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대통령은 11일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뒤 대선이 치러지면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루마니아를 방문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현지 매체 'Digi24'와 인터뷰에서 내년 대선 출마 여부를 묻는 질문에 "전쟁이 계속된다면, 'да'(다, 예스, 출마한다), 전쟁이 끝났다면 'нет'(니예트, 노, 출마 안한다)"라며 "전쟁 중에는 대통령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은 전쟁의 중간에 있는 게 아니다"며 "러시아군의 점령이라는 첫 단계에서, 우리가 러시아 공세를 뒤집고 (반격으로) 주도권을 잡았으며, 이제는 막바지 단계에 와 있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쟁이) 언제 끝날 지는 답변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루마니아 대통령과 공동성언문을 교환하는 장면/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스트라나.ua는 그의 이날 인터뷰에 대해 "충격적인 측면이 있다"며 발언의 의미를 자세히 분석했다. 이 매체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어떤 경우에도 연임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돼왔고, 전쟁 중에 대선이 치러질까 의구심도 컸다"면서 "그가 헌법에 따라 2024년 3월 마지막 일요일에 대선을 치르기로 결정했다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10월 마지막 일요일(10월 29일)로 예정된 총선은 이미 '물건너 간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우크라이나는 계엄령 하에서 아예 선거를 치르지 못하는데, 90일마다 연장되는 계엄령은 오는 11월 15일 만료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내년 3월 대선 실시를 위해 내년 2월에는 계엄령을 재연장하지 않을 작정일까? 아닐 것이다. 계엄령을 연장하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났다는 뜻이고, 약속 대로라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출마를 접어야 한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계엄령 하에서 대선은 법률(선거법)에 의해, 총선은 법률과 헌법 83조에 의해 각각 금지돼 있다는 유권해석(일부 법 전문가의 의견을 다르다/편집자)에 따라 젤렌스키 대통령은 최고라다(의회)에서 선거법 개정을 통해 대선을 실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선 구도 자체도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절대로 유리한 상황이다. 유력한 경쟁자가 없기 때문이다.
유일한 경쟁 후보는 전쟁으로 국민 신뢰를 쌓은 발레리 잘루즈니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합참의장 격)인데, 그가 해임되지 않는 한, 대선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전쟁의 결과가 아직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젤렌스키 캠프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선거를 치르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유리하다고 분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와의 평화 협상이나 휴전 조건이 자칫하면 대통령의 평가에 극도로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트라나.ua의 분석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할 경우, 전쟁 종식 방안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더 큰 재량권을 갖게 되리라는 전망이다. "예를 들어, 현 전선에서의 휴전(한국식 휴전 시나리오)이나 1991년 국경선 도달이라는 당초 목표에 미달하는 전쟁 종식 방안도 여론의 눈치를 거의 보지 않고 택할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더욱이 이달 말로 예정된 총선이 정상적으로 치러지지 못할 경우, 의회는 헌법상 모든 권한을 상실한다고 하니, 대통령으로서는 거칠 게 없는 셈이다.
◇ 선거 수락 진짜 이유는?
하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총선및 대선 실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전시에 선거를 치르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로 크게 3가지(세분하면 5가지)를 들었다. 언론인 나탈리아 모세이추크와의 인터뷰(지난 8월 27일)에서, 또 캐나다 방문중 기자회견(9월 23일)에서 그는 선거 실시 여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선거가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실시되기 위해서는 투표 감독관들이 필요한데, 서방측 감독관들이 최전선으로 갈 수 있겠는가? 러시아군 점령 지역에 사는 유권자들과 해외로 도피한 피란민들이 정상적으로 투표할 수 있겠는가? 전쟁 비용도 부족한 판이니, 선거 비용으로 서방 측이 추가로 50억 달러를 지원할 수 있겠는나?"
