십계명이 정답이다. 유대교 십계명은 이렇다. 1 유일신 신앙, 2 우상숭배 금지, 3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지켜라, 5 부모를 공경하라 여기가 첫째 돌판이고, 둘째 돌판은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적질 하지 말라, 9 거짓 증거를 하지 말라, 10 탐내지 말라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의 근본은 유일하신 하나님인 여호와를 신앙하는 것이고 이에 반하는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것이다. 창세기 12장의 아브람의 출가가 내포하는 것이 이것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신앙하고자 한다면 우상숭배를 버려야 한다는 것과 그것과는 정반대의 상태를 이룩해야 한다는 갈데아 우르와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말씀이다.
아브람을 하나님이 택하신 것과 그를 인도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브람은 그 당시의 사람들과 달랐다. 육체적이고, 쾌락적이며, 세속적이고 우상숭배적인 것을 지양(止揚)하는 사람이었다. 말했듯이 데라와 그의 세 아들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은 아버지 보다 먼저 우르에서 죽었다)은 모두 우상숭배자들이었다. 갈데아 우르가 그러한 곳이었고, 하란이라는 지역도 그러한 곳이었다. 데라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것이 하란에서의 죽음이 뜻한다. 데라가 가나안으로 가고자 한 것이 자신의 뜻인지 하나님의 뜻인지는 불분명하나 아마도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도 아브람과 같이 하나님의 어떤 메시지나 자극이나 충동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지가 약해서 하란에 머물다가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뜻을 장남인 아브람이 이어받는 것으로 보이고, 하나님도 데라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나은 또는 적합한 아브람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아브람은 그 당시의 사람들과 성품이나 성향이나 가치관이 달랐다.
땅과 땅의 먼지를 보라
(창 13:14) 롯이 아브람을 떠나간 뒤에,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15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16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17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 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 18 아브람은 장막을 거두어서, 헤브론의 마므레, 곧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거기에서 살았다. 거기에서도 그는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땅을 선택할 수 있는 우선권을 준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바라보는 땅을 아브람과 아브람 후손에게 주겠다고 하시는 장면이다. 세 번째 축복의 말씀이다. 이것은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믿음의 눈(eyes of faith)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육안(肉眼)과 영안(靈眼), 육안으로는 후손이 없는 땅을 보지만 영안으로는 후손이 있는 땅을 보는 것이다. 땅의 먼지를 후손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인에게 상상(imagination)을 즉 시각화(Visualization)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마치 말씀이 사람에게 조요와 영감(Illumination and inspiration)을 불러일으키듯이,
여기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생각한 것은 이것이지만 사람은 저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한자가 아니라 절대자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시하는 것은 최고의 것으로 그것에는 한계가 없다. 그러나 사람은 유한하고 스스로를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사람은 각자의 역량에 따라 자기 몫을 하나님으로부터 취한다. 하나님의 축복과 축복의 크기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사람이 거부하면 축복은 주어질 수 없다. 수용해도 사람이 스스로 정한 한도만큼만 주어진다. 하나님의 축복이 사람의 역량에 따라 제한된다고 하는 것은 (열왕기하 4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릇에 기름을 채우는 기적에 관한 기사인데 가져온 그릇 수만큼만 주어졌다. 궁핍한 과부는 기름 한 병밖에 없었다. 엘리사는 이웃들에게서 그릇을 가져올 수 있는 대로 가져오라고 했고 과부는 가져왔으며 기름은 가져온 그릇 수만큼 주어졌다. 만약 지구의 모든 그릇을 가져왔어도 하나님은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채웠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급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마태 16:19)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프라나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티끌(아파르)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결(니쉬마트 하임, breath of life)을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숨쉬는 존재(히 네페쉬 하야, 헬 푸쉬케 조산, a living being)가 되었다”
아담 창조 기사에서 생명의 숨결(니쉬마트 하임, breath of life)이 암시하는 것은 호흡의 기운에 있다. 호흡, 숨에 생명이 있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적이다. 호흡에 있어서 산 호흡과 죽음 호흡이 있는가? 호흡이 산 것이지 죽은 것인가? 그래서 이 기사는 사실 영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인 호흡과 거듭남, 아담 창조 기사는 단순히 인간 기원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숨, 호흡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생명과 관련된 단어가 니쉬마트 이외에도 히브리어에는 루아흐(ruach)가 있다. 헬라어로는 푸뉴마(pneuma)라 하고,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는 프라나(prana)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우리 말로는 모두 영(靈)으로 번역한다. 영어로는 spirit이고, 영이라 하면 존재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의미도 있지만 에너지의 의미도 있다. 이 후자의 의미가 숨결 니쉬마트에 있는 것이다.
