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좌 한 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있었다' (4,6)
이것은 하느님의 어좌를 중심으로 주변을 사각형으로 나누고, 그 사각의 중심에 네 생물이 하나씩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원(inner circle)처럼 하느님의 어좌를 감싸고 있는데, 하느님의 어좌를 감싸고 있는 네 생물은
에제키엘서 1장 10절, 10장 8절, 10장 19~22절에 나오는 네 생물, 즉 '커룹'(Cherubim)들을
연상시킨다.
거기에 언급된 네 생물은 각각 사람, 사자, 황소, 독수리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묵시록 4장 7절의 언급을
감안할 때 에제키엘서의 묘사는 상당히 유사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에제키엘서의 커룹은 각각 네 날개를 가졌지만, 묵시록의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다.
또한 커룹은 하느님의 어좌를 운반하지만, 묵시록에 언급된 네 생물은 하느님의 어좌를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커룹은 각각 네 얼굴을 가졌지만, 묵시록의 네 생물은 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네 생물은 '피조물의 대표'를 상징한다.
이것은 네 생물이 24원로와 함께 하느님을 예배하고 경배한다는 차원에서 타당한 해석이다.
그리고 '네 생물의 앞뒤로 눈이 가득 달려 있다'는 것은 에제키엘서 1장 18절을 배경으로 나온 것으로서,
네 생물이 끊임없이 깨어 있다는 뜻과 더불어, 하느님의 뜻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열정과 탁월한
천상적 통찰력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양해야 하는 하느님의 백성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제 네 생물의 등장을 보여준 묵시록 4장 6절에 이어 4장 7~9절은 네 생물의 모습과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찬양을 기록한다.
이들 네 생물은 4복음서로 이해되기도 하여, 사람은 마태오 복음, 사자는 마르코 복음, 황소는 루카
복음, 독수리는 요한 복음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아마도 복음서의 시작인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 마르코 복음은 사자처럼 포효하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세례자 요한의 등장, 루카 복음은 사제 직무를 수행하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의 이야기, 요한 복음은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시는 그리스도의 선재(先在) 사상을 펼치는
요한 복음사가의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높은 신학이 전개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든 네 생물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한다.
보통 네 생물은 모든 동물계에서 가장 고상한 것(가축의 대표인 황소가 가진 힘, 충성, 인내를 상징),
가장 강력한 것(야생동물의 왕인 사자가 가진 권위와 존엄을 상징), 가장 지혜로운 것(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가진 지혜, 이성, 형제애를 상징), 가장 민첩한 것(날짐승의 왕인 독수리가 가진 활동성과
용맹성을 상징)을 상징하며, 사람을 포함한 자연계의 각 대표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앉아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고, 하느님의 지극한 위엄을 예배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좋다.
묵시록 4장 8절에서 '네 생물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는데, 사방으로 또 안으로 눈이 가득
달려 있었다'는 구절을 살펴볼 차례이다.
이것은 이사야 예언서 6장 2절의 '그분 위로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라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사도 요한이 본 네 생물 역시 이사야 예언자가 목격한 '사랍'(Seraphim)들과 같이 '저마다'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날개는 하느님의 뜻을 신속히 수행하는 상징성을 지닌다.
네 생물이 하느님의 어좌 가까이 있는 매우 중요한 존재들이라는 점(묵시5,6; 14,3), 부단히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점(묵시5,8.14; 7,2; 19,4), 그들의 활동이 하느님의 진노를 쏟아붓는 것과 관련된다는 점
(묵시6,1~7; 5,7)을 감안할 때, 그들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신속하게 이를 집행하는 존재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시편18,11; 에제10,16).
그런데 '그 날개의 사방과 안으로 눈이 가득 달려 있었다'는 것은 네 생물이 저마다 예리한 천상적
통찰력을 가지고서 거룩하신 하느님을 보좌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네 생물은 '밤낮 쉬지 않고 외치고' 있는데, 이것은 네 생물의 존재의 목적이 오로지 하느님을 찬양하는 데
있음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표현이 묵시록 14장 11절에서 나오는데, 사도 요한은 짐승과 그 상에 경배하고 자기 이마나
손에 표를 받는 자를 향해서 '누구나 낮에도 밤에도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천명한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오로지 '밤낮 쉬지 않고' 하느님만을 찬양하는 네 생물과, 짐승과 그 상에게
경배하여 '낮에도 밤에도 안식을 얻지 못하는' 배교자들을 대조한다.
한편 '네 생물'이 천상적 존재들을 포함하여 우주 만물, 곧 피조물 전체를 상징한다면,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불러야 하는 찬양은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시는 분!' 이라는 가르침이 나온다.
이것은 이사야서 6장 3절의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라는 '사랍'(Seraphim)들의 찬양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거룩하시다'에 해당하는 '하기오스'(hagios; holy)는 원래 모든 피조물과 질적으로 완전히
구분되는 하느님의 속성을 의미하며, 세 차례 반복 표현된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최상급의
표현을 나타낸다.
히브리식 사고에 의하면, 동일한 표현을 두 번 반복하는 것은 강조를 의미하고,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최상급의 표현이다.
<피앗사랑 rigel 글 참조>
첫댓글 다녀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