우크라이나 투표 장면/사진출처:스트라나.ua
젤렌스키 대통령은 현지 TV 채널 '1+1'과의 인터뷰에서 "정상적인 상태에서 선거를 치르는 데 드는 비용이 1억3,500만 정도"라며 "전쟁 중이라 도대체 얼마가 들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2024년 우크라이나 예산 초안에는 아직 내년 대선 비용이 계상되지 않았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지도층이 전시 중 대선 실시를 꺼리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미 워싱턴 포스트(WP, 9월 24일)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보안 당국은 "러시아가 선거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정치·사회적 분열을 조장할 수 있고, 정치권 내부로 침투할 수도 있다"며 "러시아는 이미 비밀 채널을 통해 이를 진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율리아 티모셴코 전 우크라이나 총리는 "선거 중에 발생하는 정치적 대립은 국가 단합을 깨뜨린다"며 "전시중 선거 실시의 대가는 바로 전쟁 패배"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서방 진영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발전하고 정착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WP에 따르면 유럽평의회 의회(PACE) 티니 콕스 대표가 지난 5월 우크라이나를 향해 총선과 대선 실시를 촉구한 것을 시작으로 서방 측은 앞다퉈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했다. 콕스 대표는 당시 "올해 초 대지진을 겪은 튀르키예(터키)도 대선 결선투표까지 치렀다며 "우크라이나도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 민주당 리차드 블루멘탈,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과 함께 지난 8월 23일 키예프(키이우)를 찾은 공화당 소속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나 지속적인 무기 지원을 약속하면서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에도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를 치르는 것을 보고싶다"고 요구했다. 미 폭스뉴스 간판 앵커였던 극우 성향의 터커 칼슨 등 유명 인사도 이런 주장에 힘을 실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을 예방한 그레이엄 등 미 상원의원들/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무기와 재정 지원을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로서는 이런 요구를 무시하기 어렵다고 WP는 지적했다. 전쟁의 장기화로 피로감이 커지고,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가 뒤로 밀리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어서 우크라이나는 무조건 서방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대선 공학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미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크는 지난 4월 중순 "전쟁이 끝나면 84%에 이르는 젤렌스키 대통령 지지율이 곤두박질칠 것"이라며 "그의 지지율이 전쟁 전 한때 11%까지 떨어졌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 매체는 "국가 최고관리자로서의 능력과 군사·외교·경제 등의 분야에 대한 식견, 부패와의 전쟁 등 젤렌스키 대통령을 평가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며 "그의 능력을 의심할 수 있는 분야는 하나 이상으로, 실존적 위협이 사라지는 대로 그것들이 드러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쇼 비즈니스 스튜디오 '분기 95'(Квартал 95, 영어로는 quarter 95)는 전쟁 중에도 효과를 발휘했으나, 전쟁이 끝나면 상황이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며 "'전쟁만 없었다면', '전쟁을 오래 끌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법으로 표현되는 또 다른 감정이 분출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야당과 서방 측의 반발이 예상되지만, 최전선에 배치된 병사들과 해외 난민들을 대상으로 정부 전자시스템인 '디야'(Дия)를 통해 '전자투표'가 처음으로 시행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나쁠 것은 없다. 다행하게도 우크라이나 국민들 사이에는 전자투표에 대한 신뢰도가 그리 낮지 않다.
우크라이나 선거 감시 시민단체 '오포라'(ОПОРА)가 유럽 8개국으로 피란한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한 결과, 우편투표에 대한 신뢰도는 8%에 그쳤고, '전자투표'는 완전 신뢰 19%에 비교적 신뢰 49%로, 기존의 투표(완전 신뢰 19%. 비교적 신뢰 57%)에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선거감시 시민단체 오포라/자료 출처:epde.org
◇ 차기 대선 승리후의 행보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차기 대선 승리후 예상되는 행보중에서 주목할 것은, 최전선을 따라 방어진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크라이나 정치권에서도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데니스 슈미갈 우크라이나 총리는 지난 9월 22일 키예프에서 열린 '지역 경제포럼'에서 "우리도 러시아처럼 전선을 따라 방어 요새를 구축해야 한다"며 "새로 임명된 국방부 장관과 이를 협의하고 있으며, 필요한 예비 자금도 있다"고 말했다. 다소 성급하게 해석하면, 서로 밀고 밀리는 공방전에서 기존 영토라도 확고하게 지켜 (미래의) 휴전에 대비하자는 뜻이다.