이 루아흐, 푸뉴마, 프라나는 말했듯이 산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생명(spiritual life)을 말한다. 이 영적인 생명이란 영적인 호흡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을 말하는데, 사람은 영적인 존재라 누구나 영적인 호흡을 한다. 다만 사람이 선한가 악한가에 따라 다르고 또 수준에 따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영계에도 대기가 있다. 천국과 지옥과 그 중간의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 거듭나면 천국의 대기를 호흡한다. 그러나 말했듯이 프라나는 대기가 아니다. 천사들에게 니쉬마트를 적용해 봐라. 그것이 천국의 대기이겠는가? 루아흐는 대기의 근원 아니 모든 것의 근원인 하나님의 영을 말한다. 이 영을 통해서 산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천국의 대기를 호흡하는 산 사람이,
주의력
숨결(breath)이라는 것은 코만이 아니라 입(mouth)에도 들어갈 수 있는데, 왜 아담 창조 기사에서는 코(nose)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코가 상징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코가 하는 기능은 숨을 들이시는 것도 있지만 냄새를 맡는 기능도 있다. 이 냄새를 맡는 후각의 기능이 상징하는 것이 직관(intuition), 지각(perception)이다. 이 직관이라는 것은 오감과 이성(five senses and reason)을 초월한 느낌, 앎을 뜻한다. 상식적인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깨달음이나 통찰이나 지식을 뜻한다. 후각도 오감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나마 덜 물질적인 것이 냄새를 맡는 것이다. 그래서 코, 후각이 선택된 것이다. 그 직관적인 것, 지각적인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것을 상징하는 것이 코이고 코가 지각하는 숨결 즉 영인 것이다. 이 숨결은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고 주어지지만 누구나 그것을 받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열쇠는 그것을 캐치하는 사람의 감각, 능력에 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주의력(attentiveness)을 뜻한다. 무의식적으로 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그것, 자신이 원하는 것 또는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을 뜻한다. 의식의 감각을 예민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의 근원인 영에게, 이런 것을 보통은 주파수를 맞춘다고 한다. 의식의 주파수를 자신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채널에 맞추는 것이다. 맞추면 그것만 보이고 그것만 들린다.
신인협력(神人協力, Synergism)이 하나님의 뜻이고 진리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다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없이 인간이 다 한다고 하지만 또 반대로는 하나님이 다 한다고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은 같이 한다. 자유의지가 왜 있겠는가? 십계명이 왜 주어졌겠는가? 예수님도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별 다른 역사를 할 수 없으셨다.
(마태 13:58)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마가 6:5,6)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말씀의 숨결
프라나는 입에서 나온다. 입에서는 숨결뿐만 아니라 말씀도 나온다. 말할 때 숨결이 같이 한다. 이것을 말씀의 숨결(breath of the word), 말씀의 기운 (spirit of the word)으로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말씀을 듣지만 말씀에는 말씀만이 아니라 기운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말씀에만 주의를 기울이는데 사실 본질은 기운에 있다. 그와 같이 아브람은 말씀에 내재된 숨결을 지각하였다. 프라나의 유입은 두 가지 방식으로 사람에게 이루어진다. 숨을 들이쉬는 것과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서, 아담 창조 기사나 예수님이 부활 후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발출 한 기사(요한 20:22)는 이를테면 단전호흡으로서 말할 수 있지만 - 단전호흡은 호흡을 들이쉬고 내 뱉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력에 있다 - 어쨌든 겉으로 드러난 형태나 뜻이 아니라 기운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주의력을 가지고 포착하는 것은 꿈을 이루는 데 있어서 시작에 불과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포착해서 그것을 들이마시는 것이다. 마시는 것은 느낌(feeling)을 말한다. 내 안에 들어왔다는, 와서 내 것이 되었다는, 음식을 먹으면 배부름이나 포만감과 같은 느낌이 일어나는데 그와 같은 것을 말한다. 실제로 배와 위장에서 느껴진다. 이것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느낌이 아니라 그 목표를 이미 이룬 상태를 느끼는 것이다. 포착, 캐치, 지각을 말하면 빨대를 꽂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는데 캐치하는 것이 꽂는 것이라면 취하는 것은 느끼는 것이다. 느끼는 것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그때 일어나는 것이 비전(vision)이다. 상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인위적으로 애써서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호흡으로든 말씀으로든 주어지는 것들은 자연스럽게 마음 안에서 상영된다. 이것은 제3자로서 관람하는 형식을 말하지 않는다. 관찰자의 입장이 아니라 참여자로서의 영상이 상영되는 것이다. 내가 꿈이 이루어졌을 때를 느끼는 영상이지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의 숨결이 아브람의 코에 들어가 아브람의 마음 안에서 꿈에도 원하는 이상적인 삶과 미래가 펼쳐졌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요한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말, 단어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에 실려 있는 내용물이 중요하다. 이 내용물이 없는 것은 속 빈 강정과 같고 빈 깡통과 같다. 소리가 요란한 것은 빈 수레라는 뜻이고 빈 수레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내가 얻을 것도 없다.
(마태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짓든지, 무슨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든지, 그들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영(푸뉴마, spirit)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32 또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겠으나, 성령(Holy spirit)을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같은 내용의 말씀이다. 살리고 죽이는 것은 겉이 아니라 속이라는 말이다. 인자가 뜻하는 것은 자연적으로는 사람의 아들이고 즉 예수님을 뜻하고, 영적으로는 성경말씀을 뜻한다. 예수님이나 성경말씀에 대한 부정적인 여러 생각들은 용서받을 수 있다. 불신이나 의문이나 비판이나 나아가 신성모독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근데 문제는 주님과 말씀의 기운인 성령에 대한 것이다. 성령님과 성령님의 역사를 반대하고 거부하고 공격하는 이는 용서를 받지 못한다. 현세에서 뿐 아니라 내세에서도, 이것은 구원은 물 건너갔다는 것을 말한다. 거기에서 좋은 모든 것이 오는데 그것을 스스로가 막고 부정하고 모독하고 있으니, 또 그것에 대해 무지하니, 이 영 즉 에너지에 대해서 (31절)과 (32절)의 기록이 다른데, 영과 성령으로, 문맥상 영을 성령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나, 성경이 그와 같이 다르게 기록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31절)의 영은 아마도 구약의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을 가리키는 듯하다. 영과 성령의 차이는 주님 유무에 있다. 성령은 오로지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 주님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활동한다. 다른 종교들이나 사람들에게, 성령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성령 안에는 주님의 공로와 공덕과 공력이 들어 있다.