우크라이나는 올 여름 반격 작전을 통해 러시아 점령지를 상당 부분 탈환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9월 28일 '우크라이나에서 누가 전진할 수 있을까?'라는 기사에서 "러-우크라 양측이 서로 야심차게 공격을 개시했지만, 최전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으며, 돌파구를 찾는 일도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워 보인다"고 분석했다. 또 "지난 9개월 간의 치열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500평방 마일(1,295㎢) 미만의 영토가 주인이 바뀌었다"며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남부 지역 230㎢)보다 훨씬 더 많은 동부 지역의 땅(533㎢)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NYT는 "전장에 있는 러시아군의 수는 우크라이나보다 거의 3배나 더 많다"며 "러시아군은 앞으로 더 많은 병력이 합류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NYT의 분석대로라면 우크라이나는 앞으로 러시아 측에 영토를 더 빼앗기기 전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등 장기전에 이은 휴전 협상에 대비해야 한다. 현 전선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경선이 그어진다면(한국식 휴전), 방어진지 구축은 빠르면 빠를 수록 이득이다. 독일 빌트지도 러시아군이 여전히 전차와 장갑차 등 군사력 측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9월 2일)
우크라이나군 탱크부대/사진출처:우크라군 합참 페북
물론, 키릴 부다노프 우크라이나 군정보국(GUR) 국장 등 우크라이나 측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부다노프 국장은 지난 9월 18일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남부 전선 반격 작전은 겨울이 되기 전에 완료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진행 중인 전황에 대해서는 "말할 기분이 아니다"며 피해갔다.
또 양측의 예비 전력 투입과 경제력 소진 전망에서도 "러시아가 더 빨리(2026년) 바닥을 드러낼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이코노미스트는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엇갈린다"고 지적했다. 특히 푸틴 대통령이 7~8월 러시아 재정 세입에서 석유 및 가스 수입이 이미 작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는 주장을 예로 들기도 했다. 부다노프 국장은 "모스크바가 승리의 축배를 들지 못할 것"이라면서 "키예프도 이를 기대해서는 안된다"며 현재의 교착상태를 인정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 잊을만 하면 터지는 미러 접촉설
우크라이나 측은 러시아군의 완전한 철수가 평화협상의 전제조건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미-러 접촉설'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세르게이 나리시킨 러시아 해외정보국 국장은 지난 7월 중순 '바그너 그룹의 6·24 군사반란 직후, 윌리엄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과 전화 통화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약 한시간 가량의 전화 통화에서 군사반란 사태와 함께 우크라이나 사태를 논의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의 전화 통화는 미 NYT와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보도로 처음 알려졌다.
두 사람은 미-러 관계가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 이후 최악으로 빠져든 와중에도 '소통 채널'을 유지해왔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하마스' 무장단체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촉발된 '중동 전쟁'을 수습하기 위해 극비로 접촉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비슷한 시기인 7월 초에는 리처드 하스 미국 외교협회(CFR) 회장 등 미국의 전직 안보분야 고위 당국자들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 등과 지난 4월 뉴욕에서 비밀회동한 사실이 미 NBC 방송 측에 의해 폭로됐다. 이 방송은 미-러 회동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위한 협상의 초석을 마련한다는 목적 아래 이뤄졌다고 분석했다.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점령지 처리 방안과 외교적 탈출구 등 민감한 쟁점들이 의제로 올랐다고 한다.
당시, 스트라나.ua는 "반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미국과 러시아 간의 비밀 협상이 시작된 것이 흥미롭다"며 "미국의 주요 언론에서는 협상에 대한 신호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로부터 벌써 6개월 가까이 흘렀다. 서방 외신에서는 우크라이나의 반격 작전과 미국의 지속적인 군사 지원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흘러넘친다. 하마스-이스라엘 충돌도 서방측의 지원이 급한 우크라이나에겐 큰 악재다.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도 '전쟁 출구 작전'을 '대선 전략'과 함께 고민할 수 밖에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