땅을 걸어 보아라
(창 13:17)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 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보라고 하고 난 이후에 그 땅을 직접 걸어보라고 하신 이유는 실제로 느껴 보라는 것이다. 아브람 자신과 후손들이 밟게 될 땅, 소유하게 될 땅을, 그리고 그 땅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과 후손들의 모습을, 원하는 것을 시각화한 이후에 그것에 대해 체험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자동차든 집이든 실제로 가서 시승해 보고 둘러보고 하면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운전해 보고 들어가 보고 하는, 그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서 내가 새 차를 운전하는 것을 느끼고, 새 집에 들어가 사는 그것을 느끼는 느낌(feeling)이다.
하늘과 하늘의 별을 봐라
(창 15:1)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2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3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4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5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righteousness)로 여기셨다.
영적으로 이전의 창세기 13장에서의 하나님의 축복은 겉사람에 대한 것이고, 창세기 15장에서의 축복은 속사람에 대한 것이다. 땅은 겉사람, 하늘은 속사람이므로, 15장이 13장과 다른 점은 아브람의 믿음이 나오고 그 믿음을 하나님이 ‘의롭다’ 칭하신 것이다. 그러면 그전에는 아브람이 믿지 않았다는 뜻인가? 왜 그전에는 믿음과 의에 대한 말이 안 나오고 이제야 나오는 것일까? 보면 여호와의 대한 신앙은 있었다(창 13:4). 그 말씀을 듣고 단을 쌓았다(창 13:18)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있고 그 말씀에 대한 믿음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믿음이 부족해서?? 아니면 성이 안 차서, 동서남북 볼 수 있는 지경의 땅만 준다고 해서???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영토를 양보했다(창 13:8-11). 그 이후에 축복의 말씀을 들었다(창 13:14-17). 아브람은 보통의 대다수 하고는 다른 사람이다. 좋은 땅을 조카이지만 양보하는 것으로 봐서는, 14장에서는 그 지역의 왕들에게 사로잡힌 롯을 구해오는 영웅적인 면모를 보인 가운데 멜기세댁으로부터 축복을 받고(창 14:18,19), 그 이후 15장에서 네 번째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는데 이때 믿음으로 의롭다는 칭호를 얻게 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자손과 땅을 준다는 것에 대한 것으로 그 믿음을 생각할 수 있지만, 땅과 하늘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땅의 먼지는 자연적인 사람, 하늘의 별은 영적인 사람에 관한 것이므로, 또 아브람의 성품이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그 차별성에 근거해서 보면 예를 들어 조카에게 땅을 양보하고(창 13:8-11) 사로잡힌 조카 롯을 구해오고(창 14:16) 이것이 가능했던 원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창 14:20)과 또 그 이후 구함을 입은 소돔 왕의 사례를 거부한 것에서(재물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다는) 아브람을 세속적인 사람으로 볼 수 없지 않겠는가? 세상의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관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아브람이 하늘의 별을 보고 믿었다는 것은 영적인 자손에 대한 욕망이 아니었겠는가? 이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좋게 보고 의롭다 칭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땅의 자손
(창 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하갈이라고 하는 이집트 사람 여종이 있었다. 2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에게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시니, 당신은 나의 여종과 동침하십시오. 하갈의 몸을 빌려서, 집안의 대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따랐다.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기의 여종 이집트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아내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온 지 십 년이 지난 뒤이다.
아브람이 하란으로부터 나온 때가 75세였다(창 12:4). 그 아내 사래는 65세였고,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것이다. 아브람 85세, 사래 75세, 그 10년 동안 아브람은 축복의 말씀을 네 번 들었다. 하란에서 나올 때 한 번(창 12:2,3), 세겜에 이르러 한 번(창 12:7), 롯과 분가 후 한 번(창 13:14-17), 조카 롯을 구해오고 멜기세댁으로 축복받은 이후 한 번(창 15:1-6),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땅도 주고 자손도 준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 결과로 아내 사래가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람의 품에 두게 된 것이다. 보통 이를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대한 불신에서 일어난 일로 본다. 그 불신의 결과가 육의 자손인 이스마엘이다. 이삭은 약속의 자녀로서 영의 자손이고, 갈라디아 4장에 나온다. 어찌 보면 이 사건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닮았다. 하와가 권유해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듯이, 아브람도 사래의 권유를 받아 하갈과 동침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로 예언의 성취다. 영적인 것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이를 단순하게 부정적으로만 해석하나, 영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은 이 사건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이미 말했다. 땅의 먼지와 하늘의 별은 육의 자손과 영의 자손이라고, 하나님은 하늘의 별 즉 영의 자손만 준다고 하시지 않으셨다. 땅의 먼지도 주신다고 하셨다. 그것이 아브람과 하갈의 결과물인 이스마엘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것이다.
이삭과 이스마엘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
사람은 속사람과 겉사람으로 구성된다. 속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겉사람은 사람으로부터 온다. 즉 조상과 부모로부터 온다. 속사람은 영적 사람이고 겉사람은 육적 사람이다. 단순하게 보면 이삭과 이스마엘이다. 그러나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사실은 이렇다. 사람에게는 에고가 있다. 기본적으로 에고는 겉사람으로부터 발생한다. 태어나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생성된다. 에고가 우리다. 우리는 죄인이다. 거듭나야 한다. 죄인이 회개하면 거듭남이 시작된다. 이때 발생하는 것이 아브람과 하갈의 동침이고 이스마엘의 탄생이다(아브람 86세, 창 16:16). 새로운 에고다.
아브람은 속사람 또는 영적 선을 상징하고 하갈은 겉사람 또는 자연적인 진리를 상징한다. 이 양자의 결합에서 탄생하는 것이 영적-자연적 합리성을 상징하는 이스마엘이다. 사래는 무엇이냐, 사래는 영적 진리를 상징한다. 아브람과 사래의 결과물인 이삭은 영적 합리성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들 간의 결합에서 오고,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과 사람에게 속한 것들의 결합에서 온다. 거듭나는 사람에게는 에고가 둘이다. 영적인 에고와 영적-자연적인 에고, 초기에는 영적-자연적인 에고가 지배적이나 영적 에고가 탄생하게 되면서 주도권은 영적 에고에게 넘어가게 된다. 사람은 속사람으로만 존재할 수 없고 겉사람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 속과 겉이 함께 한다. 함께 하는 방법은 하나가 다른 하나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를 거부한다면 추방될 수밖에 없다. 이스마엘이 추방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스마엘은 두 가지를 상징한다. 자연적인 합리성과 영적-자연적인 합리성, 이삭에게 순종하면 영적-자연적 합리성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자연적인 합리성인 것이다. 반대의 상황에서는 속사람은 없는 것과 같은 취급을 당한다.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열국의 아버지와 열국의 어머니
창세기 17장에서는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사라로 개명하는데 그 뜻은 열국의 아버지와 열국의 어머니다(창 17:4,5,15,16). 그리고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날 것이고 이름은 이삭으로 지어 주신다(창 17:19).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지금은 원하는 것이 없어도 그렇게 믿고 있어도 그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기고 취급하라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물질화를 위한 하나의 기술이다. 물질화의 첫째는 보는 것이다. 보는 것은 상상하는 것이다. 땅을 보고 하늘을 보는 것 말이다. 둘째는 보는 것을 실제로 느끼는 것이다. 땅을 걸어보라는 것, 셋째가 자아 정체성의 새로운 확립이다. 그것이 창세기 17장에서의 서술들 즉 열국의 아버지와 열국의 어머니로의 이름의 개명과 아들의 이름을 미리 짓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의 변화와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그 느낌에 대한 변화다. 펙트는 아브람과 사래는 자식이 없는 부부라는 것과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이고 그들 스스로에 대한 생각이며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 이를 바꾸기 위해서 열국의 아버지와 열국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고, 또 아들의 이름도 지어준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해 펙트와는 다른 생각과 느낌과 감정을 가지라고,
창조를 위해서는 뻔뻔할 필요가 있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해야 하니, 그러나 뻔뻔한 것이 아니다. 실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은 그 어느 것 보다도 진실이고 사실이다. 시공간 안에 나타나지 않았을 뿐, 그럼에도 거짓말쟁이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거짓말쟁이와 신앙인은 겉으로 볼 때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니,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하니, 그래도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그런 마인드가 필요하다. 신앙이, 그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느끼기까지 해야 한다. 다 가진 느낌, 이루고 성취한 느낌, 이건 뭔가? 연기자가 연기를 하는 것과 같다. 그는 부자가 아니고 천재도 아니며 초능력자도 아니다. 근데 부자인 것처럼 연기를 하고 천재인 것처럼 연기를 하고 초능력자인 것처럼 연기를 한다. 그 연기를 실감 나게 하면 사람들이 진짜처럼 느끼고 감동을 받는다. 연기자 자신도 그 배역에 빠져서 몇일이건 몇 달이건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인가? 우주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의 법칙에 따라 운영되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모인다. 천국에는 선한 사람만 있다. 지옥에는 악한 사람만 있다. 천국은 세 천국이다. 3층천은 주님 사랑의 나라다. 2층천은 이웃 사랑의 나라, 1층천은 이 양자의 외적인 사랑의 나라, 끼리끼리 모인다. 사랑이 같은 사람들끼리 수준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다. 천국에는 또 무수한 사회와 가족이 있다. 거기도 끼리끼리다. 나는 부족하다고 하면 부족한 것이 온다. 나는 가난하다 하면 가난이 온다. 나는 약하다 하면 약한 것이 온다. 이런 식이다. 단순히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 정체성에서 나온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믿으면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고, 그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고 믿는 사람들이 오고 그 믿음에 일치하는 이들이 일어난다.
이 원리는 영적 존재와 함께 하는 것에도 적용이 된다. 사람에게는 영적 존재가 와 있다. 우리 사람들은 모르지만, 자기와 같은 수준과 성품의 영적 존재가 온다. 천국에서도 오고 지옥에서도 오고, 기본이 선한가 악한가이고 다음이 성격이나 수준이 되는 것이다. 근데 이 영적 존재들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교체될 수가 있다. 사람의 성장 변화에 따라서, 천국의 존재가 오면 그들과의 인격적 교류 즉 의지적, 이성적, 감정적, 감각적 교류가 일어나고 그로 인해서 선한 사람으로 변해 간다. 근묵자흑(近墨者黑 : 검은색,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지고) 근주자적(近朱者赤 : 빨간색을 가까이하면 빨개진다)이다. 그들이 와서 우리가 선하게 된 것인가? 우리가 선해서 그들이 온 것인가? 열쇠는 지상인에게 있다(마태 16:19, 18:18). 지상인이 주님을 믿고 회개를 하면 선한 존재가 오는 것이다. 온 이후에 교제가 열리고, 그 교제로 인해서 내가 변하고 그 변하는 시간에 따라서 선이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침례의 실체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이 주님을 믿고 침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이제는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선한 사람이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인간의 성품은 단기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런 식으로도 아니기 때문이다. 성품은 외부의 힘이나 내부의 의지가 없다면 이전과 같이 가려는 경향이 있다. 관성적이다. 하던 대로 하려는 경향이 있다. 침례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침례는 형식으로서 나를 바꾸려는 외부의 힘이다. 이것은 외적인 것이다. 외부의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내고 알리는 것을 말한다. 외부인들이 그 사람을 새 사람으로 보고, 그 사람도 자기 자신을 과거와 다른 새 사람으로 여긴다. 이것은 속이 어떠하던지 겉으로는 그렇다는 것을 말한다. 침례는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의 부활을 말한다. 과거의 나는 없고 새로운 내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람이 새로워졌다고 인식하는 것은 과거와 다른 생각과 말과 행동을 했을 때이다. 근데 침례에는 그런 것이 없다. 다만 과거의 나는 죽고 새로운 나로 부활했다는 퍼포먼스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실제로는 아닌데 그렇다고 연기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침례를 받은 당사자의 믿음과 생각과 느낌이 더 중요하다. 그것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실제로 구현하는 이는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침례라는 성례의 실체다.
침례로 일어나는 영적인 도움
사람 혼자서는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불굴의 의지로 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제까지 살아온 이력이 있는 관계로 혼자서 과거를 뒤로 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하다. 근묵자흑(近墨者黑) 근주자적(近朱者赤)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살려고 하는 삶을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저세상에서도 똑같다. 사람은 자연적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영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침례를 사람이 받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일원이 된다.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한 존재가 된다. 이 세상에서 그렇듯이 저세상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침례를 받으면 영혼에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식이 새겨진다. 그것에 따라 그 영혼이 영계의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소개된다. 즉 그들 가운데 있게 된다. 한마디로 그들과 영적인 교류, 교제 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임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순정 기독교 677항) 4) 세례의 첫째 가치는 기독교회로의 입문이며 동시에 영계의 기독교도들과의 교제이다. (678) 영계에서는 지상에서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이 - 유아도 - 영계의 기독교인들에게 소개된다. 그 까닭은 영계에서는 지상에서 온 사람들을 종교에 의해서 구별하기 때문이다.
침례를 받은자에게 요구되는 태도
침례는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다.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의 부활이다. 이제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나다. 단지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이유만으로, 그러나 이것은 다 안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한다고 해서 진짜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하나님도 아시는 것이다. 근데 왜 침례라는 의식을 성례로 제정하셨는가? 앞서 말했듯이 물질화를 위한 하나의 기술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개명하고 그 이름에 걸맞은 사람으로서 산 것과 같은 즉 연기(演技)를 말한다. 아브람은 열국의 아버지가 아니다. 근데 열국의 아버지처럼 의식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았다. 그와 같은 것이 침례를 받은 사람에게서 요구되는 태도인 것이다. 나는 새로운 사람이다. 새로운 사람으로서 새로운 삶을 산다, 과거의 내가 아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천국에 속한 사람이다. 나는 선한 사람이다. 그와 같은 의식을 가지고 그런 생각을 하고 말을 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세상은 인정하지 않아도 교회는 인정하며 그뿐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도움을 준다. 그와 같이 영적 존재들도 그 사람과 함께 하며 영적인 도움을 준다.
침례에서 일어나는 이 영적 자연적 도움이라는 끌어당김은 교회 밖에서도 똑같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이 침례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 즉 사실은 없는 데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하면 침례를 받은 사람에게 교회인이 오고 영적 존재가 오듯이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풍요를 원한다. 평화와 안녕을 원한다. 치유와 건강을 원한다. 이런 기운들은 공간에 퍼져 있다. 우리가 이 기운을 포착하고 흡입하면 기운이 들어오지만 기운만 들어와서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기운과 같이 오는 것이 존재다. 그런 기운으로 가득한 존재들이 온다. 그 존재들이 와야 비로소 우리가 영적으로나 자연적으로 그 기운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연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말이다. 침례를 받은 사람들처럼 연기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면 온다. 영적인 것이 먼저 오고 다음에 자연적인 것이 온다. 풍요의 존재들, 평화의 존재들, 치유와 건강의 영적 존재들이 오면 그들과의 교류로 인해서 우리 안에 풍요와 평화와 치유와 건강에 관한 의지와 생각과 감정과 느낌이 증가하고 나아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것이 지속되면 나의 기운은 변화가 된 것이고, 그 변화된 기운에 일치하는 것들이 그 사람에게 끌려오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 사람은 새로운 사람으로서 새로운 환경과 조건 속에 놓이게 되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침례의 절차
초대교회의 침례의 과정은 이렇다.
우선 축사(逐邪)를 한다. 악령을 쫓아내는 것이다. 다음이 침례이고, 마지막이 성령세례(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다. 침례를 받기 전에 축사를 하는 이유는 사람의 악한 삶의 배후가 악령이고, 새로운 삶을 방해하려고 하는 것도 악령이기 때문이다. 그 영혼에 붙어 있는 악령을 우선 처리해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이다. 외부의 힘으로 떼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분리는 자기가 해야 한다. 스스로가 끊어내지 않으면 악령은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왜 악령이 그 사람과 같이 있는가? 그 사람이 악을 좋아하고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속 조치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 스스로가 악을 끊는 회개(repentance)를 해야 한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침례에서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옛사람의 죽음을 상징하는데, 옛사람의 죽음은 실질적으로는 악을 끊는 것에 있다. 이 회개를 통해서 옛사람이 죽을 뿐 아니라 배후에서 충동질하는 악령도 완전히 추방되는 것이다. 그러나 침례 또는 회개는 신앙으로 하는 것이다. 주님에게 두는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주님께서는 지옥을 정복하고 악령을 다스리는 권세를 획득한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해야 하지만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고 그것을 떨쳐 낼 수 없다.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쳐 내도 악령은 끊임없이 오기 때문이다. 하나를 쳐내면 또 다른 하나가 온다. 계속해서 온다. 인간은 그것을 끝까지 막아낼 수 없다. 유한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우쳐주는 말씀이 마태 12장의 말씀이다.
(마태 12:43) "악한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왔을 때에, 그는 쉴 곳을 찾느라고 물 없는 곳을 헤맸으나 찾지 못하였다. 44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나온 집으로 되돌아가겠다' 하고, 돌아와서 보니, 그 집은 비어 있고, 말끔히 치워져서 잘 정돈되어 있었다. 45 그래서 그는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딴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그 집에 들어가 거기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래서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되었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가르침과 치유와 축사를 많이 베푸셨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님께서 그들을 깨끗이 해주셨지만,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지할 경우 축출된 악령이 다시 돌아오게 될 때 막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 43절 이전 말씀에서 자기 자신을 강조한 것이고 그 이후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나를 믿지 않고 나를 의지하지 않으면 그와 같이 너희 스스로의 의지를 믿으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깨끗하게 된 사람들은 그 힘에 힘입어 스스로도 깨끗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을 것이고, 스스로의 생각에도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결과가 어떠하다는 것을 아시고 주님 자신을 등지고서는 결국에 악령에게 먹힐 것이고 상태는 이전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고 경고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회개는 악을 끊는 것이 다가 아니다. 선을 행하는 것도 회개에 속한다. 회개를 구성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악을 끊는 것이고, 둘째는 선을 행하는 것이다. 침례(baptism)가 상징하는 것이 이 회개다.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회개의 첫째인 악을 끊는 것이고,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이 회개의 둘째인 선을 행하는 것이다. 마지막 성령세례(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는 주님께서 자신의 자녀로 인정하는 인증 역사를 말한다. 육신과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와 하나님에게 속한 자녀라고 인치시는 것을 뜻한다. 교회가 침례 받은 사람을 교회인으로서 - 외적으로 - 선언한 것을 내적으로 확증하는 것이 성령세례이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아담 창조 기사에서 아담의 코에 불어넣어 진 생명의 숨결(니쉬마트 하임, breath of life)과 같은 것이다. 아담은 그 숨결을 받고 살아 숨 쉬는 존재(히 네페쉬 하야, 헬 푸쉬케 조산, a living being)가 되었다. 아담이 생기로 진정한(영적이고 천적인) 사람이 되었듯이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도 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아담 창조 기사는 침례에서 물속에서 나오고 성령 세례 받는 두 단계를 함축하고 있다. 흙의 티끌로 사람을 빚는 것이 물속에서 나온 새사람인 것이고 그 빚은 사람의 코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 성령세례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증거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의 구원은 영원불변한 것이다. 칼빈은 이를 성도의 견인론(Persevemace of the Saints)으로 주장했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는 결코 유기될 수 없다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을 말한다. 물론 그것에 반하는 성경 구절이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하여 구원을 상실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히 6:4-6, 베후 2:20-22, 마태 12;43-45, 요한 5:14, 묵 3:15,16),
(로마서 8:14)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그때에 그 영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보통은 침례 이후에 성령세례인데 이 순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착하게 살고 있는 경우 침례를 건너뛰고 성령이 먼저 주어질 수 있다. 사도행전 10장에 그 예가 나온다. 고넬료라는 로마 백부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도도 많이 하고 구제도 많이 하던 사람이었다. 천사의 지시를 받아 베드로를 초대하여 말씀을 듣는 와중에 성령세례가 주어졌다.
(사도행전 10:47)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을 금하리요,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침례(baptism)가 내포하는 회개의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침례를 받지 않았어도 침례를 받은 사람이다. 그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침례를, 주님에 대해 모르고 믿지 않았어도, 모든 선의 근원은 주님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세례 요한의 세례와 주님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침례에는 차이가 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겉사람의 정화를 의미한다. 즉 겉으로만 새로워진 것처럼 하는 것으로서 이것이야 말로 연기하는 것을 뜻한다. 침례 자체가 그러하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세례와 주님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침례가 성별 되는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침례에는 사람을 속사람으로 만드는 공덕과 공력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겉사람을 속사람이 되게 하는 - 겉사람이 속사람에게 순종하는 - 능력이 있다는 것인데, 물론 이것의 진정한 의미는 주님에 대한 믿음을 뜻한다.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는 침례 즉 연기와 그렇지 않은 연기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진짜와 가식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가운데 연기를 하면 그 연기가 진짜가 되지만 다른 것은 아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고넬료의 예에서 보듯이 주님을 모르고 주님에 대한 믿음 없이도 회개의 삶이 진심에서 나왔을 경우는 주님께서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을 믿고 회개의 삶을 사는 것으로, 그래서 성령세례가 임한 것이고, 믿음 없이 침례를 받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 침례는 세례 요한의 세례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반면 침례를 받지 않았어도 회개의 삶을 진심으로 산 사람은 주님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침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인정되어 성령세례가 주어진다.
(행전 19:3-6)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세례 요한이 증언한 예수님을 말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고 받으니 성령이 임하였다는 것이 암시하는 것은 겉으로는 주님의 이름으로 무조건 침례를 받아야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지만, 그 세례 요한의 세례가 말하자면 주님을 모르는 가운데 회개의 삶을 산 고넬료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진실이었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즉시 성령이 주어진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침례라는 것은 형식이고 연기이며 실제로는 회개의 삶이고 그것이 진심이냐 아니냐가 핵심이기 때문에 저 사람들에게 성령이 주어졌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회개의 삶을 진심으로 살았었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임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순정 기독교 690) 요한의 세례는 겉사람의 정화를 표징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세례는 속사람의 정화 즉 중생을 표징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주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가 회개의 세례라고 칭해지는 것이다(마태 3:11, 마가 1:4,5, 누가 3:3,16, 요한 1:25,26,33, 행전 1:22, 10:37, 18:25). 세례 받은 유대인들은 다만 겉사람일뿐이며 겉사람은 그리스도에게 둔 믿음 없이는 속사람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자들이 예수의 이름의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에게 둔 믿음을 획득했을 때 속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읽는다(행전 19:3-6).
(마태 3:11,12)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누가 3:16,17)”
임마누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구속(속량)
구속(redemption)의 내용은 이렇다.
첫째 지옥 정복, 둘째 천계의 질서 회복, 셋째 지상에 새교회 설시다. 이것은 영계에서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지옥 정복이란 악령들을 사람으로부터 분리, 격리하는 것 즉 퇴마(退魔)를 말한다. 악령이 사람을 자극하고 충동질하기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처리 이후에는 사람의 동물성을 다스려야 한다. 동물성이라는 것은 식욕, 성욕, 자기 보존욕 즉 공격욕을 뜻한다. 이런 충동과 본능들은 원시적으로 배출되면 사건, 사고가 발생한다. 가정과 사회가 안녕할 수 없다. 자기 자신도 해치고 이웃도 해치기 때문이다. 식욕이라는 것은 건강을 위해야 하고, 성욕이라는 것은 결혼과 출산을 위해야 하며, 공격욕이라는 것은 가족과 사회와 나라를 위해야 한다. 좋은 것을 위하는 쪽으로 본능, 충동을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승화(Sublimation)다.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하고 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신뿐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속한 남자들은 모두 할례(circumcision)를 받으라고 명하신다. 이것은 단순하게 아브라함 족속을 다른 족속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근본적인 것이 있다. 성욕과 공격욕의 정화와 승화다. 남근(penis)은 단순하게 성욕이나 성적 쾌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권력과 힘 즉 공격욕이 들어 있다. 할례를 두고 마음의 할례라고 하듯이 실질적으로 할례는 마음의 할례로서 동물성의 정화와 승화를 뜻한다. 이것은 천국인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별 즉 성별이다.
악이 있으면 선은 부어질 수 없다. 우선적으로 그릇이 깨끗해야 과일과 음식을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와 같이 구원을 위해서는 지옥 정복이 우선인 것이다. 악령을 분리시키고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을 처리하는 것, 그런 연유에야 그 사람 안에 천국을 건설할 수가 있는 것이다. 천국의 질서 회복, 이것은 사람에게 천사를 붙이는 것을 말하고 그 겉사람을 천국화 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주님사랑과 이웃사랑을 말하고, 양심적이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것을 말한다. 새교회 설시는 그런 겉사람 안에서 형성되는 새 자아를 말한다. 이것은 새로운 자아 정체성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는 자아의식 말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이다. 선한 사람이다. 사랑의 사람이다고 하는,
(임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순정 기독교 115) “[1] 속량은 지옥들을 정복하고 천계의 질서를 회복하고 한 새로운 영적 교회를 위한 준비를 갖추는데 있다. 속량이 이 세 가지 것으로 성립된다는 것을 나는 최대의 확실성을 가지고 선언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주님께서 1757년에 행하신 최후심판과 함께 시작하신 속량을 현재도 성취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속량의 역사를 지금까지 계속해 오셨으니 이는 지금이 주님의 재림이요 새로운 교회가 설시되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교회는 지옥들이 먼저 정복되고 천계의 질서가 회복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지옥들의 정복, 천계의 질서회복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설시가 속량을 구성하고 있음은 이것들이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것들은 순서를 따라서 행해진다. 지옥들은 천사들의 새 천계가 형성되기 전에 정복되어야 했다. 후자 즉 천사들의 새 천계는 새로운 교회가 지상에 설시되기 전에 형성되어야 했다. 그 까닭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천계의 천사들과 지옥의 영들에게 자신들의 내적인 마음으로 위와 같은 순서대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들과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속과 침례
구속은 첫째 지옥 정복, 둘째 천국의 회복, 셋째 새교회의 설시로 구성된다. 이와 같은 것이 침례에서의 첫째 구마(驅魔), 둘째 침례, 셋째 성령세례다. 구속의 지옥 정복에는 침례의 구마와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포함되고,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구속의 둘째인 천국의 회복에 상응하고, 마지막 성령세례는 새교회 설시와 상응한다. 사람에 대입하면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되어 새로운 자아 정체성을 갖는 것을 말한다.
아브라함의 일대기에서 보는 구속과 침례
이 구원의 과정이 아브라함의 일대기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아브람이 하란에서 나올 때 축복의 말씀을 듣고(창 12:1-3), 또 세겜에서 듣고(창 12:7), 세 번째로 들은 것이 땅을 보고 땅을 밟아 보라는 것(창 13:14-17)인데 이것이 구속의 첫째인 지옥 정복에 해당된다. 땅은 새로운 겉사람에 대한 것이고, 그 땅을 밟아 보라는 것은 새로운 겉사람으로서 사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이전의 겉사람의 대한 정복 즉 죽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지속성이 없다. 뿌리를 내리게 하기 위해서는 구속의 두 번째인 천국의 회복이 필요하다. 그래서 다음에 있어지는 네 번째 축복이 하늘을 보라(창 15:1-6)는 것이다. 하늘은 속사람을 뜻하고 천국을 뜻한다.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에 대한 도움은 하늘에서 즉 천사로부터 온다. 그런 이유로 하늘을 봐야 하는 것이다. 침례에서는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것은 지옥 정복에서 오는 새로운 삶이 아니라 지속적인 새로운 삶으로서 천국의 회복에서 오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이 성령세례인데 이것은 자아 정체성으로서 구속에서는 세 번째인 새교회 설시이고 아브람에게서는 다섯 번째로 주어지는 축복의 말씀이 뜻한다. 그것은 열국의 아버지(창 17:5)와 열국의 어머니로(창 17:15)의 개명과 태어날 아들의 이름인 이삭(창 17:19)을 지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라고 하는 이유는 아브람에게 새로운 자아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무자녀의 부부가 아니라 자녀가 있는 부모로서 말이다.
그리고 이때 할례(창 17:10-14)도 주어졌는데, 이 할례와 할례 이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구속의 과정을 볼 수 있다. 할례는 사람 안의 동물성을 정화하고 승화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구속의 첫째인 지옥 정복에 해당되고 침례의 축사(逐邪)와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해당된다. 할례 이후의 아브라함의 새로운 심정상태는 구속의 둘째인 천국의 회복에 해당되고 침례에서는 물 밖으로 나오는 것에 해당된다.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악을 해결하고 새로운 사람으로서 살게 되면서 마지막으로 일어나는 변화는 그 새로운 사람으로서의 자아 정체성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 태어난 이삭이 상징하는 것이다(창 21:2,3). 새로운 자아, 구속의 새교회 설시, 침례에서는 성령세례 즉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의식 말이다.
아브람의 자손에 대한 축복의 말씀
1 창세기 12장에서 하란에서 나올 때(아브람 나이가 75세, 창 12:1-3) 축복, 2 세겜 땅에 이르러서 (창 12:7) 3 세 번째 축복 (창 13:14-17) 동서남북 사방을 보라 그 땅(겉사람)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그리고 걸어 보아라. 4 (창 15:1-6) 아브람 75세, 사래 65세, 하늘을 보라 별처럼 많을 것이다(속사람). - 아브람이 가나안에 10년 있었다고 함(창 16:3) -, 5 아브람 85세 여종 하갈과 동침(창 16:1-4) 이스마엘 탄생은 86세(창 16:16), 6 다섯 번째 축복 (창 17:2-8) 99세 때 아브라함으로 이름 개명, 열국의 아버지(창 17:5), 열국의 어머니 사라로 개명(창 17:15)하면서 자손에 대한 축복(창 17:15,16), 할례를 명함(창 17:10-14), 이삭의 이름을 지어주며 약속함(창 17:19, 21) 할례를 시행함, 7 (창 18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대접하고 천사들로부터 아들이 있을 것이다고 재차 들음, 그리고 아브라함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중보 기도, 8 (창 19장)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과 조카 롯과 식구들의 구원, 롯과 딸로 인해 모압과 암몬이 탄생, 9 (창 20장)에서는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뻬앗김, 하나님의 개입으로 해결, 아브라함이 선지자라고 함, 10 드디어 (창 21장)에서 이삭이 태어남, 아브라함 100세(창 21:1-5) 사라 90세에,
(창 17:1) 아브람의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 2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워서,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4 "나는 너와 언약을 세우고 약속한다. 너는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다. 5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 6 내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너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너에게서 왕들도 나올 것이다. 7 내가 너와 세우는 언약은, 나와 너 사이에 맺는 것일 뿐 아니라, 너의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도 대대로 세우는 영원한 언약이다. 이 언약을 따라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뿐만 아니라, 뒤에 오는 너의 자손의 하나님도 될 것이다. 8 네가 지금 나그네로 사는 이 가나안 땅을, 너와 네 뒤에 오는 자손에게 영원한 소유로 모두 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와 세운 언약을 잘 지켜야 하고, 네 뒤에 오는 너의 자손도 대대로 이 언약을 잘 지켜야 한다. 10 너희 가운데서,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너와 네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 세우는 나의 언약, 곧 너희가 모두 지켜야 할 언약이다.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서, 할례를 받게 하여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이다. 12 대대로 너희 가운데서, 남자는 모두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너희의 집에서 태어난 종들과 너희가 외국인에게 돈을 주고서 사온 종도, 비록 너희의 자손은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 13 집에서 태어난 종과 외국인에게 돈을 주고서 사온 종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여야만, 나의 언약이 너희 몸에 영원한 언약으로 새겨질 것이다. 14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 곧 포피를 베지 않은 남자는 나의 언약을 깨뜨린 자이니, 그는 나의 백성에게서 끊어진다." 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아내 사래를 이제 사래라고 하지 말고, 사라라고 하여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겠다.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게 하겠다." 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18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뢰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19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의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아이를 낳거든,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여라. 내가 그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그 언약은, 그의 뒤에 오는 자손에게도,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 20 내가 너의 말을 들었으니, 내가 반드시 이스마엘에게 복을 주어서, 그가 자식을 많이 낳게 하고, 그 자손이 크게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에게서 열두 명의 영도자가 나오게 하고, 그가 큰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 21 그러나 나는 내년 이맘때에, 사라가 너에게 낳아 줄 아들 이삭과 언약을 세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